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228. 세계수의 부활(1)
우우웅
텔레포트를 통해서 일리아나가 전이를 한 장소는, 엘프여왕과 원로 엘프들이 모여서 마을의 중대사를 논하는 회의장인 숲의 회랑이다.
“당신은….”
갑작스러운 마력의 파동과 함께 바닥에서 등장한 마법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일리아나는 지체할 틈도 없이 성큼성큼 레지나에게 걸어갔다.
그 일방적인 행동에 한 엘븐가드 엘프가 일리아나를 막아서며 외쳤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
“괜찮습니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발걸음을 옮겨 접근해오는 일리아나의 행동을 레지나는 따로 제지하지 않았다.
여왕이 허락하자, 일리아나의 앞을 가로막아선 엘븐가드 엘프는 어쩔 수 없이 일리아나가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침내 레지나의 앞에 당도한 일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도움이 필요하죠?”
“세계수의 복원에 힘을 보태드릴게요.”
“……!”
“무슨…!”
“그것이 어떻게 그대에게 가능하다는 말이오!?”
느닷없은 일리아나의 말에 많은 엘프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세계수의 힘을 복원시키는 것은 현재 엘프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대한 안건 중에 하나다.
오랜 시간을 달의 마을에 풍요와 수호의 축복을 내려줬던 나무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고,정령들이 태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원인이 세계수에 생긴 문제였기 때문.
도대체 엘프의 사람도 아닌, 인간이 엘프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엘프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대는 우리 종족의 현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 대가로 그대가 원하는 건 뭐죠?”
“제 남편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을?”
이미 일리아나와 은현의 관계를 알고 있던 레지나는 은현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다크엘프의 본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굉장히 심각해요.”
일리아나는 은현과 엘븐가드 엘프들이 벌이고 있는 교전중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으음, 저주….”
“선생님뿐 만이 아니라, 엘븐가드 엘프들까지….”
은현만을 돕자는 것뿐 만이 아니라, 기습조로 다크엘프들의 섬멸에 나갔던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일리아나의 의도를 이해한 레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세계수의 힘을 복원시키겠다는 건가요?”
“사실 이건 저도 도박에 가까운 수단입니다. 어떻게 될지 결과를 저도 예측하지 못하니까요. 제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이론과 방법뿐입니다.”
“검증되지도 않은, 확실하지 않은 방법을 무작정 시도해 볼 수는 없습니다!”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일리아나의 제안에 반대의 의사를 내보인 젊은 엘프의 발언에 몇몇 엘프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을 수호하는 신성한 나무이자, 단 하나뿐인 나무인 만큼, 그 대처 또한 굉장히 신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
심지어 인간처럼 몇십 년을 애지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몇백 년의 명맥을 이어와 신성한 존재로 모시고 있는 만큼, 그 망설임과 신중함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가벼운 판단으로 이루어져선 안 될 판단이다.
일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우려와 반대의 의사를 표하고 있는 엘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가벼운 판단으로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나도 여러분들과 똑같아요. 당신들의 동족이 지금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듯이, 제 남편도 그곳에서 당신들의 동족과 함께 싸우고 있어요.”
“…….”
“제 남편의 이야기는 제쳐두고서라도, 이번 싸움에서 세계수의 힘이 개입된다면, 지금 전장에 있는 엘프들이 위험에처할 확률은 더 줄어들겠죠. 틀린가요?”
“맞…습니다.”
일리아나의 질문에 추궁을 받던 엘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많은 엘프들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고 있을 때, 결단의 목소리를 입에 담은 것은 이 장소에서 가장 높은 결정 권한을 가진 레지나였다.
“여, 여왕님!”
승낙의 의사를 밝혀온 레지나의 발언에 많은 엘프들이 화들짝 놀라며 레지나를 불렀지만, 그 결정에 대해 반대의 의사를 내보이는 엘프들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달의 마을 안에서 현 엘프 여왕인 레지나의 결정은 그녀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350년 전,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
나이가 어렸고, 힘이 없었고, 어머니인 선대 엘프 여왕과 많은 엘프들, 은현의 보호 만을 받아야만 했던 때를 떠올린다.
그때, 자신 하나를 피신시키기 위해 많은 엘프들이 목숨을 걸었고, 자신의 존재가 발목이 잡혀 은현은 10년을 함께 했던 실비아를 잃었다.
달의 마을이 복원되고, 긴 시간 끝에 다시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지만, 350년 전의 다크엘프와의 항쟁은 레지나가 평생을 짊어져야 하는 의무와 책임감이 되었다.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서 세계수의 힘을 복원시키려는 도박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선생님과 함께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동족들을 위해서죠.”
왕좌에 앉아있는 레지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리아나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엘프에게 있어서 세계수는 우리의 출생과 끝을 평생 함께하면서 축복을 내려주는 신성한 존재가 맞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이윽고 고개를돌려, 회랑에 모여있는 엘프들을 둘러보았다.
“저한테는 세계수 만큼이나소중한 게 여러분들입니다.”
“아….”
레지나의 발언을 들은 엘프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지금전장에 나가 있는 엘븐가드 엘프들은 모두 여러분들의 가족이죠.”
인간과 달리 엘프들의 개체수는 굉장히 적다.
현재 달의 숲에 정착하여 살고있는 엘프들의 총인구수도 이천 명이 조금 넘는 숫자에 불과하다.
백 명도 채 조금 안되는 엘븐가드의 구성원인 엘프들은 이곳, 숲의 회랑의 회의에 참석해있는 엘프들의 자식이고, 딸이고, 부모이며 친구들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전장에 나가 있는 동족들을 잃게된다면, 그 사실을 견딜 수 있나요?”
엘프들은 자신의 목숨이 희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목숨을 거는 엘프의 입장이며, 남겨진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그 희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평생을 그리워하며 장수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자식, 연인,부모, 친구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입장에서 먼저 하늘로 올라간 이의 모습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그리움과 슬픔을 느껴야만 하는 것은, 인간이나 엘프나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차피 지금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그들을 잃는다면, 우리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앞으로의 또 다른 위협에,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350년 전에도, 지금도 달의 마을에 찾아온 위기는 해결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때 그 순간을 대비하여 새로운 엘프들을 전사로 키워내고 처음부터 다시 복원작업을 하여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점점 힘을 잃어가는 세계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기가 선택의 기로야.’
모든 엘프들을 둘러보기를 마치고, 다시 일리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린 레지나의 표정은 이미 결심이 선 듯 굳건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일리아나는 베르단디에게서 들었던 과거의 말을 떠올렸다.
-…웃기지 마. 종족의 번영, 미래 같은 것보다, 나는 당신들이 더 소중해. 나도 당신들과 함께…크윽!?
그때 그 순간, 그곳에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던 것은 은현뿐 만이 아니다.
‘이 엘프분도 똑같구나.’
자신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포기했던 동족들의 목숨을 짊어지고, 동시에 가슴 한켠에 죄책감과도 비슷한 감정을 안고 있었던 것.
어떤 부분에서 레지나는 은현과 굉장히 비슷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도 과거의 그때와 너무나도 비슷하다.
게다가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하려는 것까지.
“그렇다면 나는 이분과 선생님의 인연에 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레지나의 설득과 연설이 끝나고, 많은 엘프들은 여왕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 뿐 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까지도 소중하다고 말을 해주는레지나의 솔직한 고백에 감동한 표정을 몇몇 엘프들이 짓기도 했다.
“…따르겠습니다.”
고심 끝에 자리에서 일어난 한 원로 엘프를 따라, 다른 엘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많은 엘프들이 숨을 모으며 동시에 외쳤다.
“““여왕의 말씀을 따릅니다!”””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엘프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레지나는 일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카리스마 장난 아니네.’
비슷한 신분이었던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비인 디아네를 떠올리고, 그녀와는 차원이 다른 위정자로서의 위압을 뿜어내고 있는 레지나의 모습에는 일리아나 마저도 속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다.
“복원작업은 어떻게 진행할 건가요?”
“세계수앞에, 가능한 한 많은 엘프 주민분들을 모아주세요.
“엘프 주민들을…?”
“엘프 분들의 마력을 모아, 직접적으로 세계수에 그 힘을 전달할 생각이에요.”
“그게…가능한 건가요?”
“장기간에 걸쳐 저주를 통해 대지를오염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세계수의 힘이 깎여나가고 있었다는 원인을 찾아냈잖아요. 원래 현이는 다크엘프들을 처리하고 나면, 이 방법을 통해서 세계수의 힘을 복원시킬 생각이었어요.”
원인과 과정을 알아냈다면, 그 과정과 원인을 역산하여 해결방법을 추론하는 것 또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이미 은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여 그 방법은 이미 생각해둔 뒤였다.
“깎여나가고 있던 힘을 다시 복원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마력의 양은 저나 현이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엘프분들 모두가 힘을 보태주셨으면 해요.”
아무리 일리아나가 은현이나 다른 인간들에 비해 방대한 양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약 천 명이 넘는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총량과 비교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일리아나는 세계수의 복원에 들어가는 자신의 마력은 최대한 아껴두고 싶었다.
‘힘을 복원시키고 다시 현이한테 가야하니까.’
또 다시 전투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남아있는 마력을 모두 써버리는 것은 우책이다.
“알겠습니다.”
레지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엘프들이 세계수의 힘을 원래대로 복구시키기 위해 힘을 모은다는 것은 엘프들에게도 굉장히 뜻깊은 의미를 지니게 만들었다.
“저는 당장 앨리스를 데리고 세계수 쪽으로 향할게요.”
또다시 텔레포트를 통해 앨리스의 집으로 전이한 일리아나는 자신의 등장에 깜짝 놀란 앨리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알겠습니다. 협력할게요.”
“고마워.”
“아뇨. 당연한 일인걸요. 이 마을은 남편과 제가 살고있는 마을이니까요. 게다가….”
앨리스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에 숨어서일리아나를 흘끗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미소를 지었다.
“에리스 ‘집’이기도 하죠.”
엘프들은 달의 마을 자체를 커다란 ‘집’으로 표현한다.
나이를 먹어도 죽지 않고, 장수하는 엘프들사이의 가족관계는 굉장히 복잡하다.
누구에게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누군가에게는 형제와 자매 또는 남매의 관계가, 또 누군가에게는 연인과 친구의 관계가 다양하게 엮여 얽혀있다.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거대한 울타리로 형성되어 그 안에서 삶을 누리는 공간 자체를 거대한 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엘프를 남편으로 맞아들여 그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게 된 앨리스가 세계수의 힘을 복원시키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일리아나의 요청을거절할 리가 없다.
오히려 엘프들과 전혀 연관이 없었던 일리아나 쪽이 이런 제안을 해왔던 것이 앨리스에게는 놀라울 따름이다.
“오히려 일리아나님이 더 대단하세요.”
“흥, 그 말은 현이 앞에서 해줘.”
일리아나는 코웃음을 치며 태연히 대꾸했다.
“내가 걜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걔는 좀 더 알아야 해. 나 같은 여자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냐고.”
“후후.”
그런 건 이미 은현도 충분히 알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앨리스는 구태여 그 말을 입에 담지 않고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