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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대련?"
내가 되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아키.
그녀의 표정은 아까 둘만 남게 되었을 때의 그 수줍음이 묻어있다.
"어렵지 않지. 근데…. 갑자기 대련은 왜?"
"그냥…. 내 수준을 알고 싶어서."
그저 수준을 알고 싶어서 대련하자고 하는데 저렇게 수줍어할 일인가?
음…. 잘 모르겠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려울 거 없지. 근데 방식은? 실전처럼?"
"그러고 싶긴 한데…. 그게 되나?"
될 리가 있나.
아키가 쓰는 절멸 같은 거에 맞으면 데미지 감소 같은 게 있어도 즉사할 것 같은데?
게다가 팔다리를 잘못 맞으면 뎅겅 하고 썰려버릴 거다.
그건 데미지 감소고 나발이고 의미가 없을 거 같은데….
상태 회귀로 돌리면 잘린 팔다리도 붙으려나? 이건 아직 테스트를 안 해봤는데?
아! 맞다. 파티가 있었지? 파티를 하면 데미지를 안 받을 텐데?
"될 거 같은데? 그럼…. 잠깐만 기다려봐. 금방 올게. 한 1분?"
아키를 두고 벙커로 순간이동 한다.
마침 거실에 있는 승희. 다행이네. 찾으러 갈 수고를 덜었어.
"승희야. 나 지금 뭐 테스트하려고 파티 해제할 거거든? 놀라지 말라고."
"그래요? 알겠어요."
나를 보며 싱긋 웃는 승희. 그렇게 바로 파티를 해제한 다음 다시 방주로 순간 이동했다.
"왔다. 그리고…. 파티 생성."
새로 파티를 만든 다음 아키를 초대한다.
그렇게 나는 나와 파티가 된 그녀 앞에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타."
"엑? 어딘데 다짜고짜 타라는 거야?"
"여기서 대련을 할 수는 없잖아? 밖에서 해야지."
"아…."
바로 게이트를 타는 아키. 그리고 우리는 인도로 넘어왔다.
"자…. 그럼 뭐 하나만 테스트해보자."
"여긴 어디야?"
"인도."
"갑자기 여긴 왜…."
"말했잖아. 테스트해본다고. 따라와."
비행을 써서 사람의 기척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이는 여자를 하나 바로 매혹하고 염력 촉수로 집어서 한가한 곳에 데려온다.
그런 인도 여자에게 파티를 초대한 다음 받으라고 명령했다. 바로 파티에 들어온 여자.
그걸 확인하자마자 수면을 걸고 아키에게 말한다.
"공간 절단이나 절멸로 이 여자 한번 베어봐."
아키는 내 말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 이게 할 짓이냐는 표정.
"뭐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뭐긴 뭐야? 대련하자며? 니가 공간 절단이나 절멸을 마음껏 써도 되는지 확인해보는 거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는데…. 그걸 이렇게 테스트 해야 하는 거야?"
아키는 진심으로 화가 난 모습이다.
나를 보며 말하는 표정과 목소리에는 살짝 경멸의 기운까지 담겨있는 느낌.
그리고 난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오히려 그런 나의 표정에 황당한 표정으로 바뀌는 그녀의 모습.
"이보세요. 아키씨. 지금 뭐하자는 거죠? 장난하시는 거예요?"
"엣…?"
"대련하자고 한 건 너잖아? 마음껏 대련하기 위해서 확인하려고 이러는 건데. 뭐가 문제라도 있어?"
"대체 사람 목숨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만약에 파티 효과로 피해가 무효화 되지 않으면 이 여자는 불구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소리까지 지르는 아키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내가 바짝 다가가자 아키는 주춤하며 뒷걸음치려다가 말았다.
키차이 때문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가 되었고 아키는 지지 않고 나를 노려본다.
"나는 내가 신경 쓰는 사람 외에는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모조리 죽일 수 있다고. 알아?"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
검성이란 이름과 절대 강자라는 명성까지 얻었지만…. 아직도 옛 시대의 물이 덜 빠진 모습.
그래.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감정이다.
쓸데없는 망설임과 연민은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을 뿐이야.
"싫으면 관둬.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 니가 스킬을 써서 이 여자를 베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방주의 방어에 대해서 일절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나는 너의 가치관을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그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오로지 니 책임이 되겠지."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니.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나는 그저 니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지 궁금할 뿐이야. 관심을 끊을지 말지를 보는 것뿐이고."
"그게 협박이잖아!"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당장 니가 이 여자에게 스킬을 쓰지 않으면 니 입을 틀어막고 묶은 다음 내가 좋을 대로 강간할 거다?' 어때? 협박은 이런 게 협박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내 말을 들은 아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더듬더듬 말한다.
"대체…. 왜 항상 그런 식인데? 왜 항상 모질게 말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거야…?"
"상처? 아직 아무에게도 상처는 안 줬는데?"
"나한테 줬잖아!"
"넌 정말….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
아키는 내 말에 그저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표정? 그런 거 같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될 수 없어. 서로가 목숨을 노리지 않고 웃으면서 각자 먹을 식량만 생산하는 평화…. 그런 건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만약 진짜 모른다면 나는 너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거랑 이거는 다르잖아! 이 여자는 아무런 위협이 안 된다고!"
"위협이 될 수 있는 놈에게 죽어서 그놈의 코인이 될 수도 있지. 그럼 결국 위협이 아닐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잖아!"
"일이 일어나고 난 다음은 늦어. 내가 굳이 너의 친구 이야기를 꺼내서 니 마음을 한 번 더 후벼 파야겠니?"
자신의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아키는 그대로 굳었다.
가면 놈에게 강간당하고 죽은 아키의 친구.
그 이야기는 아키의 아킬레스건이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고.
친구의 이야기까지 꺼낸 건 조금 심했나? 하고 속으로 살짝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함을 유지하며 아키를 바라본다.
그런 나를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는 아키.
"나는…. 나는 그쪽을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남을 상처입히는 걸 그렇게 쉽게 하지?"
"음…. 그 대답은 어렵지 않지. 내가 상처받기 싫으니까."
내 말에 아키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말고 대로야. 나는 내가 상처받기 싫어. 나는 별거 아닌 이유로 너를 잃고 상처 입고 싶지 않아. 그러니 미리미리 그럴 일을 없게 만드는 거야. 너를 잃고 상처받는 것보다 너에게 해코지 할 수 있는 사람 수천만 명을 죽이는 게 더 나으니까."
"난 그쪽과 아무런 관계가 아냐. 그렇게 뭐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지 마."
"그래? 그건 좀 아쉽네. 나는 너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얼굴이 빨개진 아키. 이런 상황에도 그런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야? 하여간 여자들이란.
아니지. 여자라고 다 이런 건 아니겠지. 아키 얘가 고지식하고 쑥맥이라 이러는 걸 거야.
나참. 내가 이런 거로 우위에 있게 되다니. 세상 참 말세네. 말세야.
"농담이나 우스갯소리가 아니야. 나는 아키 니가 맘에 들어. 그건 굳이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렸어야지. 니가 맘에 안 들었으면 이미 너는 센다이에서 나에게 강간당하고 죽었을 거니까."
"말 좀 곱게 하라고! 왜 자꾸 강간이니 죽인다느니! 그런 이야기만 하는 건데!"
"그게 내가 늘 하는 짓이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아키는 나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노려본다.
"너…. 자꾸 그렇게 사랑스럽게 바라보면 키스해버릴 거야."
"장난 좀 그만…. 이익!"
내가 진짜 키스할 듯이 얼굴을 들이대자 바로 뒤로 몸을 빼는 아키.
그리고 정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본다.
아. 진짜 놀리는 맛이 있는 여자야. 이런 반응을 보고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어?
"자.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빨리 정하자. 대련하고 싶다면 이 여자에게 스킬을 써. 공간 절단이나 절멸. 아무거나 상관없어. 쓰면 대련해주고 안 쓰면 끝이야. 복잡할 건 없어."
그렇게 말하고 웃으면서 아키를 바라봤다.
내 말을 듣고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는 모습.
이래서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게 중요한가 봐.
그리고 저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둔하디둔한 나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키 얘는 나에게 마음이 있어. 확실해.
마음이 없는 남자에게 이렇게 휘둘릴 수는 없지.
아무리 성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질질 끌려다닐 리는 없으니까.
"진짜…. 진짜 못됐어."
그렇게 중얼거린 아키는 빛의 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숨을 한번 푹 쉬더니 짧게 중얼거리며 스킬을 쓴다.
"절멸."
가볍게 휘두른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위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누워있는 인도 여자에게 휘둘러진 빛의 검은 땅에 무시무시한 흉터를 남겨놓았다.
사람 하나는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푹 파인 땅. 그렇지만 여자는…. 멀쩡했다.
여자의 몸과 여자가 누운 땅 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한 모습.
스킬은 파티원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검으로 쓰는 물리적 공격도 완전히 상쇄시키나 보네?
"잘했어. 아키. 그러게 진작하지 그랬어."
내가 말했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나는 그런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이번엔 내 테스트를 한다.
"철근 생성."
분명 인도 여자의 몸을 꿰뚫을 수 있게끔 철근을 생성했지만, 철근은 생성되지 않았다.
아니, 생성은 됐다. 하지만 길이가 짧다.
여자의 몸을 슬쩍 치워보니 몸에 닿을 정도까지만 철근이 생성돼있는 게 보인다.
음…. 파티원은 어떤 방법으로도 피해를 못 주는 건가? 이것 참 편리하네.
잘하면 이걸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좋아. 테스트는 됐어."
그렇게 말하고 수납을 열어 인도 여자를 그대로 삼켰다.
순식간에 사라진 여자를 보며 눈이 커지는 아키.
"또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아예 입 열지 마. 나에게 먹히지도 않을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너의 인식을 바꾸는 게 더 속 편할 테니까."
뭐라고 말하려 했던 거 같지만 내가 선수를 쳐서 그런지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
그래.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그리고 나에게 하나씩 하나씩 길들여지는 거지.
"자. 테스트는 됐으니 이제 니가 원하는 대련을 해볼까? 근데 말야."
아직도 나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는 못한 거 같지만 대련으로 이야기가 넘어갔기에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살짝 어린다.
"대련에서 이기면 뭐가 있나?"
"뭐?"
"아니…. 그냥 대련도 좋지만 뭔가 동기가 있어야 힘이 나지 않겠어? 그래야 전력을 다하지. 안 그러면 설렁설렁하게 되잖아."
"대련은 그런 게 아니야. 뭘 내기로 걸고 그러는 게 아니라고! 실전의 감각을 익히고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는…."
"나도 그런 건 알아. 대련의 뜻 정도는 안다고. 그래도 뭐가 있어야지. 음…. 어때? 소원 하나 들어주기 같은 건?"
내 말에 아키는 인상을 살짝 쓴다. 영 맘에 안 든다는 표정.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 안쪽에서 묘한 열기가 느껴진다. 마치….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느낌?
"어때? 콜?"
"하아…. 너무 무모하거나 말이 안 되는 소원 같은 건 제외하고."
"뭐가 무모하고 말이 안 되는 건데?"
"그런 건 상식선에서 판단해야지!"
"음…. 내 상식은 제법 프리한 편인데. 괜찮나?"
"적당히 선만 지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래. 뭐…. 그러자. 좀 자세하게 정하고 가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아. 그런 건 되나? 나한테 키스해달라고 하면 해주나?"
"거절!"
"뭐야? 키스도 안 돼?"
"무모하고 말이 안 되는 소원은 제외한다고 했잖아! 선은 지키라니까?"
"내 선은 야한 짓인데."
"진짜!"
"알았어. 알았어. 아. 정말 까다롭네. 키스도 안 되면 대체 뭘 소원으로 요구해야 하는 거야?"
"그런 건 이기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 같은데?"
묘하게 자신만만한 모습의 아키. 웃기네? 얘는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좋아. 그럼…. 일단 해보자고. 그럼 룰은 이렇게 하자. 어차피 서로의 공격은 피해를 주지 못하니까 확실하게 맞은 상황이 되면 깔끔하게 인정하는 거로. 예를 들어서 니 절멸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간 게 확실해지면 그건 내 패배. 대신 너도 내 철근 같은 게 니 몸에 닿으면 그걸로 패배라고 해. 그대로 몸을 꿰뚫린 거랑 마찬가지니까."
"알았어. 그렇게 해."
"그럼 바로 시작?"
"맘대로."
나는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들고 아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돌멩이가 땅에 떨어지면 시작이야. 됐지?"
"알았어."
빛의 검을 들고 나를 노려보는 아키.
돌멩이를 던지자 나와 아키의 시선은 동시에 돌멩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땅에 닿는 순간, 나는 바로 그녀에게 피할 수 없는 수면을 썼다.
짧은 '자라' 한마디에 블링크고 나발이고 그대로 잠들어 버린 아키.
아. 이거 너무 웃기네. 얘를 깨우면 반응이 어떨지 진짜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