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5화 〉 419 린덴 폐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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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린덴 폐촌
적색과 청색 두 가지 색 찰흙을 뭉쳐 빚은 것처럼 변한 위상석을 신기해하는 백려강의 태도에서 환인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백려강은 중급 도시를 지배하는 호족 가문의 차녀다. 거기다 직업자로 각성한 풍술사이기까지 하다.
그녀의 신분상 위상석이라면 얼마든지 접해보았을 텐데 이런 것은 처음 본다고?
“이렇게 두 가지 색이 섞인 위상석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나.”
「네. 검은색, 흰색 위상석까지 본 적 있지만 두 가지 색이 하나의 위상석에 나타난 것은 풍문으로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
끄우으어어어어어—
생각에 잠겨 들려는 찰나, 기백 없는 거대 괴물의 울음소리에 환인의 얼굴에 짜증이 스며들었다.
듣기만 해도 있는 기운을 뿌리째 뽑아가는 한심한 소리다. 거기다 소리가 좀 큰가.
이 이상 들으면 지금 느끼고 있는 후련함과 해방감이 오염될 것 같다고 생각한 환인은 마침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생각나 품에서 천칭을 꺼내 들었다.
스틱의 머리 부분을 잡고 남은 중급 정령 구슬의 절반, 5개를 꺼내 영혼 화살로 중첩한다. 이어서 문양 에너지도 10%를 주입하자…….
「와아.」
천칭의 머리에 마치 풀 차지 된 레일건처럼 황금빛 전류가 맺혔다.
그것을 들어 총을 쏘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느릿하게 어기적거리는 거대 괴물 껍데기의 남은 머리를 조준한다.
그리고 발사.
쫘아악—!!
채찍으로 허공을 때린 소리를 10배 정도로 증폭한 소리와 함께 황금빛 섬광이 일직선으로 날아가더니 거대 괴물 껍데기의 머리를 단번에 관통했다.
뒤늦게 적중 지점을 중심으로 펑— 소리와 함께 지름 1m의 원형 터널이 생기고, 그 충격에 몸뚱이가 밀려난 괴물이 쿠우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대지에 몸을 뉘었다.
「와아아…….」
백려강의 감탄사와 함께 잠시 멈췄던 하늘 기사들이 죽은 코끼리의 잔해에 모여드는 대머리독수리처럼 달려든다.
이제 좀 조용하군.
고개를 돌린 환인은 적/청의 위상석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으로 쥐어보았다.
“…….”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몸으로 퍼져나가는 뜨끈한 기운. 거기에 맑고 청량한 기운이 뒷골을 타고 올라오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전자는 익히 알고 있던 핏빛 위상석의 재생 효과다. 그런데 후자의 효과는 뭘까.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백려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려강, 이 위상석에 대한 것은…….”
「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눈치껏 웃으며 대답하는 백려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환인은 난도질당하고 있는 거대 괴물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색의 위상석이다. 진귀한 거라면 눈에 불을 켜고 수집하는 인간들에게 노려질지도 모른다.
일단은 유르파에게 보여준 뒤 그 뒤에 어찌할지 정하면 되겠지.
바르둘이 벗어던진 껍데기 거대 괴물도 얼마 안 가 여자친구들 및 하늘 기사들의 확인 사살에 조각조각 나서 퇴치되었다.
활약이 눈에 두드러진 것은 이실리테.
잔상을 그리는 듯한 이실리테의 대검 세 자루가 거대 괴물의 촉수 다리를 후려칠 때마다 쩍쩍 벌어지거나 끊어져 나가니 거대 괴물은 아무것도 못 한 채 흐물거리다 그대로 토막이 나버렸던 것.
안느의 활약도 충분했다.
그녀의 망치가 적을 때릴 때마다 반경 1m 사이즈의 갈색 섬광이 떵떵거리며 터져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으니까. 다만 대검 형태의 다중 검기 두 자루와 레드릭 얼터를 휘두르는 이실리테에 비하면 손색이 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실리테와 안느는 흡사 광전사처럼 날뛰었다.
쿠핀의 등에 탄 안느는 방패도 집어넣고 양손으로 천벌의 망치를 잡고 휘두르며 꿈틀거리는 다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나갔고, 이실리테는 다중 검기를 발판삼아 반쯤 날아다니며 거대 괴물의 촉수 다리를 산낙지회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오죽하면 하늘 기사들이 기세에 눌려 그녀들 근처로 가까이 가지도 못했을까.
아무튼 환인의 일격에 쓰러진 거대 괴물은 모든 다리가 끊어지고도 꾸물거렸는데 흡사 유성이 떨어진 듯한 안느의 강타에 두부가 완전히 짓뭉개진 뒤에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광경을 백려강과 함께 쭉 지켜보던 환인은…….
“…….”
여자친구들의 광전사 같은 모습에 자신이 뭔가 그녀들에게 실수한 게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그녀들의 내면에 분노가 쌓인 느낌인데……. 혹시 나 때문인가.
환인은 자신의 뒤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여자들의 활약을 구경하던 백려강에게 물었다.
“혹시 이실리테와 안느가 화난 것 같던가.”
「환인 님의 전투를 지켜볼 때까지만 해도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표정은 딱딱하게 변했던 거 같지만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백려강. 그녀의 눈빛 속에서 신뢰의 감정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을 환인은 느꼈다.
바르둘과 전투를 치러 승리한 것에서 감명을 받은 모양새지만 그런 것보다……
‘말도 없이 적 대장과 일대일을 벌여서인가.’
늘상 웃거나(안느) 담담한 표정(이실리테)의 둘이다. 그런데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면 감정이 부정적으로 변했다는 뜻.
그 말은 자신이 바르둘과 일대일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안위라면 자기 한 몸 불사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인 이실리테와 안느다. 그런 그녀들에게 자신의 행동은 부대 지휘관이 홀로 적 진영에 돌진한 것으로 보였을 테지.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거라고 확신한 환인은 그녀들의 화를 풀어줄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하던 중 거대 괴물의 시체에서 수많은 사람의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죽은 키메라뿐만 아니라 아직 죽지 않았던 키메라까지 몸 일부로 삼았던 건가.
환인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하는 하늘 기사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부 영혼은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승천한 반면 일부 영혼은 자신이 괴물의 신체 구성의 재료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통해하며 흐느껴 울었다.
저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후 세계에 대한 신앙? 아니면 이 세계의 신들에 대한 믿음?
환인은 죽어서도 괴로워하는 그런 영혼들을 불러 모아 간이 위령제를 치러주었다.
야외에 접이식 장탁자를 펼쳐놓고 각종 과일과 음식을 정갈하게 차린 뒤 향불을 피워 영혼을 간략하게나마 위무하는 환인.
생전 처음 보는 한국식 위령제에 하늘 기사들은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우리 도령이 영혼들을 위무하는데도 멀찍이서 멀뚱멀뚱 구경하겠다고……? 나라면 참여해서 묵념이라도 올리는 걸로 영혼의 덕을 쌓을 텐데.=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께서 직접 주도하시는 위령제에요. 평생 가도 이런 업 쌓기에 손을 거드는 것은 한 번 경험하기도 힘든 일이에요. 그런 기회를 그저 멀리서 구경만 하시겠다는 건가요……?」
=…이년들이 빠져가지고……! 복귀해서 뒤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헤쳐모여……!=
안느와 백려강의 협박 같은 재치에 기겁한 미로=라드하는 여기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다시 피해서 집결시켰다.
생각해보면 타락한 바르둘은 성자 일행 혼자 해치운 것과 다름없다.
이쪽이 으스대며 자랑한 결전 병기는 이름이 무색하게 제대로 된 성능을 내지 못했으며 두 명의 사망자까지 발생시켰다.
프라버 영주로 확정된 백중강과 군부 사령관으로 낙점된 백치령과도 친분이 두터운 그이니 이럴 게 아니라 그의 부츠를 핥아서라도 위령제에 참여해 뒷말이 나올 상황을 무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부관 또한 멀찍이 피난 가 있던 인부들도 데려와 위령제에 참여시켰다.
수십 명보다는 백수십 명이 더 있어 보일 테니까.
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든 말든 환인은 수십에 달하는 영혼들 하나하나 손을 잡고 영기를 나누어주어 모습을 드러나게 해준 뒤 평온의 파동을 펼쳐 그들의 서글픔을 위로해주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영혼사님……. 이제야 신님의 정원에 들 수 있겠어…….」
그 결과 자신들을 해쳤던 원수도 죽었고 영혼사의 위로도 받은 영혼들은 눈물 같은 빛구슬을 하나둘씩 남기며 미련을 버리고 하늘로 승천해갔다.
200명가량 되는 영혼을 성불시킨 환인은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부른 것을 느꼈다.
그들이 남긴 빛구슬을 회수해 영혼 구슬 보유 개수가 96개에서 100개로 4개나 더 늘었다. 매우 유니크한 위상석도 얻었으며 나름대로 속에 쌓여만 가던 스트레스도 풀었다.
여기에 영혼술까지 한 단계 성장했고 정확한 건 모르지만 핏빛 위상석도 강화되었다.
알소프로 가는 길을 잠깐 늦춘 것에 비해 더없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챙긴 것이다.
하늘 기사단도 타락한 바르둘을 퇴치하는데 한 손 거들었다는 명예를 얻긴 했지만, 환인이 챙긴 이득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이었다.
영혼이 모두 성불한 뒤 하늘 기사들은 타락한 바르둘이 남긴 껍데기를 챙기기 위해 인부들과 함께 전후 처리 작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어? 우리가 왜 도령한테 화를 내겠어. 말도 안 돼.=
=맞아요. 저희가 화났던 건 나 자신 때문이었는걸요.=
자신 때문에 그녀들이 광전사처럼 날뛰었다는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도령이 타락한 바르둘하고 싸우는 걸 보니까…… 우리가 엄청나게 자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이만하면 나도 강한 거겠지? 헬루멘의 영웅 기사들과 싸워서 이길 정도니까.
이 정도 훈련했으면 됐겠지. 미궁의 보스와 싸워서 이길 정도로 강해졌으니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훈련을 예전만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이야기였던 것.
“그렇다면 이제부터 훈련 강도를 더 높일까.”
=어떻게?=
=어떻게요?=
자신의 이야기에 동시에 되물어오는 여자친구들을 보며 환인은 웃었다.
“이때까지는 그냥 맨몸으로 대련했었지. 앞으로는 하급 강령을 쓰겠다. 그러면 너희에게 한층 높은 부하를 줄 수 있을 거다.”
검술이나 전투법에는 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을 거라는 이야기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침을 꼴깍 삼켰다.
방심하거나 느슨한 마음가짐으로는 천칭에 죽도록 두들겨 맞을 테니까. 라는 환청이 들린 것 같아서.
침을 꼴깍 삼키긴 했지만 두 여자는 바라던 바라며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중간한 대련으로는 만족 못 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 정도는 되어야 뭔가 얻는 게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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