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31화 (731/813)

731 소도시 라펩

=라펩의 주인인 본인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태도……!=

=긴 시간 라펩을 지켜온 족장을 우습게 볼 리 없지 않…….=

환인은 두 사비족의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쪽은 큰 소리로 역정을 드러내고 다른 쪽은 아닌 척하면서 상대를 무시하고 폄하한다.

저 상황을 짧게 두 글자로 평가하자면 촌극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겠지.

라펩의 은인이자 대정령의 친구를 홀대할 수 없다는 처지, 그렇다고 벨티칼의 족장으로서 동족의 위기를 그저 보아넘길 수 없다는 충성심에서 나온 역정.

귈탐은 현재 적굉이라는 용린족 인해 자신의 분노가 벨티칼과 헤뷜트로 향하지 않게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저 적굉이라는 도마뱀 대가리는 사비족의 상위 종족이라 말하는 용린족으로서, 그 자존심이 하늘에 닿아 그런 그녀의 숨겨진 호소를 눈치채지 못하고 모가지에 철근을 박아넣은 것처럼 뻣뻣하게 군다.

나라 걱정에 자존심을 버리고 몸을 던지는 사비족과 자존심으로 나라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사비족의 언쟁.

저걸 우습고도 슬픈 촌극이라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스꽝스러운 일일까.

물론 슬픈 쪽은 귈탐이고 우스운 쪽은 적굉이다.

=정교의 기본 지론은 만물을 직시하여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 헌데 수석 교위라는 자가 초대면부터 기를 세워 상대를 억누르려 하는가! 정녕 그것이 만엽 교장의 뜻인 것인가!?=

=족장이 어찌하여 그리 역정을 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본인이 정녕 교위의 역할에 충실하였다면 얼굴을 맞대었을 때 본분을 다하려 하였겠지.=

=무어라고……!=

도시 내에서 족장을 연행했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자 귈탐의 얼굴이 기막혀하여 어이없다는 듯이 변한다.

어이없어하는 것은 환인의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영혼 기사의 본분인 호위에 집중하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저 빨간 비늘 도마뱀의 언행이 점입가경이 아닌가.

“후.”

작게 웃음 짓는 소리가 들렸을까. 흑갈색 비늘에 작게 분홍빛이 올라올 정도로 열을 내던 귈탐과 그런 그녀의 그런 모습을 내심 코웃음 치며 비웃던 적굉은 저도 모르게 언쟁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환인은 그런 적색의 용대가리 사비족에게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는 것처럼 상큼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조롱이 섞인 그 제스쳐에 적굉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지는 것은 당연지사.

=무슨 뜻입니까.=

날카로운 어조의 추궁에 환인은 미소년 특유의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전의 비웃음, 지금 조롱 어린 태도의 뜻을 묻는 겁니다.=

=하…….=

은은한 노여움이 섞인 적굉의 목소리에 귈탐은 망했다는 듯이 한 손으로 눈두덩을 덮었다.

이런 상황을 막아보려 저 어린놈에게 누누이 당부를 하였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상위종인 용린족이 된 자들의 특징인 선민의식과 우월감이 사고를 터트렸다.

성제로 인해 현 용린족은 진정한 용린족이 아니라는 설說이 대두되어 반감을 품은 것도 있겠지. 그래서 본인이 직접 교위를 마중 나가기까지 하였는데……!

‘하지만 저렇게 아둔할 줄이야! 만엽 공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어린놈을 보내셨단 말인가!’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무난하게 풀어나갈 길을 필사적으로 찾는 귈탐의 귀에 환인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가 흘러 들어갔다.

“안쓰러울 만큼 멍청하고 눈치 없는 모습이 한 편의 촌극 같아 웃었는데, 뭐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오싹—

날붙이가 목덜미를 핥는 것처럼 귈탐의 흑갈색 매끄러운 비늘이 곤두서고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좌우로 활짝 열린다.

약간 무감정하지만 늘 솔직함을 담고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느낌의 화법을 쓰던 성제다.

요 며칠 그와 대화할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았기에 성제와 대화는 그녀에게 즐거움까지 주었었다.

족장인 자신은 이 도시에서 율법 그 자체, 자신에게 이토록 객관적인 시선을 보내며 솔직가감한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저택의 노예들에게도 차별의 눈빛을 보이지 않고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몸에 익은 예의의 흔적이었기에 그런 존중이 어색하지 않았고 진실되게 다가왔었는데 그런 성제가 저 정도로 상대를 비꼬고 조롱하다니?

귈탐은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생존본능으로 감지해냈다. 하지만 저 어린놈은 생존본능마저 개방하지 못하였는지 얼굴에 대놓고 노여움을 드러낸다.

=이곳은 영도가 아니며 바깥세상도 아니오. 당신의 무례를 웃으면서 넘겨줄 사람도, 당신의 뒤를 닦아줄 사람도 없다는 걸 명심하여야 그 명줄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오.=

그 폭언에 귈탐은 영혼 기사들의 살기를 느끼며 기겁했다.

‘미, 미친 건가?! 정교 기관이라면 성제의 무위에 대한 정보도 입수했을 텐데 왜 저러는 거야!?’

“오, 모욕에 화를 내실 줄도 아는군요? 저는 이 땅의 주인에게 고개를 쳐들고 무례는 있는 대로 저지르시기에 모욕이란 단어를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웃음을 띈 환인의 비아냥에 적굉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주술사제 후보로서 용린족으로 진화한 뒤에는 만엽 교장은 물론 대전사장인 청에게도 이런 대우를 받지 않았거늘 감히…….

=…민둥 피부 따위가……!=

적굉이 멸칭을 입에 담자마자 이실리테와 안느, 아영에게서 끔찍한 살기가 폭사 되었다.

엄한 놈 옆에 있다가 숨통을 죄는 살기에 직격당한 귈탐의 비늘색이 하얗게 변해간다.

=귈탐 님. 이쪽으로.=

백려강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폭풍 같은 살기의 영역에서 빠져나오는 귈탐.

그러나 적굉은 대전사장 못지않은 살기의 폭풍 속에 갇혀 신경줄을 옥죄는 긴장감에 이맛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그러자 한층 더 짙어지고 강렬해지는 살기.

특히 세 종류의 살기 중 산뜻하거나 끈적한 살기와 달리 숨통에 비수를 꽂아 넣는 듯한 살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농도를 늘려가는 중이다.

심약한 자라면 살기에 노출되자마자 심장 마비로 죽을 정도.

우르르르—

이 살기에 거처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정교 기관 소속 5~6급 아우라의 심판자 넷이 각자 무기를 꼬나쥐고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실내로 뛰어들었다.

=수석 교위님!=

=무사하십니까!?=

그 순간 찌릿— 가장 강하던 살기가 눈 깜짝할 사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에 적굉은 생물로서 가진 본능이 맹렬히 위험을 경고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폭풍전야. 아니,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 같은 고요함.

그 순간 성제의 오른편에 선 호박색 머리카락의 민둥 피부 여자에게서 감지되던 기운, 기백이 폭발했다.

여자의 드레스처럼 아름답게 흐르던 아우라가 주변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짙어지고 그 빛의 흐름도 한층 정갈해져 간다.

척 봐도 등급의 상승을 이룬 모습. 게다가 이전 등급에서 얼마나 기술과 숙련을 연마한 건지, 등급이 상승하자마자 아우라가 흔들림 없이 견고하다.

이어 등 뒤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다섯 자루의 황금빛 검이 출현했다.

빛을 뭉쳐 벼린 듯한 다섯 자루의 검기에 적굉을 포함한 정교 기관원들의 긴장이 끝없이 치솟는다.

이형종과 싸우며 무수한 사선을 넘은 그들의 눈에도 저 황금빛 검기는 정순한 기력을 극한으로 연마한, 검기의 극으로 보였기 때문.

성제의 영혼 기사들과 벨티칼의 정교 기관이 맞붙을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귈탐은 참지 못하고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만!!=

귈탐의 포효와 함께 그녀의 몸에 그려진 문양이 새빨간 빛을 발하더니 쿵!! 무거운 기운의 충격을 퍼트린다.

직후 사방에서 흑회색의 반투명한 손 수십 개가 뻗어 나와 적굉과 정교 기관원 넷을 움켜잡았다.

=큭, 이 무슨?! 귈탐 여족장! 벨티칼에서 정교 기관을 공격하는 것은……!=

=닥쳐라!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놈아!!=

입을 열 때마다 그녀의 쩌렁쩌렁한 포효가 울려 퍼지니 우르르, 또 다른 한 무리의 전사들이 환인의 거처에 흙발로 뛰어들었다.

6급의 전사에 4급의 전사와 술사로 이루어진 라펩 최정예 무력 집단, 귈탐이 가진 최고의 무력 스무 명이 마력으로 제련된 황금 창을 기관원들에게 겨눈다.

=라펩의 이름에 먹칠하여도 유분수지!! 감히 본인의 땅에서 본인을 욕보인데다 본인이 손님으로 모신 이들에게 폭언과 행패를 퍼붓다니!!=

그녀의 포효에 적굉도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대 벨티칼 헤뷜트의 부족회 직속 산하 아렘나키아 정교 기관의 수석 교위다!! 대족장님의 뜻에 따라! 대족장님의 뜻을 받들어 대행하는 용린족으로써!! 부족장의 권한 위에 서 있거늘 감히…!! 소도시의 족장 따위가 이 나에게에에!!=

끄으와아아아악—!!

비명과도 같은 고함에 적굉의 몸에 그려진 무늬도 짙은 핏빛을 발하며 부족장의 권능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블러드러스트, 피의 욕망이라 부르는 사비족의 선천 능력으로 발동하면 모든 능력치가 작게는 몇십 퍼센트, 많게는 수백 퍼센트로 증가하는 일종의 광폭화다.

=으워어어어어-!!=

=크아아아아……!!=

그에 따라 휘하 정교 기관원들도 각자 무늬를 빛내며 블러드러스트를 일으키니 귈탐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에 따라 귈탐의 전사들도 블러드러스트를 일으켜 황금 창에 핏빛 기운을 담아나간다.

반투명한 검은 손에 잡혀 눈에 핏대까지 세우며 발버둥 치는 적굉, 그리고 정교 기관원들.

=귈탐 라펩!! 이러한 반역 행위를 저지르고도 네년의 목이 무사할 줄 아느냐!!=

=반역이라고?! 국가 전복 시도는 지금 네놈이 저지르고 있다!! 이 개짓거리는 결단코 제정신으로 볼 수 없어!! 벨티칼에 암운을 드리우려는 네놈이 대족장님의 수족이라고?! 개소리!!=

=개짓거리?!! 정당한 정교의 율법을 이행하는 나에게 개짓거리라고!!!=

=만엽 공도 지금 네놈의 짓거리를 본다면 당신의 눈이 부족했다고 한탄하며 파문을 선언하실 터다!!=

=귈타아아암!!!=

“큭큭큭.”

서로 핏빛을 번뜩이며 살기와 고성을 지르는, 개판이라고 표현하기에 한치 모자람 없는 광경을 구경하던 환인이 별안간 큭큭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거슬렸던 적굉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고성을 내지르려는 찰나.

『입.』

작지만 영혼을 꿰뚫는 소리에 덜컥 고개가 뒤로 꺾였던 적굉은 =으, 어?= 한쪽 콧구멍으로 피를 주륵 흘리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뭐…지? 바, 방금 의식이 한순간 날아간 거 같은……

『닥쳐.』

=꺽……!=

단 두 마디에 적굉을 비롯한 정교 기관원들은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체의 제어까지 풀려 블러드러스트가 해제되거나 정신을 잃는다.

간접 영향권에 들었던 귈탐의 전사들도 심령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후들거리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들의 블러드러스트도 당연히 강제 종료되었고, 귈탐이 영지에서만 펼칠 수 있는 족장의 권능인 포박까지 해제된 상태.

일부는 심적 내상이 터져 나왔는지 주둥이로 피까지 흘린다.

백려강이 내민 팔에 매달려 간신히 정신을 유지 중인 귈탐이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아신, 아신의…… 목소리. 신언!’

고등급 직업자에 정신까지 견고하게 해주는 용린족이 그저 목소리만 듣고 전투불능이 되었다.

목소리로만 심령을 깔아뭉개는 언력言力이 그저 흔한 상급 통언通言일리 없다.

아신급, 신격에 오른 이들이 쓴다는 신언이 틀림없다……!

=으, 어. 어극…….=

개구리처럼 엎어진 적굉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애써 환인을 올려다보려 애쓰며 목 막힌 신음을 흘린다.

환인은 그런 적굉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렘나키아 정교 기관의 수석 교위 적굉. 당신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머저리에 팔푼이, 얼뜨기입니까.”

=……!=

“믿을 수가 없군요. 정교 기관, 바르게 가르친다는 이름을 가진 기관의 수석이라는 자가 내면을 들여다볼 줄 모르고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 핥아먹으며 만족하는 쓰레기였다니.”

후 하고 웃은 환인이 누구보다 섬뜩한 기운을, 심령을 짓누르는 기백을 피워올리며 물었다.

“그래, 옹이구멍 보다 못한 그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8살짜리 꼬맹이인가? 아니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어설픈 차원의 방랑자?”

=끄으윽……!=

아니다. 겉의 온화한 모습은 그저 껍질일 뿐, 속에는 열화와도 같은 노기에 빙정과도 같은 살기가 뒤섞여있는 엉망진창의 괴물이다.

성제에 관한 소식은 정교 기관에도 하루에 몇 건씩 쏟아졌다.

태고의 거인 수십 명을 굴복시킨 능력.

3만의 이블 팩션 군단을 손짓 하나로 증발시킨 능력.

거대한 죽음의 땅을 대지에 현현 시킨 능력.

하늘에 일순간 태양을 만들어낸 능력.

수백 수천의 영혼을 이끌며 대규모 승천의 길을 연 능력.

자애신님의 시련을 돌파하여 아신위에 도달한 능력. 능력! 능력!!

적굉은 메리아놀의 비밀 결사 집단의 존재가 발각되어 다들 정신이 나갔다고 비웃었다.

알려진 소식 하나만 해도 대륙 규모의 명성을 떨칠 위업이다. 이걸 전부 동일 인물이 해냈다고? 그것도 이제 8살 남짓해 보이는 민둥 피부 애새끼가?

존경하는 만엽 교장과 청 대전사장이 언제고 성제와 만나 물러섰다는 이야기는 자신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라드세아와 히스론드, 메리아놀 삼국이 쓴 비열한 수작 탓에 순수하고 올곧은 두 분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성제는 민둥 피부들이 자신들의 명망을 드높이고 우리 척인족을 깔아뭉개기 위해 만들어내는 역겨운 선동과 날조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제라는 사기꾼이 어느새 벨티칼에 들어와 라펩에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고 또 사실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그랬는데…… 사기꾼이, 아니었어?

바다신 교단의 추기경이 성제를 만나러 몸소 움직인 것도, 진짜였고……?

혼자서 메리아놀이라는 국가와 싸우려 드는 게 악의로 조성된 헛소문이 아니라, 진짜 단신으로 국가와……!

진짜로, 성제는 진짜 아신이다.

=으, 어어…….=

“…….”

환인은 한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 혈안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적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냉소를 흘렸다.

선민사상과 정보 교류의 어려움이 섞이면 저런 말 못할 끔찍한 머저리가 태어나는 건가.

아무리 정보 교류가 어렵고 뜬소문에 휘둘리기 좋은 세상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환인은 머저리에게서 신경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여자친구들과 귈탐뿐. 귈탐도 백려강에게 의지해 간신히 두 다리로 서 있는 수준이다.

‘지금은 두 음절 이상의 신언은 어렵고 문장의 완성도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자신이 아신위라는 걸 증명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신언의 후유증일까. 목의 아릿함을 느낀 환인은 목울대를 어루만졌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 후유증은 육체가 약한 탓이다. 지금도 육체가 심핵력을 먹으며 계속 성장 중이니 성인의 몸이 되면 신언의 부담과 여파, 후유증은 완전히 사라질 거라 확신했다.

환인은 널브러져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적굉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들을 필요도 없지만, 예의상 일단 물어는 보겠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누군가의 전언인가, 아니면 네놈의 헛소리대로 날 잡아 처벌하기 위해서인가.”

쿨럭!! ……크르륵, 커억. 크러럭.

목에 피가래가 낀 것처럼 좀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숨넘어갈 듯한 기침만 토해내는 적굉의 모습에 귈탐이 한숨을 푹 내쉬며 간신히 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멍청한 놈은 아마도, 만엽 공의 전언을 가지고 왔겠지. 내용도 얼추 짐작이 가. 성제 그대를 헤뷜트로 다시 초대하여 가뭄 해결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일 거야. 하지만…… 저 머저리가 전부 다 망쳐버렸군.=

근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푹 한숨을 내쉬는 귈탐. 환인은 벌레처럼 버르적거리는 적굉과 기관원 넷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오늘을 포함해 사흘 내내 반응이 없기에 국민의 시름은 별 신경 안 쓰는 막장 지도층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도 사비족이라…… 국가를 향한 애국심에 약간 변명하자면, 구주의 독니가 활개 치고 있어 도시 분위기가 어지러워 그런 게 아닐까 해.=

“혼란스럽다면 더더욱 정신을 차리고 교섭에 걸맞은 인원을 파견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머저리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저는 영도와 저를 적대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금만 알아보면 초월급 정령이 막대한 정령력으로 청정수를 생성해내 라펩에 보급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비인도적 비구름 생성으로 주변 기후를 뒤틀어버렸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려던 놈이다.

설령 만엽, 거인숲 미궁 앞에서 봤던 이구아나를 닮은 그 사비족이 정말 우호적인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이 머저리를 보냈다 해도…….

‘이제는 물 건너갔지.’

환인은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차지한 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환연을 불렀다.

“네 발언이 정령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흠?」

질문에서 그의 의도를 짚어낸 환연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헤뷜트의 물 정령을 전부 물릴 정도는 돼.」

=……!?=

뭐, 라고……?! 거의 평정을 되찾은 귈탐과 이제야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적굉이 눈을 부릅뜬다.

도시에 있는 물 정령을 전부 물린다는 게 무슨 뜻인가.

특정 속성 정령이 없는 지역에는 해당 속성도 없다. 불의 정령이 없는 곳에서는 불이 없고 하늘에는 땅의 정령이 없으며 폐쇄된 공간에는 바람의 정령이 없다.

밤에는 빛의 정령이 모습을 감추고 낮에는 어둠의 정령이 그늘로 숨어든다.

그렇다면 물의 정령이 사라진 곳은 어떻게 될까.

“적당하군.”

「적당해? 난 저놈을 보낸 책임을 물어서 관계자 전원의 목숨을 받아내는 쪽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저런 놈의 목숨을 취해서 어디에 쓰겠나. 영혼으로 데리고 다니려 해도 저 멍청함이 사고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는 죽는 것보다 더한 일은 얼마든지 있지.”

「흠……. 하긴, 주도의 수원이 몇 년에 걸쳐 메말라버린다면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될 테고, 물이 없으면 사람은 못 사니까 사람들은 주도를 계속해서 탈출하겠네. 그럼 언젠가는 도시가 사라질 거고…….」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의 명맥이 끊긴다는 이야기다. 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인재, 돈, 사람이 사라지고 생존에 필수인 물도 없어지는데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런데 그게 평범한 도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주도, 인구 백수십만의 도시다. 그 여파는 절대 적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벨티칼의 지도층은 그런 일이 없도록 필사적으로 매달리려 하겠지.

이렇게나 아신위의 역량을 드러냈는데 이놈처럼 머저리 같은 선택지는 고르지 않을 것이다.

「응. 그렇게 생각하니까 적당한 거 같네.」

그러나 귈탐은 영화로운 대 벨티칼의 주도 헤뷜트가 사라질 거란 미래에 사색이 되어 깊게 생각하지 못한 채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제! 그, 그것은…… 이 머저리 한 놈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될 거야! 제발, 부디 조금의 자비와 아량을 보여줘!=

환인은 그런 그녀를 상냥하게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귈탐. 만약 타국의 자작이나 2급 호족이 벨티칼의 차기 대족장에게 따귀를 올려붙이고 폭언을 쏟아부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차기 대족장은 그저 선의로 곤경에 빠진 타국 도시를 도와주었을 뿐인데요.”

그의 찰진 비유에 귈탐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진다.

=……그, 그래……. 미안해. 나라는 여자가 너무 경우 없는 소릴 했군…….=

“이해합니다. 환연, 해라.”

「응~.」

해맑게 대답한 환연이 환령계로 모습을 감춘 뒤, 귈탐은 이마를 감싸 쥔 채 치밀어오르는 두통을 이기지 못해 뿌드득 이를 갈았다.

=도르하.=

=옛.=

=저 새끼들 모두 묶고 능력 봉쇄 조치까지 해서 건식 감옥에 대가리만 내놓고 처박아놔. 로라시아는 부족회에 통신 연결 준비를 하고…….=

뒷일을 수습하기 위해 비틀거리며 걸어나는 귈탐을 바라보던 환인은 자신의 여자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특히 이실리테.

5급에서 6급이 되어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진 그녀에게 다가간 환인은 그녀의 고운 손을 잡고 싱긋 웃었다.

“이실리테. 정체되어있던 등급이 상승할 정도로 내 모욕에 대신 화를 내주다니, 솔직히 감동했다.”

=주, 주인님…….=

솔직한 칭찬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꼼지락거리니 영락없는 시골 숫처녀의 모습.

그에 안느가 짓궂게 휘파람을 불고 백려강과 아영도 싱글싱글 웃으며 그녀의 주위를 맴도니 이실리테는 더더욱 부끄러워한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던 환인은 열이 올라 뜨뜻해진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너의 성장에 부족했던 것은 감정의 격류였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저 도마뱀 대가리에게 감사해야 할까? 저놈이 아니었다면 네가 그만한 격노를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그……건 싫어요. 주인님을 그렇게 모욕한 놈의 목을 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참았는걸요.=

“그러냐.”

=네. 사실 지금 말씀드리는 거지만, 얼마 전에 6급으로 올라갈 실마리를 조금 잡았어요. 그러니까 아까 그놈이 아니었어도 언제고 6급에 올라섰을 거예요.=

어색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귀여운 반응에 환인은 아직 자신보다 40cm는 더 큰 이실리테의 뜨거워진 양 볼을 잡아서 그 입술에 쪽, 입맞춤해주었다.

“아무튼, 네가 5급의 벽을 넘어서 이제 안심이다. 앞으로도 옆에서 날 쭉 지켜다오.”

=…네,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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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뚜껑이 또 들썩거립니당... 쿨타임이 돌았나봐용

한글을 버전업했습니당. 덕분에 지금까지 등록했던 수백 개 사용자 사전이 싹 날아갔지만 뭐.. 다시 등록하면 되죠!

(대충 히힣 웃는 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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