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54/90)



〈 54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광서는 사천 때와는 달리, 다른 지역의 고수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광서 본토를 포함하여 광서의 마을들은 이계의 괴물 침공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분열된 세력이 하나로 통합되어, 이해관계에 따른 이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명령체계가 하나로 통일되니, 자신들이 해야 할 것만 딱딱 해주면 능력적으로는 문제될 게 없기 때문에 이계 침공을 충분히 막아냈다.


광야가 태수를 중심으로 사설수기를 내기 전.

이계 침공을 수월하게 막아낸 청사파들의 활약에 무림 곳곳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무림맹 문파에서도 가장 힘이 강한 화산파와 전력을 비교해도 절대로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청사파의 힘은 세문파와 세력가 하나를 통합해낸 것만큼, 예상대로 매우 강하다
-청사파의 장문인은 무림 전체를 상대로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청사파는 무림맹의 화산파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이런 각종 구설수가 돌아다니고 있는 가운데, 태수는 당천휘를 데리고 아내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녀석! 그새 여자들이 더 늘은 것 아니냐. 듣기로 4명이라고 했는데! 흠흠, 그런데, 다들 고우시구나. 흠흠"
"노인네, 86살 먹고 그러고 싶소?"
"예끼! 언제나 마음은 청춘이다 이말이야"
"할아버지!"

당가려가 태수와 같이 오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와 당천휘에게 안겼다.


"오냐, 려아야. 할아버지가 왔다. 하하. 태수, 이 놈이 너에게 못된 짓이나, 잘못 같은 건 안하더냐?"


당천휘는 한걸음에 달려오는 당가려가 귀여운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평소, 당천휘를 아는 사람이 이런 그의 눈빛은 보게 된다면 '당천휘 맞나?' 라는 생각이  정도였다.

"가가는 늘 저에게 잘해주세요, 할아버지"
"가가라고? 허허-"

한치의 망설임없이 자신의 지아비를 두둔하는 당가려의 모습에 당천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보아하니, 손녀딸은 예전과 달리 표정이 굉장히 입체적으로 살아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평생 무공과 암기술만 알고 있다가, 이제는 여자로서 결혼의 행복과 재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녀석, 여자들이 주위에 많아서 남편 구실이나 제대로 할지 의문이었는데, 나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당천휘는  지내고 있는 듯한 당가려의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당 대협은 무슨 일로 광서에 오셨습니까? 정말, 려아만 보자고 온 것은 아니잖소"
"늙어서 집에 박혀있으면 뭘 할게 있다고 그러느냐.  정말로 려아를 보러 이곳에 온 것이다. 뭐, 이계 침공 건도 있고 해서 네 녀석도 잘 살아있나 싶어 온 것이지"

 마디로 늙어서 인생의 낙이 이런 것 말고는 없다는 뜻이었다.


"깨달음 이후에는 내공 단련은  하고 계시는  맞습니까?"
"어후, 늙어서 좌공만 죽어라 하니 삭신이 쑤셔서 못하겠다"
"깨달음을 얻고 기쁨에 눈물을 흘리신 건 기억나지도 않나 봅니다"
"무인이라고, 어디 인생의 재미가 무공 경지 올리는 데에만 있겠느냐? 이렇게 려아가 잘 사는지 보는 것도 늙은이의 참된 재미 중 하나지. 후후"

태수는 당천휘의 말이 나름 이해가 가긴 했다.


'곧, 늙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무공 경지에 매달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옆에 따라온 광야도 당천휘의 말이 공감가는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렇죠. 무인이라고 무공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인생 너무 힘들어요. 어디까지나 무공은 인생을 윤택하게 사는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죠"
"네 놈은 무인이 아니라, 방랑자 혹은 떠돌이 같은 부류고"
"에이, 그런 측으로는 당천휘 대협도 만만치 않은 거 스스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요 녀석, 무림의 존장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나!"


자꾸 얄궂게 시비를 거는 광야 때문에 약이 올랐는지, 당천휘가  속의 암기를 꺼내 출수했지만 광야는 너무나 쉽게 암기를 피해냈다.

일부러, 여유를 두어 피하는 태도는 이후로 더 속도있게 공격해와도 충분히 피할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듯했다.

"도망치는 건, 아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어후, 재수없는 놈. 태수야, 넌 저 녀석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겠느냐?"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  속도에 관해 훈련을 하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광야는 신법은 자신의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다.

전투 재능은 보잘것없어도, 신법만큼은 자신만의 철학과 비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쉽게 생각할  있는 문제가 아닌데요"

태수는 게임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서  말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광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공은 심법에 따라,  궤를 전혀 달리했다.

도검류에 특화된 심법으로, 현경의 경지에 오르면 당연히 보법과 신법도 어느 정도 같이 발전하겠지만 신법에 특화된 심법을 익힌 자를 신법으로 익힌다는  어불성설이었다.

게다가, 광야가 익히고 있는 심법은 일반적인 심법이라 보기에는 상당히 애매한 부분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심법은 하단전 - 중단전 - 상단전의 과정을 거치지만, 광야의 심법은 뇌공腦功류의 심법으로 특이하게도 편법으로 상단전부터 단련을 한다.


덕분에, 광야는 하단전과 중단전에서 오는 육체적 깨달음없이, 상단전의 깨달음으로 어느 정도 시공간을 초월해버리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신법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광야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태수는 여전히 별 생각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쳇, 내용에  무시하는 듯한 태도도 적어야겠어'

태수에 대한 묘사가 적혀있는 광야의 수첩에는 지금껏 광야가 봐왔던  어떤 인물보다도 내용이 넘쳐흐를 정도였다.


"뭐, 신법에 딱히 매달릴 생각은 없어서. 아무튼 오랜만에 오셨는데, 차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오시지요"
"그래, 출세한 손녀 사위한테 좀 얻어먹어보자"

당천휘는 뒷짐을 지고 껄껄 웃었다.

태수의 여인들은 현경의 고수면서 무섭게 생긴 당천휘 때문에 조금 당가려를 태수한테 밀어주는 듯한 태도로 뒤에 있었다.

"려아야, 너네 할아버지 너무 무섭다. 힝-"
"괜찮아요, 착하신 분이세요"
"너한테만 착하신 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는 뒤에 있을게"
"언니들 너무 그러지마요. 아니, 믿었던 소혜마저"

소혜마저 당천휘가 무섭다며 자신을 냅두고 뒤로 도망치는 듯한 모습에, 당가려는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결국, 당가려는 홀로 태수에게 안겨 할아버지와 함께 광서지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일행을 따라 광야도 지부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고, 태수는 광야를 제지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취재 온  알겠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들어올 것이오?"
"에이, 야박하게 그러지말고 협조 좀 해줍시다"
"난 그런 협조 허락한 적 없소"
"후훗, 저와 친해지면 세상의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텐데요. 궁금하지 않소? 내가 여행해오면서 경험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뭐 그렇다면"

애매하게 허락한 듯한 태수의 태도에, 광야는 마치 완전히 허락해준 것마냥 태수의 일행에 합류했다.

그런 광야, 특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분방한 태도에 태수는 백기를 들었다.

밤꽃무림 인물 중에서도 광야는 상당히 특이한 축에 속했다.


"네 놈은 도대체 무슨 여복이 있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대접받고 사는 것이냐"
"혹시, 손녀사위한테 질투하시는 겁니까?"
"에잉! 무슨 말을 못해. 됐다"


태수의 여인들이 줄지어 요리하고 있는 모습에, 당천휘는 '이런 세상이 어디있냐'라며 한탄했다.

"정말 부럽긴 하네요. 도대체, 이런 여인들을 어떻게 볶아내신 건지는 몰라도"

광야도 한 마디 거들었다.


세상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이  곳에 모여있다는 게 여전히 익숙치 않았다.

"그나저나, 나한테 말해줄 정보가 뭐요"
"흐음, 뭐가 궁금하오? 무림맹? 아니면 정천맹? 혹은 새외무림? 뭐든 태수 대협에게 흥미롭게 들릴 것이오"


광야의 표정은 묘했다.


뭘 말해주든 '너는 필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같은 표정이랄까.

"뭐 그런 정보보다도 사실, 당신의 무공에 관심이 있소. 익히고 있는 심법이 뭐요?"
"후훗, 역시 그런 쪽에 관심이 많군요. 태수 대협은 '3단전의 이해'라는 책을 들어보셨소? 혹시, 비슷한 제목이라도 괜찮소"
"들어봤던 것 같소"


태수는 밤꽃무림이 아니라, 창천무림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계 침공 부분을 제외하면 세계관이나 설정은 거의 비슷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책의 내용을 보면, 하단전으로 신체의 안정을 이루고 중단전으로 신체의 극의를 이루고 상단전으로 신체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나와있소. 한 마디로 순서를 지키라는 것이지. 하단전을 먼저 단련하고, 그 이후 중단전 그 이후로 상단전"
"나는 그 책이 처음에는 엉터리인 줄 알았다!"

옆에 잠자코 듣고 있던 당천휘가 거들었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 책의 내용을 엉터리로 알고 있을 거다"
"그렇습니다, 당 대협. 그 당시만 해도 무공 수준이 현경 초입을 넘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갑자기 등봉조극의 경지라는 말이 생기며, 중단전이라는 말이 생겼으니까요.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렇다면 상단전도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했었죠"
"처음으로 중단전에 진입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럼?"

태수는 애초에 이들처럼 무공 경지 같은 설정에 무지하지 않았다.


밤꽃무림 출시를 기다리며, 설정은 서울대 못지 않게 공부했고 이들은  모르겠지만 중단전 이후의 경지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처음으로 중단전에 진입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지요. 아마 역대 천마들은 대부분 등봉조극의 경지에 올랐을 겁니다. 다만, '등봉조극'이라는 말과 '중단전'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용어들은 '3단전의 이해'라는 책에서 나왔던 것이니까요"
"현 무림맹주, 위지운도 나와 같은 현경 초입인 걸로 알고 있다. 등봉조극의 경지는 그야말로 백 년에 한  나올까, 말까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
"맹주 어르신께서 그렇지요. '3단전의 이해'라는 책의 내용이 퍼진 지금, 맹주님도 계속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만은  풀리지 않고 있는 것 같네요"

태수는 광야의 대답을 들으며, 자신이 질문을 잘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3단전의 이해'라는 책은 언제 나왔소?"
"이제, 7~8년 되었을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오차 2~3년 정도로 생각하면 되오"
"그렇다면 그 책이 나온 이후, 등봉조극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누구요"
"아마, 현재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 주진악일 겁니다"
"호오"
"소문으로는 천마가 등봉조극의 경지에 오른 이후, 얼마 안되어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이 궁금해 계속 잠입취재를 시도했지만 워낙 경계가 철옹성이라 힘들더군요"

'미치광이가 되었다라'


태수는 사천명루에서 보았던 주홍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관이 있을  같기도'

"그래서 그 3단전의 이해라는 책과 당신의 무공과 무슨 관계란 말이오"
"나는 하단전과 중단전을 거치지 않고, 상단전부터 먼저 익혔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태수는 진심으로 놀랐다.

이것은 밤꽃무림의 설정과 어긋나는 부분이었다.

하단전 - 중단전 - 상단전은 창천무림과 밤꽃무림의 기본 설정과도 같은 말이었으니까.


"뇌공腦功류의 심법을 익히면 가능하오. 상단전을 먼저 익히게 되면, 재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시공간에 대한 인체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되오. 물론, 자주 사용하면 매우 심한 육체적 피로를 느끼게 되는 게 문제겠지만"
"혹시, 그 심법의 비전서를 내가 얻을 수 있겠소?"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외부인에게 비전서를 건네줄 수 있겠소?"

너무 날로 먹으려고 했나.

태수는 자신이 생각해도 방금 발언은 양아치들이  법한 발언이라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게다가, 그런 뇌공류의 심법은 아무런 일반인이나 익힐 수 있는 심법이 아니오. 하단전과 중단전의 단련이 불가능한 사람만 익히는 게 가능하오"
"이유가 뭐지? 자, 자세히 말해주시오!"

태수는 자신의 게임 시스템이 다시  번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부분이라 생각한 나머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런 갑작스런 태수의 광적인 모습에 광야가 뒤로 주춤했다.


"그야 간단하지 않소? 절맥이 있어야만 익힐 수 있는 심법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하단전과 중단전의 세맥이 모두 끊겨있었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었지. 상단전이란 걸 알기 전까지는"


보통의 인간은 심법을 익히면 자연스레 하단전을 운용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중력에 의해 인간이 바닥에 발이 붙어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내공의 추진력을 얻어, 비로소 중단전에 도달할 수 있듯 상단전으로 가는 과정은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하단전과 중단전의 세맥이 모두 끊겨있으면 중력이 사라지듯 내공은 몸 속에서 부유의 상태가 되버린다.

바로, 상단전으로 직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광야는 내공의 훈련없이 젊은 나이에 상단전을 운용하는 게 가능했다.

광야가 가진 속도의 비밀은 그 상단전의 운용에 있었다.

물론, 그 대신에 심법으로 신체를 단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전투에서는 힘을 거의 쓰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거 대박이다'


이어지는 광야의 말을 다 들은 태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후로 레벨을 올리며 어떤 심법을 추가해서 배울까 고민하고 있었다.

예정대로 도법과 관련된 심법을 배우기에는 뭔가 심심했다.


게임 시스템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심법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심법이 하나  있을줄이야'


"흐음"

문제는 그 심법의 주인이 바로 광야라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하오"
"아니, 별 생각없었소. 뭐 더 이야기 할 것이 있소?"
"일단, 밥이 나왔으니 밥이나 먹읍시다. 이야, 요리 다들 잘하시네. 태수 대협 참 부럽소이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무림의 선배인 당천휘가 먼저 입 대기도 전에, 음식을 먹는 저 예의없는 버릇.


저 녀석을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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