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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왔구나."
"네. 별일 없었죠?"
"지금 이 상황이 엄청나게 별일인 거 아니니…?"
물약 후유증은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지금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운지 승규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어디 보자…."
처음에 잡아 왔던 탐지 세 마리. 그리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녀석. 마지막에 잡아 온 네 마리.
총 여덟 명. 근데 한국어 할 줄 아는 녀석의 상태가 조금 말이 아니다.
"어떻게 됐어요? 말해요?"
"어…. 말은 했는데…."
"말을 했어요? 진짜!? 어떻게요?"
"그냥 뭐…. 조금 참기 힘든 고통을 오래 줬지."
"아니…. 겨우 그걸로 입을 연다고요?"
"응? 원래 고문이 그런 거 아냐?"
"말을 안 해도 죽고 해도 죽는데…. 그럼, 말을 안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글쎄. 논리적으론 그게 맞는데…. 누구나 논리적인 건 아니니까."
"나 참…. 나약한 새끼네."
하긴 민희를 만난 날 그 부장 옆에 대리 새끼도 결국 페이즈 아웃에 대해 줄줄 입을 열었지.
누구나 논리적인 건 아니라는 승규의 말…. 사실 맞긴 하다.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면 '차라리 죽여줘'라는 말도 나오긴 하니까.
"그래서. 뭐래요?"
"그게 조금 어이가 없어. 약을 찾으러 왔데. 여기에 약이 있나 봐. 엄청 많이."
"약? 씨발…. 무슨 진시황의 불로초라도 찾으러 왔나…. 뭔 약을…. 약…. 설마?"
"응. 네가 생각하는 그 약."
"뽕?"
"글쎄. 약도 종류가 많으니까. 뭐일지는 모르지."
"아니. 미친 짱개 새끼들이 왜 여기에서 약을 찾아? 대가리들이 약에 절여져서 녹았나?"
"그게…. 살짝 짚이는 게 있긴 한데."
"네?"
"이 많은 양의 MRE는 여기 왜 있다고 생각해?"
승규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류센터를 점거하고 나서 그 많은 양의 MRE를 처음 봤을 때, 충격과 놀라움을 느꼈지만…. 어쨌든 이 많은 양이 수중에 들어온 거라 더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 그 이후에도 더 의문을 가지거나 하진 않았지.
근데…. 정말 궁금해했어야 하는 일이긴 하다.
왜 여기에 있을까?
전혀 뜬금없는 물건이긴 하다. 근처에 미군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련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게요…?"
"너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여기 들어와서 이걸 본 이후로 늘 생각했었어. 왜 여기에 MRE가 있을까? 그것도 한 상자 수준이 아니고 냉동창고 세 개분에 가까운 엄청난 양이 왜 여기 있을까?"
"그래서요?"
"일단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누군가가 빼돌린 거지. 그것도 어지간한 규모 있는 놈들이."
"그렇겠죠. 이정도 양이면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거고…. 옮기기도 쉽지 않았겠죠."
"그래. 생존을 위해 누군가가, 혹은 어느 단체가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대량의 장기 보존식을 준비했어. 그런데…. 그들이 과연 식량만 준비했을까?"
"음…."
"너에게 따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제법 되는 금괴도 발견하긴 했어."
"금괴요?"
"응. 지금 와서는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지만…. 그래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흐뭇해지긴 하는 양이지."
"으음…. 하긴. 화폐가 제 기능을 잃으면 결국 가치 있는 건 금 같은 귀금속이니…."
"그래. 생존에 필요한 식량, 그 후에 어찌 될지 모르니 자산가치가 될 수 있는 금. 그리고?"
"약…. 도 그런 거라 이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무게대비 가격도 비싸고 약 자체만으로도 효과가 있겠지. 어차피 죽어버릴 세상이라면 거나하게 약이나 하고 황홀한 상태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으니까."
"으음…."
약이라. 그런 게 여기에 있다고? 그래. 있을 수도 있지. MRE도 있고 금괴도 있는데 약이 있는 게 이상하진 않잖아.
"근데…. 왜 지금 와서 갑자기?"
"글쎄. 그것까진 모르던데? 뭐 한동안 몰랐다가 인제 와서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지."
"그래요. 뭐 그거야 그럴 수 있다고 치고…. 근데 약은 그럼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몰라. 위치도 모르는 거 같던데. 우리도 아직 찾아볼 생각도 못 했고."
"약이라…. 하."
질병 해제가 있으면 중독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세상이다.
결국, 약은 멸망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오락거리가 되는 셈이고.
원래라면 그 끔찍한 부작용 때문에 대부분이 고개를 가로젓는 물건이잖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리턴이 엄청나게 크지만…. 리스크가 아예 끔찍한 수준이다. 중독과 사망. 끝이 정해져 있는 악순환.
근데 그 리스크를 스킬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 결국, 막대한 쾌락만 남는 물건.
그리고 여기에 그게 있다고? 하하…. 씨발. 물류센터 이름을 바꿔야겠네. 보물섬으로.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물건을 못 봤으니까. 근데 짱개 녀석들이 이렇게 많이 왔다면…. 결국 그게 신빙성을 더해주는 게 아닐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진 않겠지."
"그렇긴 하지만…. 이 새끼들이 단체로 약 처먹고 대가리가 회까닥 돌아서 엄한 데서 지랄하고 있을 수도 있죠."
"그래. 암튼 간 그렇다는 거야."
"약이라…. 하. 이것 참."
생각이 필요한 건수다. 이건 신중해야 하는 일이야.
한참 생각한 나는 승규를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끼고 나를 바라보는 승규. 내가 뭘 물어볼지 아는 느낌.
"형."
"안 한다."
"뭘 물어볼 줄 알고요."
"뻔하지. 실제로 약이 있고, 그 약이 엄청나게 많다면 그걸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려는 거잖아? 게다가 유정이도 질병 해제가 있고. 더없이 좋은 상황이지. 그거 물어보려는 거 아냐?"
역시. 이 사람을 리더로 만든 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잘한 일 중에 하나 인 거 같아.
이렇게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지.
무력으로는 내가 우월할지는 몰라도, 인간적으로서, 남자로서 존경심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왜 안 해요?"
"나는 유정이의 스킬이 누군가를 제어할 수 있는 스킬로 만들고 싶지 않아."
"네?"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다는 건, 언제든지 치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하…. 그런 것까지 생각하신 거예요?"
"당연하지. 약이 엄청 많다면, 소량의 약으로 누구든 노예처럼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니까. 치료와 지속적인 배급만으로 사람을 속박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죠…."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사는 것은 끝이지. 게다가 아무리 중독이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캐미컬 적인 반응이지, 사람의 의존도와는 다를 거야. 몸이 그걸 원하지 않아도 사람의 인식이 그렇게 변하겠지.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는 쾌락. 과연 질병 해제가 그 인식까지 치료해 줄 수 있을까?"
역시…. 생각이 깊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깊이가 달라.
나는 어떻게 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약에 대해서.
마음대로 쓰고 완벽하게 초기화시킬 수 있는데…. 그걸 마다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잖아.
게다가 그렇게 되면 질병 해제 스킬 숙련도 할 수 있고….
근데 승규의 말을 들어보니 역시…. 위험하긴 하다.
인식이라니. 그런 것까진 생각 못 해봤는데.
몸의 의존이 아닌 정신적 의존이라는 건가. 언제든지 치료가 될 수 있으니 더 쉽게 찾게 될 테니까?
"알겠어요. 형의 말을 들으니 느껴지는 바가 있네요."
"만약 찾게 되면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 같은 데다가 뿌려버릴 거야. 절대로 다시 줍지 못하는 곳에 골고루 뿌려버릴 거야."
"좋은 생각이네요. 갈등의 씨앗은 애초에 싹을 자르고 뿌리를 파내야죠."
"그래. 그런 거지."
일단…. 대충 약 이야기는 됐다.
승규의 의견이 이렇게 확고하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럼 이제…. 놈들의 처리만 남았네.
"그럼 이제…. 남은 놈들 처리를 하죠."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단…. 스킬 마스터 한 사람 또 누가 있죠?"
"유진이. 연서, 미연이. 민주."
"유진이가…. 성장이죠? 연서 미연은 식물 자매고. 민주? 아. 기름?"
"응."
"역시 성장이랑 식물 조종…. 음…. 일단 기름은 놔두고."
"민주는 왜?"
"약간…. 스페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생산 스킬이였던 여잔데…. 인제 와서 공격이나 전투를 위한 스킬을 배우게 하기도 그러니까."
"으음…. 하긴. 민주는 사람 죽이기엔 조금 여리지."
"그러니 잠깐 두고…. 하아. 식물 자매라."
"아. 연서랑 미연이는 자기들이 찍고 싶은 스킬이 있다고 말했어."
"네? 뭐요?"
"식물 조종이랑 성장."
"엥? 그건 이미…. 아. 식물 조종 있는 사람은 성장을 찍고 성장 있는 사람은 식물 조종 찍고?"
"응. 그러고 싶다네."
"완전히 정말 식물 자매로 가려나 보네."
"근데 그게 물류센터에도 좋아. 어쨌든 그 둘이 식물 키우는 데는 프로니까. 이 울타리도 다 만들었고…. 게다가 성장은 유용하니까."
"그렇죠. 성장은 훌륭하죠. 솔직히 성장만 한 10명 있으면 그 사람들은 인프라만 조금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을 텐데."
"맞아."
"민주…. 그 여자도 성장 찍으라고 할까."
"그래도 좋고."
"그럼 유진이는요?"
"글쎄. 내가 가부장적인 사람이라 그런진 몰라도 여자애들한테 공격 스킬 배우라고는 못 하겠네. 사람 죽이는 짓을 시키고 싶지도 않고."
"살아남으려면 해야죠."
나 역시 승규와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승희, 미나, 세아, 안나를 학살자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우리야 그렇다 치고…. 물류센터 같은 곳은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각자 맡은 역할에서 프로가 되는 게 더 나을 수 있으니까.
"그럼 일단은…. 그 넷을 부르죠."
"그래."
승규가 잠시 들어갔고, 유진이와 연서, 미연, 민주가 승규를 따라 나왔다.
근데 왜 다른 사람들도 다 따라 나온 거야?
"왜 다 나온 거예요?"
"그러게. 차마 말리진 못했어."
"뭐, 잘됐네요."
내가 가까이 가자 약간 움찔하는 네 여자.
"이제부터 뭘 할지 알고 있어?"
아무 말이 없는 네 여자. 모를 리가 없지. 꽁꽁 묶여있는 중국인들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데 할 게 뭐가 있겠어?
"이놈들은 여기를 공격한 놈들이야. 그대로 있었으면 이놈들은 여기. 너희들의 집을 짓밟고 들어와서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너희들을 강간했겠지. 그리고 그 다음은 뭐….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인상을 쓰는 여자들. 그럴 만하다. 유진이도 그렇고 민주도 그렇고 이미 경험해본 일이니까.
연서와 미연이는 약간 케이스가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이해 못 하진 않을 거다.
"그리고 너희는 스킬을 마스터 했으니 코인이 필요해. 명분과 동기가 확실한 상황이야. 너희 손으로 이놈들을 죽여."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적당히 목이나 허벅지를 찍고 여자들 보고 서 있으라고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언제까지 남의 등 뒤에서 숨어있게 할 수는 없잖아.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고 하더라도 할 때는 해야 하는 거니까.
"제가 먼저 할게요."
유진이가 앞으로 나섰다.
하긴 쟤는 마트에서 조폭 놈들 찍어 죽일 때도 망설이지 않았지.
"자."
웃으면서 마체테를 건네줬고, 유진이는 덤덤하게 받아들었다.
"유진아."
"네."
"너, 다음 스킬 원하는 거 있니?"
"저요…. 저도 식물 조종이요."
"음…. 혹시 서로 이야기를 했던 거니?"
"네. 연서 언니, 미연 언니랑은 항상 붙어 다니니까요. 스킬 쓰는 것도 많이 봐서 어떤 것인지 잘 알고요. 게다가…. 식물 조종이 숫자가 많아지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 것 같아서요."
"예를 들면?"
"지금은…. 한 명이 식물 하나 밖에 못 움직여서 복잡한 것들을 만들기 힘드니까요."
"음…."
식물 조종이라. 분명 쓰레기 같은 스킬이라고 생각했지만 여기 한정으로는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겠지.
"그래. 그럼. 하나 죽이고 보유 코인을 말해줘. 식물 조종은 분명 10만 코인이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네."
"시작해."
마체테를 들고 짱개를 노려보는 유진이.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더니 그대로 짱개 하나의 목을 내리쳤고, 짱개는 드디어 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