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13화 (51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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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장면

마트를 다녀오는 건 이젠 일도 아니다.

빠른 비행에 블링크. 입구도 필요 없는 페이즈 아웃.

식량이나 뭐든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동이는 마트지만 그 외의 물건들은 거의 그대로다.

전기가 풀로 들어오는 세상이기에 숯 같은 건 그 자리에 그대로 쌓여있을 정도.

게다가 캠핑용품 같은 건 이쁘게 한데 모여있어서 챙기기도 편하다.

일일이 챙길 필요도 없지. 그냥 보이는 족족 수납에 쑤셔 넣으면 되니까.

오케이. 이정도면 됐지? 한 스무명은 고기 파티할 수 있겠네.

바로 돌아간다. 돌아갈 때는 순간 이동 한방. 순식간에 바뀌는 배경.

그렇게 집에 돌아오자 다들 이것저것을 준비해서 벙커 바깥으로 나르고 있다.

"잠깐만."

주방 앞을 저장하고 밖으로 나가 게이트를 열었다.

이러면 이것저것 들고 힘들게 벙커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겠지?

"진작 이래 주고 가지."

그 사이 몇 번은 왔다 갔다 했는지 약간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아가 작게 투덜거린다.

"아니. 그럼 비행이라도 쓰지. 뭐하러 걸어 다니고 있었어."

"아. 그러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세아가 뻔뻔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한다.

"뭐. 불만이야?"

"됐다. 빨리 나르기나 해라."

채소, 반찬, 양념장이나 그런 것들. 그사이에 해놓은 밥. 간단한 찌개.

어느새 본격적인 고기 파티가 되고 있다. 다들 상당히 기합이 들어갔어.

나는 그사이에 고기를 구울 불을 피운다.

그릴에 숯을 붓고 불을 피우려는데…. 생각보다 안 붙네.

이 활성탄은 효과가 있긴 한 거야? 지 혼자만 타고 숯은 안 타는 거 같은데?

"왜요? 잘 안 돼요?"

"어? 아냐. 금방 붙겠지."

승희가 내 뒤로 와서 내 등을 짚은 채 물어본다.

차마 불피우는 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고 싶지 않기에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다.

아마 모든 남자가 다 그럴 거야. 이런 거에 은근히 민감하거든.

근데 의지와는 다르게 영 시원찮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아. 정말. 번거롭네.

부탄가스를 연결한 토치로 숯을 계속 달군다. 그걸 지켜보던 승희가 조용히 말한다.

"폭발 한번 쓰고 싶네요."

"어휴. 그럼 고기는 지옥 가서 먹어야겠는데?"

"아니. 저쪽 구석 가서 쾅 하고 한방 쓴 다음에 거기서 활활 타는 숯을 건져오는 거죠."

"아니야. 그렇게까진 아닌거 같아. 조금만 기다려봐."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초보인 내가 보기에도 확신이 들 정도로 숯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일사천리.

불판 위에 고기가 올려지고 치이익 하는 아름다운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다 같이 둘러앉아 고기 익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기 색이 변하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 너무 웃기네.

"근데 쟤들을 생각 못 했네."

렉스를 비롯한 들개들.

사료를 잔뜩 부어놓아 줘서 지금까지는 그냥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고기가 구워지기 시작하자 개들의 상태가 조금 요란해진다.

그래. 이놈들도 알지. 고기 굽히는 냄새 정도는. 근데 어쩌지? 이놈들 줄 고기는 없다.

아 이럴 거면 잡뼈라도 잔뜩 얻어올걸.

"쟤 렉스랑 서열 높은 놈들 좀 테이밍해서 멧돼지라도 잡아오라고 해. 안 그러면 얘들 미치겠다."

내 말에 승희와 세아, 안나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바로 개들을 테이밍 한다.

컹! 컹컹!

테이밍 된 렉스가 몇번 짖자 저만치 물러나는 들개들.

그걸 보고 렉스는 몸을 돌려 휙 달렸고 그 뒤를 테이밍 된 열한 마리의 개가 따른다.

"자. 일단 첫 고기."

그사이 나는 다 익은 고기들을 접시에 옮겼고 금방 네 쌍의 젓가락들이 달려들어 한 점씩 들고 간다.

막 불에서 내려온 거라 뜨거울 테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다들 일단 입에 넣고 본다.

행복한 미소. 입에 고기를 넣은 채 씹고 있는 네 여자의 표정이 동시에 미소로 바뀌는 모습.

후후. 이런 표정들을 보고 싶었지. 그럼 나도 맛 좀 보자.

고기 굽던 집게로 고기를 한 점 집에 입에 넣었다.

하아. 죽이네. 그래. 이 맛이구나.

고기는 몇 번 씹지 않았는데 입에서 사라졌다. 진한 씹는 맛과 육즙을 남기고.

그리고 몸이 외친다. 더 더! 조금 더 많은 고기를 원해!

고기 굽는 손이 바빠진다. 불판의 공간을 조금 더 빡빡하게 써서 고기를 더 올렸다.

먹는 게 끊기는 것만큼 짜증 나는 게 없지. 부지런히 고기를 올리고 뒤집고 자르고 내놓는다.

"자. 아 해요."

승희의 말에 입을 벌리자 상추쌈이 바로 들어온다.

아. 눈물 나려고 하네. 여자가 싸주는 쌈이라니. 성공했어. 이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야.

그 모습을 본 여자들이 부랴부랴 자기들도 쌈을 싸서 준다.

행복하네. 입만 벌려도 쌈이 들어오다니. 게다가 쉴 틈 없이.

이정도면 고기 굽는 보람이 있지. 아. 진짜 너무 좋다. 행복하다는 말 말고는 더 표현할 방법이 없어.

얼마 뒤 렉스가 컹컹거리며 내려왔고 들개들이 힘을 합쳐 멧돼지 몇 마리를 물고 온다.

제법 큰 멧돼지들인데 테이밍으로 강화돼서 그런가? 다리 하나씩을 물고 질질 끌면서 잘도 내려오는 모습.

그리고 녀석들도 파티가 시작됐다.

멧돼지의 사체에 주둥이를 박고 우적우적 먹기 시작하는 녀석들.

우걱우걱까드득까드득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쟤들은 이제 신경 안 써도 되겠네. 다행이야.

그렇게 한참을 먹다 보니 부지런히 고기를 입에 가져가던 손길들이 제법 둔해졌다.

그렇다고 손이 노는 정도는 아니다. 아까처럼 나오자마자 휙휙 집어갈 정도는 아니라는 뜻일 뿐이지.

"이건 무슨 부위에요?"

"맛있는 부위."

"이야. 오빠. 척척박사네."

그러면서 냠하고 고기를 입에 넣는 승희. 귀여워. 왜 이 여자들은 고기 먹는 모습도 귀여울까.

나도 고기 한 점을 더 입에 넣고 씹다가 꿀꺽 삼킨 다음 옆에 따라져 있는 콜라 한잔을 입에 들이부었다.

크. 좋다. 더없이 좋네. 기가 막히잖아?

"근데. 우리 진짜 건전하네요."

승희의 말에 다들 그녀를 바라본다.

나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생각한다. 건전? 우리가? 남자 하나랑 여자 넷이 한집에서 사는데?

"이렇게 고기를 먹는데 아무도 술을 안 마셔. 다들 그래도 성인인데."

"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긴 그래. 그런 부분에서는 정말 신기하지.

이 여자들을 만나고 넷 다 술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런가? 술 취한 모습들은 보고 싶긴 한데.

"생각해보니 그렇네? 그럼 먹어볼래? 수납 안에 술도 잔뜩 있긴 있을 텐데."

예전 회귀 숙련하면서 넣어놨던 물건 중에 분명 술도 있다.

와인도 있고 위스키도 있고 양주도 있지. 맥주, 소주, 그 뭐야. 짱개 술. 독한 거. 암튼 그것도 있고.

내가 수납에서 하나씩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자 다들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특히 승희. 완전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말한다.

"엑? 먹어도 되는 거예요? 오빠는요?"

"나? 나는 안 먹지. 설마 내가 먹을 거 같았어?"

"역시…."

그래. 미친 게 아닌 이상 내가 술을 먹을 리 없다. 무슨 일이 언제 생길지 모르는데 어떻게 술을 먹어.

"취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안 먹는 거예요?"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미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당연하지. 게다가 술은 별로….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몰라서."

"근데 우리는 괜찮고요?"

"뭐. 내가 깨 있으니까."

솔직히 맛이 없는 게 가장 클 거다. 맛을 느끼고 술을 좋아했다면 무슨 핑계를 대고도 먹었겠지.

하지만 정말 맛이 없다. 왜 먹는지 모를 정도로. 차라리 이렇게 콜라를 한잔 더 먹고 말지.

"내 눈치 보지 말고 먹고 싶은 사람 있으면 먹어도 돼. 그렇다고 항상 입에 달고 살라는 뜻은 아니고, 이런 날에는 상관없다 이거지."

최대한 분위기를 풀어서 좋게 이야기한다.

하긴 웃기긴 해. 맘껏 먹어! 근데 나는 안 먹음. 그래놓고 이러는 거잖아.

흥을 박살 내놓고 이어가려니 역시 분위기가 안 산다. 후후. 그래. 나는 분위기 브레이커.

근데 어쩔 수 없어. 이래서 지금껏 살아왔는걸.

"난 먹어야징. 나 이거 먹어볼래. 비싼 양주."

발렌타인 30년산을 집고 눈을 빛내는 세아.

역시, 세아가 이런 분위기에 휩쓸릴 녀석이 아니지. 자기 하고 싶은 건 당당히 주장하는 녀석이니까.

"어. 그럼 나도 한 잔만 맛볼래."

"어. 나도!"

"저도요."

다행히 그런 세아 때문에 이들은 내 눈치를 보지 않게 됐다.

짜식. 나중에 또 귀여워 해줘야지. 고맙네.

그럴듯한 양주잔은 없지만, 컵에 한 잔씩 술을 따라 마신 네 여자.

세아는 맛보자마자 인상을 썼고 승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한 모금 먹는다.

먹고 나서 웃긴 표정을 짓는 미나.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한잔을 비우고 또 따르는 안나.

"맛있어?"

"네. 괜찮은데요? 달콤하고, 부드럽고."

"그래? 다들 표정이 별로인데 너만 평온하네."

"그러네요."

한번 맛을 본 뒤 다신 입에 안 대는 세아. 결국, 갸웃거리면서 한잔을 다 마신 승희. 뭐 얼마나 먹었다고 얼굴이 빨개진 미나.

웃기네. 반응들이 제각각이라 웃겨. 게다가 세아는 실망한 듯 다른 술을 뒤적거린다.

뭐가 맛있을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모습.

"좋은 건가? 막 고급스러운 느낌을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서 한잔 더 따르는 승희. 한 모금 더 먹고 또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지? 쟤 저러면서 한 병 다 비우는 거 아냐? 생각보다 잘 먹는 거 같은데.

미나는 아예 눈을 감았다. 어지럽나? 슬쩍 잔을 보니 한잔을 다 먹긴 했다.

근데 얼굴 붉어진 미나는 엄청 귀엽네. 저게 홍당무구나. 새빨개.

"미나 괜찮니?"

내가 물어보자 전부 미나를 바라본다.

눈을 빼꼼 뜨더니 헤 하고 웃으며 말하는 미나.

"괜차나요. 괜차나."

발음이 살짝 풀렸다. 와. 쟤도 몸이 술 더럽게 안 받는 체질인가 보다. 한잔먹고 저 정도라니.

이번엔 와인을 들고 나에게 물어보는 세아.

"이거 여는 거 있어?"

수납에서 오프너를 하나 꺼내서 줬다. 후후. 내 수납에는 없는 게 없지.

처음엔 어떻게 쓰는지 몰라 이래저래 돌려보던 세아는 금세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따더니 새로운 잔에 와인을 따른다.

"오. 색은 이쁘네."

그리고 한 모금 먹더니 자신의 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색은 이뻤는데?"

그러더니 또 한 모금 홀짝 한다. 그래도 이번엔 두 모금은 마시네. 아까 30년산 그건 한 모금 먹고 안 먹더니.

오. 세 모금. 이건 좀 입맛에 맞나?

"이건 뭔 맛이지. 희한하네."

그리고 네 모금. 쟤는 와인이 입에 맞나? 의외네.

승희는 또 30년산을 한잔 따른다.

"야. 뭘 그렇게 혼자서 넙죽넙죽 먹냐? 말도 없이?"

내가 말하자 승희는 나를 보더니 또렷한 말투로 말한다.

"아니. 신기하잖아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그러더니 또 넙죽 한 모금 마신다. 괜찮나? 생각보다 술이 센가? 취한거 같진 않은데.

이렇게 술을 먹여본 건 처음이라 얘들이 얼마나 잘 먹는지를 모르니…. 잘 봐둬야겠네.

근데 결국 가장 먼저 쓰러진 건 승희였다.

아. 웃겨. 저럴 줄 알았지. 넙죽넙죽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어느 순간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기절한 듯 잠들어있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그리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것저것 하나씩 따서 전부 맛보더니 역시 상태가 별로 안 좋은 세아.

아직도 얼굴이 붉은 상태인 미나.

안나는 그나마 멀쩡하다. 물론 평상시보단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이정도면 멀쩡하지.

러시안이라 그런가? 이정도 알콜은 우습다 이건가?

“쟤들 옮겨야 하나? 토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요."

나를 보고 말하는 안나.

"이거 술병에 회귀 쓰면 어떻게 돼요?"

“어?”

“술이 다 깰까요?”

"어? 그러게?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말 나온 김에 써봐야지. 발렌타인 30년을 시작으로 세아가 이것저것 따놨던 술병들.

내가 젓가락 하나를 들고 마법 지팡이를 흔드는 것처럼 술병에 회귀를 쓰자 안나가 웃긴다는 듯 꺄르르 웃는다.

"회귀!"

발렌타인 30년이 따기 전의 새것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법같이 눈을 반짝 뜬 승희.

"어…?"

그렇게 병에 한 번씩 회귀를 썼다. 휘리리릭. 원래대로 돌아가는 병들.

코르크 마개가 다시 생기고 까졌던 뚜껑이 다시 생긴다. 캔 병 할 거 없이 전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술들.

그리고 세아가 말짱해진 자신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럴 거면 오빠도 먹지 그랬어??"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네. 근데 내가 취해서 내가 회귀를 못 쓰면?"

"아. 그런가. 그럼 내가 회귀를 배워야겠군…."

혼자서 중얼거리는 세아. 나는 그걸 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나한테 부탁 안 하고 마음껏 군것질하게?"

"음. 그것도 좋지. 괜찮은 생각이야."

자신이 술에 취해 해롱거렸다는 게 신기했었는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는 승희와 미나.

그리고 날아가 버린 술기운이 아까운듯한 느낌의 안나.

"이제 다 먹었지? 치우자?"

내 말에 다들 일어나 먹었던 것을 치우기 시작한다.

내가 게이트를 열어줘서 치우는 건 금방이다. 바로 옆이 주방이 되어버렸으니까.

"이 접시에 회귀는 안 되나요?"

싱크대에 잔뜩 쌓인 접시들을 보면서 미나가 한숨 쉬듯 말한다.

"되겠지? 해줘?"

"아니에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너무 많아요. 하나하나 스킬 쓰게 하느니 그냥 설거지하고 말지."

“상관없는데.”

“아까워요. 그러지 마요. 코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게 낭비할 필요는 없죠.”

"다음엔 일회용 용기를 쓰자. 다 쓰고 그냥 버리게."

"네."

그렇게 말하며 먹은 자리를 마저 치웠고, 우리의 소고기 파티 및 첫 술자리는 별일 없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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