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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장면
네 여자가 몸에서 나는 구운 소고기 냄새를 맡으며 안락한 침대로 들어가 잠든 시간.
나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누워있어도 잠을 잘 수 없는 나는 이럴 땐 편하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라는 건 나에게 실수가 아닌 축복이다.
어지간해선 겪기 힘든 축복. 그렇기에 이렇게 일어날 수 있겠지.
바로 적당히 옷을 걸치고 수원으로 순간 이동한다. 대호 그룹의 벙커.
비행장 지하에 있는 화려한 방공호.
인공 정원의 불빛을 바라보며 탐지를 쓴다. 각자 방에 있는 성연과 신영. 그리고 주변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기척.
좋아. 문제없음. 이건 됐고.
몸에 반사 하나만 두른 채 성연의 방으로 먼저 간다.
소리를 죽이거나 은밀할 필요는 없다. 그저 뚜벅뚜벅 걸어간다. 둘 중에 누가 일어나도 상관없다.
'잠자리에 누웠다'라는 기억의 편집 점이 잡혀있는 이상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수면과 기억 삭제. 완벽한 상호 호응.
성연의 방문을 연다. 역시 조용히 문고리를 돌리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 그렇게 들어간 성연의 방.
아니 원래는 성연과 그의 남편이 썼던 방.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자는 여자. 가벼운 잠옷을 입고 있지만, 이불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가 보인다.
일단 무효화, 그리고 수면. 이 여자는 됐고.
방을 나와 이번엔 신영의 방으로 간다.
투시로 보이는 신영의 모습, 침대 안에서 옆으로 누워 곤히 자는 여자. 각도가 그래서 그런지 가슴골이 훤히 보인다.
좋은 각도야.
그런 생각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간다. 문 여는 소리에 움찔하는 거 같았지만 상관없다. 무효화에 수면.
일단 둘 다 재웠으니 이제 다음 차례.
아까 심각했던 표정. 그 이유를 살펴본다. 무슨 책을 읽었길래 그러지?
그렇게 기억을 읽는다. 책을 읽던 모습. 책의 내용. 얼래? 이것 봐라? 기억을 더 읽는다.
낮에 성연과 대화한 내용들.
하? 이런 대화를 했었어?
신영을 두고 다시 성연에게 간다. 기억 읽기.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모습, 그 이전 기억. 역시 신영과의 대화. 그 이전까지.
둘의 기억을 읽고 나니 확실히 알았다. 내 사기가 걸렸다는 것.
저 둘은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다. 거의 확정적으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일을 거지같이 처리했으니까.
어설펐어. 기억이 전부가 아니다. 저 여자들의 기억은 전부 지웠지만, 이곳에서 살았던 두 달의 흔적. 그게 있었다.
성연의 경우에는 스마트폰에 남아있던 운동기록이었다.
지난 두 달간 운동했던 기록들. 굳이 자신이 기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저장되는 수치들.
두 달간 죽은 듯 있었다고 했는데 운동한 기록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지. 게다가 아무리 정체 모를 스킬이라고 하지만 두 달이나 먹지 않고 잠만 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거기에 대해서도 둘은 서로 이상하다는 대화를 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나 손톱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분명 누군가 관리한 손길. 그것도 본인들의 솜씨인 게 분명한데 자고 있었다고 하니 의심할 수밖에.
신영의 경우는 본인이 쓴 소설이었다.
앉아서 뭔가를 쓰는 거 같더니…. 소설을 쓰고 있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자기가 쓴 기억은 없는데 떡하니 소설이 쓰여 있었다면.
소름 끼쳤을 거 같은데. 여러가지 의미로.
어쨌든 내 실수가 맞다. 기억 삭제를 할 때 꼼꼼히 봤으면 이런 걸 캐치 했었을 텐데.
숙련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못 보고 쓱쓱 지운 게 문제였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럼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할 것 같다. 잘됐네. 어차피 스킬 숙련도 해야 하니까.
기억 조작도 빨리 마스터 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하아. 어떻게 손을 대야 하나.
막막하네. 두 달 치의 기억을 인제 와서 다 만들어내는 건 어렵고.
사실 두 달의 기억을 모두 만들 필요는 없을 거다. 사람은 자잘한 기억들은 자체적으로 망각하니까.
어느 정도 굵직한 것들만 만들면 되겠지.
지난 두 달간 이 안에 숨어있던 거로 하자. 일단 큰 줄기는 그렇게 잡아야겠다.
SG에서 습격했고, 그 때문에 다 죽었고, 성연과 신영은 전리품으로 잡혀가려는 걸 내가 구했다.
간단하네. 심플하고 좋아. 아. SG로 하지 말까?
아. 그래. SG는 안 되겠다. 걔들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괜히 그쪽에 모든 원한을 돌리면 귀찮아져.
레테로 하자. 실제로 그놈들은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야쿠자도 적당히 집어넣고. 아. 좋네. 게다가 내가 구한다는 것도 말이 되네.
레테랑 야쿠자 놈들을 다 치워버린 것도 맞잖아?
좋아. 큰 줄기는 만들어졌고…. 이제 시공할 차례네.
일단 성연에게 가서 기억을 지운다. 기억을 지우는 건 금방이다. 삭제는 이게 편해.
이번엔 꼼꼼하게 지켜볼 필요도 없으니 실수할 것도 없지.
좋아. 삭제 완료. 그리고 이제 기억 조작으로 새로운 기억을 넣는 건데….
좀 지난 기억들은 어느 정도로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네.
솔직히 나도 두 달 전의 기억을 해보라면 뭘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 못 하잖아?
게다가 이 여자들은 어차피 이 안에만 숨어 있는 거로 하면 그리 선명한 기억은 필요 없을 거다.
어차피 날마다 비슷한 기억이니까. 아. 근데 여기 숨어있는 게 말이 안 되네.
한번 습격받은 곳에서 계속 숨어있다? 그건 말이 안 되지. 여기가 무슨 난공불락의 요새도 아니고.
다른 장소를 섭외해야겠네. 어디가 좋지? 좋은 곳이 없네. 마땅한 곳…. 하아.
아. 있네. 벙커 하나 더 있잖아. 내 벙커 지은 회사에서 만든 그 벙커. 공원 지하에 있는 곳.
흑해방에서 배달됐던 코인 여자들 발견했던 거기. 아. 거기 상태가 괜찮았나?
아니다. 좀 그렇네. 좀 좁은 곳이 좋은데. 거긴 너무 커.
성연과 신영의 기억을 뒤져본다. 좋은 장소가 있을 거야. 이들도 익숙한 곳이면 더 좋다.
근데…. 마땅찮네. 하아. 그냥 여길 써야 하나? 그래. 그냥 여기 쓰는 게 낫겠다.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것도 일이다. 게다가 두 달간 사용했던 흔적을 만드는 게 더 어렵지.
차라리 내가 레테를 빨리 후드려까서 여기로 향하는 위협이 거의 줄었다고 하는 게 더 낫겠네.
기억 조작을 쓴다.
숙련도 할 수 있으니 번거롭다는 생각은 덜하다. 뭐가 됐든 숙련이 되니까.
어차피 조작을 완료할 때까지 이 여자들을 풀어줄 생각은 없다. 불편해도 당분간 자유는 없어.
그렇게 포션 멀미가 올 때까지 기억 조작을 했다.
아. 죽겠네. 보통 숙련 때랑은 멀미 수준이 다르네.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스킬이라 더 힘들어.
아직 기억 조작을 마저 하려면 한참 남았으니 이제 뒷정리를 해야지.
멀티 벙커의 게이트를 열었다. 다른 곳으로 안 덮어씌워서 다행이네.
잠든 성연의 옷을 벗긴다. 알몸이 된 성연. 그런 여자를 들어서 내 멀티 벙커의 자물쇠 방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신영 역시 옷을 벗긴 채 안아 들고 게이트를 넘었다.
내일 다시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싸우지 말고 있으렴. 조금 불편해도 며칠만 참아봐. 곧 편해질 테니.
그렇게 일단락을 짓고 집으로 돌아왔다.
후. 멀미. 진짜 오랜만에 힘드네.
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바로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바로 나에게 수면을 썼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 번에 수면 안 걸리는 게 대단하네. 지독한 불면증 새끼. 어휴.
점심쯤 눈을 뜨고 간단하게 밥을 먹은 뒤 바로 비행을 나선다.
이따 가서 기억 조작을 해야 하니 비행은 먼저 해놔야 해.
다섯 시간의 비행. 오늘도 거의 천 킬로를 날았으니 이제 남은 건 세 번.
타이밍이 나쁘지 않다. 그 안에 성연과 신영의 조작을 마무리 짓고 바로 미국으로 던져놓으면 딱 괜찮겠네.
그럼…. 이제 다시 기억 조작을 하러 가봐야지.
멀티 벙커로 순간 이동했다. 뭔가를 말하고 있는 성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에 나 있는 창문으로 보니 알몸의 두 여자가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니, 성연이 신영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혼란스러운 표정. 그래. 기억을 만들다 말았으니 어쩔 수 없지.
성연으로서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갈 거다. 신영은 더 심하지. 쟨 아예 기억이 없으니.
둘 다 무효화와 수면을 건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쓰러져있는 두 여자의 사이에 앉았다.
왼손으론 성연의 가슴. 오른손으로는 신영의 가슴. 으음. 크기는 성연이 조금 더 큰가? 거의 비슷하긴 한데.
감촉은 신영이가 더 좋네. 역시 나이가 깡패지. 아무리 관리를 잘했더라도 젊은 걸 이길 순 없어.
어쨌든 둘의 기억을 읽으며 이곳으로 데려온 이후의 기억은 일단 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성연의 기억만큼 신영의 기억도 생성한다.
지루하고 복잡하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작업.
게다가 시간도 드럽게 많이 걸린다. 어설프게 하면 다시 싹 다 갈아엎어야 하는 작업이니까.
그렇게 밤늦게까지 신영의 기억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여자들 덕분이 기억 삼 종 세트 스킬은 확실히 연습이 되었다는 것.
이젠 어디에서 어떤 누구의 기억을 조작해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달 치 기억도 조작하는데 짧은 기억 같은 건 일도 아니겠지.
그렇게 기억 조작을 마치고 또다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씻고 누우니 나조차도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생각해보니 이거 되게 무섭네.
기억 조작을 하면서 없던 기억을 만드니 나도 없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내가 만들어 낸 기억인데. 나조차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무섭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이정도면 저 여자들은 정말 깜빡 속겠지?
진짜 더러운 스킬이야. 매혹도 매혹이지만 기억 조작은 질이 달라. 질이.
다음날 또 점심 무렵에 일어나니 승희와 미나, 안나가 나를 부른다.
가장 먼저 나에게 말하는 안나.
"독무 마스터 했어요."
"빠르네. 그럼 이제 출혈인가?"
"네. 근데…. 그거 안 배워도 돼요? 제약 해제?"
"아. 그거."
그래. 그게 있지. 그렇긴 한데.
"그게 잠금 해제를 배우면 제약 해제가 나오는지 확실한 게 아니니까. 게다가 너는 데스 윈드가 우선이고."
"아…."
"그럼 저도?"
미나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도 천국의 문 배우려면 아직 멀었잖아? 갈 길이 멀지. 너희는 일단 제약 해제 조건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원래 트리 타."
"그럼 내가 배우면 되겠네요?"
승희가 나를 보고 말한다.
"맞아. 너는 지금 여유가 있지. 니가 잠금 해제 먼저 배워봐 줄래? 니가 잠금 해제 마스터 한다음에 제약 해제 패시브가 떠 있으면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으니까. 지금은 패시브 없는 거 맞지?"
"네."
"원래는 코인 탐지 배우는 거였지?"
"그랬죠."
"응. 그럼 잠금 해제 부터 부탁해."
"알겠어요."
그렇게 스킬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마치고 바로 비행을 하러 간다.
미국이 거의 눈앞에 다가왔으니 서둘러야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비행을 하면서 스킬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마 오늘 밤에 나도 기억 조작을 마스터할 수 있을 거다. 지금 고급 81퍼니까 충분히 되겠지.
문제는 기억 조작을 마스터 하고도 한참은 더 써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제약 해제의 조건이 단순하게 잠금 해제의 마스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근데 다른 조건은 더 없을까? 있을 만한 건 없었는데.
지금껏 나오지 않다가 티어13에 나온 건….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게 있다.
티어12까지는 티어당 스킬 나오는 개수가 많았었다. 아무리 적게 잡았어도 네다섯 개씩은 새로운 스킬이 나왔었지.
근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티어가 올라가도 스킬이 한 개씩 밖에 나오지 않았었다. 그 경계가 티어13이었고.
그거였어.
내게 보였던 스킬들. 티어13의 천국의 문, 티어14의 카타스트로피, 티어15의 기억 조작, 티어16의 데스윈드...
이것들은 공용 스킬인 거다. 조건은 오로지 선행 스킬. 누구에게나 공개되는 스킬들.
티어13부터 특정 스킬을 배운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히든 스킬이 출현하는 거였어.
그래서 한 개씩만 나왔던 거지. 그래. 스킬 만든 새끼들이 일을 대충 하는 게 아니었어. 그냥 머리를 조금 더 쓴 거지.
문제는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건데.
무작정 하나씩 다 배울 수도 없고. 조건 씨발. 암담하네.
일단은…. 승희가 잠금 해제를 마스터 하면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짧으면 닷새 정도. 길면 일주일.
아니다. 빠르면 나흘도 되려나? 잠금 해제는 그리 숙련 방법이 어렵진 않으니까.
일단은 생각나는 건 있으니 내 스킬 숙련부터 하자.
성연과 신영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일단은 내 스킬 숙련이 우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