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축제 다음 날 아침.
광서지부 입구.
광야는 머쓱한 표정으로 태수 앞에 섰다.
광야는 어제 태수가 갑자기 기녀를 소개해주는 바람에,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단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가는 건가?"
"뭐, 그렇긴 한데. 태수 대협은 몇 살이오?"
"이십육"
"난 이제 스물다섯살인데, 형이라 부르면 되오?"
"마음대로"
"본가는?"
"딱히 없어"
"그러면 그냥, 태수 형이라 부르면 됩니까?"
"어"
광야는 태수의 단답에 피식- 웃으며 작별의 인사로 손을 흔들었다.
지금껏 대륙 각지로 수많은 여행을 다녔는데, 그 중에서도 나름 이곳에 정이 들던 참이었다.
"태수 형, 어차피 조만간 보게 될 것이오. 난 아마 이번에 개방의 대표로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게 될 것 같으니"
"광야, 그럼 그때보자고-"
"하하"
광야는 특출난 신법으로 순식간에 태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빠르긴, 엄청 빠르네-"
내공으로 안력을 딱히 키우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상단전이 활성화되면, 저런 속도를 가질 수 있으려나-'
"광야도 갔는데, 당 대협은 언제 돌아갑니까?"
"어구구- 이제는 막 쫓아낼려고 하네?"
당천휘는 마치 식당 주인한테 내쫓기는 거지인 것처럼 과장된 자세를 취했다.
"에휴, 됐습니다"
"으하하-"
귀찮은 듯, 마음대로 하라는 태수의 태도에 당천휘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는 껄껄 웃었다.
광야가 돌아간 이후로, 광서지부는 이계 침공도 끝났고 원래의 제자리로 다시 되돌아갔다.
태수는 파천군단장을 선출하는 비무대회를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 광서지부 각지에 널린 리자도맨의 가죽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진무"
"부르셨습니까, 주군"
"마을의 관 대리인들 다 모집해서, 마을 주변에 널리고 널린 괴물 부산물들 한 곳에 정리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주군"
진무는 태수에게 줄을 선 이후로, 광서지부 내에서 태수와 만남이 잦은 직책을 맡게 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 같은 느낌이랄까.
'소집령을 내려서 한 곳에 모이게 하는 것도 세월아 네월아지'
다행히 게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밤꽃무림 세계라, 전서구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통신체계 때문에 지옥이었을 것이다.
"일단, 광서 본토에 널려있는 괴물 가죽부터 처리해야겠다"
"네 녀석, 정신 없는 모습을 보니 아주 기분이 좋구나, 껄껄- 이 시체들을 처리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주 지끈거리겠는데?"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시체를 옮기는 것부터 해서- 엉!?"
당천휘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 금붕어처럼 눈을 여러번 꿈뻑였다.
리자도맨의 거대한 시체는 태수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 검은색 공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기괴한 장면에 당천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네 녀석! 방금 그건 무슨 능력이었으냐"
"비밀입니다"
"으아아! 도대체 왜 그게 비밀인 것이냐"
인벤토리 능력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태수 때문에 화병이라도 걸릴 것 같은 당천휘였다.
보는 것만으로, 정말 갖고 싶은 능력이었다.
"혹시, 그것 역시 중단전의 능력이더냐?"
"뭐,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젠장- 중단전에 도달해야 할 이유가 왜 이렇게 많은 것이냐. 그 공간은 무제한이더냐?"
"제한이 있긴 합니다만, 뭐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태수 덕분에 충격을 여러번 받은 당천휘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니구나'라며 광서지부의 연공실을 찾아 들어갔다.
일단 마음 먹은 바로는, 그곳에서 한참동안이나 연공한 후에 나올 생각이었다.
"흐음-"
중단전과 인벤토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그걸로 동기부여가 된다고 하면 나름 착한 거짓말이지 않겠는가.
태수는 광서 본토를 직접 전부 돌아다니며, 인벤토리에 리자도맨의 가죽을 모두 넣은 후 중앙상단으로 찾아갔다.
"와, 대박. 그 사이에 엄청 커졌잖아"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중앙상단은 그 전보다 더욱 세력을 넓혔다.
경쟁 상단이 없어지니, 광서에서는 저 멀리 표국을 거치는 일이 아니라면 중앙상단의 제품을 사야만 했다.
특히, 중앙상단이 파천회의 밑으로 들어오며, 중앙상단은 파천회에게 매달 제품들을 납품할 수 있었고 덕분에 파천회의 무인들은 중앙상단의 제품을 사용하는 게 가장 나았다.
'뭐, 제품의 질은 문제가 되질 않으니까'
이계의 괴물 가죽은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우수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계 침공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 시각.
송유린은 송인수와 함께 건축 현장에 나와있었다.
이번에 짓고 있는 건, 중앙상단 기술자들을 재워주기 위한 공간으로 전용 숙소였다.
새롭게 짓는 만큼, 공들여 지을 생각이기에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물론, 둘은 건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사고가 나는지, 안 나는지 정도만 보러 확인차, 밖에 나온 것이었다.
'흐음-'
송인수는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중앙상단을 보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어느 정도 불안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파천회의 도움 덕분에, 중앙상단이 이렇게 발전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말은 곧 파천회가 중앙상단의 뒤를 봐주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뜻했다.
'건물을 새롭게 신축하고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지만, 그 노력들을 한순간에 불태워버리는 일은 너무나도 쉬우니'
송인수는 건축 현장을 집중해서 보는 자신의 딸, 송유린에게 시선이 닿았다.
파천회의 회장인 태수와 부부 관계로 이어지면 그것보다 좋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참견할 수 없는 일이지. 암 그렇고 말고-'
"아버지"
"왜, 그러니. 린아야"
송유린은 건축 현장을 보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송인수는 그런 딸의 모습이 참 마음에 들었다.
비록, 여자로 태어났긴 했어도 일에 관해서는 남자처럼 굉장히 야무지고 똑부러졌다.
덕분에, 중앙상단은 그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괴물 부산물에는 간혹 육류와 가죽만이 아니라, 영물의 내단 같은 것도 나온다고 해요"
"그러니?"
"네, 그래서 저희 중앙상단에서 내단을 잘 다루는 단약사를 고용해서, 내단 사업도 하면 어떨까요?"
"호오-"
송인수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상단이 현재 벌이고 있는 사업 비중 분포는-
-기능성 옷 50%
-기능성 도검류 30%
-기타 편의제품 20%
로 어떻게 보면 너무 옷에 치중되어 있었다.
전문적으로 옷을 잘 만들긴 해도, 이렇게 한 분야에 치중되어 있으면 여러 분야에서 수익을 올리는 것이 제한되기 때문에 상단의 성장에 제약이 걸리기 쉽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내단을 곁들인다면?
내단을 지속적으로 장사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파천회의 회장, 태수의 말에 따르면 무림의 멸망에 이를 때까지 이계의 침공이 계속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걸 고려하면, 충분히 해볼 만한 사업이었다.
"충분히 해볼 만한 사업이구나. 그런데 단약사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그건 태수님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렇구나.."
자력으로 재능있는 인력을 구할 수 있는 것도 한 단체의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인력풀을 파천회를 거치지 않고서는 상당히 힘들었다.
태수는 파천회의 회장으로서, 지속적으로 파천회의 중요성을 부하들에게 인식시켰고 목적 의의를 이계 침공을 끝까지 막아내는 것에 대해 두고 있으니까.
"내단은 내공을 늘려주는 단약이기 때문에,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구매하려고 할 거에요. 그걸로 저희 중앙상단이 한 번 더 크게 도약할 수 있겠죠"
"생각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니"
"분명, 할 수 있을 거에요, 아버지"
송유린은 비록 중앙상단이 독립적인 단체에서, 파천회의 하부조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중앙상단을 제대로 키우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예전에는 단순히 그런 게 재밌어서 그렇겠지만, 지금은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중앙상단이 발전하면 태수님이 더 관심을 가지시겠지? 그러면 나를 더 많이 봐주실 거야'
태수의 여인 7명 중, 아직 관계를 맺지 못한 송유린은 조금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주변에서 그런 그녀를 보는 게 얼마나 답답했으면,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서 그녀와 또래인 선하는 '이럴 때는 덮치는 게 가장 좋아!'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송유린은 그 망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해져, 두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해야만 했다.
이후로, 송유린은 결재할 일이 없으면 바깥에 나가 직원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독할 겸, 독려해주었고 결재할 일이 생기면 집무실 안에 들어가 계약 문서에 결재 도장을 찍었다.
"우으- 힘들어. 지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
그녀는 끊이지 않는 일에, 잠시 침대에 누워 쭉 기지개를 폈다.
조만간 총관을 고용해, 결재 일을 대신할 사람을 구할 생각이었다.
물론, 총관이 결재한 것들을 모두 정리하여 승인을 하는 건 자신이 할 계획이었다.
"정말, 돈벼락이잖아"
그녀 본인이 일일이 결재했기 때문에, 중앙상단으로 돈이 얼마나 들어오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셀 수 있었다.
파천회만이 아니라, 광서 주변에 중앙상단에 대한 입소문이 잘 나고 있었기 때문에, 대량 주문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돈이면, 헤헷-"
돈 버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송유린은 돈 쓸 생각에, 머릿속이 망상으로 차올랐다.
"아차,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이구나. 우리 직원들 챙겨줘야지-"
잠시, 휴식 시간으로 침대에서 얼마나 누웠을까.
얼마 눕지도 않았지만, 송유린은 직원들한테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한걸음에 일어나 퇴근 전까지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마실 것과 다과를 챙겨주었다.
"다들 마시고, 먹으면서 하세요"
"부상단주님,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어요"
"에이, 여러분들이 더 고생하셨죠. 헤헷-"
밤꽃무림 세계관에서, 옷을 만드는 방직 기술과 도구 수준이 그렇게 많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방직은 장인의 숙련도 수준이 굉장히 중요했다.
송유린은 그걸 절대로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참, 냉정하면서도 따뜻하기도 하시지-'
직원들은 빈틈없는 일처리를 위해 감독하면서도, 이런 부분에서는 늘 세심하게 챙겨주는 송유린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야말로, 빈틈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여자랄까.
그녀에게서 헤픈 모습은 절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들 힘내요"
"린아야"
"엇, 공자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송유린은 태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송유린은 손에 다과를 들고 있다는 것도 잊고서, 한걸음에 태수에게 달려와 안겨왔다.
"뭐하고 있었어?"
"아아- 곧 마감 직전이라 독려할 겸, 직원들한테 다과와 차를 챙겨주고 있었어요"
"후훗, 마음이 따뜻한데?"
"아니에요오-"
태수는 자신의 품안에 안긴 송유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고, 그녀는 그 감촉에 부끄러운지 태수의 품안에 얼굴을 묻었다.
직원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같이 일을 하며 처음으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빈틈이 없었던 그녀에게 이렇게 많은 빈틈이 있을 줄이야.
남자에게 껴안긴 채로, 남자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만지고 있었으나 별 저항없이 오히려 달뜬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지 않은가.
"흠흠, 부상단주님도 역시 여자였구나"
"한창, 그럴 때이긴 하지-"
"못본 척 해주자"
송유린은 태수의 몸에 정신이 팔려, 직원들이 근처에서 보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태수는 송유린의 손을 잡고, 중앙상단의 대정원을 걸었다.
"돈은 많이 벌었어? 보아하니, 신축 건물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네, 다 공자님 덕분이죠, 헤헷"
"그건 아니지. 린아의 능력이 없었으면 중앙상단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발전하지 못했을 거야"
"으읏-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오-"
송유린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태수의 손이 허리를 두르자, 몸이 민감해지는 걸 느꼈다.
"아, 보여줄 게 있어. 이번에 리자도맨의 부산물들을 모아왔거든"
"정말요?"
"응, 중앙상단은 지금껏 직접 도축은 안하고 가죽만 받아왔지?"
"네, 맞아요"
"우리 사업 하나 더 해보자"
"사업이요?"
송유린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태수를 바라보았다.
"응, 괴물의 육류로 아주 재미있는 사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른 바, 야식 배달이랄까. 뭐, 내단 단약 사업도 충분히 해볼 만하고"
"아, 내단 사업은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그럴려면 파천회에서 단약사를 좀 채용해야 할 것 같아요"
"뭐,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일단 창고로 가자"
"네"
창고에 도착한 태수는 창고가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창고도 더 늘려야겠는 걸?"
"네? 이 정도면 충분.. 헉-"
검은 아공간 속에서 리자도맨의 시체들이 튀어나와 창고에 빠른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까지 하자. 부패할 가능성이 있으니- 그러니까 야식 배달이란 사업은 괴물의 맛있는 부위를 발라내 기름으로 튀긴 후 적당히 양념질을 해서 포장 후, 주문배달을 하는 거야. 돈은 미리 선금으로 받고. 중앙상단 대문에 음식 주문 예약 같은 걸 받아놔서 하면 되겠지"
태수는 대한민국의 치킨 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밤꽃무림에는 야식 주문, 배달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수준급으로 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히트를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안될까요. 아직 잘 이해가.."
"하하,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송유린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치킨 사업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태수가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네 방으로 들어갈까? 오늘 그것말고도 대화할 게 많거든"
"대, 대화요?"
송유린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음란마귀가 낀 걸까?
대화라는 태수의 말에, 가장 먼저 머릿속에 육체적 대화가 떠올랐다. 아주 정열적이고 뜨거운 그렇고 그런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