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227. 죽음의 기사(2)
[아이야!]
다급한 여신의 외침.
“크윽!?”
영혼을 직접 울리며 일깨우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사고가 멈춰있던 은현의 몸이 반응했다.
왼쪽 팔뚝에 관통된 데스나이트의 검날을 왼손으로 꽉 붙잡아 검을 빼내는 것을 봉했다.
왼팔에 힘을 주면 줄수록, 검이 관통된 상처에서 피가 더욱 거세게 분출된다.
까득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 강해지는 통증에 이빨을 꽉 깨물고 억지로 버텼다.
곧바로 팔을 관통한 검을 뽑아내어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자신의 손과 팔이 베어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꽉 붙잡고 있는 은현의 손에 의해서, 데스나이트는 검을 빼내지 못했다.
“당신이…왜 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는지…나는 몰라요.”
“…….”
모른다고 말을 하면서, 이를 갈며, 분노로 물든 은현의 얼굴은 사실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어째서 시에테가 데스나이트가 되었는지,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은현의 앞에 나타났는지, 원인을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추론하는 것 자체는 간단하다.
“메디아….”
뿌득
소중한 사람이자, 스승이었던 사람의 영혼을 종속시켜 죽어서도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게 만든 초월자의 이름을 증오스러운 감정을 담아 불렀다.
데스나이트의 감각을 동조시켜 마계에서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메디아가 지금의 은현의 표정을 보고,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은현은 모른다.
‘어떻게 그녀의 영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지금은 생각을 접어두자.’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삶을 살았던 시에테.
지구가 멸망한 이후 아르케나 대륙에서 삶을 살았던 메디아.
존재했던 시간대 자체가 틀릴 진데, 어떻게 시에테의 영혼을 손에 넣어 자신의 아래에 종속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은현은 이 의문을 머릿속 깊숙한 곳에 억지로 집어넣고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내가…구해줄게요.”
지금은 죽어서도 평안한 안식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는 시에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으로도 은현의 머릿속은 터질 지경이다.
한 번 사망하고, 부활하기 전, 여신의 제약이 걸려 있었던 과거의 은현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시에테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멘탈이 깨져버려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아이야….]
‘괜찮아요. 여신님.’
그런 은현이 지금 멘탈을 간신히 붙잡고 시에테의 구원을 위해 움직일 수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베르단디의 외침과 머릿속으로 떠올랐던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얼굴 때문이었다.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떠올리고 붕괴할 뻔했던 정신은 새롭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망과 욕심에 의해 더욱 견고 해져갔다.
베르단디, 일리아나, 엘레노아의 노력의 결실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검을 봉한 상태로 초근접의 거리에서 데스나이트가 되어버린 시에테와 마주하게 된 은현은 과감히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버렸다.
짧은 간격을 두고 벌이는 초근접의 거리에서, 그 간격보다 긴 검을 사용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그렇게 검을 뽑아 거리를 벌리려는 시에테의 행동을 허용하지 않고,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왼쪽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마력을 응축시켰다.
[주현성 극원류]
[호접발경(胡蝶發勁)]
카아앙!
응축된 마력이 터지면서 쇠와의 격렬한 충돌음을 만들어내며 시에테의 갑옷이 거세게 흔들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 응축된 마력의 폭발력에 직격하면서, 내장이 뒤흔들리고 심각한 내상을 입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인간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기운이 덩어리로 응집된 죽음의 기사는 그런 내상의 타격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마력의 직접적인 공격이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갑주의 옆구리가 안쪽으로 찌그러진 것을 손의 감촉으로 확인하고, 은현이 주먹을 꽉 쥐어 제 2격을 준비하려 했던 순간,
[아이야! 팔이!]
“크윽!?”
시에테를 공격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통증을 억지로 참고 있던 은현은 여신의 외침에 뒤늦게 검을 관통당한 자신의 팔뚝의 상태를 깨달았다.
생기가 빨려 나가다 못해 마른 나뭇가지처럼 홀쭉해지고, 피부가 검게 물들어가며 썩어들어가고 있는 왼팔.
그것이 시에테의 검에서 발현된 저주로, 자신의 생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은현은 단검을 소환하여 재빨리 자신의 팔을 망설임 없이 절단시켰다.
자유가 된 것을 노리고, 은현은 뒤로 크게 점프를 하며 시에테와의 거리를 벌렸다.
재빨리 자신의 몸 상태를 살핀다.
‘다행히…저주의 침식은 막았어.’
관통당한 팔을 기점으로 저주가 몸 전체로 퍼지기 전에 망설이지 않고 팔을 절단시킨 선택은 옳았다.
[은현 고유능력]
[시간 역행]
저주가 몸 전체에 진행이 되었다면 시간 역행으로도 저주 자체를 되돌릴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는 은현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시도를 해본 적도 없고, 저주가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에 대한 것도 미지수였기에, 은현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을 절단시키고, 권능을 통해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쯧.”
명백한 은현의 실수다.
시에테가 가지고 있는 검은 하계에 소환이 되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사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것을 방치하고 리스크를 감행했던 것은 은현의 실책이었다.
자신의 앞에 등장한 죽음의 기사의 정체가 다름 아닌 자신의 스승, 시에테라는 사실에 아직도 동요하고 제대로 된 사고의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야….정말로 괜찮느냐?]
죽어서도 메디아에 의해 영혼을 농락당하고, 비참한 몰골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스승을 마주하고 있는 은현의 내면의 심리를 읽은 베르단디가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한 번 무너져내렸기에, 더 강한 마음을 다잡은 은현은 그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다시 두 자루의 검을 소환시킨 뒤, 자신을 마주해 검을 겨누고 있는 시에테를 향해 은현도 검을 겨눴다.
“제가 구해야만 해요.”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은현도 알 수 없다.
원인과 과정을 파악하기에 자신의 감정과 가슴은 너무나도 복잡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일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스승의 평안한 안식과 구원을 위해, 제자는 죽음의 기사에게 검을 휘둘렀다.
◆ ◆ ◆
“그렇군요…. 그분께선 지금….”
텔레포트를 통해서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데르킨은 은현의 아내들에게서 상황의 설명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더 이상 다크엘프들을 죽여선 안 돼요. 죽이면 그 다크엘프의 원혼이 현이가 상대하고 있는 데스나이트에게로 흡수가 되어 더욱 강해져요.”
“알겠습니다.”
일리아나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인 데르킨은 이내 엘븐가드의 기습조 엘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현재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다크엘프의 본진 전체를 범위로 발동한 저주의 내용을 설명하고, 다크엘프들 전원을 죽이지 말고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전달한 엘븐가드의 엘프들이 얼굴을 굳혔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적당히 때려눕힌다는 것은, 그냥 죽이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양측 세력의 사이에 압도적인 격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등비등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엘레노아, 우리는 바로….”
“수, 수색조장님!”
데르킨을 통해 엘프들에게 상황의 전달을 마친 일리아나는 곧바로 다음 행동을 엘레노아에게 말하려 한순간, 한 엘븐가드 엘프가 황급히 데르킨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데르킨과 일리아나, 엘레노아의 세 사람이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한 엘븐가드 엘프의 뒤에서 휘청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존재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죽었던 다크엘프들의 시체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그 안에서 뼈까지 보이는 흉측한 몰골.
생명 활동을 위한 호흡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고 힘없이 흐느적거릴 뿐인 그 모습은 영락없는 언데드다.
“좀비….”
생전의 몸속에 자리 잡았던 영혼들은 사망하면서 모조리 뽑혀나가고, 지성의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본능에 충실한마수와도 같은 모습들.
[세 자릿수 마법]
[파이어 애로우]
엘븐가드 엘프에게 달라붙어 살아있는 살점을 뜯어먹으려고 접근하던 좀비의 몸을 일리아나가 발현시킨 불꽃의 화살이 관통하면서 좀비가 되어버린 시체를 불태웠다.
일리아나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하나둘씩 차례차례 몸을 일으키는 좀비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쯧.”
아예 불속성의광역 마법으로 모조리 태워 시체조차도 남겨버리지 않는 것이 가장 최적의 방법이지만, 이곳이 숲속에 위치한 장소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불속성의 광역 마법조차도 섣불리 쓸 수가 없다.
아군인 엘븐가드 엘프들까지 마법에 휘말리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상황인 데다가, 작은 불씨의 하위마법으로 일일이 처리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다.
“일리아나님. 숲을 뒤덮은 이 저주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신 거죠?”
“……? 응. 있기는 한데….”
수백 구의 시체들이 몸을 일으키며 좀비로 변이해가는 과정에서 100명도 채 안 되는 엘븐가드 엘프들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비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가주세요.”
“…엘레노아?”
일리아나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엘레노아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좀비의 무리들과 교전을 벌이기 시작한 엘프들을 향해 걸었다.
쥐고 있던 스태프를 팔 안쪽에 걸치고, 자유가 된 양손을 한데 모았다.
손 위에 생겨난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는 새하얀 구체를 두 손으로 꽉 쥔 엘레노아가 한치의 더러움도 존재하지 않는 깨끗한 신성을 터뜨려 주위에 발산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모시는 베스타 여신에게 기도한다.
[여신이시어. 저의 소중한 사람이 아끼는 분들이 다치지않도록, 보듬어주시길간절히 바랍니다.]
[베스타의 축복]
[홀리 생츄어리(Holy Sanctuary)]
“이건 아니에스의….”
무겁고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던 사기가 가득했던 공기를 밀어내는 신성한 기운.
엘프들의 신체의 활력을 향상시키고, 동시에 다크엘프 좀비들의 신체 일부를 정화시키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좀비의 등장으로 인해 급변하는상황 속에서 꺾일 뻔했던 엘프들의 사기를 북돋우게 만드는 신성한 성역화의 결계.
“이건…?”
“상처가….”
잃어버렸던 체력을 회복되고, 자잘한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한 것도 모자라, 저주로 인해 짙은 사기에 잠식되어 있던 공기가 조금씩 정화되어 호흡이 편해진다.
엘븐가드 엘프들은 이 기적을 일으킨 사제, 엘레노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활기를 되찾은 엘프들이 다시 싸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엘프들은 다짐했다.
반드시 살아서, 이 기적으로 자신들을 구해준 엘레노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고.
“하….”
엘븐가드 엘프들과 다크엘프 좀비들 간의 격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장에서성역화의 결계를 치고 베스타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엘레노아의 모습은 성녀 그 자체다.
그 눈부신 성녀의 일면을 보게 된 일리아나가 기쁨 반, 놀라움 반의 표정을 담은 헛웃음을 지었다.
기도를 마치고, 성역화의 결계가 설치된 전장을 바라본 엘레노아는 자신이 일으킨 기적으로 전황이 조금씩 호전이 되었음에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아직 아니에스님에 비하면….’
한참 모자르다.
자신이 친 결계로도, 숲에 설치된 저주는커녕, 지금 일어난 수백의 숫자의 좀비들을 정화 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다시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엘레노아는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이 정도라면 엘븐가드 엘프들과 함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으리라 판단을 마치고, 현재 상황을 해결하여 조금이라도 은현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데,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엘레노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일리아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저랑 엘빈과 엘프분들이 맡을게요. 일리아나님께선, 일리아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해주세요.”
그 짤막한 한마디가 한없이 듬직하고 믿음직스럽다.
피식 미소를 지은 일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수록 멋있어진다니깐.”
고민을 마친 일리아나는 망설임 없이 텔레포트를 발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