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86화 (68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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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아니야! 이건 무효야. 이건 대련이 아니라고!"

잠에서 깬 아키는 나를 보고 강력하게 항의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기대한 대련이 아니었는지 승패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여자.

"무슨 소리야? 넌 일단 1패 한 거야. 실전이었으면 이미 죽은 거라고. 대련이니까 살아있는 거지. 어쨌든 소원 한 개 잘 받아가겠습니다."

"아니라니까! 이건 반칙이야! 뭔가 이상하다고!"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설마 나도 마체테를 꺼내서 너랑 함께 챙챙챙하면서 기가 막힌 칼싸움을 하고…. 뭐 그런 걸 원했던 거야?"

"그건 아냐! 아닌데…. 아무튼 이건 아냐! 아니라고!"

그저 떼를 쓰며 우기고 있는 아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놀려주고 싶지만, 적당히 봐준다.

"좋아. 그럼 한번은 봐주겠어. 설마 또 당한 다음에 그때도 우기는 건 아니겠지?"

"안 그래!"

"진짜로?"

"진짜로!"

"좋아. 그럼 다시 해줄게. 방심하지 말라고."

내가 돌멩이를 들며 말하자 아키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 손에 든 돌멩이로 옮겨가는 시선.

"간다? 진짜 준비 된 거지?"

"됐어."

"그럼 던진다."

돌멩이가 다시 공중으로 치솟았고 아키의 시선 역시 함께 따라간다.

그리고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아키는 이번엔 칼 같은 타이밍에 하늘 위로 블링크 했다.

하지만 또 수면.

바로 공중에서 잠들어버린 아키가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블링크로 떨어지는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 들었다.

그렇게 지상으로 내려온 뒤 무효화. 잠에서 깬 아키가 내 품에서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다.

"허억!"

"잘 잤어!?"

나를 어이 없다는 듯 바라보는 그녀.

"말도 안 돼!"

"뭐가? 2패 한 게?"

"패배가 문제가 아니라고! 난 공중에 있었어! 반사도 켰고! 어떻게 수면이 걸린 거야!?"

"음…. 그러게? 어제 잠을 잘 못 잤어?"

"헛소리하지 말고!"

"아니면 나에게 안기고 싶어서 일부러 잠든 척 한 거 아니냐?"

"이이이…. 진짜!"

후다닥 내 품에서 벗어나는 아키.

그러더니 뭔가 말은 하고 싶지만 할 말이 나오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본다.

그런 그녀를 웃으면서 보고 있자 뭔가 약오른다는 듯 나를 노려보더니 결국 빼액 외치는 아키.

"수면 쓰지 마! 뭔가 이상해! 반칙이라고! 어떻게 반사를 무시하고 수면을 거는 거야!"

"얼래? 그게 무슨 소리래. 내 밥줄 같은 스킬인데 그걸 쓰지 말라고? 양심 없는 거 아냐? 그럼 너도 빛의 검 쓰지 말라고 하면 안 쓸 거냐?"

할 말이 없어진 아키는 그저 나를 째려보고만 있다.

아. 귀여워 죽겠네. 저렇게 생동감 넘치는 표정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근데 솔직히 피할 수 없는 수면은 사기긴 하지.

상태 회복을 패시브 화 시켜놓지 않는 이상은 이걸 피할 사람은 없으니까.

"좋아. 수면은 안 쓸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표정이 조금 환해지는 여자.

"단, 조건이 있어."

바로 다시 불안해지는 표정. 실시간으로 변하는 표정 변화가 흥미진진할 정도다.

"뭐…. 뭔데?"

"솔직히 말하면 수면은 내 주력 스킬이야. 이걸 안 쓴다고 하면 내 팔을 묶어 놓고 대련을 하는 거랑 마찬가지라고. 엄청난 페널티인 셈이지. 그러니 나도 메리트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이기면 조건 없이 소원 들어주기."

"뭐?"

"그 정도는 해야 나도 의욕이 생기지."

내 말에 잠시 나를 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

그러더니 나를 보고 말한다.

"당신 스킬을 모두 알려줘. 생각해보니 나는 스킬을 모두 말해 줬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말한 게 없어."

"음…. 내 스킬은 마흔다섯 개인데? 그걸 다 말해줘?"

"뭐? 마흔다섯 개!?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키.

뭐…. 저런 반응이 정상이지.

자신도 어지간히 강하다고 생각하는 여잔데 자기보다 스킬이 배는 많다고 하면…. 어이없는 게 당연할 거다.

"그리고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대련이 끝나면 나는 니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어."

"기억을 지운다고!?"

"니가 내 스킬을 모두 알고 있으면 문제가 생기니까. 나는 내 정보가 새나가는 걸 원치 않거든."

"내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인 줄 알아!?"

"물론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다만 누군가가 니 기억을 몰래 읽어버리는 걸 경계하는 거지."

"아…."

내 말을 들은 아키는 상당히 고민하는 표정이 됐다.

음…. 근데 기억 복구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알려줬다가 지우는 것도 웃기네.

"좋아.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 거 같으니 이렇게 하자. 스킬을 말하진 않을게. 대신 엄청나게 제한해서 쓰겠어. 니가 원하는 대련의 수준이 되도록. 대신 조건 없는 소원 들어주기가 전제 되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역시 고민하는 아키. 제법 심각한 표정.

조건 없는 소원 들어주기라는 것은 상당히 무서운 말이다.

막말로 내가 벗으라면 벗어야 하는 거잖아?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대련을 하고 싶은가 보다. 이걸 고민하는 거 보면.

왜 아키는 이렇게 대련에 집착하는 걸까? 정말 이해를 못 하겠네.

"좋아."

결국, 승낙한 아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씨익 웃으며 돌멩이를 쥐었다.

"간다?"

또 던져진 돌멩이. 그리고 땅에 닿자마자 나와 아키는 공중으로 블링크 했다.

바로 몇 번 블링크를 더 하며 모든 버프를 건 다음 천리안과 투시를 쓰고 공중에 떠 있는 그녀를 바라본다.

정상적인 대련이 시작되자 바로 의욕이 넘쳐흐르는 그녀.

일단 추적부터 건다. 그녀 역시 계속 블링크를 했지만 어차피 나는 보이기만 하면 바로 추적을 걸 수 있으니 별 상관없어.

순간 내 시야에서 사라진 그녀. 하지만 내 대응은 뭐 별거 없다.

절대 마주치지 않는 것.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몸에 안 맞으면 끝이잖아? 서로 검과 검이 충돌하며 멋진 합을 이루는 전투는 나에겐 필요 없다.

아니…. 어차피 절멸 앞에서는 그런 짓도 불가능하지만.

블링크를 쓰다가 축소를 쓴다.

갑자기 확 줄어든 체적에 순간 나를 놓친 아키.

그렇게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문제 내가 공중에서 공격할 수 있는 스킬이 몇 없다는 거다.

고질적인 공격 스킬 부재.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몇 개 생겼으니 테스트 할 겸 써본다.

번개 구체를 크기를 왕창 키워서 날리고 그 사이사이에 크기를 왕창 줄인 번개 구체를 잔뜩 뿌린다.

어차피 보호막 한방에 다 막히는 번개 구체지만 그래서는 아키 역시 공격을 못 하니까.

검을 휘두르며 공격을 하려면 자신을 보호막으로 완전히 막을 수는 없잖아?

파티에 걸려있어서 데미지는 직접 받지 않겠지만 아키는 이 번개 구체를 무시할 수는 없을거다.

고지식한 그녀는 번개 구체가 자신의 몸에 닿은 걸 느끼면 자신이 졌다고 인정하겠지.

번개 구체를 피하면서 나를 찾는 아키. 하지만 찾기는 쉽지 않을 거다.

애초에 이건 아키가 나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솔직히…. 이건 내가 놀아주는 수준이야.

하지만 아키는 동체 시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탐지로 나의 작은 기척을 보고 있는 건인지는 몰라도 제법 나를 잘 발견한다.

간간히 내 쪽으로 날아오는 절멸. 하지만 나노화로 작아진 내가 저걸 맞는 건 태업이나 마찬가지다.

날아오는 걸 보고 비행으로 피해도 피할 수 있는 수준.

아키도 그걸 아는지 절멸과 공간 절단을 섞어서 선 공격이 아닌 면 공격을 한다.

그렇다 해도 역시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비행 속도만 해도 어마어마하니까. 못 피할 수가 없어.

아키가 강한 축에 속하긴 하나 그건 동급이나 동급 이하에서 압도적인 무쌍이 가능할 뿐이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아마 그녀가 나에게 대련을 요청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까는 몰랐지만 이제야 알 거 같네. 그게 그녀가 대련에 집착하는 이유야.

하긴…. 내가 근접 공격과 물리 공격을 무시하는 이유도 저 이유가 크지.

한계가 명확하잖아? 솔직히 블링크만으로도 어느 정도 회피할 수 있으니까.

계속해서 공격하지만 역시 별 타격이 없는 걸 아는지 아키는 땅으로 내려갔다.

뭐지?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쓸 셈인가? 이런…. 봉인을 써야 하나? 그럼 아키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은 0으로 수렴할 텐데?

일단 봉인을 쓴다. 그리고 스킬 사용 불가 지대에서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건 비밀로 하고 나도 땅으로 내려갔다.

지난번에 보여주려고 했는데 아키는 그때 제대로 못 봤잖아?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됐으니 계속 숨겨야지.

바닥에 내려간 아키가 바로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썼고 나는 타이밍을 맞춰서 축소를 풀어줬다.

뭐 이런 걸 원한 거 같으니까 어울려줘야지.

신검합일 패시브로 빛의 검을 든 아키. 바로 내 쪽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나는 지난번처럼 폴터가이스트를 이용해 그녀와 신나게 챙챙거리며 싸운다.

확실히 아키가 원하는 대련은 이런 게 맞았나 봐.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지고 검을 휘두르는 손놀림이 매우 가벼워 보이잖아?

"어때? 만족했어?"

"싸우면서 입 열지 마!"

조금만 더 하면 내 염력을 뚫고 나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키는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른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대련은 여기까지야. 일렉트릭 에리어."

내가 스킬을 쓰자 내 주변에 파지직 하고 커다란 번개의 고리가 생긴다.

그리고 그 안에 서서 멍한 표정이 된 아키. 빛의 검을 들고 있던 팔을 스르륵 내린다.

"뭐야…."

"자. 이제 대련은 끝났으니 피드백의 시간을 가져볼까?"

내가 그렇게 말하고 게이트를 열자 아키는 한숨을 푹 쉬다가 깜짝 놀라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게이트를 바라본다.

"어떻게!?"

"일단 타."

못 믿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게이트를 타는 아키.

그녀를 따라 들어가자 홋카이도의 풍경이 나타났다.

"방금…. 뭐였어? 그리고 왜 여기로 온 거야?"

"일단 들어가자."

게이트를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하루카와 아키가 잠깐 같이 살았던 집.

집을 비운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아직 집 상태는 양호했다.

나와 아키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고 나는 수납에서 물티슈를 꺼내 식탁을 한번 닦았다.

그리고 이온 음료 두 개를 꺼내서 각자의 앞에 하나씩 놨다. 역시 운동 후에는 이온 음료를 마셔야지.

"대체…. 나를 얼마나 봐준 거야?"

"너를 놀리거나 기만할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니까 봐줘. 어차피 너도 알고 있었잖아? 승산이 없을 거라는 걸?"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

아마 그녀는 자신의 한계에 봉착한 걸 느꼈겠지.

절멸이 근접 스킬중에 가장 강력하고 상위 티어인 스킬은 맞지만 역시 한계가 있는 건 분명하니까.

그래서 저렇게 조급했나 보다.

방어 조장이라고 뽑히긴 했는데…. 자신이 없었던 거야. 자신의 실력에 의심을 가지게 된 거지.

"그럼…. 피드백을 해볼까? 일단, 나는 너를 죽였다면 한 100번 정도는 죽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

"하아. 무력하구나. 나는."

"근데 그건 니가 상대가 안 좋아서 그런 거긴 해. 물론 실전에서는 이런 핑계는 못 되겠지만. 죽어서 천국에서 핑계 댈 건 아니잖아?"

"나도 알아. 그 정도는."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마지막에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썼다는 거야. 너는 니가 신검합일을 가지고 있어서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악수 중의 악수였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니가 스스로 발로 찬 거라고. 니가 나에게 당한 스킬. 뭔지 알아?"

"몰라."

"본적 없나? 일렉트릭 에리어인데."

"모른다고."

"삐졌니?"

"안 삐졌어!"

"알았어. 어떻게 하면 삐진 걸 풀어주나."

"안 삐졌다니까!?"

"목소리 톤이 다른데 안 삐지긴."

게다가 입이 살짝 나온 것도 보인다. 아. 키스 갈겨버리고 싶네.

"음…. 대련을 정산해보면 너는 내 소원을 100개 정도만 들어주면 되겠다. 조건 없는 소원 100개."

"무슨 소리야! 내가 당한 건 마지막 한 번이라고!"

"그래? 그럼 그건 당한 걸 인정한다는 뜻이지? 좋아. 그럼 한 개."

내 말에 당했다는 표정을 짓는 아키.

크크크. 이 여자 생각보다 허당이라니까. 이런 얄팍한 수에 당하면 어쩌자는 거야?

"음…. 소원은 뭘 말해볼까."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대련이었어."

"뭐야? 인제 와서 대련 자체를 부정하는 거야?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게 비겁하고 무책임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내 말에 아키가 바로 정색하는 게 보인다.

오. 비겁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구나?

하긴. 얘는 무예를 배운 사람이지? 그럼 비겁하다는 소리는 죽기보다 듣기 싫어하는 게 이해가 가네.

"그치? 비겁하고 겁쟁이 같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인 건 아니지?"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난 한번 한 약속은 지켜!"

"좋아 좋아. 그럼 조건 없는 소원은 하나 있는 거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중얼거리면서 대답한다.

"으…. 그래. 그렇다고 해. 하아."

크크크. 진짜 재밌는 여자야. 얘는 스스로 자폭하는 걸 지켜보기만 해도 질리지 않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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