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230. 엘프 여왕(1)
빠각!
검에 맞은 좀비의 허리가 크게 휘청이면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엘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달리고 계속 달리면서, 좀비들을 때려눕히고, 걷어차고 동원할 수 있는 물리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하면서 날뛰는 엘빈의 모습은 마치 이성을 잃은 한 마리의 야생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굉장히 냉정했다.
“으악!”
계속 몰려드는 좀비를 대처하다가 자신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 엘프의 비명을 듣고, 엘빈은 달렸다.
그림자를 조작해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어낸 엘빈은 칼날을 조작하여 넘어진 엘프에게 다가가는 좀비들을 베어냈다.
서걱
머리가 잘리고, 몸통이 두 동강을 내버린 좀비의 시체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툭 쓰러졌다.
‘역시 직접 처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야.’
공격력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그에 비해그림자의 형태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것에서 드는 마력의 소비량은 무기의 형태의 그림자를 쥐고 직접 휘두르는 것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특히나 이렇게 끈질긴 상대들을 대상으로, 장기전이 지속될수록, 그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다름 아닌 엘빈 쪽이다.
‘이렇게나 강한 몸을 받고, 힘을 사용하게 되었음에도, 아직도 멀었다는 건가.’
마법만을 공부해왔던 생전의 마법사에게 개척된 새로운 기회와 삶.
이 몸과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작게 한탄한다.
은현과 패스가 연결되어져 있는 지금, 엘빈이 원한다면 은현에게서 마력을 끌어와 부족분의 마력을 보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상황이 급변한 지금 굳이 은현에게서 마력을 끌어와 그에게 부담을 주는 선택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과 함께, 엘빈은 다시 싸움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맙다!”
넘어졌던 엘프기 엘빈의 난입으로 목숨을 건지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엘빈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
엘빈은 엘프의 감사의 인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강 대꾸하고, 엘프와 함께 다시 좀비들을 차례차례 정리하기를 반복해나갔다.
그으으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라고 부를 수 없는 좀비들이 입 밖으로 내는 소리는 단지 몸 속에 남아있던 공기가 입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성대를 긁으며 나는 소리다.
엘빈은 좀비의 무리에 돌진하여 뛰어들었고, 주먹을 내질러 좀비의 얼굴을 짓뭉갰다.
“이, 이봐!”
무작정 적진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암흑기사의 모습에, 그 기사에게 도움을 받은 엘프가 놀라며 외쳤다.
정령이 된 암흑기사의 신체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통해 만들어진 아티팩트 그 자체.
제공받은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한, 아무리 움직여도 신체적인 피로가 쌓이지 않는다.
오히려 거세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들러붙는 좀비들의 물리적인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는 그림자 갑주를 보고, 엘프가 어이를 상실한다.
“뭐, 저런 무식한….”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일방적인 폭력으로 좀비들을 짓뭉개고 다니면서, 전장에서 빛나는 암흑 기사의 위용에 넋을 빼앗길 정도다.
“같이 하자고! 친구!”
이내 전장을 휘저어 좀비들을 때려눕히고 있는 이름 모를 암흑 기사를 부르며, 엘프가 자신의 무기를 꽉 쥐고 좀비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누가 네 친구라는 거지?”
“하하! 같은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전우가 아닐까!?”
“…….”
호쾌한 발언에 순간, 엘빈이 할 말을 잃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신이시어!]
[베스타의 축복]
[퓨리피케이션]
근처에서 발현된 신성한 정화의 기적의 존재를 감지한 엘빈은 본능적으로 기적이 발생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자신과 등을 맞대고 있던 엘프에게 말을 걸었다.
“뭐라고 불러야지?”
“응?로튼이라고 불러라!”
“싸움보다도,내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분이 계신다.”
엘빈이 손가락으로 신성한 기적이 일어난 방향을 가리키자, 로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엘프는 말하는 바의 의미를 깨닫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고!”
“선봉은 내가 뚫지.”
◆ ◆ ◆
[베스타의 축복]
[퓨리피케이션]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좀비의 시체를 기적을 통해서 정화를 시킨 엘레노아는 굳은 표정으로 주위의 전황을 살폈다.
“너무 많아….”
좀비의 무리와의 싸움이 시작되고, 엘레노아는 성역화의 결계를 유지한 상태로 일일이 좀비의 시체들을 정화하면서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과거리오드가 이끄는 아르티아의마수 퇴치 원정에서는 사령술로 인해 고통받던 언데드 합성 마수들을 모조리정화시켜버린 전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 혼자만의 위업이 아니다.
은현이 발동시킨 보석 증폭술로 인해, 정화의 기적의 범위를 광역으로 확대시킨 것이었으며, 엘레노아 개인의 능력으로 그만한 범위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필요하다.
하려고 한다면 성역화의 결계가 아닌, 광역 정화를 발동시킬 수 있는 여력도 가지고 있었지만, 엘레노아는 광역 정화가 아닌 성역화의 결계를 선택했다.
모든 좀비들을 한꺼번에 정화시키고, 이 땅을 대상으로 발동된 저주의 효과를 모조리 억누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땅에 걸려있는 저주는 굉장히 강한 원념과 사기(死氣)를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엘레노아는 신성력의 소모는 좀 더 많지만, 확실하게 저주의 효과를 조금이라도 억누르고, 동시에 엘프들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성역화의 결계를 선택했다.
“이대론 안 돼.”
1000이 넘었던 좀비의 무리는 100명도 안 되는 엘븐가드 엘프들과 엘빈의 활약으로 치열한 접전 끝에 차례대로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엘레노아의 광역 범위로 전개된 축복의 기적의 덕이 컸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좀비 무리의 숫자는 자그마치 약 700.
이대로 가다가는 엘빈과 엘프들이 모든 좀비들을 정리하기 전에, 엘레노아의 신성력이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성역화의 결계가 신성력의 공급이 끊어지면서 풀어지게 된다면, 약화된 좀비들의 힘은 물론이고, 다크엘프 본진 전체를 범위로 발동된 저주도 조금씩 효과를 되찾아갈 것이 뻔하다.
게다가 은현에게서 공급받았던 처음의 마력도 동나게 된다면 엘빈은 움직이지 못한다.
처음 보였던 그림자의 칼날들이 춤췄던 광역 마법을 다시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엘빈이 빠른 소모를 피하고, 자신의 마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싸움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엘레노아도 알고 있었다.
“일리아나님께는 맡겨 달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버틴 것이 은현과 일리아나에게는 대단하다고 칭찬 받을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맡겨 달라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 일리아나가 돌아오기 전에 한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엘레노아를 분하게 표정을 짓게 만든다.
퍼억!
자신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을 자각하고 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근처의 좀비의 머리를 짓뭉개고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암흑 기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엘빈….”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괜찮아요.”
엘레노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엘빈의 질문에 답했다.
“…….”
“하대하셔도 됩니다. 공녀님.”
“하지만….”
엘레노아는 아직 엘빈의 존재가 어색했다.
그가 껄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에린과 엘빈의 인생을 망친 것에는 애슈턴이 연루되어 있으며, 자신의 공작 가문은 후계자였던 애슈턴의 만행을 덮고외면하는 선택을 했었다.
본인이 그 사건에 관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에린에게 가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엘레노아는 이렇게 엘빈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하게 된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금 당혹스러운상황이었다.
“저는 이제 은현의 영혼에 종속된 정령입니다. 그 녀석의 아내가 된 공녀님이 저에게 말씀을 높이실 이유는 없죠.”
“그러신 것 치곤, 당신도 그 사람에게 말을 높이고 있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은현과는 서로 말을 터놓고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그의 아내가 된 엘레노아에게는 자신을 하대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굉장히 모순적이라고 엘레노아는 생각했다.
“그 녀석은 저에게 그런 걸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주종서약을 통해 은현에게 종속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은현은 엘빈이 자신을 윗사람으로 깍듯이 대하고 부하로서의 태도를 갖출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것을 원했다면 종속된 엘빈의 영혼에 직접 간섭하여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것은 주종계약을 맺었음에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엘빈의 자유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은현의 배려였다.
“그리고 과거에있었던 저에 대한 일로 마음을 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
애슈턴은 처벌을 받아 베스타 신전의 지하 감옥에 연금되어 있는 상태고, 공작 가문도 왕국 궁정 회의에서 그에 대한 안건으로 이미 벌금형을 선고받아 처벌을 받았다.
중간에 개입해서 은현이 공작 가문이 납부해야 하는 벌금을 대신 납부하였다고는 하지만, 에린에게 진정한 사과를 해주었던 것과 함께,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는 공작 가문에 대해 더 이상의 분노를 품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에린을 아껴주신다면, 저는 그것 만으로도 족합니다.”
엘빈의 진심을 들은 엘레노아는 살짝 몸을 떨었다.
마음속 한구석에 차지하고 있었던 헤르샤 남매에 대한 죄책감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을 느끼고,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퍼억!
자신의 본심을 전한 엘빈이 주위에 접근한 좀비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를 뒤따라 쫓아온 로튼이 좀비의 무리를 보며 엘빈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봐, 친구! 이제는 어떻게 하지!?”
“…공녀님. 지시를.”
“저, 저 말인가요!?”
엘빈의 지목에 놀란 엘레노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물었다.
“저는 은현에게 종속된 정령입니다. 지금 그 녀석이 없는 지금,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공녀님밖에 없죠.”
“…앞으론 공녀라고 부르지 말고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엘레노아.”
순간 할말을 잃은 엘레노아가 이내 입을 꾹 닫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퍼져있는 범위가 너무 넓어. 숫자는 거의 10배 차이로 압도적으로 불리해. 지금은 분발해주고 있다고 하지만, 내 결계가 해제된다면 상황은 단숨에 역전돼. 그러면….’
이내 생각을 마치고 결심이선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엘빈과 로튼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엘프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엉? 로튼이라고 합니다만?”
“로튼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 말씀하시죠.”
뜬금없이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던 로튼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엘레노아의 말을 기다렸다.
“데르킨 수색조장님을 찾아서 지금 흩어져서 싸우고 있는 모든 엘프들을 한 곳으로 모아달라고 전해주세요.”
“엉?”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은 로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