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9)

소녀의 문이 열릴 때 [3]

  내가 이불속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웃으며 두 팔을 뻗었다. 일으켜달라는 신호다.

  나는 그녀를 안고 창쪽으로 갔다. 그녀가 팔을 뻗어 커텐을 열어 젖히자 햇살이 눈부시게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평화로운 눈길로 창밖을 바라봤다. 담장 없는 정원밖으로 작은 자동차가 몇 대 지나갈 뿐 인적도 느껴지지 않는 거리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겨울의 초입이라 그런지 밖에는 조금 쌀쌀한 기운이 돌고 낙엽이 바람에휩 쓸려 거리위를 뒹굴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해맑은 모습.

  내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자 그녀가 손가락을 가져다 내 입술을 막았다.

"아빠. 아무말 하지 말아요..." "그리고 우리 죄책감 같은 거 이제 갖지 말기로 해요. 저는 아빠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

  "그리고 전 언제까지나 아빠와 함께 아침을 맞을 거예요." "그럴 수 있죠?"

  "......"

  대답대신 나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잡고 긴 긴 키스를 해주었다. 부드럽게...

  "사랑해.... 나도 널 죽도록 사랑한다."

  "나의 천사. 내 사랑...."

  ......................

  여기는 미국. 뉴욕에서 남쪽으로 30여키로 떨어진 작은 도시다.

  이곳에는 아무도 우리를 알지 못한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품에 안았다.

   간섭하거나 질타하거나 멸시하는 그 누구도 우리 곁에 없다. 이제 우린 다정한 부부로 이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즐기면 그만이다.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린 채...

  사랑하는 딸 서희.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서희와의 기막힌 사랑의 협주곡은 6개월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희는 올해 열여섯으로 여고 1년생이다. 학교 성적도 우수한 편이고 성격도 밝고 얼굴도 예뻐서 늘 친구들이 따랐다.

   아내는 3년전 서희의 생일전날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한 근 20년간 고락을 같이 해온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그때 나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업체도 제대로 안돌아보고 망연자실 보낼 때가 많았고 웃음을 거의 잃고 지냈다.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사람처럼 그늘속에서 생활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그럴것이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와 나. 우리 부부는 완벽한 커플로 늘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터였고 무엇하나 부족함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한 나날을 지내왔다. 속궁합도 겉궁합도 잘 맞아서 나는 아내 외에 다른 여자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고 그럴 필요성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결혼생활 10여년이 지나면 권태기도 있을 법한데 우리는 늘 신혼처럼 지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녀의 지혜와 기술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딸 서희를 출산하고도 몸매관리를 잘 해서인지 40 가까이에도 군살 하나없이 날씬한 몸매를 간직해 왔고 피부도 늘 싱그러웠다. 늘 미소를 잃지않고 주위사람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했다. 워낙 성품이 착한 탓이기도 하지만 상냥한 미소가 몸에 배어있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의 성격을 닮아 예쁘고 해맑게 자라나는 서희까지 그야말로 우리 가정은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만큼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신의 질투였는지 그런 우리가정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채 아내는 먼길을 떠나 버린 것이다.

   그때 그 이상으로 고민된 것은 서희였다. 엄마의 죽음으로 충격받아 심신에 이상이 생기면 어쩌나 해서였다. 서희는 당시 13살이었는데 그 시기가 가장 예민한 사춘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서희는 이상이 있기는 커녕 오히려 아내 대

신 내 신변을 보호하고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아침에는 나보다 일찍 일어나 식사준비를 해놓았고 저녁때는 클럽 활동으로 피곤할텐데도 저녁을 지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간혹 바쁜 일로 연락 없이 늦게 돌아왔을때에는 식탁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그대로 엎드려서 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식탁위에는 깨끗하게 차려진 맛있는 요리가 2인분 손도 대지 않은 채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대견스럽고 한편으로는 가여운 서희의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은 뜨거운 그 무엇이 밀려오며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내와 사별한 뒤 2년만에 나는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었고 사업체도 더 키워나갈 수 있었다. 모든게 서희의 덕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별한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사업체를 키워가느라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고 서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선뜻 재혼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안정도 찾았고 아직까지 불편함없이 지내올 수 있었는데 서희에게 또 다른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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