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7화 (4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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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흑, 흑흑."

감찰관은 한참 눈물을 흘렸다. 맞은 편에 앉은 신창은 남들의 오해를 살까 봐 괜히 걱정스러웠다.

"뭐가 그렇게 슬퍼?"

"그렇지만 선배, 너무 슬프잖아요. 설마 검마와 현기도사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감찰관은 현기도사와 그를 습격했던 당사자 사이의 수십 년 묵은 은원을 현기도사 본인에게 직접 전해 들었다.

비록 감찰하는 과정에서 다소 딱딱하게 대하기는 하였으나, 숙소로 돌아온 감찰관은 자료를 정리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죽기 전에 여동생을 죽인 남자와 자웅을 겨뤄보고 싶었다니. 흑흑."

"정작 여동생을 죽이기는커녕 아내로 맞이해서 잘 보살펴줬고, 천화에 걸린 검마 놈은 병을 고칠 생각도 안 하고 무당파에 역병을 퍼뜨렸지만 말이다."

검마(劍魔).

천산십마 중 한 명이자 대공자와 소공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야인삼마 중 일인인 그는 화경에서 현경 사이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대한 무공을 지닌 남자라도 전염병에는 이길 수 없었다. 천화에 걸린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앓아누워야만 했고, 조용히 천환단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소공녀가 신의에게서 구한 천환단을 추소표국에서 관리하기로 했으나, 추소표국의 소가주는 사랑에 눈이 멀어 팽가에 천환단을 넘겼죠. 그 바람에 검마는 상처를 치료할 방법이 없게 되었고, 죽어가기 직전에 누군가가 그에게 잘못된 정보를 집어넣었죠."

"마교의 대공자, 흑염룡."

"이제는 구룡이 아닌 남자. 그가 검마를 부추겼어요. 무당의 장문인이 여동생을 죽였다고."

악취미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현기도사는 검마의 여동생을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 그리고 검마의 여동생이 마인임을 숨기고 아내로 맞이하였고, 검마의 여동생은 짧은 시간 동안 현기도사와 사랑을 나누다 세상을 떠났다.

그런 진실을 왜곡하여 '현기도사가 여동생을 죽게 내버려 뒀다'며, 검마가 천환단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천마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마지막 목숨을 불태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마교 대공자였다.

"이러니까 마교 놈들은 정이 안 간다니까요."

"언제는 백도나 흑도나 전부 왈패들이라더니."

"상식이 통하는 쪽이랑 상식과 인륜을 무시하는 놈들이랑 같은 선상에서 놓으면 안 되죠, 선배."

감찰관은 눈시울을 붉히며 붓에 먹물을 다시 묻혔다.

"흑흑, 아무튼 갑자기 나타난 천환단의 행방은 풀렸어요. 마교가 검마를 위해 준비된 천환단이 결과적으로 팽가로 들어갔다. 이걸로 정리하도록 하죠."

"...정말 이걸로 보고를 끝내도 되는가."

"뭐 또 걸리는 게 있습니까, 선배?"

"신의의 제자."

움찔. 서책을 덮으려던 감찰관의 손이 멈칫거렸다.

"안휘에서 나타난 신의의 제자는 사칭으로 밝혀졌지만, 호북성 용봉지회에 나타난 신의의 제자는 진짜로 밝혀졌지. 그런데 둘의 인상착의가 비슷했어. 마치...."

"10달 넘는 동안 자란 것처럼?"

"그래."

둘은 청년에 대한 인상착의를 두고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만약 그 청년이 진짜였다면 말이다, 청년이 팔았다고 하는 천환단이 진짜였을까? 아니면 스승의 이름에 먹칠을 하면서 제 주머니 챙기려는 가짜였을까?"

"글쎄요. 잠시 기록을 조금 뒤져보도록 하죠. 당시에 분명 증언이...응?"

감찰관은 사건 기록부 안을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인들이나 주변 약재 상인, 그리고 기녀들까지 인근 산에서 약초를 채집해서 파는 자라고 했는데... 팽가의 아가씨는 이 청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었네요?"

"그럴 리가. 팽유월은 추소광이 가진 천환단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청년에게 물어봤다며?"

"그러...게요? 이건 마치...팽유월이 청년의 존재를 숨긴 것 같은...?"

감찰관과 신창은 혼란에 빠졌다.

* * *

"...그리하여 비천삼마는 아마도 높은 확률로 태극화를 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공녀의 입장에서 셋을 막을 방법은 없고, 이기자니 확신이 들지 않고, 만약 자신이 패배할 때를 대비하여 상처 입을 태극화에게 천환단을 줘라?"

"......."

소공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귀가 붉어진 것으로 보아 자기 자신도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악어의 눈물이로다."

"네?"

"위선이라는 말이지. 그쪽은 결국 자기 마음이 편하려고 태극화에게 천환단을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 태극화가 어떤 일을 당하든 난 최선을 다했다. 설령 비천삼마에게 겁탈을 당하더라도."

찌걱. 나는 막자로 사발을 짓눌렀다. 자꾸 움직이는 그릇을 막자로 꾹꾹 누르며 이를 갈았다.

"내 말이 틀렸는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위선이라도 좋습니다. 천환단, 있습니까?"

"있지만, 내가 돈으로 팔지 않는다면?"

"........"

소공녀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이미 그녀는 내가 자신을 음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금은 필요 없다. 하지만 상황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군. 태극화가 겁간을 당한다면 몸의 상처는 천환단으로 치료할 수 있어도, 마음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신의께서는 환자의 마음도 치료하신다고...."

"남궁유린."

단 한 마디에 소공녀는 눈을 감았다. 분노를 삭이는 행동이었으며, 어떤 반론에도 그녀가 내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녀가 이곳 침상에서 흘린 눈물이 증거다. 당사자를 치료한 의원이 어찌 모르겠는가? 물론 시비를 가리자면 남궁유린이 큰 잘못을 했지만, 소공녀 또한 도마의 겁간을 눈감지 않았던가? 태극화도 같은 일을 당한다고 한다면, 내가 천만금을 가진다고 한들 그걸로 태극화를 위로할 수 있는가?"

말은 송곳이 되어 소공녀의 전신을 찌른다. 일봉 이봉을 다투는, 여느 문파 장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천마신공의 보유자는 양심이라는 약점에 쿡쿡 바늘이 박히며 상처를 입었다.

"내 묻도록 하지, 소공녀. 그대는 그들이 겪은 일을 똑같이 겪을 자신이 있나? 내가 그대를 겁간한다면, 천환단의 대가로 그대의 몸을 요구한다면 거래에 응하겠냐는 말이야."

"......만약."

소공녀는 눈을 부릅떴다. 붉은 눈동자가 수치심과 분노로 떨리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본녀가 패배하여 태극화의 꽃잎이 져버린다면, 당신의 거래에 따르도록 하지요."

"진심인가?"

"천마의 딸은 한 입으로 두말 하지 않습니다."

올곧고 바른 눈동자다. 나는 한참 동안 소공녀를 빤히 바라봤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이 강렬한 의지로 활활 타오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왜 웃으십니까?"

"나는 말이야, 신의의 제자지만 딱히 스승님이라고 할 생각은 없어. 신의가 마교에 납치당한 걸 가지고 내가 마교랑 척을 질 이유는 없지. 혹시 나도 납치할까 봐 무서워서 도망은 다니지만."

"......네?"

이게 무슨 개소릴까 하는 눈빛이 되었다. 나는 아래 서랍에서 나무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교 소공녀에게 빚을 하나 달아두는 거로 하지. 천환단, 태극화에게 사용하도록 하겠다."

"...거래에 감사드립니다, 무붕 의원님."

소공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태극화에게 천환단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라지."

"꼭 그리하겠습니다, 의원님."

태극화 견희를 꺾고 자신이 용봉지회 천하제일봉 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겠다. 소공녀의 눈빛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가득했다.

"그런데 의원님, 왜 흔쾌히 제 거래를 받아들이셨습니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당신이 내게 베풀어준 동정과 자비를 생각해봤다네."

"예?"

과연 아무리 총명한 소공녀라도 내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두 팔을 벌리며 씩 웃은 다음, 손날을 세워 내 목을 쓱쓱 그었다.

"단칼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여인이 고개와 허리까지 숙이며 나를 의원으로 대하지 않았는가? 한 번 거래로는 부족하지."

"......하."

소공녀는 허탈한 미소로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하, 한 번으로 부족하다면.... 그, 다른 거래를...지금."

얼굴을 붉힌 소공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 달이 차올라서 그런데...혹시 좋은 약 없나요?"

뷰르르릇.

나는 마시던 차를 사발 그릇에 주르륵 흘려버렸다.

* * *

소공녀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의자를 뒤로 급히 당겼다.

"야야야, 내가 너를 견희라고 부르지만 진짜 개처럼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책상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사공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나를 향해 억울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들키는 줄 알았잖아요...!"

"들키면 뭐 어떠냐. 바로 내가 저년을 제압해서 침대에 눕히면 그만이지."

나는 막자를 들어 사발 그릇을 휘휘 저었다. 막자를 찧는 것과 똑같이, 나는 사공희의 머리를 당겼다 풀며 내 아랫도리에 달린 막자를 입사발로 달궜다.

"희야, 네 도움이 정말 컸다! 안 그랬으면 당장이라도 덮칠 뻔했거든."

"마교 소공녀를요?"

"그래. 왜? 소공녀는 여자 아니냐? 따지고 보면 너랑 비슷한 수준의 아름다운 꽃인데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건 그렇네요."

소공녀는 사공희조차 인정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사공희가 평소에는 음침한 것 같지만 주인의 앞에 서면 애교를 부리는 커다란 강아지 같다면, 소공녀는 특유의 적안 때문에 다소 날카로운 인상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고양이상이었다.

이곳저곳 하악질을 해대며 발정 난 고양이가 아니라, 한 구역의 지배자로 기품을 가지고 도도하게 걷는 밤고양이와도 같았다.

'심성도 착해서 더 꼴려.'

나이 차이는 최소 십수 년은 되겠지만, 자비로 내게 첫 경험을 선사해준 미래의 그녀가 떠올라 몇 번이고 은혜를 갚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상공, 천환단이 진짜로 있나요? 여자들 치료하기 귀찮다면서 환골탈태시키셨잖아요."

"있기야 하지. 가지러 갈 시간에 너랑 내공을 더 쌓기 바빠서 그렇지, 천환단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쌓여있다."

재료만 있다면 내가 만들 수도 있는 게 천환단이다. 다만 지금은 천환단을 사용할 수 없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견희야, 오늘부터 내가 항상 너의 옆에서 따라다닐 것이다. 네 비무 경기가 있는 날은 내가 현장에 나가서 무인들을 치료하도록 하마."

"...네?"

사공희는 감격한 얼굴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요? 비무장에 계시면 남자 무사들도 치료하셔야 할지 몰라요."

"그딴 새끼들한테 손 닿아서 더러워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씨발, 비천삼마 새끼들. 내가 가만히 있으면 감히 너를 범하려고 들 놈들이야."

마인이 괜히 마인이 아니다. 이미 도마는 남궁유린을 범한 전적이 있고, 도마나 환마도 딱히 다를 바가 없는 놈이다.

"차라리 남정네들 상처를 치료하는 게 더 낫지, 죽어도 네가 딴 놈이랑 하는 건 못 본다."

"상공...!"

사공희는 나를 와락 껴안으며 머리를 비볐다. 일부러 허리를 숙이며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통에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당분간 다친 여인들을 상대로 하던 손장난도 끝이다. 너는 내일 있을 비무에서 상대의 다리를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네 방식대로 승리를 쟁취하거라. 일검에 무기를 날려버려도 좋고, 장외도 좋다. 어차피 그년들이랑은 안 할 거니까."

"어머, 그러면...?"

"네 내공을 쌓아야지. 혹시나 마교 놈들이 개수작을 부려도, 내가 네게 도착할 때까지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도록."

"그러려면 무공을 익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허."

나는 사공희의 손을 잡고 침대로 향했다.

"견희야, 너는 이미 모든 무공을 머릿속으로 익히고 있다. 정확히는 구결을 외우고 있지. 걸어 다니는 무당파 비급이 있다면 바로 너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전부 깨우치지는 못했어요."

"그게 네 오성이 나빠서 그런 걸까? 아니다. 네 몸이, 네 기가 너를 보호하는 것이다. 너는 분명 상승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무리해서라도 그걸 익히려고 들 테니."

사공희의 상태는 나와 비슷했다.

"무공의 사용 방법도 알고, 상승 무공은 전부 머릿속으로 이해도 했지만, 사용은 할 수 없지. 왜 그런지 아느냐? 이게 부족한 거다. 이게."

나는 사공희를 반듯하게 눕히고 하단전에 손을 올렸다.

"내공만 쌓이면 너도 얼마든지 화경, 현경에 이를 수 있단다. 진정한 태극검후가 되는 것이지."

"어느 정도로요?"

"...지금의 네 배?"

태극검후가 내공이 4갑자 정도는 되었으니, 이제 1갑자를 간신히 넘은 사공희에게는 갈 길이 너무나도 먼 곳이기는 했다.

"그러면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네요."

"하지만 걱정 마라. 네 곁에 누가 있느냐?"

콰득. 나는 침상 옆에 놓아둔 천년하수오 절편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부터 내공수련을 시작하겠다."

"성교로 내공수련을 한다는 건 제 머릿속 비급에는 없는데요?"

사공희는 배시시 웃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나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서로의 설육으로 하수오절편을 섞었다.

"푸하. 견희야, 네 심법은?"

"태극신공이어요."

"지금 이렇게 음양합일, 태극을 이루고 있지 않으냐?"

"...수련이라면 어쩔 수 없네요."

야심한 밤.

하늘에는 달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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