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75화 (17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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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망한 세상을 고오급 외제 차를 끌고 가로지른다.

참 낭만적이잖아? 자동차 광고 같기도 하고.

다만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기껏해야 40에서 50킬로.

군데군데 도로가 푹푹 파여있어서 더 속도를 냈다간 자칫 잘못하면 피곤한 상황이 된다.

게다가 곳곳에 깔린 쓰레기와 온갖 잡동사니들.

50킬로를 밟는 것도 진짜 어쩌다 한 번이다. 평상시 속도는 그것보다 느리다.

그래도, 전동 휠보단 몇 배는 빠르다.

시간이 대폭 줄어들고 옮길 수 있는 물건도 많다.

무엇보다 춥지가 않아. 그게 최고야.

빵빵하게 히터를 틀고 창문을 열었다. 기름을 길바닥에 버리는 짓이긴 하지만, 어쩔거야? 어차피 기름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걸.

게다가 탐지를 쓰면서 가야 하니 너무 빠르면 위험하다.

아직 내가 다른 짓을 하면서 운전을 할 정도로 능숙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느긋하게 고가도로를 달린다.

벙커까지 가장 빠른 길. 걸어서 갈 때는 굉장히 짜증 났는데 차 타고 가니 이렇게 신나네.

하늘에 떠 있는 인간의 기척을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실수로 도로의 조금 파인 부분을 밟아 차가 크게 한번 출렁거렸고, 안에 실었던 물건들이 껑충하고 튀었다.

뭐 잘못된 거 없나 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앞을 보는데 머리 위쪽에서 기척이 잡혔다.

그 순간 등골이 쭈뼛하며 진짜 화들짝 놀랐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두세 번 확인했을 정도.

분명 사람의 기척이었다. 아파트 고층 같은데 사람이 있는 게 아닌 말 그대로 허공. 그것도 일정한 속도로 나를 따라오고 있는 인간.

머릿속에 번뜩 비행 스킬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나를 비행 스킬로 쫓아오고 있어.

탐지를 쓰고 앞만 보고 가니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평상시라면 크게 한번 둘러봤을 텐데, 운전을 하고 있으니 앞만 보고 간 게 문제였다.

과연…. 저새끼는 어디서부터 쫓아왔을까? 물류 센터부터는 아니었겠지?

물류 센터가 발견됐으면 골치 아프다. 어느 정도 공격은 막을 수 있겠지만, 공격당한다는 것 자체가 짜증 난다.

일단 저 비행하는 놈을 잡아야 해. 놈인지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잡아야 한다.

저 새끼가 만약 일행이 있고 저렇게 돌아가서 자신이 본 것을 알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가 눈치 못 챘으면 모를까, 발각된 이상 잡아 죽여야 해.

근데…. 날아다니는 새끼를 뭐로 잡지.

머리를 굴려본다. 그렇다고 갑자기 뾰족한 생각이 난리가 없지.

비행…. 워낙 귀한 스킬이라 따로 대응하는 방법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비행도 사기지. 선공은 할 수 있지만 공격당하진 않을 테니까.

총 같은 게 없는 세상에서는 정말 훌륭한 스킬이다.

근데 왜 이렇게 많이 없는지가 의문이다. 뭔가 심각한 페널티가 있나?

일단…. 유인하자. 그 수밖에 없다.

눈치 못 챈 척하고 가까이 오게 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저 녀석이 공격하게끔 방심을 유도하던가.

터널…. 터널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근데 근처에서 터널을 본 적은 없다. 아오 씨. 꼭 찾으면 없어.

뭐가 좋을까. 그래. 일단 고가도로니까 그걸 이용하자.

내려가면 저놈도 따라 내려오겠지. 일단 해보자. 내가 눈치챘다는 낌새는 보이지 말고.

500미터 앞에 내려가는 길. 자연스럽게 차선을 바꾼다. 어차피 차선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지만.

곧 내려가는 길이 나왔다. 좋아. 내려간다. 놈은? 쫓아온다. 그래. 내가 목표면 당연히 쫓아오겠지.

내가 탐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놈이 모른다는 게 나의 가장 큰 무기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원래 목적은 고가도로 밑에서 차가 이상 있는 것처럼 세우려고 했는데…. 마땅치 않다.

그렇게 한다고 내게 다가올 리가 없잖아.

일단 도로를 끼고 슬슬 계속 갔다. 그냥 쌩하고 달려가 볼 걸 그랬나? 비행 속도가 얼마까지 가능한지 모르겠네.

마침 도로변에 커다란 고깃집이 보였다.

넓은 주차장에 커다란 단독 건물, 그래. 일단 저기로 가자. 마치 저기가 목적지인 것처럼 행동하자.

자연스럽게 고깃집으로 들어가 차를 주차했다.

매번 그렇게 차를 댄 것처럼, 이곳에 자주 오는 사람인 것처럼.

차에서 내리니 녀석의 기척이 안 보였다.

어디지? 어디 있지? 분명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거다. 함부로 두리번거리면 바로 눈치채겠지?

일단 앞쪽과 왼쪽엔 없다. 자연스럽게 뒤를 보고 싶은데.

아. 그래. 이러면 되겠네.

차에서 뭔가를 두고 내린 것처럼 몸을 숙이고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저깄네. 길 건너편, 주유소 간판 뒤.

아무 물건이나 들고 다시 차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삑삑-

차 문을 잠그고 고깃집 옆으로 돌아간다. 마침 뒤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어떻게든 저놈의 사각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저놈이 내게 접근할 거다.

거리. 다른 건 필요 없다. 수면을 쓸 수 있는 거리만 나오면 된다.

뒤로 돌아가니 고깃집 주방으로 들어가는 뒷문과 컨테이너 하나가 있다.

뭐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숨기만 하면 돼. 저놈이 궁금하도록, 이쪽으로 다가오도록.

가만히 숨어서 탐지를 계속 돌린다.

날파리 녀석의 기척이 아까 숨었던 곳에서 살그머니 나와 내 차가 있던 쪽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보일 것 같은데….

고깃집의 유리 벽, 여러 겹의 유리 너머로 내 차가 보인다. 기척도 그쪽으로 오고 있으니 곧 모습이 보이겠지?

어디 어떤 놈인지 한번 확인이나 해볼까….

음? 왜 없어?

기척은 잡히는데 모습이 없다. 와…. 설마 투명화야? 투명화에 비행? 더블 스킬?

와씨…. 승희나 미나에게 얻게 하고 싶은 그 조합이다. 역시, 좋아 보이는 건 누군가 이미 하고 있다니까?

마침 잘 만났다. 정말 하늘이 준 기회야.

비행 스킬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이 정도로 자유자재로 쓰는 녀석이면 알아낼 수 있는 게 많겠지.

자…. 조금만 다가와라. 조금만 오면 수면 스킬의 범위다.

유리를 통해서 스킬을 쓸 수 있으니 한 5미터 정도만 더 오면 스킬을 쓸 수 있다.

그대로 도망갈 생각 말고 꼭 이쪽으로 와라. 제발…. 제발….

거리 안쪽으로 들어왔다.

무효화를 쓰니 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이바를 쓰고 몸에 딱 붙는 슈트 같은 걸 입고 있다. 그리고 바로 수면이 걸려 쓰러지는 녀석.

멍청한 녀석. 투명화까지 있다고 방심했네. 아마 잠드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발각될 거라는 의심을 조금도 못했겠지.

주변엔 저 녀석과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고 쓰러진 녀석에게 다가간다.

전리품을 확인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과연 이 보물상자에선 뭐가 나올까? 두구두구두구.

가까이 다가가니…. 오우 씨. 대박이다. 완전 대박이 터졌어.

아까 봤을 때 혹시나 했었다. 남자가 무슨 저런 슈트를 입나 싶었으니까.

그래도 라이더 슈트같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다. 여자야.

볼록한 가슴에 넓은 골반. 그리고 평평한 와이 존.

미쳤다. 이런 횡재라니. 일단 몸매 좋은 여자라는 것은 확인됐다. 적어도 매혹으로 정보는 탈탈 털어먹을 수 있다는 소리.

좋아. 이제 얼굴을 확인해 보자. 떨리는 순간이다. 여자의 몸을 일으켜 앉힌 뒤 하이바를 벗겼다.

아…. 젋은 여자긴 한데. 뭐…. 그저 그렇다. 실망이야.

이래 봬도 눈이 높아진 놈이라고.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단 말이야. 으휴.

사실…. 안나를 본 이상 어느 여자가 눈에 찰까 모르겠다.

승희도 제법 이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미나나 안나랑 비교하면 그냥 평범한 사람이 돼버리는 현실이다.

그러니 이런 여자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안타까운 현실에 할 말을 잊는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일단 여자인 것에 만족하자.

적어도 이 여자에겐 들을 수 있는 것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할까. 벙커로 데려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지금 차에 태울 수도 없다.

트렁크고 뒷자리고 빈자리는 없다.

옆자리엔 소중한 달걀이 타고 있다. 이 여자를 싣고 가긴 애매하다.

그럼 여기서 하지 뭐.

고깃집. 문을 열어본다.

잠겨있다. 아씨…. 뭐 하려고 잠가놨어.

아까 숨었었던 뒤로 돌아가 주방 쪽 문을 열어본다. 여기도 잠겨있다.

귀찮네 정말.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유리문. 그냥 부숴버리면 되지.

마체테를 가져와서 유리문 모서리에 잠금쇠가 있는 부분을 손잡이 부분으로 후려쳤다.

와장창!

모서리 부분만 박살 내려고 했는데 문 한쪽이 다 박살 났다.

아이씨.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됐어. 열렸으니 됐다. 어쨌든 들어 왔잖아.

예전 같았으면 보안경보 같은 게 울렸겠지만, 이젠 그런 걸 신경 쓰진 않는다.

경보음 같은 게 울렸으면 모를까. 울린다 하더라도 가서 뽑아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출동할 보안업체 같은 건 없으니까.

여자를 짊어지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박살 나서 찬바람이 들어온다. 아오. 귀찮아 죽겠네.

고깃집은 제법 커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좌식 방이 있었다.

먼지가 좀 쌓여있었지만 한쪽에 쌓아져 있는 방석을 발로 쓰러뜨려 적당히 쓱쓱 문지르고 그 위에 여자를 눕혔다.

자…. 이제는 정보 공유의 시간인데.

아차. 매혹을 안 걸었네. 매혹을 걸고 여자를 흔들어 깨웠다.

매끈한 라텍스 재질의 슈트.

가까이에서 보니 오토바이를 타거나 할 때 입는 용이 아니다. 좀 더 매끈매끈하고…. 물에서 입는 용 같은데.

그래. 잠수할 때 입는 그런 거. 암튼 상당히 두꺼워 보인다.

이거 벗기면 생각보다 호리호리할지도 모르겠다. 이 옷…. 상당히 좋아 보이네.

결국, 여자가 눈을 떴다.

내 쪽을 보더니 친근한 눈초리로 나를 향해 웃는다.

하아…. 이제는 이 반응이 무섭다.

매혹. 어지간해선 쓰고 싶지 않은데. 그 효과가 너무 좋아서 안 쓸 수가 없는 스킬.

"일어나봐."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여자.

나를 향해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 소름 끼친다.

뭐랄까. 정상적인 사람의 눈빛이 아니야. 약간 광기 어린 사람의 눈 같다.

"왜 나를 쫓아왔지?"

"궁금해서요."

"뭐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저렇게 당당하게 차를 끌고 다니나."

"같이 다니는 사람은 있어?"

"아니요. 혼자 다녀요."

혼자 다닌다고? 의외네. 아니, 내 질문이 틀렸구나. 이렇게 날아다니는데 같이 다닐 사람은 없겠지.

"그럼 어디 속해있거나 모여 살거나…. 그런 건 있나?"

"네. 저는 컴퍼니란 곳의 소속이에요."

이런…. 의외의 곳에서 익숙한 이름을 듣는다. 컴퍼니라니. 하. 이것 참.

"혹시…. 정종찬이라고 알아?"

"아뇨. 모르겠는데요."

"몰라? 차장이라고 하던데?"

"몰라요."

뭐지. 왜 모르지? 서로 잘 모르나? 분명히 그 새끼도 컴퍼니 소속이라고 했는데.

혹시 컴퍼니가 여러 개인가? 아니면 여기도 짭이 있나?

"그럼, 캐슬은 알아?"

"네."

"안다고? 캐슬은 어떻게 알아?"

"제 역할이 캐슬로 보낼 사람들 찾는 거니까요."

"아…. 그렇군. 이해했어."

이 일대는 캐슬의 영역. 결국, 컴퍼니 놈들은 이곳에 일부 남아서 혹시나 있을 인간들을 잡아다가 계속 보내는 건가?

대충…. 이해가 갔다. 어느 정도 말이 되네. 아니, 그게 사실일 거다. 매혹에 걸린 사람은 거짓을 말할 수 없으니까.

"그 배낭에 들어있는 건 뭐지?"

"여기요? 쌍안경이랑…. 무전기랑…. 담배랑…. 장갑이랑…."

자신의 배낭을 열어 물건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여자.

무전기. 씨발. 무전기가 있네.

"무전기…. 일행에게 연락하는 용인가?"

"네."

"연락했나?"

"네?"

"나를 발견하고 연락했냐고."

"아니요. 아직요."

"왜지? 보통 발견하면 바로 연락부터 하지 않나?"

"거리가 안돼서요. 여기서는 연락이 안 돼요."

아…. 씨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 여자가 뭘 봤든 내 존재는 노출이 되지 않았어.

"나를 발견한 이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거지?"

"네."

확인 삼아 한 번 더 물어봤다. 좋아 됐어. 그럼 골치 아픈 일은 없어졌다.

이제 좀 편안하게 궁금한 것에 관해서 물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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