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483화 (48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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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료프카

그렇게 도착한 루블료프카라고 생각되는 곳.

일단 한참을 살펴봤다. 이놈들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잖아?

그렇게 거의 두어 시간을 살펴봤다. 근데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정말 현실인지 눈이 의심스럽다.

저게 진짜 현실이라고? 영화 세트장 같은 게 아니고? 진짜로?

내가 어이없게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 공연장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대의 고급스러운 차들이 몰리길래 궁금해서 본 곳. 대체 뭘 하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건지 궁금증이 들었다.

운전기사를 대동한 고급세단에서 내리는 정장 입은 남자, 비싸 보이는 스포츠카에서 내린 다음 차 키를 발렛 파커에게 건네주는 말끔한 남자, 드레스에 모피코트 같은 걸 걸친 두 여자를 양옆으로 낀 조금 나이 있는 남자….

영화 세트라고 생각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의 사람들. 말 그대로 진짜 부자들 같아 보이는 이들이 줄줄이 들어간 공연장.

그리고 그 공연장에서는 발레 공연이 시작됐다.

하. 발레라니. 돌아버리겠네.

발레복을 입은 수많은 발레리나의 움직임. 주연인듯한 발레리나와 발레리노.

점프하고 빙빙 돌고 서로 잡아주고 들어 올리고…. 그야말로 이런 세상에서 실제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광경.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멍하니 그걸 지켜봤다. 물론 하늘 높은 곳에서 천리안과 투시로.

보고 있으면서도 이해가 안 됐다. 이해 안 가는 게 너무 여러가지라 뭐부터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첫째. 저들은 왜 저러고 있을까?

이 녀석들에겐 세상의 멸망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나?

물론 우리나라의 대기업 놈들이나 청주의 SG시티를 봤을 때도 했던 생각이다.

근 5년 동안 망해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상식 밖의 삶을 살았던 게 억울할 정도로 평화로운 삶.

그걸 보고 어이없긴 했었다. 근데 이건 더 심하잖아?

어떻게 저러고 사냐고. 저게 가능한 거냐고?

그래. 그게 두번째 의문이다.

저들은 어떻게 저러고 있을까?

내가 눈에 본 것들만 해도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여기 있는 놈들의 생활. 호화로운 저녁 식사, 샴페인, 명품 옷들, 고급 승용차…. 그런 것들.

그래. 뭐 그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이 망했다고 해서 예전에 만들어 놓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술이든 옷이든 뭐든 간에 그건 조달할 수 있겠지. 게다가 스킬로 회귀가 가능하잖아?

녀석들 중에 티어6 이상을 찍은놈이 없을 리는 없으니까.

회귀 하나면 생필품 대부분을 조달할 수 있어. 그래. 그건 나도 해본 짓이니까 이해한다.

근데 스킬이 풀린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햇수로 4년. 스킬 하나밖에 없던 시절. 그때는 회귀고 뭐고 없었다.

그때는 어떻게 했었지? 분명 이런 삶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텐데?

둘 중 하나다. 그동안 못하다가 회귀 스킬이 나온 이후로 다시 이런 삶이 복구된 것.

아니면 이놈들은 회귀고 멸망이고 신경 쓸 필요 없이 이런 삶이 가능하도록 유지할만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

음. 생각해보니 둘 다일 수도 있겠네. 그래. 뭐 불가능한 건 아니지. 그래 그것도 그렇다 치고.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사람들이다. 저 상류층의 삶을 영위하는 놈들 말고, 다른 놈들.

발렛 파커, 발레리나, 웨이터, 요리사, 운전기사…. 이런 놈들.

왜 저러고 있지?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도 일을 하는 거야?

노동은 신성하고 살아 숨 쉬는 한 신성한 노동을 멈출 수 없다…. 뭐 그런 거야? 그런 건 아닐 거 같은데.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이력이 있어서 그런가? 그런 단순한 문제는 아닐 거 같은데 말이지.

궁금하면 알아보면 되지.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지.

주차장. 고급세단의 운전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느긋하게 여유 부리고 있는 한 남자.

운전기사인 그가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밖에다 던지자 무효화와 수면을 걸었다.

그리고 기억 읽기. 가까운 곳에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하며 계속 기억을 읽는다.

다음은 발렛 파커. 차를 주차해놓고 터벅터벅 올라오는 한 남자. 역시 재우고 기억을 읽는다.

그리고 공연장 뒤에 있는 스태프인 듯한 한 여자, 근처 가까이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종업원.

그런 식으로 빠르게 기억을 읽었다.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타겟으로 하는 무작위성 기억 읽기.

발레 공연이 끝날 때쯤엔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고르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어떻게 이런 생활이 유지되는지는 알게 됐다.

이놈들이 망하기 전의 세상과 다름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별게 없었다.

물물 교환. 그러니까 이놈들 말로는 바터.

원래부터 노동에 대한 대가를 돈으로 받는 것보다 물건으로 받는 게 익숙하던 사람들.

그렇기에 루블이 휴지가 되었어도 이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거였다.

문뜩 그런 말이 떠올랐다. 씹창난 경제는 러시아의 유구한 전통이라는.

그렇게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들에겐 세상이 망한 건 크게 의미가 없었구나.

오히려 희희낙락하면서 좋아하는 놈들이 많았다. 적어도 보드카와 담배가 싸졌으니까.

스킬로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게 됐기에 이들의 삶은 훨씬 더 좋아졌다.

하. 어처구니없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소주 생성 스킬. 그게 여기에서는 보드카 생성 스킬이다.

그게 주류인 세상이 오다니. 진영이는 틀리지 않았던 거였어. 다만 한국에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에러였을 뿐.

그래. 뭐…. 알겠다.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는 거지.

하지만 내 생각엔 스킬 만든 놈들에게는 러시아의 상황 같은 건 실패작일 거 같았다.

싸우다 말았잖아? 서로 죽이다가 만 거 아냐.

그러니까 생성 스킬 같은 건 만들지 말았어야지. 대체 그건 왜 만든 거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기호품 같은 건 없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니지. 갈등을 유발하는 용으로는 딱 좋은가?

사람이 물욕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그만큼 갈등이 없어지니까? 음. 그렇게 생각하니 그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네.

어쨌든 이 녀석들이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더 관심 가질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코인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놈들. 딱히 죽여도 얻을 게 없는 녀석들.

아니, 뭐하러 죽이냐. 오히려 여기에서 이것저것 뜯어가는 게 훨씬 낫지.

게다가 돌아다니다 보니 혹할만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여자. 확실히 이쪽 여자들은 전체적으로 이쁘네. 다들 무슨 모델 같아.

아니지. 모델 같은 여자들만 살아남은 거겠지. 미모도 여자의 생존 도구 중에 하나니까.

근데 딴짓 하는 건 나중에 여유 있을 때 하자. 지금은 이고르가 먼저야.

평범한 일반인 중에는 이고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 뭔가 있어 보이는 놈들을 뒤져봐야지? 그러려고 온 거니까.

마침 발레 공연이 끝나서 공연장을 떠나는 놈들이 있으니 그놈들을 타겟으로 삼자.

온 천지에 널린 게 먹잇감이니 좋네.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수고를 안 해도 되니까.

공연장을 나오는 놈 중에서 가장 껄렁한 놈을 찾아본다.

누가 좋을까. 어떤 놈으로 할까….

그렇게 보고 있는데 아까 여자 둘을 끼고 공연장으로 들어갔던 남자가 보였다.

음. 저놈으로 하자. 왠지 좀 분위기가 그쪽 사람 같네. 옆에 끼고 있는 여자들도 내 스타일이고.

입구 앞에 준비된 차를 타고 바로 출발하는 남자.

차에 타니 양옆에 앉은 금발 여자와 흑발 여자의 어깨에 팔을 걸고는 가슴에 손을 집어넣는다.

자연스럽게 금발 여자가 술을 한잔 따라서 남자의 입에 가져다줬고 그걸 한 모금 마신다.

그 뒤를 이어 흑발 여자는 시가 하나를 꺼내 입에 물려준다.

캬. 씨발. 행복하게 사네.

새끼. 성공한 삶이구나. 어떻게 보면 참 부러운 삶이야.

세상이 망하든 말든 해오던 가락을 유지할 수 있는 저런 능력. 저게 진짜 능력 아닐까?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어쨌든 살아남았잖아?

하긴, 이런 말을 하는 건 내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지. 불법적인 면으로는 끝을 달리고 있는 나니까.

녀석이 도착한 곳은 그럴듯한 대저택. 안나의 집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마 안나의 집이 지금까지 관리가 됐으면 저런 상태였겠지?

녀석이 여자 둘을 끼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사용인인 듯한 사람이 맞이한다.

귀족 같은 삶이네. 신기해. 저러고도 지금까지 아무 탈이 없다는 게 가장 신기하다.

분명 나 같은 미친놈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런 녀석들은 어떻게 막지?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그런 부분이다. 치안의 공백. 그건 뭐로 메꿨는지.

이놈들은 습격자나 불온한 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 걸까? 그걸 알아내야 마음대로 일을 하는데.

내가 지금 떠 있는 곳은 저들이 있는 곳과 상당히 먼 곳.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서 먼 곳으로 거리를 벌리고 있는 상태다.

먼곳에서 천리안과 투시로만 탐색하고 있는 상황.

이제 집안에 들어갔으니 집안에 누가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지?

거리를 좁혀 집을 탐지범위 끄트머리에 넣었다.

적어도 경호원 같은 놈들은 있겠지? 저 정도 능력 있는 놈이라면 경호원 정도는 있을 거야.

탐지에 걸린 놈들을 하나씩 확인해본다.

아. 역시 있네. 저렇게 대놓고 정장을 입고 귀에 뭔가를 꼽고 있으면 누가 봐도 경호원이잖아?

흐음. 저 녀석들 수준은 어떨까? 마피아 놈들은 시시했는데.

적어도 마피아 녀석들 정도는 이길 수 있는 능력이겠지? 근데 얘들은 코인을 뭐로 충당했을까?

경호원이면 코인 충당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지.

코인은 목숨이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재화다.

그리고 경호원이라는 직업은 의뢰자의 곁에서 항상 있어야 하는 녀석들이다. 그러므로 사냥이든 뭐든 할 수가 없다.

완벽하게 상충하는 상황. 그렇다면 녀석들은 능력이 부실하다는 뜻이 된다.

근데 그러면 의뢰자를 지킬 수 없다. 여러가지로 말이 안된다.

음. 궁금하네. 궁금한 거 천지야. 과연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뭐….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해답지가 저기 떡하니 있으니 가서 들춰보기만 하면 되잖아?

아직은 밤이 늦지 않아 저택의 안쪽은 조금 부산스럽다.

사람이 제법 많다. 한 스무명 정도? 근데 전부 상주하는 인원은 아닌거 같으니 조금 기다려본다.

어차피 아까 불태운 마피아 놈들의 거처도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마피아 아지트 쪽은 별다른 일이 없다.

불을 보고 놀라서 온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기억을 읽고 싶을 만한 녀석들은 오지 않았다.

딱 봐도 주변 마을 사람인 것 같은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불을 끄려고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멀찌감치에서 허망하게 불타는 것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동안 저축해놨던 은행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랑 비슷한 표정 같은데.

생각해보면 허무하고 아까울 만하다. 기껏 보호비랍시고 식량을 줬는데 이렇게 싸그리 망해버렸으면 저런 표정이 맞지.

어쨌든 불길도 많이 약해졌고 특이사항은 없다. 다른 마피아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통신 같은 게 없으니 바로바로 연락은 안 되는 거겠지? 뭐…. 안 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부자 녀석의 저택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다.

안에 있는 건 부자 놈 하나와 금발이랑 흑발 여자, 경호원 셋. 그리고 집에 상주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 남자 하나, 여자 하나.

경호원 하나는 쉬고 있고 남은 두 명이 근무 중인 거 같다.

아. 저 쉬는 놈은 차를 운전했던 놈이구나?

으음. 그런 시스템이라 이거지? 운전기사 겸 경호원?

일단 저 부자 놈에게 접근하려면 저 경호원들부터 무력화시키긴 해야겠다. 그게 순서에 맞지.

집 안에 있는 놈들은 전부 테이프 질 해놔야지. 안 그러면 불안해서 내가 맘에 안 놓여.

스킬이 많이 생기면서 이런 침투는 상당히 쉬워졌으니 바로 움직인다.

일단 목표는 상주해 있는 사용인 남자와 여자. 침투의 기본은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드는 거니까.

바로 블링크. 그리고 페이즈 아웃.

먼저 사용인 남자에게 간다. 아마 곁에 두고 일하는 사람을 위협적인 스킬을 가지고 있는 녀석으로 두지는 않을 거다.

바로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고 무효화와 수면을 걸었다. 그리고 테이프 질과 동시에 기억 읽기.

스킬은 기름 생성. 역시 생성 스킬이네. 일단 이 남자는 불타고 있는 마피아 아지트 감시처 쪽으로 게이트를 열어 던져놨다.

됐어. 이제 경호원 놈들이 탐지 같은 걸 써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그럼 다음으로 가야지.

사용인 여자의 스킬은 남자의 기억을 읽어서 알았다. 보드카 생성.

그렇기에 페이즈 아웃 같은 걸 쓰지 않고 당당하게 방으로 가서 노크했다.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미는 여자. 바로 매혹을 건다.

아주 이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젊고 매력적이긴 하다. 하긴, 외모는 중요하지.

기왕이면 젊고 이쁜 여자를 뽑고 싶은건 모든 남자의 공통된 생각일거야.

매혹에 걸려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여자. 그런 여자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수줍은 듯 몸을 뒤로 조금 빼고 갈망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아쉽지만…. 그런걸 할 시간이 아니야. 너는 할 일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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