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굴러가는 수레바퀴
기다시피 하며 몸을 숙이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고작 몇 미터를 가기 위해 몇 분이고 몇십 분이고 주변을 살피고 안전하다고 판단 될 때까지 기다리던 시절.
탐지가 생긴 다음엔 이동이 많이 자유로워졌다.
탐지 범위가 늘어나면서 발소리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게 되었었다.
탐지 마스터가 되면서 내 몸에서 나는 소리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었고.
자신감이 생겼기에 전동 휠도 탔고 대범하게 차도 몰았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점점 편해졌지. 투명을 배움으로 정말 마음이 가벼워졌고 비행을 배우면서 기동력은 한껏 좋아졌다.
거기에 페이즈 아웃.
이동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벽이고 지하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원하는 곳을 얼마든지 가고 비행으로 날아가다가 고층 건물 벽 안쪽으로 들어가는 기예까지도 벌였었다.
그리고 블링크.
비행으로는 한계가 있던 속력을 극복했다. 달리는 차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마지막으로 순간 이동.
이제는 목적지로 이동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저장되어있는 곳까지 한마디만 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스킬.
그 말도 안 되는 편리성과 사기스러움은 왜 진작 이런 스킬을 배우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언제든지 사냥감이 넘치는 청주에 갈 수 있게 되었기에 길바닥에서 버리는 시간이 줄었다.
상당히 좋은 일이야. 그만큼 주변에 신경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여유시간이 늘었고, 잠도 언제든지 집에서 잘 수 있다.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여자들을 안고 자면 수면을 안 쓰고 잠드는 경우도 종종 더 생겨났다.
역시 사람에겐 안정이 최고의 약인가 봐.
지긋지긋하던 불면증.
온갖 의학으로도 극복하던 게 불가능하던 그 끔찍한 새끼.
스킬이 생기고 나서야 겨우 찍어 누를 수 있던 그 불면증이 미약하게나마 좋아지고 있잖아.
좋은 일이야. 행복하네. 정말로.
나는 다 같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말했다.
"너희가 비행을 마스터 하면, 우리는 바로 밖에 나가 볼 거야."
내 말을 들은 네 여자는 별로 놀라진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계속 먹는다.
"세아 같은 경우는 이미 괴력이 있으니까 비행이 고급만 돼도 밖에 나가 볼 거고."
"어? 나만?"
"응. 어차피 다섯이 한꺼번에 나가는 경우는 조금 나중이 될거니까. 내가 처음부터 너희를 한꺼번에 봐줄 만큼 대단한 건 아니거든. 아마 처음엔 한 명씩 돌아가면서 밖에 나가겠지. 그러니 세아 너는 비행 고급만 되도 나갈 수 있고."
"그렇구나."
의외로 담백한 반응들에 오히려 내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거나 자신 없는 모습 같은 걸 보일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없어. 무슨 일이래?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요. 다들 각오는 하고 있으니까."
나를 보며 말하는 승희의 말. 그리고 다른 여자들의 표정.
아. 그렇구나. 이들이라고 마냥 약한 소리를 내는 아가씨는 아니라는 거지.
역시 내가 반한 여자들 답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밖에 나갈 준비를 한다.
다 같이 모여 앉아서 넷 다 비행이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은 참 보기 웃긴다.
"나가요?"
비행이 걸려있기에 공중에 뜬 채로 스르륵 내게 다가오는 미나.
그걸 따라서 쫓아오는 승희와 안나. 뒤늦게 배웠지만, 공중에서 누운 자세로 내 쪽으로 오는 세아.
역시 세아 저 녀석은 센스가 있긴 있어.
"한꺼번에 그렇게 날아오니 느낌이 이상하네."
"하하…. 무슨 유령 같네요."
미나가 말하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유령은 무슨…. 요정이지. 너희 넷 다 축소 배워보지 않을래? 그러고 내 주변에서 날아다니는 거야. 등에 날개 같은 거 하나씩 달고."
세아가 인상을 쓰며 '저놈 저거 또 이상한 소리 하네!'라는 표정을 짓는다.
근데 웃긴 건 승희와 미나, 안나는 혹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거다.
"축소요? 흐음. 그거 재밌긴 하겠네요. 평소엔 오빠 주머니에 들어가 있고?"
"와. 그거 나쁘지 않다. 어디 이동할 때도 우린 그냥 옷 안에 들어가 있으면 되겠네. 근데 그 상태에서 블링크 쓰면 우리는 다 놓고 혼자만 움직이는 거 아냐? 별로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짓 안 해!"
승희와 미나가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세아가 옆에서 소리를 빽 지른다.
작아지는 거면 뭐든지 싫은 건가? 웃기는 녀석이야.
솔직히 말해서 본인이 작아서 얻는 이득이 더 많아 보이는데.
어쨌든 그런 그녀들과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캐슬과 펜스, 청평을 모두 둘러봐야지.
일산 녀석들도 마무리 해야 하고 펜스는 어떻게 잘 돼 가고 있나 보기도 해야 하고, 그 김포에서 봤던 녀석은 청평에 잘 갔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청평이 제일 문제네.
스킬 구성으로 봐선 청평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할 그럴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란 게 어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캐슬로 먼저 향한다. 일산에 있는 녀석들을 언제까지 거기에 둘 수는 없다.
일단 민희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 봐야지. 투명은 어느 정도 숙련이 됐으려나.
적어도 일산의 남매들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신뢰와 믿음으로 서로를 알아가며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는 건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소리잖아.
그런 거지. 우리 개는 순해서 안 물어요.
그래. 순해서 안 물 수도 있어. 근데 물리면? 아차차 하고 말 건 아니잖아.
게다가 일산의 그 남매는 그냥 개도 아니다. 사람을 어지간히 죽일 만큼 죽인 프로들이라고.
그러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지.
나는 민희를 그런 식으로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어.
비행과 블링크를 쓰면 캐슬은 정말 순식간이다.
거리로 따져도 5킬로 조금 넘는 수준이니까. 블링크 열 번이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거리.
음…. 너무 가까운 곳에 있나? 승미세안 네 여자가 막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남양주의 캐슬은 너무 코앞일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서로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여자들은 예리하잖아. 아마 내가 있는 상태에서 서로 만나면 단박에 눈치챌걸?
그런 상황은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다. 으으…. 벌써 진저리쳐지네.
탐지를 돌렸을 때 딱 적당한 위치에서 기척들이 느껴지면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일단 최상층 성주의 방에 기척이 하나만 있는 게 안심이 든다.
물론 기척에 이름표가 있는 것은 아니니 가서 확인해 봐야 하지만.
페이즈 아웃 덕분에 입구의 개념을 잃어버린 나는 천장을 뚫고 민희의 앞에 나타났다.
이젠 놀라지도 않는 민희.
내가 나타나자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와 안긴다.
그래. 이런 부분이 좋은 거다. 민희를 보면 그런 게 있다.
나를 보고 반가워 하는 게 머리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게 아닌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 같은 모습.
연기나 가식 같은 것이 아닌 진심이 배어 있는 모습이잖아?
물론 여자는 일생이 연기라고 했으니 이런 것도 의도해서 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안 보인다.
아 몰라. 내 감이 그렇다는데 어쩔거야.
"잘 지냈어?"
"그럼요. 별일은 없죠."
"포션 줬던 거 다 먹었지?"
"약간 남았어요."
"에헤이. 게으름 부리는 거야?"
"게으름은요! 날마다 오만상을 다 쓰면서 먹고 있는데!"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민희. 그런 그녀를 보면서 피식 웃는다.
역시, 인생이 연기인 건 맞나봐. 별로 삐지지도 않았으면서 저렇게 삐진 척을 하네.
"포션 어디 뒀지?"
"여기요."
캐비닛 서랍 하나를 가리키는 민희. 열어보니 그녀 말따라 아직 조금 남아있다.
상점에서 포션을 사서 넣기 시작하자 지켜보던 민희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진다.
"잠깐…. 잠깐만요. 대체 몇 개나…."
"몇 개 안 돼."
서랍에 가득 찬 포션. 대충 코인 빠진 걸 보니 100만 정도 쓴 거 같다. 그럼 개수로 500개.
"세상에…. 이게 다 몇 개야…."
"500개쯤 되겠네."
"하아…."
그러면서 나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마 나는 저 표정을 보고 싶어서 자꾸 오바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할 말이 있는데."
내가 조금 진지하게 말을 걸자 약간 긴장하는 민희.
"혹시…. 애들 돌보는 데 재주 있나?"
"어…. 애들요?"
나는 일산에 있던 남매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의 광역 스킬 무효화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에요. 그러지 마요. 차라리 지금 데려와요. 오히려 그게 더 낫겠네."
"지금?"
"네. 광역 스킬 무효화가 없는 지금이 차라리 나아요."
"나는 이해를 못 하겠는데? 걔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잖아."
내가 말하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민희.
"후우. 당신의 그런 준비성 좋은 부분은 이해하고 존중해요. 대단하다고도 생각하고 있고요. 하지만…. 모두가 당신 같은 것은 아니에요. 게다가 열여섯이랑 열넷이라면서요? 그런 애들이 언제든 자신의 목줄을 움켜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부 열겠어요?"
"나도 민희 너의 인도적인 접근 방식은 이해해. 하지만 그걸 잊지 마. 그 아이들은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여본 경험자라고."
"복수였다면서요."
"그건 살인의 핑계 중에 하나고."
내 말을 들은 민희가 살짝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내 말이 극단적인 건 알아. 하지만 나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일을 해. 그렇게 운과 기대만으로는 일할 수 없어."
"맞아요…. 당신의 일 처리는 틀린 것이 전혀 없어요. 그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이번 일은 나에게 맡겨줘요. 그렇게 하기로 했으면."
속으로 살짝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긴 했다.
'그래서 니가 조 상무 그 새끼에게 당한 거야!'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약간 사람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
내가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새끼라고 해도 그런 말을 본인 면전에 할 정도로 씹쌔끼는 아니잖아.
모르겠다. 한 2년 전이었으면 그랬을지도?
어쨌든 민희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고수했다.
결국, 거기에 밀린 나는 일산으로 출발했다. 나 원 참. 뭐가 저렇게 급한 거야?
그렇게 가면서 잠시 생각했다. 그 일산에 있던 남매에 대해서.
민희와 함께 있다면 동생은 그렇게 위험 대상이 아니다.
물론 동생이 아무 남자나 매혹해서 주변을 공격할 수도 있지만, 동생은 반사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제압할 수 있어.
문제는 오빠 쪽. 반사도 있는 데다가 공격 스킬이 암석 탄환이다.
막을 수 있는 스킬은 오직 보호막 하나.
뭐, 민희도 투명이 있으니 쉽게 맞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 조심스러운 꼬맹이가 마음먹고 움직이면 상당히 막기 힘들 거다.
대체 민희는 무슨 자신감이 있어서 저러는 거지?
모르겠다.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내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일산에 도착하니 녀석들은 그때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번엔 내 쪽에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내가 그나마 녀석들을 존중한다는 최고의 예우다.
내 기대에 부응하듯이 내가 나타나자 바로 남매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내 근처로 오더니 모습을 드러낸다.
"잘 있었냐."
꾸벅 인사를 하는 녀석들. 저렇게 보면 진짜 그냥 꼬맹이들인데.
"추우니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내가 말하자 오빠 녀석이 나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괜찮으시면 저희 집이라도…."
"그래. 그럼."
보통은 이런 제안은 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텐데.
누가 자신의 아지트에 함부로 외부 사람을 들이려고 할까?
게다가 누가 함부로 남의 아지트에 들어가려고 할까?
역시 애들은 애들이다. 아는 것들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모르는 것들이 더 많은 아이들.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녀석들을 따라갔다.
스킬 사용 불가 지대 같은 것이 생각나긴 했지만,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물러나 블링크를 쓰면 그만이다.
블링크…. 역시 사기야. 사람을 여유롭게 만들어주잖아?
녀석들이 데리고 간 곳은 생각보다 고급스러운 주택.
본인들의 집인가? 보니까 그렇다. 냉장고에 붙어있는 이 녀석들의 어릴 적 사진, 벽에 걸려있는 가족사진.
많은 것들이 여기가 녀석들의 집이었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
"전에 준 건 다 먹었니?"
"아. 그거요. 조금 남았어요. 아껴먹어서…."
"굳이 아낄 필요는 없는데. 얼마든지 있으니까."
내 말에 동생 쪽의 표정이 살짝 밝아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참 식탐 많을 아이들이다. 장담하는데 얘들이 먹는 게 나보다 양이 많을지도.
"전에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냐? 내가 원하는 게 있다고."
식탁에 앉은 나와 남매.
내 말을 들은 남매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캐슬이라는 곳이 있는데…."
나는 천천히 캐슬이란 곳에 대해서 이야기 해줬다.
너무 자세하게는 이야기해줄 필요 없다. 그건 민희의 몫이니까.
적당히 가감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나자 오빠 녀석이 나에게 말한다.
"저희끼리…. 상의 좀 해도 될까요?"
짜식. 어디서 본건 많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자리를 비켜줬다.
그래. 그래도 저렇게 신중한 게 낫지. 저런 모습들은 맘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