〈 229화 〉229. 세계수의 부활(2)
“이 결계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마력을 방출해주세요.”
“그거면 되는 겁니까?”
천 명이 넘는 엘프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마법진으로 설치된 결계를 응시하며, 한 엘프가 물었다.
“이 결계는 엘프분들이 방출한 마력들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내부에 붙잡아두는 역할을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대량의 마력들을 압축시켜, 일정한 양을 지속적으로 세계수에게 전달하는 거죠.”
은현은 세계수의 현재 상태가 인간의 몸을 비유로 하자면, 혈허(血虛) 상태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출혈 같은 모종의 이유로 대량의 피를 흘리고, 부족해진 혈액으로 인해 영양 불량, 만성 질환과도 같은 병이 생긴 상태.
출혈을 예로 든 모종의 이유는 ‘다크엘프들의 저주’
부족해진 혈액은 ‘깎여나간 세계수의 힘’
결과적으로 생긴 영양 불량, 만성 질환의 병은 ‘메마른 대지와 약해진 축복’
달의 마을 주변에 설치된 저주는 모조리 회수하여 처리했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 세계수는 자연스레 힘을 회복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십 년, 백 년이 넘는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엘프들에게 시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은현은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간단하지. 피가 모자르면 수혈을 하면 되니까.’
모자란 혈액을 다시 보충해주는 것.
즉 저주로 인해 잃어버린 세계수에 다시 대량의 마력을 퍼부어 강제로 회복력을 급격히 상승시키는 것이다.
장기간의 시간을 투자하여 그저 기다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효과적이고 빠른 결과물을 볼 수 있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일리아나나 은현도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너무 과한 것도 좋지 않다’라는 말은 어디에서나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진리와도 같은말이었으며, 일리아나도 그 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방법은 생각해뒀으니까…. 해보자.’
일리아나는 그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조작하는 걸 혼자서….”
결계 안에 모인 엘프들의 마력들을 모아 조작하여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가늠하며 세계수에게로 보내는 작업은 일리아나의 몫이다.
개인으로써도 인간의 몇 배나 되는마력양을 보유하고 있는 일리아나라지만, 천 명의 엘프들이 방출한 방대한 마력을 혼자서 조작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날 믿어요. 나는 당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남자의 아내니까.”
피식 미소를 보이며 자신감이 가득 찬 말로 대꾸한 일리아나를 보고, 레지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앨리스. 부탁할게.”
“네.”
일리아나가 세계수 안에 직접적으로 대량의 마력을 주입시키는 동안, 레지나와 앨리스의 역할은 세계수의 변화를 감지해내고 그 변화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럼 시작한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일리아나는 엘프들을 수용한 거대한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어 결계를 쳤다.
우우웅
“방출을 시작하세요!”
세계수의 은혜 안에서 태어난 엘프들은 선천적으로 높은 마력의 양을 보유하고 태어난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마력의 보유량이 가장 적은 비전투원인 엘프들이라 할지라도,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의 마력보다 높을 정도.
그런 엘프들이 모여 일제히 방출하는 마력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생각보다…많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도 없었던 일리아나는 순식간에 결계 안의 수용 한계를 채워버리는 엘프들의 마력을 조작했다.
“끄…으!”
방대한 양의 마력들을 조작하는데 필요한 연산 작업의 양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리하게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연산 정보의 양에 머릿속을 강타하고, 헤집고, 뒤흔든다.
‘머리가…깨질 것 같아…!’
지금까지 마력을 조작하여 마법을 발현시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두통에 일리아나의 몸이 휘청이며 다리의 균형이 무너졌다.
“일리아나님!”
“괜…찮아! 집중해!”
스태프의 끝자락을 바닥에 내려찍어, 쓰러지는 것을 면한 일리아나는 급하게 자신에게로 달려오려는 앨리스의 행동을 제지했다.
이 작업의 핵심은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것을 일리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제안했는데, 내가 쓰러질 수는 없지.’
이빨을 꽉 깨물고 머리를 뒤흔드는 격통을 억지로 버텨내며 엘프들의 마력을 연산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정갈하게 갈무리하고, 마력의 양을 조절하며 일정한 양의 마력을 세계수로 보내는 센스는 그만큼 마녀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기에 가능한 위업.
그 기예는 엘프들뿐 만이 아니라, 고위자릿수의 인간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쉽게 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세계수는 물론, 수많은 연산 작업을 처리하고 있는 자신의 머릿속과 정신마저도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수를 감행한 이유는.
‘이런 것도 해내지 못한다면, 그 녀석의 옆길을 함께 걸어갈 수 없잖아.’
은현과 맺어지면서, 여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은현의 여정을 생각했다.
은현과 베르단디의 여정 속에 끼어들어,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다고 한 것은 일리아나 자신이다.
‘사도의 사명’, ‘불멸자의 삶’.
그런 무거운 책임과 역할은 일리아나에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연심을 품고 있는 남자와 언제까지고 함께 있고 싶다는 작은 소망.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정말 벅찬데, 넌 항상 어디론가 가버릴 것만 같아.’
항상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남자와 드디어 맺어지고 부부가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불안감은 일리아나를 초조하게만들었다.
행복한 시간이 이어지다가도, 이렇게 목숨을 건 전장에 뛰어들게 되면, 마음도 전하지 못한 채로 덜컥 죽어버렸던 은현의 주검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그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태와 능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너 혼자 그 길을 걸어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400년을 넘도록 항상 누군가와 싸우고, 목숨을 건 전쟁터를 오가는 삶을 살고 생을 마감했던 남자는 부활하고 나서도, 그 역할과 사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걷고 있다.
영혼에 걸린 제약이 풀리고, 여신이 함께하는 여정으로 이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신의 사도라는 직함과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함께 그 여정을 걸으면서 그 길이 외롭지 않도록, 은현과 평생을 함께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일리아나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나도 현이와 같은 존재가 되면 되지.’
은현은 본래 죽어야 할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운명을 스스로 비틀어버리고 생존했다.
그것이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로서 자신을 비롯한 노른의 세 여신들의 눈에 띄어 은현을 신의 사도로 삼았다고, 베르단디는 말했다.
베르단디에게서 들은 신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한 일리아나는 그 점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세계수의 복원’을 감행하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과 동시에, 이곳이 아닌, 신계에 있을 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나는 이 정도의 능력이 있다.’
‘나를 선택해라.’
‘나를 내 남편과 같은 신의 사도로 삼아라.’
은현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한계는 이 정도가 아니라고, 유용한 말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필사적으로 어필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의 영혼에 수작질을 부릴 생각은 하지 마.’
생을 마감하기 전, 은현의 영혼 속에 걸려 있던 ‘제약’과도 같은 수작질을 사전에 단호히 차단하는 경고의 의지.
‘내 마음은 오직 내 남편만의 것이야. 그걸 당신들이 건드린다면, 아무리 당신들이 신이라고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인간이 아닌, 상위의 존재에게 경고를 보내는 그 의지가 터무니없이 당돌하다.
일리아나도 자신의 논리와 이치가 신들에게는 한없이 건방지고 억지에 가까운 어리광과도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의지는 확고했다.
일리아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현과의 앞으로의 생활이지, 세계의 명운을 지키라는 거창한 책임감으로 포장된 사명의 수행이 아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나를 사도로 삼는다면, 당신들의 유용한 말로서 움직여주겠어.’
신들에게 당돌하게거래를 제안하는 태도.
그 의지를 관철하며 일리아나는 계속해서 결계 속에 모여진 엘프들의 마력을 조작하여, 세계수에 대량의 마력을 흡수를 시키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극심한 두통으로 정신을 잃으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그러던 도중, 그녀의 영혼에 직접 말을 걸어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
[그대의 의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아….”
새하얀 빛이 내려와 일리아나의 전신을 감쌌다.
[그대의 소망. 이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대에게 ‘신의 사도’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니….]
깨질 것만 같았던 두통이 사라지고, 이를 악물고 버티며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마력의 조작에 대한 부담감이 눈이 녹듯 사라진다.
지금까지 한정돼 있던 그릇의 한계가 확장되면서 버겁게 느껴졌던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 연산이 가벼워져 갔다.
[‘우리의 사도’의 ‘권속’이 되어, ‘우리의 사도’와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어보는 건 어떤가요?]
일리아나의 조건에 정확하게 부합되는 조건.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억지스러운 요구가 모두 수용된 제안을 제시해오는 여신의 말에 일리아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콜이에요.’
그렇게 세계수의 모든 복원 작업이 끝난 일리아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일리아나님!”
탈진하여 바닥에 주저앉는 일리아나를 발견한 앨리스가 급하게 달려와, 그녀의 상체를 부축했다.
“뛰면 안 되지….”
“그게 중요한 게…!”
맹인인 앨리스의 빠른 발걸음으로 바닥에 넘어질 것을 걱정한 일리아나의 말에,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반응을보이던 도중, 막대한 양의 마나가 흘러나오는 거대한 나무를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세계수가….”
메말라갔던 주위의 대지가 다시 활기를 되찾고, 풀과 꽃들이 급속도로 무성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조금씩 빛을 잃어갔던 신성한 나무는 어느샌가 잎을 피우고, 빛을 발하며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을 모조리 베풀어주겠다는 듯이 달의 마을 내부를 풍요로운 마나들로 가득 채워나갔다.
“하하…. 됐다.”
자신의 도박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깨닫고, 뿌듯함으로 가득 찬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리아나님이라고 하셨지요?”
“네.”
함께 세계수를 올려다보던 레지나가 일리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차분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걸었다.
이내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세계수의 힘을 복원시켜주셔서. 당신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엘프들의 은인입니다.”
“뭐, 약속한 것도 있었으니까요.”
일리아나는 정중한 레지나의 감사의 인사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평소 이렇게 일을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타입이 아닌 일리아나는 이렇게 직설적인 감사의 인사에 약한 편이다.
쑥스러워하고 있는 일리아나의 반응에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앨리스가 작게 미소지었다.
“자, 그러면.”
작게 심호흡하고 앨리스의 부축을 받고 있던 일리아나는 레지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 약속을 지켰어요.”
“알고 있습니다.”
은현을 도우러 가겠다고 사전에 맺었던 약속을 레지나는 잊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스승이었던 은현은 물론이고,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엘프들을 도우러 갈 생각이었다.
“일리아나님…괜찮으시겠어요?”
반면 앨리스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복원작업을 마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던 그녀의 상태를 우려해 물은 질문이다.
“괜찮아. 하지만…. 후으….”
작게 숨을 내쉰 일리아나는 이미 눈꺼풀이 반즈음 감긴 상태였다.
곧바로 전선에 다시 참전하여 은현을 돕고 싶었지만, 세계수의 복원작업으로 인해 쌓인 피로와 탈력감이 곧바로 일리아나의 몸을 덮쳐왔다.
중간부터 이름 모를 여신의 힘을 받아들여 부담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시작부터 많은 부담을 견디면서 쌓였던 피로와 탈력감의 양도 장난이 아니었다.
“뒷 일은 부탁드릴게요.”
“저도 약속을 지킬게요. 반드시 은인의 곁으로 선생님을 모셔오도록하겠습니다.”
레지나의 확언을 들은 일리아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신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신력을 쥐어 짜내어 텔레포트를 발동시켰다.
[여덟 자릿수 상위마법]
[텔레포트]
우우웅
눈을 다시 떴을 때, 무사한 은현과 엘레노아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일리아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죽기만 해봐. 절대로 가만 안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