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풀발을 넘어서 (3)
23화.
9.
최종택은 줄곧 생각했다.
‘풀발에는 무언가가 더 숨겨져 있다.’
그걸 처음 느낀 건 풀발 2단계가 발동되었을 때였다.
극심한 분노로 인한 진화.
감정의 변화가 그런 변화를 주었다면,다른 방식으로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변화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줄곧 생각하던 그는 던전에 들어오기 전 일주일간 테스트를 했다.
그리고 끝내 방법을 찾아냈다.
‘이것만은 사용하지 않으려했는데…’
다소 후유증이 있는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의 그로서는 놈을 상대하기 벅차니까.
놈과의 거리는 20M.
녀석의 속도라면 눈 깜짝할 새에 파고들 거리다.
‘시간을 벌어야해.’
각오를 마친 그가 소리쳤다.
“한지수… 10초만! 10초만 막아줘!”
“…뭐?”
“10초만 버티면 방법이 있어!”
“…알았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최종택을 믿는 것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멘티스가 최종택에게 팔에 달린 톱날을 휘두르려는 찰나.
화악!
뜨거운 화염이 놈을 휘감았다.
불쾌한지 눈매를 좁힌 멘티스가 뒤를 돌아보자 한지수가 소리쳤다.
“여기다 이 새끼야…!”
“키기기긱-”
그러자 흥분한 놈이 그녀에게로 발을 돌린다.
그런 놈을 막기 위해 그녀는 온힘을 다해 능력을 쏟아 부었다.
퍼엉! 화악-! 촤악!
키에에엑-!
온갖 화염이 난무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불바다가 되어 후끈해질 정도로.
하나 멘티스는 한지수의 공격에 밀려날 뿐 큰 피해는 없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조금씩 거리가 좁혀진다.
“으윽…”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마력은 빠르게 닳고 있었다.
“빠, 빨리…! 한계야…”
그 모습을 보던 최종택은 주머니에서 꺼낸 알약을 바라봤다.
그리곤 주문을 외듯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남자는 크고 단단해야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핑-
알약을 위로 튕긴 그가 말을 이었다.
“남자는… 빠르고 정확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이윽고 튀어 오른알약을 입으로 받아낸 그가 까드득 물자.
화악-!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꿈틀거렸다.
몸이 뜨겁다.
당장이라도 찢겨져나갈 듯 기운이 솟구친다.
삐이- 거리는 이명 사이로 경쾌한 알림이 작게 들려왔다.
띠링-
[비아그라를 복용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풀발 2단계가 발동됩니다.]
하나 그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터질 듯 끓어오르는 기운을 막느라 여념이 없던 탓이다.
“크윽…”
신체로 전해지려는 기운을 막는 최종택의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곤 그 기운을 온몸으로 순환시켰다.
한 바퀴, 두 바퀴…
쳇바퀴 돌 듯 맹렬한 회전을 이루자 최종택의 몸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때론 크기와 단단함보다 테크닉이 중요할때가 있지.”
이를 악문 그의 입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풀발 2단계… 테크닉 모드!
하얀 입김을 뿜어낸 그가 땅을 박찼다.
파밧!
시야가 달라졌다.
달리는 차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듯 순식간에 주변이 지나친다.
그 시야 속에서 멘티스를 저지하느라 지친 한지수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그녀를 베려는 멘티스의 모습도.
서걱-
막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의 검은 멘티스의 팔을 벤 후였다.
선이 그어지고 뒤늦게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키에에에에엑!!!!!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멘티스가 비명을 내질렀고, 최종택은 한지수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곤 지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어, 응.”
“고생했어.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쉬고 있어.”
파앗!
그러며 다시 사라지는 최종택을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봤다.
‘…무언가 달라졌어.’
더 남자답고 날카로워졌다.
좀 전까지 막는 것도 버거워하던 그는 지금 없었다.
파바박!
푹!
“키에에에엑! 키엑!”
오히려 압도하고 있다.
하나하나 예리하고 정확하다.
‘혼자 잡을 수 있다고? 저 괴물을?’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은 기대감 때문일까, 자상하게 말하던 그의 모습 때문일까.
알 수 없는 감정에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확실한 건 지금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녀는 리타이어 된 상태.
재희는 의식을 잃었고 종우는 그런 재희의 숨을 붙드는 것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그걸 아는지 최종택도 전투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휙-
‘빠르지만 느리게… 그리고 확실하게.’
리듬감 있는 스텝으로 정확하게 치명적인 곳을 노린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급소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였다.
‘보인다.’
샤프아이를 통해 그의 눈에는 멘티스의 약점이 샅샅이 보였으니까.
아까는 속도가 느려 노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목을 노리고 옆에서부터 휘둘러지는 팔의 궤적, 날개를 살짝 핀 추진력으로 움직이는 스텝.
그 모든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게 테크닉 모드…’
스스로도 감탄이 나온다.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거근’ 모드도 좋지만, 재빠른 놈에게는 지금 상태가 더 효과적이었다.
포식자와도 같던 멘티스가 어린아이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키에엑!
아이가 떼를 쓰듯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속도와 예리함이 장점인 놈이 보다 빠르고 예리한 상대를 만났으니 참담할 법도 하지.
마음 같아선 좀 더 농락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제한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빠르게 끝낸다.’
지금의 상태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끌어온 거니까.
놈의 장점이 돌아오면 그때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파앗!
그렇기에 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놈이 움직임을 쫒지 못하게 사방을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석-!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대각선에도 다시 반대 꼭짓점으로.
마치 별을 그리듯 점과 점 사이의 선을 그었다.
그럴 때마다 점수를 내듯 빨간 점이 베이며 피가 터져 나온다.
키에엑!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멘티스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분명 사라졌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몇 차례 베인 후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속도 차이.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였다.
푸드득-
놈이 날개를 피더니 이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지면에서 떨어지면 안전할 거란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패착이었다.
휘청-
“키이익?”
언제 베였는지 놈의 한쪽 날개가 찢겨져있던 것이다.
중심을 못 잡은 놈이공중에서 휘청거렸다.
위태로운 움직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찰나를놓칠 최종택이 아니었다.
“마지막은 절정에 이르게 해주지.”
무릎을 구부린 그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순간.
파앗-
한 줄기 섬광이 그어졌다.
공중에서 두 동강난 놈에게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탁.
촤악-
피의 분수를보며 착지한 최종택이 한 마디 했다.
“아… 쌌구나.”
그와 동시에 몸에서 흘러나오던 증기가 빠지며 익숙한 알림이 들려왔다.
[풀발이 해제되었습니다.]
[C등급 던전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10.
“씨발, 좆 됐다.”
파주 던전 앞에 도착한 유종현은 게이트를 보자마자 낙담했다.
게이트의 색이 변한 탓이었다.
“저거 보스 리젠 됐다. 진짜 어떡하냐.”
한 눈에 봐도 위험한 빨간색을 보며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의 앞날에도 적신호가 터진 것 같았다.
‘아직 걔라도 B등급은 절대 못 잡을 텐데… 그것도 보스면… 하아.’
답답한 심정에 그가 머리를 박박 긁었다.
피딱지가 터진 것 같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머리라도 긁지 않으면 초조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 그를 한 남자가 차갑게 바라보았다.
“얘들에게 무슨 일 생겼으면… 가만 안 둘 겁니다.”
“…알지요. 옷이라도 벗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민 선배.”
진심이 담긴 말에 김수민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그래도 여전히 차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지수… 무사해야할 텐데.’
한지수를 길드에 데려온 사람이 그였으니까.
평소선배, 선배거리며 귀찮게 하는 건 질색이었지만, 막상 그녀가 죽는다 생각하니 심란한 건 사실이었다.
하루일과가 다소 허전해질 것 같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보스가 리젠 된 지 얼마나 됐지?”
“…20분 정도 지났다고 합니다.”
“나쁘지 않군.”
20분이 넘게 버텼다는 건 제법 선방하고 있다는 소리였기에.
예상보다 대단한 성적이긴했다.
그가 알고 있는 파티의 전력이라면 B등급 보스에게서 10분도 채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그 수석이라는 친구 때문인가?’
그 친구의 역할이 크다고밖에 볼 수 없다.
흥미로운 정보였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가 변수이길 바라야겠군.’
부디 던전을 클리어하기를.
그런 그의 염원이 닿은 걸까.
“어? 방금…!”
게이트가 일렁이는 것을 본 유종현이 소리쳤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니 게이트가 요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설마?”
그리고 그 설마가 사실이었다.
일렁이던 게이트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지수 일행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아…! 신이시여.”
특히나 유종현은 감격에 겨웠는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김수민도 티를 내지 않을 뿐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덤덤한 척 다가간 그는 바로 상태부터 살폈다.
“…많이 다쳤군.”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에 한지수가 베시시 웃었다.
“아하하… 죽다 살아났어도 선배.”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보스가 리젠 됐어요. 클리어하려고 했는데… 너무 강하더라고요. 상대가 안 됐어요.”
김수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대로다.
그때 한지수가 다소 어두운 기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김승현 씨가 죽었어요.”
“……”
그제야 그가 없음을 자각한 김수민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만 들어도 얼마나 상황이 안 좋았는지 알 수 있었다.
툭.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했다.”
“오올, 웬 일이래요. 선배가 그런 말도 하고?”
“말하는 거 보니 멀쩡한 것 같군. 그러고 보니 다친 곳도 가장 적은 거 같은데.”
“에이 저도 지금 많이 아픈…”
발끈하던 한지수가 동료들의 상태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재희야 말할 것도 없고 김종우도 마력을 너무 많이 쓴 탓에 탈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다 가장 상태가 멀쩡한 최종택을 보더니 말했다.
“…뭐, 사실 얘 아니었으면 저희 다 죽었을 거예요. 사실상 얘가 혼자 처리했거든요.”
“흠.”
그제야 최종택을 본 김수민의 눈빛이 변했다.
‘상처하나 없다고?’
그가 변수일 거란 생각은 했는데 이리 멀쩡한 상태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웬만한 B등급 헌터가 들어가도 저럴 수는 없을 텐데.
저런 헌터가 이제 막 수료식을 끝냈다고?
‘…보고를 올려야겠군.’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개인적인 흥미가 일었지만, 이내 떨쳐냈다.
그리곤 순수하게 호의를 담아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길드원들이 무사할 수 있었군요. 안타까운 희생은 있었지만… 종택 씨가 없었다면 더 참담했을 겁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최종택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호의 가득한 눈으로 보던 김수민이 다시 한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길드 병원에서 좀 쉬어라. 길드 차원에서 배상할 거다. 종택 씨도혹시 다친 곳이 있다면 가시지요. 저희가 배상하겠습니다.”
“네. 안 그래도 좀 쉬어야할 것 같아요. 좀 어지럽……”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던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재빨리 받아내자 품에 푹 안긴다.
다소 어정쩡한 자세가 된 최종택이 머리를 긁적였다.
“…보스한테서 혼자 버틸 때 마력을 많이 썼나 봐요.”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놈이군요. 제가 병원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종택 씨는 어떻게…”
“아, 저는 괜찮습니다. 깨어나면 병문안이나 한 번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김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소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예.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별 생각 없이 대답한 최종택은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향했다.
김수민은 그런 그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