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74화 (17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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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오우. 웬일로 차를 끌고 왔어요?"

내가 차에서 내리자 진영이가 반갑게 맞이한다.

참 붙임성 좋은 녀석이야. 나에겐 없는 능력. 어떻게 보면 저런 성격이야말로 수많은 스킬보다 값어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난 때려죽여도 못할 텐데. 아마 저게 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할 거야.

"식량 가지러 왔다."

"아하.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래. 승규 형은?"

"늘 그렇듯 비닐하우스에 있죠. 지금은 할 게 그것밖에 없으니."

"그래. 알겠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영이를 바라본다.

"야. 혹시."

"네?"

"스마트 폰의 지도 앱 되게 하는 방법 없냐?"

"아. 그거요. 저도 별 쌩쑈를 다 해봤는데 안되더라고요. 통신사랑 GPS가 맛이 갔다고 하더라도 지도는 보여야 하는데 아예 안 뜨는 거 보면."

"그치? 나만 안 되는 거 아니지? 역시…. 이 새끼들 일부러 막은 거라니까."

"네?"

"아냐. 혼잣말이야."

"근데요."

"응?"

"형 안드로이드 써요?"

"어. 우주폰. 왜?"

"오프라인 지도 같은 거 앱만 있으면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오프라인 지도? 현재 위치 파악 안 되는 그냥 지도?"

"네. 그건 될 거 같아서요. 근데 다운을 받을 수 없으니 어차피 안 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런가. 그렇겠네."

이 짓을 한 놈들이 지도를 모두 없애고 싶었으면 현실에 있는 지도책 같은 것도 싹 없애버렸을 거다.

충분히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놈들이잖아.

그걸 안 했다는 건 그냥 편하게 지도로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게 싫었다는 거다. 이유가 뭘까?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어쨌든 지금은 못 구한다는 소리잖아?"

"그렇죠. 그런 앱이 들어있는 스마트 폰을 줍지 않는 이상."

"에휴. 됐다. 때려치워야지."

"답답하죠?"

"당연하지. 거지 같아."

그렇게 말하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작게 웃는 진영이. 쟤는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거야.

지도. 종이 지도는 남겨 놓고 앱으로 쓰는 지도는 못쓰게 한 이유는 뭘까. 그게 궁금하다.

이 새끼들은 마구잡이로 일하는 것처럼 보이고 하는 일에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다 뚜렷한 의도가 있다.

결국은 재미가 목적일 텐데. 지도 앱이 재미를 해치는 부분이 있나? 멍청한 내 머리로는 이해를 못 하겠다.

"어. 왔어? 진영이한테 무전 온건 들었다."

이 사람들은 왜 매번 올 때마다 비슷한 거 같냐.

비닐하우스에 있는 승규와 유정, 하율, 그리고 안나. 저번이랑 똑같은 구성인데?

"다른 사람들은 뭐하는데 맨날 이렇게만 비닐하우스에 있어요?"

"각자 맡은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비닐하우스에 그렇게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게다가 지금 시간이면 자유시간이야."

"그런가."

물류 센터의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나야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지.

그런 내게 다가오는 유정과 안나.

안나는 생긴 건 굉장히 도도해 보이는데 하는 짓은 개 같다. 아니 이러니까 욕 같네. 나쁜 뜻이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개과?

내 곁으로 다가와 어떻게든 친한 척을 하고 싶어하는 모습.

뭐지? 내가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아닐 텐데. 고작 구해준 거로 이렇게 친하게 구는 것도 좀 과하고.

"안녕. 안녕하세요. 나는 안나입니다."

"뭐야. 웃기네. 그래도 자연스러운데?"

"요즘 배우고 있는 게 인사라서요. 어때요. 잘 지내요?"

"매번 챙겨줘서 잘 지내고 있죠. 오늘도 잔뜩 얻어가려고 왔어요."

승규의 부인인 유정은 뭐라고 해야 하나. 예의를 차리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굉장히 싹싹하다.

겉으로 크게 내색은 안 해도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사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고 싶다.

승규와 유정. 참 좋은 사람들이야. 좋은 사람들끼리 만난다는 게 저런 느낌인가?

"걱정 마요. 이미 잔뜩 준비해 놨으니까. 자주자주 오면 많이 챙겨줄 텐데 뜨문뜨문 오니 많이 못 주네요."

"그렇게 말하니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요. 자주 와요. 그리고 안나도 좀 봐주고."

"왜요?"

"많이 찾아요. 왜 안 오냐고."

"저를요?"

"네."

"왜요?"

"구해줬잖아요."

"고작 그걸로?"

"고작 이라뇨. 안나에게 들은 내용이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고 안나에게 처음으로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 성철 씨래요. 그러니 특별하게 보일 수밖에 없죠."

"그게 그 정도인가."

물론 나에게 호감을 보이면 좋기야 하지. 그렇지만 조금 이해가 안 간다. 음…. 외국인이라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들이랑 인식이 좀 다른가? 잘 모르겠네.

나를 보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안나.

안 그래도 이쁜 여자가 이렇게 웃고 있으니 심장이 벌렁거리는 느낌이다.

하. 이거 몰카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나를 좋게 보는 건 쉽게 이해가 안 가는데.

모르겠다. 에휴. 좋은 게 좋은거지.

당장이라도 데려가고 싶지만 이제 한국어 인사말만 겨우 하는 여자를 데려가는 건 쉽지 않겠지.

조금 더 여기 있으라고 하자. 일단 여기도 분위기는 좋으니까.

"탐지는 배웠데요?"

"아. 그거. 네. 배웠어요. 상당히 재밌어해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 수 있다고."

"네. 그만큼 사기 스킬이에요. 아…. 그래서 말인데. 하율이요."

"네?"

"지금 몇 살이죠? 다섯인가?"

"네. 이제 곧 여섯 살이죠. 개월 수로 하면 47개월."

"말 잘 해요?"

"아직 많이 어눌하죠. 그래도 곧잘 해요. 갑자기 하율이는 왜요?“

애 엄마라 그런지 하율이 이야기에 약간 민감해지는 느낌이다.

"스킬 때문에. 쟤도 스킬은 쓸 수 있으니까."

"아…. 그렇죠.“

스킬 이야기라고 해서 그런지 약간 안도하는 듯한 유정.

"가능하면 하율이도 주변 인간 탐지 고르게 해요. 어린아이에게 공격 스킬은 어려우니까. 아직은 이르니 조금 나중에 배우게 하던가."

"그래요. 아직은…. 조금 이른 거 같아요."

"뭐, 부모니까 알아서 잘하겠죠. 저 같은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니."

"스킬에 관한 건 다 성철 씨에게 물어볼 거에요. 우리 중에 제일 잘 아니까."

"뭐, 그거야 얼마든지 알려드릴 수 있죠. 그리고…."

"전에 부탁한 거 말하려는 거죠?"

"아. 네. 그 리스트. 좀 보셨나요?"

"네. 잠깐 있어 봐요. 가져올 테니. 근데 큰 기대는 말아요. 그렇게 많은걸 알아낸 건 아니니까. 안나가 지명을 많이 혼동해서."

"뭐든 상관없어요."

"그럼 있어 봐요. 하율아. 이리 와봐."

유정은 하율이랑 같이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안나는 나를 계속 생글거리면서 바라본다.

하…. 유혹당하겠네. 매혹당하면 이런 기분인가? 어떻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런 기분이냐.

내가 한번 어색하게 웃어주니 정말 환하게 웃는 안나.

그러더니 기분이 좋은 듯 비닐하우스에 자라고 있는 작물을 구경한다.

"성철아."

슬그머니 나에게 붙어서 작게 말하는 승규.

"왜요."

"안나 말인데."

"네."

"어떻게 할 거냐? 계속 여기 둘 거야?"

"왜요? 문제 있어요?"

유정이 안으로 확실히 들어간 걸 확인한 승규가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아무래도…. 안나를 데려가야 할 거 같아."

"왜요?"

"안나를 싫어하거나 하는 건 아닌데…. 쟤 때문에 여기 남자들이 다들 제정신이 아닌거 같아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아랫도리에 덜렁거리는 게 달린 사람이라면 안나를 보고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쉽지 않을 거다.

저렇게 한번 해맑게 웃어주기만 해도 근심·걱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인데…. 오죽할까.

게다가 지금 사귀고 있는 놈들은 더 할 거다.

안 쳐다볼 수도 없고 쳐다보니 눈치 보이고…. 유부남인 승규가 저런 말을 했다는 건 본인도 그런 상태라는 뜻이겠지.

"알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형수님한테 좀 더 한국어를 배웠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러면 좋기야 하겠지만 우리도 좀 살려줘. 내가 어지간해서는 이런 말 안 하는데 조금 심각하긴 해."

하…. 이걸 어떻게 한다. 물론 당장이라도 데려가고 싶긴 한데.

일단 나도 말은 꺼내야 하잖아. 이제 겨우 넷이서 같이 사는 걸 허락받은 놈이 무슨 염치로 하나가 더 있다고 말하나.

아니…. 지금 분위기 좋을 때 먼저 말하는 게 낫나?

아오…. 모르겠다. 일단 말이라도 해봐야겠네.

"알겠어요. 일단…. 시간을 좀 줘요."

"그래. 부탁 좀 하마. 여기 남자들 좀 살려줘."

그렇게 말하는데 유정이 손에 잔뜩 뭔가를 들고 하율이와 함께 나왔다.

나와 딱 붙어서 이야기 하는 승규를 보고 의아한 듯이 물어본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요?"

"아니…. 양파가 잘 안 자라서 뭐 아는 거 있나 물어봤어. 모른다네."

아이고…. 불쌍한 남자야. 하긴 어쩌겠어. 정상적인 애 아빠라면 저게 맞겠지. 이런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저렇게 건실한 남자라니.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네.

"자요."

유정이 건네주는 종이를 한번 훑어봤다.

별거 없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적혀있는 게 많다.

"이 자리에서 대충 훑어볼 양은 아니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뭐 이런 거로. 아. 그리고 이것도."

"뭐에요?"

"고기랑 야채랑 감자하고 양파랑…."

"이렇게 잔뜩 줘도 돼요?"

"이게 다가 아닌데요? 이따가 갈 때 달걀도 좀 가져가요. 요즘에 닭이 많아져서 달걀이 남기 시작했거든요."

"닭이 남아요?"

"우리가 너무 크게 일을 벌였나 봐. 모이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숫자가 늘어났어요."

"어떻게 닭이 남아요? 신기하네. 다 잡아먹으면 되잖아요?"

"그렇긴 한데. 맨날 닭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왠지 굉장히 사치스러운 소리인 거 같은데요."

"그렇죠? 나도 이게 맞나 싶어요."

물류 센터는 지나치게 잘 돌아가고 있나 보다. 이거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

닭이 남는다고? 그럼 우리 쪽에도 좀 가져가서 키워볼까.

"닭 키우는 거 어려워요?"

"쉽진 않은데…. 그래도 우리는 이것저것 있으니까요. 성장 스킬도 두 명이나 있고, 내가 질병 해제 스킬도 있으니 어지간해선 폐사하지도 않고. 현정이가 힐 해주면 어지간한 상처나 부상도 다 낫고."

"와. 동물 복지 엄청나네."

"후후. 그렇죠? 이대로 양계장으로 이름을 바꿔도 될 것 같다니까요."

그렇구나. 질병 해제를 동물한테 쓸 수도 있네.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이래서 여러가지 시각이 중요한 거다. 한 방향에서만 계속 보면 틀에 박히고 굳어져.

"암튼, 그럼 이만 가볼게요. 챙겨주셔서 고마워요. 아. 그리고 저 휘발유 한 통만 줘요.“

승규에게 말하자 흔쾌히 대답한다.

"그래. 기름이야 민주 덕분에 넘치니까. 받아 놓은거 있으니 그거 가져가. 차 가지고 와서 그렇지?"

"네."

"그럼 아예 여기서 만땅 채우고 가."

"그래요. 그럼 저야 좋죠."

확실히 물류 센터를 만들어 놓은 건 잘한 일이다.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 아무리 내가 승희와 미나, 세아와 함께 산다고 하지만 물류 센터는 꼭 지키고 사수해야 한다.

물류 센터는 이제 단지 MRE의 보관 장소가 아니다. 이곳의 존재만으로 편해지는 게 한둘이 아니니 어떻게든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사람이…. 조금 더 필요하려나?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더 보내줘야겠네. 근데 있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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