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 소도시 라펩
솨아아아아—…….
라펩에서도 높은 지대에 세워진 족장의 저택. 그런 저택의 2층에서 비 내리는 라펩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눈을 감고 조용히 들려오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뜨겁다고 할 수 있던 햇빛은 하늘을 뒤덮은 회색 비구름에 차단되었고 그 아래로 뿌려지는 조용한 빗줄기는 시원하면서도 찹찹한 공기를 퍼트린다.
“…….”
몇십 분 전.
도시 중앙 분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 오가던 사람들과 광장에 좌판을 펼치고 마악 장사를 시작하려던 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환연과 환인 일행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었고…….
=오오. 비다, 비야!=
=이 얼마만의 비인지……!=
=대정령님께서 라펩에 비를 뿌려주신다!!=
우와아아아아~!!!!
환연의 몸에서 솟구쳐오른 푸른 빛의 기둥이 먹구름을 생성, 비를 뿌리기 시작하니 도시가 떠나갈듯한 우레같은 함성을 질렀었다.
수년만의 가뭄 속에서 내리는 단비를 맞이한 것처럼 감격에 겨워하는 라펩의 시민들.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거나 옷을 훌렁 벗은 채 두 팔 벌려 비를 맞거나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랩과 비슷한 노래를 엉망진창으로 부르거나.
그 소란에 허겁지겁 달려나온 귈탐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감동과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비가 평범한 비가 아닌, 사람 사이즈로 커진 환연(인어폼)의 이적임을 알아차리곤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고개를 조아렸고, 모여있던 사비족 수천 명도 여족장의 뒤로 늘어져서 물빛의 아우라를 파동처럼 뿜어내는 환연에게 절을 올렸다.
숭배의 의미를 가진 절이 아닌 존경과 감사의 의미를 지닌 배례拜禮.
도시 광장에서의 소란 이후 함께 저택으로 돌아온 귈탐은 바로 환인을 찾아 걱정어린 모습으로 조언을 주었다.
‘도시를 위해 비를 뿌려준 것에는 족장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느껴.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크다.’
‘가뭄은 벨티칼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지. 원체 수량이 많은 지역이라 2년 정도의 가뭄에는 버틸 수 있지만, 비를 보지 못 한 지 오래된 장소가 많아.’
‘헤뷜트에도 거의 7개월 가까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기에만 비가 내렸다는 소식이 헤뷜트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정교 기관이 나올 테지. 그리고 연유를 파악한 기관은 대정령님과 성제를 찾아 매우 귀찮게 굴 거다.’
‘은인인 대정령님과 대정령님의 친우인 네게 해가 갈까 걱정이 들어.’
비가 내린 것을 본 자들이 눈이 뒤집혀 환인 일행에게 수작을 걸지 않을까 하는 우려. 그러니 빨리 도시를 뜨는 걸 권한다는 이야기였다.
=오빠. 라펩은 언제 떠날 생각이심까?=
자신의 다리를 안마해주던 아영의 질문에 환인은 대답 대신 시선을 건넸다. 옆에서 귈탐에게 팔아넘길 마도구를 분류하던 유르파도 질문을 보탠다.
=비를 안 뿌려도 되는데 비를 뿌린 건 의도가 있기 때문이지?=
=벨티칼에서 머물러야 할 시간이 의도하지 않게 좀 길어졌잖아요. 여기서 비까지 뿌리면 관심이 되게 많이 쏠릴 거 같은데…….=
환인이 그런 걸 모를 리도 없으니 무슨 의도로 이렇게 관심을 끌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게 아영의 눈빛이었다.
쏴아아아아…….
바깥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 환인은 세상을 짙은 회색으로 칠해가는 비를 바라보다가 유르파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길 바란다는 손짓.
눈을 동그랗게 뜬 유르파가 서둘러 방음, 방청 마도구를 꺼내 작동시키고 본인도 수인을 맺어 외부 소리 차단 비술을 펼친다.
그렇게 몇 겹의 보안을 만들어낸 유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됐어. 7급 비술사가 아니면 여기서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려는 시도조차 못할 거야.=
환연이 있다면 좀 더 간단할 텐데 그녀는 지금 릴라이스에게 몸을 넘겨주었다. 릴라이스는 당연히 밖으로 놀러 나갔고.
환인은 다시 밖으로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벨티칼의 가뭄은 아드네빌라가 원흉일 확률이 크다고 본다.”
=……엥?=
=네?=
=어…째서……?=
“2년 전, 아드네빌라는 영도에 있는 날 꾀어내기 위해서 알류겔 호수의 그 넓은 해안선에 막대한 양의 비를 오랫동안 뿌렸었지.”
자연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오묘하기 마련이라, 사람이 억지로 자연에 손을 댔다간 자연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진다.
구름이라는 것은 보통 하늘에 모인 수증기나 작은 얼음알갱이의 집합체다.
그게 중력에 의해 무거워지면 빗방울의 형태가 되어 낙하하게 되는데 대충 이걸 비라고 부른다.
알류겔은 바다라고 부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대호수. 거기서 발생한 수증기는 보통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지 않고 해당 지역에서 다시 쏟아지기 마련일 테지만 일부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 거기에서 비를 뿌리겠지.
“예를 들자면 벨티칼이라던가.”
=…….=
=으음…….=
“비를 뿌리는 것도 환연과 릴라이스가 한 것처럼 물을 잔뜩 만들어 하늘에다 먹구름을 생성한 다음 비를 뿌리는 식이 아니라면, 자연의 어딘가에서 비를 끌어와서 뿌릴 수밖에 없어. 그리고 후자가 압도적으로 기운을 덜 소모하겠지.”
=……몇 주, 몇 달에 걸쳐 비를 내리게 하려면 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후자를 고를 수밖에 없다는 거네.=
그의 이야기에 안느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유르파는 거기까지 이해했지만 하나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의를 내놓았다.
=하지만 자기, 그건 2년이 넘은 이야기잖아. 그때 뿌린 비의 여파가 아직도 벨티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해?=
“자연이라는 것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해 우주로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된 현대 사회에서도 아직 전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자정 작용이 있고 항상성이 있다 해도 자연의 섭리를 뒤틀 정도의 강한 힘이 가해지면…….”
일부러 말을 끝맺지 않음으로써 여자들의 긴장감과 상상력을 부풀렸다.
“거기다 아드네빌라는 지금도 메리아놀에 비를 뿌리고 있습니다. 양쪽에서 이러니 사이에 끼인 벨티칼에 영향이 없다고는 절대 말 못 하겠지요.”
=으음….=
=아…….=
=…….=
방안이 침묵에 휩싸인다.
“제 이야기가 어느정도의 신빙성을 지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벨티칼의 가뭄은 그저 우연이 겹친 결과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심증은 아드네빌라가 원흉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를 뿌렸습니다. 귈탐 여족장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약간이지만 사과의 의미도 있고 말입니다. 겸사겸사…….”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나?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리고, 환인은 조금 느릿하게,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벨티칼이 보여줄 반응에서 현 삼국 연합 조사대의 현황을 어느 정도 짚어내 볼까 해서지요.”
헤뷜트에서 반응이 빠르면 빠를수록 벨티칼 최상류층이 지금 가뭄에 얼마나 진심인지 엿볼 수 있다.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벨티칼의 삼국 연합 동조 행위에서 다른 마음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도 짚어낼 수 있겠지.
“구주와 쿠클린은 단지 부족회 내부가 두 파벌로 나뉘어 날 중심으로 다툼을 하고 있다 말했지만, 그게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암살자의 생태를 잘 아는 아영이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손가락을 꼽아본다.
=우리가 본 그 여자 성격이면 날씨로 인한 문제 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이 나라에 드리워진 가뭄에 대한 사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빠한테 말 안 했거나, 정말로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어서 말한다는 생각도 못 했을지도…….”
“그래. 그래서 비를 뿌린 거다. 정교 기관이라 했나. 그곳에 속한 자들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저들의 진정한 저의를 볼 수 있을 테니.”
만약 헤뷜트의 대족장이 교섭이든 대화창구든 일찍 보낸다면 가뭄 해결에 매우 큰 관심이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아드네빌라를 이용하려 들 수 있다는 점을 셈해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아드네빌라의 안전을 약간이지만 확보할 수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려강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하고 입을 열자 그녀의 눈이 한층 더 커진다.
“현시점에 아드네빌라를 자극할 가능성이 큰 국가를 꼽으라면 벨티칼이다. 라드세아와 히스론드도 아드네빌라를 자극해 일을 좀 수월히 할까 하는 내심이 없지는 않겠지만 벨티칼보다는 덜하겠지.”
=두 나라는 자기가 아드네빌라 님하고 긴밀한 관계라는걸 알 테니까…….=
“약간의 성가심과 귀찮음을 감수해 그녀의 안전을 조금이나마 확보할 수 있다면 그리 밑지는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우나 고우나 자신과 살을 섞었고 천릉이라는 선물에 심핵력의 고서도, 백려강의 육체도 거래로 주었으며 하여튼 마냥 싫어할 수 없는 관계의 인물이 아드네빌라니까.
게다가 대성녀에게 듣기로 아드네빌라가 저 꼴이 된 것은 자신의 계획을 듣고 뒤에서 보조해주려다 그런 것이라지 않나.
부모님께서는 선물을 받았으면 받은 만큼의 도리는 하는 게 사람이라 하셨다.
비록 백려강의 육체에다 수작질을 걸어놔 뒤통수를 한 대 치긴 했지만 본인도 고개 숙여 사과했고 자신도 그녀를 복하사 시켜 한 번 죽음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리저리 주고 받은 것이 제법 있다보니 각각 어느정도 상쇄하고도 빚이 남는다고 환인은 여겼던 것이다.
아드네빌라를 걱정하는 백려강의 마음도 달래주고 자신의 마음에 남은 빚도 탕감하고.
“그런 거다.”
=오라버니…….=
감동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간 백려강은 아기를 안는 것처럼 살며시 그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음. 그럼 지금 바로 움직여서 백청룡 님을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구해주면 우리한테 손을 들어줄지도 모르고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다 곤경에 처하면 본말전도다. 무리하지 않고 도울 선택지가 있다면 고르겠지만 그 이상은 생각 없다.”
운명과 인연이 이어져 있다면 훗날 무사히 재회할 수 있을 거고, 아니라면 인연은 여기까지겠지.
백려강도 어린아이 몸인 데다 포영과를 복용 중인 환인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한계라고 여겼기에 불만 없이 조금 더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그 후 이틀이 흘렀다.
환인은 포영과를 계속 먹어 몸의 성장을 이루어나가는 한편 노른의 등에 타고 이모렐만 대동, 환연과 함께 라펩을 둘러싼 산맥의 수원지를 찾아 물을 가득가득 채워나갔다.
그사이 키는 21cm가 더 커져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가 되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모호한 성별의 외모는 깜찍하다고 할 만큼 앳된 미소년의 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군……. 성제처럼 매끄럽게 성장하는 경우는 처음 봐. 보통 세 번 정도 먹으면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못 참고 애새끼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데.=
“사비족의 정신력은 겨우 그 정도인가봅니다.”
=하! 무슨 말을 해도 이쪽만 구차해질 테니 반박할 수가 없어 슬플 따름이군.=
귈탐은 하루에 한 번씩 꼭 들러 그의 상세와 헤뷜트의 분위기 등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방문할 때마다 변해가는 그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바깥 인간들이 성제를 영웅이라 부르는지 알 거 같단 생각이 든다고 할까.
“그런 것보다 헤뷜트에서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구주의 독니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 사건이 이어지고 있어. 대상은 귀족 위주로 피해자의 일치성이 없어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다들 몸을 사리는 중이야.=
“…….”
=귀족들도 나름 창구를 통해 령주들과 접촉하려 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려있던 창구가 대부분 폐쇄되어있거나 응답이 없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보고……인데, 성제 뭔가 알고 있어?=
“큰 적을 해치우고 포식한 짐승 떼에게 아직 피가 더 필요한 거겠지요.”
담담한 대꾸에 귈탐이 으음,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린다.
=내부 분쟁이라는 이야긴가…….=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모습에 환인이 정신을 차리란 뜻에서 말을 던졌다.
“자신과 같은 머리가 여덟이나 더 있습니다. 슬슬 몸뚱이의 제어권을 독차지하고 싶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도 그래. 권력을 쥐려고 상잔을 벌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 아참, 헤뷜트에서 공간이동술법진 사용 요청 신호가 날아왔어. 보나마나 정교 기관이겠지. 일단 못 본 척하고 바로 왔는데…….=
귈탐은 그들을 만날 것인지 아니면 라펩을 뜰 건지 의견을 물었다.
=라펩을 떠나겠다면 내 권한으로 최대 한나절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어. 그 정도면 정교 기관이 쫓지 못할 만큼 멀리 갈 수 있지?=
라펩 주변 산맥의 수원지를 가득 채워준 이후로 호의와 호감치가 최대를 찍어 무제한적인 지원을 보이는 귈탐.
환인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들을 피해야 도망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음.=
“그들이 예의 없이 무례하게 나온다면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뿐입니다. 그러니 귈탐 여족장께서는 그들에게 괜히 트집잡힐 행동은 하지 마시고 바로 보내주십시오.”
=이 도시의 주인은 나야. 정교 기관이 아무리 헤뷜트의 대 부족장회에서 보내는 자들이라 해도 내 도시에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 아무튼, 성제의 뜻은 알았어.=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귈탐은 환인에게 씩- 웃음을 지으며 꼬리를 한차례 흔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 저택은 부숴도 되지만 도시를 부수는 건 좀 봐달라고?=
“유념하겠습니다.”
훗 웃으며 귈탐을 배웅해준 환인은 백려강에게 릴라이스를 찾아오라고 부탁한 뒤 여자들에게 장비를 차려입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쿠션과 양탄자를 써서 소파처럼 만든 환인은 거기에 몸을 깊게 파묻고 눈을 감았다.
“…….”
어제 대성녀에게 연락이 왔었다.
메리아놀을 중심으로 한 주변 정세에 변화가 발생해 환인이 꼭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서두로, 메리아놀 본국에 귀국하려던 조사대 신분의 플뢰족 기사들이 잡혀버린 직후 들끓던 분위기가 지금은 미적지근하게 가라앉았다는 소식이었다.
서민들, 여행자나 상단을 통해 이야기가 퍼지는 것도 어느 시점에서 멈추었고 라드세아, 히스론드, 벨티칼 삼국은 메리아놀을 더더욱 압박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딴 일을 하는 듯하다는 이야기.
‘설마 싶은 거겠지.’
자신들의 몸 안에도 메리아놀의 비밀 결사, 결명자 같은 치명적인 기생충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결명자라는 집단이 메리아놀의 그림자에 숨어 차원 방랑자를 강제로 소환하고 사역한 내막이 진실로 드러난 데다 성제인 자신이 그에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게 심증을 넘어 확증된 상황이다.
이전까지는 메리아놀만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혹시 우리 몸에도?’ 싶은 각국 수뇌부가 내부 단속을 나서고 있을 거다.
그 때문에 각국 주도나 대도시에는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것이고, 그런 분위기에 위축된 소문 전파의 주역들이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사리는 것.
혹시나 했는데 역시라고 해야 할지. 발칵 뒤집혀도 너무 심하게 뒤집혀 불씨가 되어주어야 할 것들이 파묻히며 오히려 불길이 가라앉고 있는게 훤히 보인다.
“…….”
뭐, 이제는 상관없다.
환인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당초 세웠던 계획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왼팔로 향한다.
몸이 점차 성장하면서 왼팔을 뒤덮은 빛무리, 영혼 보관고의 빛이 가라앉고 있다.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와 영혼술을 각성한 뒤부터 줄곧 함께 해오던 빛이었는데 그 빛이 사라져가며 왼팔의 피부가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신체 일부에 영혼 구슬을 보관하는 혼고魂庫의 역할이 자릴 잃고 있다는 이야기지만, 영혼술과 혼의 조종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오히려 영혼 구슬과 관련된 제약 등이 사라져가는 게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중급 정령을 있는 대로 구슬화해서 모으고 있는데 현재 그 숫자가 300단위를 돌파한 지 오래.
중급 정령이 보이질 않아 더 만들지 못할 뿐이지, 중급 정령만 있다면 계속해서 그 숫자를 늘릴 수 있을 듯한 느낌이다.
물론 영혼 구슬의 최대 유지 시간도 13일 남짓하던 게 이제는 한계 시간이 잘 가늠되지 않는다.
강령 유지 시간도 6시간 정도였던 게, 어제 아영에게 걸어놓은 중급 정령 강령이 17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해제되지 않고 있다.
육체가 아신의 혼격에 걸맞은 그릇이 되어가며 알게 모르게 존재하던 제약이 하나둘 풀려가고 능력 또한 아신에 걸맞은 수준으로 재조정되고 있는 감각이다.
성장 중인 지금도 이러한데 성장이 끝나 육신이 완성된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간 꾸몄던 계획을 정리하고 있는 데는 이러한 현상이 지분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음.』
정신을 집중해 짧게 외마디를 내뱉자 언어가 힘을 가지고 주변을 휩쓰는 게 느껴진다.
곧 찾아올 정교 기관을 맞이하려 장비를 갖춰 입던 여자들이 어깨를 움찔하며 그를 돌아볼 정도의 언력言力.
이전에는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만 아주 가끔 나오던 것이 지금은 제 의지에 따라 쓸 수 있게 되었다.
영혼술이 점차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자신이 인간을 벗어나 아신에 도달하고 있다는 증거. 강자를 존중하며 강함이 진실이라 여기는 니오네브레스 풍토에서 이건 앞으로 자신이 하는 말에 매우 높은 신뢰를 부여할 것이다.
여기에 혼령주 같은 전술 핵미사일이 있는데 머리 아프게 신경 써서 계획을 꾸며 삼국의 군사력과 영향력을 등에 업고 메리아놀을 압박한다는 귀찮은 길을 고집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힘이 충분하다면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직접 찾아가 단죄해버리면 그만인 일.
물론 명분은 유지할테지만, 이전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편함이 예상된다.
안느가 호들갑스럽게 팔이며 몸을 막 쓸어내리다가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어제부터 가끔 그러던데 그 목소리 뭐야? 아드네빌라 님의 목소리랑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데.=
“신이 쓰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신? 신언…이라는 말이야?=
“아드네빌라가 쓰는 것도 신언이라고, 천통언이라고 부르지만 이게 진짜 신언일 거다.”
=그으…렇게 보는 이유가, 있니?=
심장이 콩닥거린다는 듯이 가슴에 손을 올린 유르파의 질문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린덴 촌락에서 보았던 천원의…….”
……그건 환상이나 환영 따위가 아니었겠지. 그 눈은 자애신의 눈동자였을까.
“신이 직접 말을 걸어왔을 때 이런 느낌이었으니까요.”
=저, 정말?=
『예.』
짧게 신언으로 대답하니 또다시 쏟아진 거대한 존재감에 여자들은 벼락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주저앉는다.
=아, 아으으. 모…옴이, 파들거려어어.=
가장 가까이서 신언에 직격당한 아영이 개구리처럼 자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워준 환인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눈을 작게 빛냈다.
‘무의식중에 쓰는 것보다 의식하며 쓰는 쪽이 더 강한 영향을 끼치는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겠지. 말한다고 우르릉거리며 대기를 흔들고 그러는 건 자신의 신언이 아직 완벽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거다.
완벽한 신언이라면…… 자격 없는 자가 신언에 노출될 경우, 자신이 천원에서 느꼈던 영혼을 쪼개고 불태우는 그런 감각을 느끼겠지.
「뭐야. 무슨 일인데? 뭔데 힘의 파동이 바깥까지 막 쏟아지고 그래?」
그때 밖에서 되돌아온 환연의 이야기에 환인은 잠깐 멈칫했다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런.”
곳곳에 사비족 하인, 하녀들이 기절해서 널브러져 있다. 신언에 직격당해 혼절한 모양새.
자신의 기운에 계속 노출되어 조금씩 내성이 생긴 그녀들도 허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정도인데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앞으로 주의해서 써야겠군.’
환인은 쓰게 웃으며 이실리테와 이모렐만 남기고 기절한 사비족들을 챙기라며 여자친구들을 내보냈다.
=처음 뵙겠소, 성제. 헤뷜트 아렘나키아 정교 기관의 수석 교위, 적굉이라 하오.=
“지금은 몸이 불편해 예의를 차릴 수 없는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성제라 불리고 있는 환인입니다.”
머리가 드래곤, 서양용을 닮은 적색 비늘의 사비족 남자는 검은색과 푸른색으로 이뤄진 로브 차림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
=공사가 다망하실 성제가 어떻게 라펩에 계신지 그 연유는 묻지 않겠소. 대 벨티칼은 오가는 사람을 이유 없이 막지 않으니까. 다만…….=
잠깐 말을 멈춘 적굉은 환인의 다리 위에 앉아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환연에게 다소 부드러운 시선을 주었다가 환인을 향해 날카로운 눈을 뜬다.
=라펩에 비를 뿌리고 수원지를 채운 그 방식에 대하여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음을 헤아려주시기 바라오.=
그에 대한 지적은 환인이 아닌, 같은 자리에 동석한 귈탐 여족장에게서 나왔다.
=적굉 교위, 그대는 지금 나의 땅에서 나의 권위를 무시하는가? 내 누누이 성제와 대정령님께 무례한 태도는 용납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말하였을 터인데.=
귈탐의 강한 노기에 적굉은 눈매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태연히 대꾸한다.
=족장의 땅에서 그 권위를 무시할 생각은 없소. 다만 비구름의 생성은 헤뷜트의 고명한 학사와 술사들이 연구 끝에 장차 미래에 큰 해가 되는 행위라는 점을 공표한 상황. 현시점에 비구름을 만들어내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어있음을 족장도 잘 알고 있지 않으시오?=
=이 내가 그런 위법 행위조차 탐지해내지 못할 만큼 우둔하다 돌려 말하는 것인가!=
=그런 뜻은 아니오. 하지만 오래된 가뭄으로 걱정이 눈을 가린 상태라면 판단이 흐려지지 않을까 한 가닥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
=헛소리! 적굉 교위, 계속 그러한 말로 라펩 부족의 이름에 오물을 끼얹는다면 라펩의 86대손인 이 귈탐, 정교 기관의 행패를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
“…….”
환인은 뜬금없이 자신을 두고 대립하는 귈탐과 적굉의 기 싸움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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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귈탐: 야이 띨빡 새끼야!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복장터지는 여족장 누님
한글이 이제는 맞춤법까지 태업을 저지르네요!
교정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퉷 내뱉기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