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177. 사냥개들(7)
“이건….”
바론은 란델이 다루는 흑마법과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림자이면서 실체를 가지고 있고,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란델의 조영술과 다른 점은 검은 형체 속에서 마치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시선과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
“오빠…?”
반면, 자신과 바론의 사이에 끼어들어, 에린을 지킨 그림자를 보고, 에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검은 후드를 쓴 것처럼 그림자를 몸에 두르고 있는 무언가가 마침내 입을 연다.
“집중해.”
“아…!”
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질타하는 그림자의 질책에 에린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바론의 손목을 놓칠 뻔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에린이 아주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지으며 빈틈을 보였음에도 바론이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에린의 팔을 뿌리치지 못한 이유는 두 사람 사이에 난입해 그의 몸을 옭아매고 있는 그림자들이 원인이었다.
“끄…으!”
바론은 마력을 전개하여 자신의 신체능력을 강화하여, 몸을 옭아맨 그림자들을 억지로 뜯어내려 하고 있었지만, 마력을 전개할 때마다 모조리 에린에게 흡수가 되어가면서 자신의 힘이 더더욱 빠른 속도로 깎여나갈 뿐이었다.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자신의 기력을 모조리 흡수해가고 있는 에린의 목을 노렸다.
카앙!
또 다시 그림자에 가로막혀 그녀의 목을 베는 것을 저지당하는 것에 바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쯧!”
에린에 의해서 마력을 전개하는 것은 악수로 작용하고, 아무리 단련된 남성의 몸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물리적인 공격만으로 그림자를 베는 것은, 바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부터 그것이 가능했으면 조영술로 몸이 지켜지고 있는 란델부터 진즉에 죽였다.
에린에게 체내의 생기와 마력을 빠른 속도로 빼앗기고 있는 시간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두 사람의 차이는 완전히 반대로 역전되고 있었다.
마력과 생기를 빨아들이면서, 조금씩 체력을 회복시키고 있는 에린과는 달리, 바론의 단단한 근육들로 부풀어 올라 있던 팔뚝이 점점 바람 빠진 풍선마냥 홀쭉해져갔다.
조금씩 저항이 약해지고 있는 바론의 힘을 실시간으로 느낌과 동시에 바론의 몸에 달라붙어서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그림자가 에린에게 외쳤다.
“지금!”
외침을 들은 에린이 반사적으로 남아있는 손의 주먹을 꽉 쥐고, 에너지 드레인을 통해 충만해진 마력을 수용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담아낸다.
“흐읍!”
숨을 참아내고 있는 힘껏 내지른 주먹에는 이렇다 할 기술의 정수가 담겨있지 않는, 그저 평범한 정권지르기.
은현이 이전에 한 번 보여주었던 ‘삼매붕권’을 따라해 보고 싶기에 무의식적으로 내지른 공격이었다.
그 정권지르기가 너무나도 유려하고 깔끔한 동작의 연속이었기에, 그 공격 하나에 담겨있는 수많은 시간의 노력과 정수를 느끼고 따라잡기에는 에린의 역량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주먹에 담겨있는 마력의 질은 쇠약해져 있는 바론의 몸에 타격을 입히기에는 충분했다.
“크흐윽!”
깔끔한 복부의 공격이 강타하고, 바론이 신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의 허리가 휘청거린다.
그림자에 의해서 몸을 구속당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에린의 공격이 정확히 먹혀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흥…나쁘지 않은…주먹이군.”
피식 미소를 짓던 바론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정신을 잃는다.
그림자가 구속하고 있던 정신을 잃어버린 그의 몸을 풀어주자, 스르륵 허망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웅!
바론을 쫓아 뒤늦게 도착한 에밀리아와 검사백귀가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있는 바론의 모습을 확인하고, 가만히 서서 에린을 응시했다.
에린은 한쪽 팔을 뜯겨진 상태로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는 검사 백귀의 몸을 확인하고, 백귀의 몸에 마력을 보충해주었다.
“남은 인형들과 백귀님들의 지원을 해주세요.”
에린에게서 마력의 보급을 받아 원상태로 되돌아온 검사 백귀는 알았다는 대꾸도 없이 몸을 돌려, 남은 사냥개들을 처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백귀들에게 있어 주인인 에린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에 굳이 의사의 표현도 할 필요도 없었다.
“에밀리아는…괜찮아?”
옷가지가 찢어지고 여기저기 인형의 몸체를 드러내고 있는 에밀리아의 상태는 그만큼 격렬한 전투를 치루고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본 개체의 손상률 26%. 기능이 55% 저하되었습니다.”
“이제 괜찮아. 쉬어도 돼.”
“…아직 적의 소탕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본 개체는 전선에 나서서 계속 싸울 수 있음을….”
“후방에서 인형들의 지휘만 해. 그거면 돼.”
“…명령을 수락합니다.”
에린은 바론에게서 흡수하여 보충한 마력들을 갈무리하고 곧장 전개하여 요술을 발동시켰다.
[호족 요술(狐族 姚術)]
[백귀야행(百鬼夜行)]
세 개체의 새로운 백귀들이 소환되어 에린의 앞에 서서 그녀의 명령을 기다렸다.
“인형과 백귀님들과 싸우고 있는 적들을 모조리 잡아주세요.”
명령을 받은 백귀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남은 사냥개들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전력의 보충과 동시에,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 에린은그제 서야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이 바론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도와준 그림자 인간을 천천히 응시했다.
“…….”
꿀꺽
에린이 침을 삼키며, 가만히 서있는 그림자 인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검은 후드를 만져보자, 실체가 존재하는 옷감을 만지는 것만 같은 감촉에 에린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설마…진짜로?’
결심을 굳힌 에린이 검은 후드를 뒤로 젖히자,후드 속에 있는 얼굴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아….”
자신과 같은 남청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던 남자의 얼굴이 두 눈에 들어오자, 에린이 작게 탄식했다.
탄식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녀의 두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과 표정이 그녀의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왜 울어. 기껏 살아 돌아왔는데.”
“…….”
“마른 오징어 같은 얼굴이 물이 묻으면서 더 못생겨지고 있잖아. 그만 울어.”
“이, 이이이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을 거는 엘빈의 태도에 감동과 서러움, 기쁨과 미안함, 안타까움 등의 휘몰아쳤던 그녀의 감정들이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어갔다.
“이게 진짜!”
꽉 쥔 주먹으로 있는 힘껏 엘빈의 가슴을 내리쳤지만, 마력이 없는 평범한 에린의 주먹은 실체화를 풀어버린 그림자의 몸통을 허무하게 통과하며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오빠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알아.”
“이렇게 도와줄 수 있었으면, 어째서!”
“미안해.”
“왜…진작 내 앞에 나타나주지 않았던 거야….”
있는 힘껏 두들기던 주먹이 점점 약해지고 울먹이는 에린이 엘빈의 몸을 꽉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오빠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실종되었던 당시, 에린이 깨어난 이후로 에린에게는 은현에게 구원을 받아 나름대로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자신을 떠나 먼저 죽어버린 엘빈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도 나약했기 때문에 엘빈에게 그 부담을 모두 지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깨어난 건 최근이었어. 곧바로 너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건 그 녀석과의 약속 때문이었지.”
“그 녀석?”
“너를 구원하고, 나를 죽이면서 해방시켜준 그 자식.”
“현이가?”
“…꽤나 친근하게 부르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에린의 말에 엘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튼 할 얘기는 굉장히 많….”
“에린 양. 그것에서 당장 떨어지세요.”
[미숙한 것! 뒤다!]
파지직!
머릿속으로 떨어지는 미호의 노호성에 화들짝 놀란 에린이 본능적으로 뒤쪽에 마력을 전개해 감지를 발동시켰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는 인간의 존재를 느낀 에린이 다급하게 엘빈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뒤를 돌았다.
“큭!?”
전방을 가득 채우는 눈부신 뇌전의 섬광으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시야가 확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엘빈의 목을 노리는 사선에 들어와 공격을 방해해오는 에린의 행동에 제라드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에린을 상처 입힐 수는 없었기에, 제라드는 돌진을 멈추고 뒤로 점프하여 에린과 엘빈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읽혔다고? 내 움직임이?’
엘빈이 란델이 사용했던 흑마법의 잔재라고 판단하여, 그를 처리하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을 방해했다는 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17살의 어린 소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기술이 읽혔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금껏 내 뇌광을 읽은 사람은 이 기술을 만드는데 조언을 해주신 현이 형님 밖에 안 계시는데…. 역시 형님의 제자라는 건가?’
에린이 은현과 마찬가지로 감지라는 기술을 익히고, 그녀보다도 더 빨리 제라드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던 미호의 노호성이 있었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에린의 돌발행동이었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제라드에게는 그저 에린의 능력이 대단하게 비쳐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능력과는 별개로, 이 상황에서 엘빈을 감싼 행동 자체가 옳은 일은 아니라고 제라드는 생각했다.
“에린 양. 어째서 뒤의 저것을 감싸는 거죠?”
“이, 이 사람은….”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그게…그런 게 아니라….”
에린 스스로도 엘빈이 어떻게 되살아난 것인지 이유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를 몰라,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 ◆ ◆
“…이게 무슨 상황이야?”
뒤늦게 난장판이 되어있는 폐창고에 도착한 아르티아의 기사단원들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묘한 상황에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에밀리아의 명령을 받은 도미너스 인형이 에이라를 부축하여 아르티아 기사단 본부를 찾아오고, 부상을 입은 에이라의 지원요청에 따라 글레오르 폐창고에 도착했지만, 상황은 이미 종료된 상태였다.
페르닌 안의 젊은 귀족자제들에게 마약을 풀었던 범인은 이미 죽었고, 그가 고용했던 용병들 ‘사냥개’라고 칭하던 이들은 이미 제압당하거나 사망한 상태였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된 가운데, 대영웅인 제라드와 에린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기사들에겐 매우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에린의 뒤에서 가만히 서있는 칙칙한 망토를 두르고 있는 남자의 모습도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이윽고 고민을 마친 에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이 사람은 제 오빠에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뭐?”
에린의 외침을 들은 한 아르티아 단원이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반문했다.
에린 헤르샤라는 소녀에게 일어난 비극은 아르티아의 단원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헤르샤 준남작의 배임횡령 사건을 수사하고, 레니온 헤르샤가 빼돌린 금화들을 가지고 달아났다는 오명이 씌워진 마법사, 엘빈 헤르샤의 추적 임무를 맡았던 기사단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는 갑작스레 아르티아의 단장인 리오드에게 엘빈 헤르샤가 살해당했다는 발표와 함께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던 금화들이 재무장관인 버나드 후작에게 되돌아가게 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리오드와 극히 일부의 인물들을 제외하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흑마법사, 엘빈헤르샤가 살아있다는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다.
“…….”
이내 고민을 마친 아르티아의 단원들도 검을 뽑아들고 언제든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마력을 전개하여 신체를 강화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흑마법사라는 존재는 발견되는 즉시 척결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에린은 다 무너져가는 폐창고의 건물 안으로 들어와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는 아르티아의 단원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다급하게 그들을 설득했다.
“자, 잠시 만요! 기사님들! 제 오빠는…!”
“아가씨. 아무리 가족이라도, 흑마법사를 감싸는 건 중죄야. 이건 아무리 아가씨가 그 양반의 제자이고, 우리 단장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감싸줄 수가 없어. 개인적인 감정을 둘째치더라도…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순순히 물러나.”
“으….”
에린은 뭐라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흑마법사의 존재가 대륙에서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지는 에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엘빈이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옹호하고 감싸줄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오빠는 이미 죗값을 치렀는데?’
이성을 잃어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 싫었던 엘빈은 은현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었고, 그로 인해 엘빈의 흑마법사로서의 인생은 끝났다고 은현이 직접 설명해준 바가 있었다.
엘빈은 그에 맞는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은현이 직접 말했다.
아르티아의 단원들이 엘빈에게 적대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그가 죽었다고 사실이 공표되었음에도 버젓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엘빈은 갑작스레 자신의 품속에 있던 검은 구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일리아나가 준 구슬이라고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이 구슬 속에 죽은 엘빈이 있었고, 되살아났다는 것을 제대로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빠가 되살아났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어….’
답답하다.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이대로 가다간 엘빈이 기사들에게 잡혀, 또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에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엘빈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엘빈은 담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 반응이 매우 당연하다는 것을 몸소 받아들이고 있는 태도가 더욱 에린의 마음을 애가 타게 만들었다.
“오빠! 오빠가 뭐라고 설명이라도 해줘!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라도 제발….”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누가 오셔?”
조급해진 에린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엘빈은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에린 양.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에린 양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저는 저것과 똑같은 흑마법을 사용하는 남자를 지금 죽이고 오는 길입니다. 저 흑마법은…너무 위험해요. 지금 당장 처리해야합니다.”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제라드가 마침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라드 속성비기]
[뇌광(雷光)의 이빨]
오늘로만 벌써 세 번째로 발동시키는 뇌광의 이빨은 아까와는 달리 주위를 가득 채우는 강력한 뇌전을 뿜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체내에 남아있던 마력을 쥐어짜내어 겨우 발동시킨 제라드는 명백히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안…!”
섬광을 만들어내며 엘빈의 목을 긋기 위해 행동을 취해 오는 제라드의 모습을 보며 에린이 절망어린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이렇게 또 잃는 거야?’
은현이 약속을 한 대로, 엘빈을 만나고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지금껏 열심히 노력해왔는데,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또 다시 엘빈을 잃어버릴 지도 모르는 상황.
그것도 자신의 눈앞에서 오빠가 죽음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에린의 머릿속을 엄습했다.
마찬가지로 제라드가 행동을 시작한 것과 동시에 아르티아의 단원들까지 움직여 흑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엘빈의 목을 제라드의 단검이 그으려는 찰나.
[한 자릿수 일반 마법]
[블래스트]
“꺄악!”
거대한 돌풍이 엘빈의 중심을 휘몰아치기 시작하면서, 실체화를 풀어버린 엘빈을 제외하고, 에린까지도돌풍에 휘말려 허공을 날았다.
“무슨….”
“…….”
당황스러운 기사들과는 달리, 제라드는 기척이 감지되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누님?”
“오랜만이네. 제라드.”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와 바닥에 착지한 마녀는 몇 년 만에 조우한 옛 동료에게 드라이한 인사를 건 냈다.
그녀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제라드는 반가운 감정보다도, 의문에 찬 시선으로 일리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님이 저 흑마법사를 감싸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대륙에서 마법사의 정점에 서있는 존재 중 하나인 마녀가 흑마법사를 감싼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그 오해를 풀어주려고 왔지. 저거 사람 아니니까.”
“예?”
“사람 아니라고. 그러니까 흑마법사도 아니야.”
두루뭉술한 이야기로 서두를 여는 일리아나의 말에 제라드가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혼란스러운 것은 제라드와 함께 엘빈을 죽이려 들었던 아르티아의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십시오.”
“정령이거든. 저거.”
“정령…이라고요?”
“응. 나랑 현이가 만든 인공정령이니까. 인간도, 흑마법사도 아니야. 그러니까 대륙에 해악을 끼칠 존재도 아니라는 소리지.”
“…….”
일리아나는 미심쩍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제라드와 아르티아 단원들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일단 저거에 대한 신원의 보증은 내 쪽에서 할게. 일단은 리오드한테 가서 사정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