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화 〉 418 타락한 바르둘
* * *
환인과 비대한 살덩어리 문어 괴물에서 타락한 바르둘로 돌아온 늑대인간과의 시선 교환은 짧았다.
약 0.5초 후, 타락한 바르둘은 두 명의 사망자를 내고서야 긴급 경계 태세가 된 하늘 기사들을 향해 재차 몸을 날렸지만.
퍽!
크악!
환인이 쏘아낸 방벽 패널의 투검??에 어깨를 맞아 경로를 이탈, 다른 발판이 되어줄 목표를 놓치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하늘 기사들은 황급히 산개해 고도를 높인다.
크허어어어엉—!!!
추락하면서 울부짖는 바르둘의 우렁우렁한 포효에 환인은 흥분이 심장을 감싸고 소름이 팔뚝을 달리는 걸 느꼈다.
형편없는 살덩어리 괴물이라는 평가는 취소다. 지금 저 상태라면 그날의 전투처럼 틀림없이 희열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환인은 중급 정령으로 자신과 비상에게 강령을 펼친 뒤 두 다리로 비상의 몸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말했다.
“비상, 지금부터는 내 지시를 따르도록.”
쿠엣!
평소에는 고삐를 놓고 비상이 날고 싶은 대로, 달리고 싶은 대로 두고 가끔 방향만 지시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된다. 아니. 그렇게 둘 수 없다.
환인은 고삐를 쥐고 통제권을 가져와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추락하는 타락한 바르둘을 대지에 떨어지는 유성처럼 쫓았다.
카아아악!!
백수십 미터 상공에서 추락하는 도중임에도 자신을 향해 살기를 아낌없이 뿌리며 울부짖는 타락한 바르둘.
그 미이라 같은 몰골이 쏘아내는 송곳 같은 살기에 환인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척 봐도 잡다한 기교를 부리는 신체가 아니라 근접 전투에 특화된 몸뚱이다.
저 몸으로 어떤 공격을 할 수 있지? 어떻게 공격할 생각일까.
부디 이번에는 기대를 배신하지 말길 바라며 광창을 꺼내 형상화한 환인은 비상의 고삐를 꽉 틀어쥐고 재차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공기의 벽을 뚫는 듯한 충격과 함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진다.
수백 미터의 거리가 시시각각 줄어든다. 환인은 타락한 바르둘이 등의 촉수에 힘을 주는 것을 주시하며 기마 돌격하는 기사처럼 자세를 낮추고 광창을 수평으로 세웠다.
그리고 가슴 설레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지금이다. 네 힘을 보여봐라!
타락한 바르둘은 자신을 얕보는 기색을 눈치채고 억누를 길 없는 분노에 크허어엉!! 사자 같은 포효를 지르며 고목 뿌리 같은 앞발을 횡으로 휘두른다.
한순간 발톱이 빛나며 바람의 발톱 같은 것이 쇄도해오는 것을 포착한 환인은 0.01초의 반응 속도로 상체를 숙이며 비상의 등을 짓눌렀다.
살짝 위치가 내려가는 동시에 쓰왁— 생살이 갈라지는 듯한 파공성이 머리 위쪽을 스치고 지나가고, 거의 동시에 환인의 광창이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촉수 셋을 가르며 지나갔다.
콰우우욱!!
팔뚝 굵기의 유달리 굵은 촉수 세 가닥이 끊어지며 피가 뿌려지는 가운데 퍽! 소리와 함께 타락한 바르둘의 등을 찌르는 단검 한 자루.
스쳐 지나치자마자 마비 독이 한가득 충전되어있는 스팀펑크 단검을 던졌던 환인은 단검이 구더기의 거죽 같은 껍데기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걸 보며 꺼냈던 단검을 도로 수납한다.
‘방벽으로 만든 장검도 통하지 않았으니 평범한 물리력으로는 상처를 입힐 수 없는 거군.’
그에 반응하는 것처럼 환인을 향해 겨눠진 촉수가 순간 부풀었다가 새끼손톱보다 작은 뼛조각을 발사했다.
네 개의 촉수에서 총알보다 빠르게 쏘아진 뼛조각.
타락한 바르둘의 동작 일체를 주시하고 있던 환인은 궤적을 읽고 살짝 몸을 비트는 것으로 총알보다 빠르게 날아오는 뼛조각을 피하고 비상을 맞출 듯한 궤적의 뼛조각을 광창으로 슬쩍 비껴치웠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뻗어 나올 듯이 스프링처럼 움츠러드는 촉수를 피해 급격한 선회 운동으로 이탈.
콰과과광—!!
하급 영혼 폭발 구슬을 던져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의 충격에 재차 튕겨 나가며 추락에 더욱 가속도가 붙는 타락한 바르둘.
네 번의 폭발에 휘말렸지만 영적인 고통도 별로 느끼지 못한 것 같고 피해도 거의 없다.
‘방어력이 어마어마하군.’
환인의 시선이 이쪽을 노려보며 헤엄치듯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타락한 바르둘의 몸 곳곳을 훑는다.
털이 몽땅 빠지고 미이라처럼 쭈글쭈글해진 몸뚱이 곳곳에 늑대가 아닌 다른 생물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인의 머릿속에 타락한 바르둘의 첫 모습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몇몇 장면이 사진처럼 그려진다.
개미굴에서 각성 키메라와 여왕개미를 흡수하려 한 것.
저 복부의 작은 촉수와 등의 큰 촉수들, 그리고 거대한 살점에 숨어있던 모습.
살점에는 생명의 빛이 깃들지 않았던 것.
수백, 수천 마리의 괴물 시체로 다리를 만들어 괴물 문어 같은 형태가 되었던 것.
그 살점에서 뛰쳐나와 여기사들을 박살 내고 그녀들의 심장과 내장을 촉수로 빨아먹던 것까지.
‘한층 더 강해지려고 변태하던 중이었나.’
그러던 중 짐승신의 포효라는 결전 병기에 얻어맞아 채 완성되지 못한 것이 저 모습이고.
콰아아악……!!
쿠궁…!
지상 약 130m, 내려앉은 지반 높이 약 180m 합쳐 310m를 추락해 굉음과 함께 땅에 처박힌 타락한 바르둘.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멀쩡해 보인다.
2년의 세월이 흐르며 이쪽도 나름대로 성장했지만, 저 바르둘은 좀 더 전투 쪽으로 성장한 듯하다.
환인은 조금 미진한 기분을 느끼며 비상에게 말했다.
“비상, 내려가자.”
그리고 환인도 땅에 내려섰다.
쿠, 쿠에~.
비상은 자신의 등에서 내린 환인의 옷자락을 부리로 살짝 물며 잡아당겼다. 뭐하러 위험을 자초하는 거야? 그냥 하늘에서 폭격만 해도 이기잖아!
“비상. 그만. 물러나있어라.”
끄응…….
비상을 타고 전투를 벌이는 것도 나름 재미있긴 했지만, 역시 전투라면 자신의 몸과 두 다리로 움직여 치러야 한다.
지반침하라지만 수 킬로미터 범위가 깔끔하게 무너져서일까. 발밑은 단단하다.
저벅저벅, 타락한 바르둘이 추락한 구멍으로 걸어가며 지반 상태를 면밀히 살피던 환인은 불쑥, 흙투성이가 된 채 땅 위로 올라온 타락한 바르둘과 눈이 마주쳤다.
크르르르…….
갈무리되지 않은 적의와 살기가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는 모습에 큭큭, 짧게 웃은 환인은 목을 살짝 비틀며 목걸이로 만든 핏빛 위상석을 꺼내 타락한 바르둘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게 그렇게나 소중한 거였나. 2년 동안 좆빠지게 쫓아오느라 고생 좀 했겠군?”
……크와아아아악!!!
환인의 조롱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폭증하며 쿵, 소리와 함께 벼락같이 접근하는 타락한 바르둘.
상처 입은 야수처럼 돌진해오는 모습에 환인은 전율이 심장에서부터 손과 발, 머리끝까지 달리며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감각에 환희했다.
이거다.
싸움의 이유나 명분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전투 이후의 상대 대처와 대응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순수한 살의의 투쟁.
소중한 것을 잃어 상처 입은 짐승의 분노란 어찌 이렇게 적나라할까.
시뻘게진 두 눈으로 눈 깜짝할 사이 지척에 다다른 타락한 바르둘이 옅게 빛나는 양 발톱을 폭풍처럼 휘두른다.
그러한 발톱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할 것은 피하고 흘릴 것은 흘리며 광창을 유려하게 움직이는 환인.
세 개의 날이 선 광창이 타락한 바르둘의 할퀴기 궤적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타락한 바르둘의 거죽이 쩍쩍 갈라지며 찐득한 피가 배어 나온다.
역시 광창이다.
앞발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환인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가하지 못한 타락한 바르둘의 살기가 더더욱 폭증한다.
눈은 아예 핏빛으로 변해 시뻘건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고 등 뒤의 촉수와 배의 작은 촉수까지 환인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빈틈을 노린다.
앞발이 휘둘러질 때 촉수 또한 몸을 꿰뚫기 위해 찔러오고 복부의 촉수는 환인의 몸을 잡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려 한다.
그러한 공격에 환인 또한 영혼 방패와 방벽 패널을 꺼내 촉수를 막아내고 쳐내고 베어내며 1초에 수십 번의 공격을 주고받는다.
교전을 이어나갈수록 정신집중과 흥분, 희열, 전율이 극에 다다라 오히려 명경지수 상태가 발동한 환인의 눈에서 황금빛 기운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콰과광! 투캉, 퍼벅— 쩌적!
두둥, 촤아악— 콰직, 꾸궁!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한 사람과 한 괴물.
그 누구도 끼어들지 못할 만큼 살기와 투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전투에 환인의 여자들과 하늘 기사 38명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그 광경을 그저 눈으로만 담았다.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정도의 초고속 공방.
주변의 땅이 퍽퍽 패여나가 흙먼지로 뿌려지지만, 투기와 전투의 소용돌이에 오히려 연무처럼 주변으로 흩어진다.
새하얀 빛이 번쩍일 때마다 타락한 바르둘의 몸이 갈라지고 촉수가 끊어지지만, 타락한 바르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체를 재생시켜나가며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더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다.
촉수가 스스로 폭발하며 유독해 보이는 핏무리를 뿌리는가 하면 쩍 벌린 아가리에서 난데없이 붉은 기파가 쏘아지기도 하고 갑자기 납작 엎드려 개처럼 어지럽게 뛰다가 급습해오기도 한다.
그 모든 공격을 빛나는 창으로 차분히 막아내고 회피하고 반격하는 환인.
황금빛과 핏빛이 어지럽고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그 전투는 싸움이라는 표현이 실례가 될만큼 뭔가 아름다웠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환인의 전투를 응시하며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정에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저 모습이 모든 걸 내려놓고 오직 싸움에만 집중했을 때의 진짜 모습인가……?
그와 합류해 1년이 넘도록 매일 아침저녁, 여의치 않을 때는 빠지긴 했지만, 매일같이 대련하고 훈련을 해왔다.
하면서 자신들도 매우 강해졌음을 인식했다.
폭군룡의 미궁과 산란못 미궁을 지나고 키메라 떼와 싸우며 실전 경험 또한 풍부하게 쌓았다고 자신했었다.
솔직히 이제는 그와도 제대로 한 번 싸울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저 영역에 자신이 들어갔다간 무기를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토막 나거나 방어만 하다가 방패가 깨져서 목이 달아나는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두 아가씨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들이 성장하는 만큼 그도 성장했다고.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성장보다 더 앞서 나아가 실력이 급속도로 벌어졌기에 그의 기량을 제대로 가늠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안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천재라는 족속인가 봐.=
=주인님이시니까…….=
보통 천재는 자신의 뛰어남을 알고 우쭐해 게으름을 피우거나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해나갈 뿐이다. 하지만 그는, 환인은 천재이면서 쉬지 않고 노력하기까지 하니…….
=……우리 같은 범인은 쫓아가기도 어려운 거지.=
=주인님이 근접 전투 계통이 아니라 영혼사이신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안느도 적잖이 공감했다.
만약 그가 근접 전투 직업이었다면 자신들의 존재가치가 한없이 0에 가까워졌을 테니까.
큐삐이잇!!
그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비상의 다급한 외침에 두 여자는 아주 잠깐, 환인의 전투에서 시선을 돌려 비상을 돌아보았다.
=왜? …아얏! 비상이 너 왜 쪼고 그래?!=
큐삣! 쀼잇!! 쿠에엣!!
퍽퍽, 발로 걷어차고 부리로 쪼아대는 비상의 난폭한 행동에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두 여자는 비상이 때리면서도 날개로 한쪽을 가리키는 걸 눈치챘고.
=……뭐야 저거. 저게 왜 혼자 움직여?!=
타락한 바르둘 본체가 빠져나간 거대 괴수의 살점 덩어리와 다리가 쿠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안느!=
=어! 이봐, 정신 차려! 저 괴물 몸뚱이가 다시 움직이고 있다고!!=
=에… 으엥?!=
=얼른 라드하 부대장을 불러!!=
=네, 네엣!=
‘후우…….’
느릿한 시간 속에서 타락한 바르둘과 무수한 공격을 주고받으며 앞뒤 생각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이 시간.
광창을 휘두를 때마다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던 권태와 미묘한 짜증, 욕구불만이 봄날의 따스한 햇살 아래 쌓인 눈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환인은 정말로,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해질 정도로 만족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욕구불만이 쌓이겠지만 이 정도면 적어도 반년, 길면 1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만족한 환인은 광기가 폭주한 것처럼 몰아치는 타락한 바르둘을 응시했다.
여자친구들과 대련해주며 그녀들의 자세와 투로에서 배우고 얻을 게 없을까 초반에 고민하다 자신에게는 투법 같은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지 1년.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 능력일 뿐이라고 생각해 감각을 좀 더 예리하게 단련하고 몸을 좀 더 튼튼하게 만들어온 지금, 그게 정답이었음을 환인은 알게 되었다.
검로니 투법이니하는 것은 전부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전투 보조 기술이다.
자신처럼 감각과 계산으로 싸우는 사람에게는 그런 전투법보다 신체 능력과 정신의 안정이 가장 중요한 것.
덕분에 차후 성장에 중요한 걸 확신한 환인은 자신을 찢어 죽이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챙기지 않고 돌진해오는 타락한 바르둘을 황금빛이 흘러내리는 눈에 담았다.
저 괴물도 2년 동안 적지 않은 전투를 경험하고 적을 먹어 치우며 힘을 쌓았겠지. 그로 인해 고고하던 모래색 늑대인간의 모습을 잃고 구더기처럼 주름지고 흉한 민둥가죽이 되어버렸을 만큼.
환인은 슬슬 끝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한쪽에서 여자친구들과 하늘 기사들이 어찌 된 일인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타락한 바르둘의 옛 몸뚱이와 싸우고 있다.
이곳의 싸움을 정리하고 저쪽을 도와야지.
크아아아아악—!!!!
철천지원수가 자신을 앞에 두고 딴생각 중이라는 걸 깨달은 바르둘은 피를 토할 정도의 포효와 함께 모든 촉수와 두 팔에 주둥이까지 더해 공격을 쏟아부…….
———
……으려 했으나 일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어 멈칫거렸다.
이 빛은 뭐지? ……내가 여기서 왜 싸우고 있었지?
바르둘은 지독한 두통과 가슴을 찢어놓던 분노가 가라앉으며 머리가, 가슴이 시원해지는 동시에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 바르둘은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빛의 창을 볼 수 있었다.
푹푹푹푹—
차례대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마지막 심장이 찢어진다.
쿨럭.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모든 심장이 파괴당한 바르둘은 찐득한 피가 아닌 선홍색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눈앞의 온통 검지만 눈동자만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컷을 보곤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저놈이 내 두 번째 심장을 가져갔고… 난 그 뒤를 쫓아왔었지.
뒤쫓으면서…… 앞을 막는 적을 해치우고, 잡아먹으면서 힘을 키웠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가 차례대로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 같은 놈에게 두 번이나 지다니. 이래서야 실력 차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잖나…….
바르둘은 저 번개 치는 산의 정상만큼이나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적의 눈을 응시하다 흐, 재차 피를 토하고는 입매만 끌어 올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잘가라.”
서걱—
광창을 섬광처럼 휘둘러 타락한 바르둘의 목을 떨어트린 환인은 풀썩 쓰러졌다가 천천히 가루로 변해가는 바르둘의 몸뚱이를 응시했다.
문양의 에너지를 10% 정도 주입한 평온의 파동을 쏘아낸 것은 타락한 바르둘의 빈틈을 끌어내기 위한 거였다.
촉수의 움직임과 가동 범위, 본체의 근골과 운동량에 반사신경 등을 종합해봤을 때 평온의 파동으로 0.5초 정도의 틈을 만들어내면 목을 떨어트릴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락한 바르둘은 찰나의 빈틈이 아니라 아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을 보던 눈은…….
핏빛으로 물든 영락해버린 괴물의 눈이 아니라 그날, 그 숲에서 만난 바르둘의 선명한 금색 눈동자였다.
‘타락에서 벗어난 건가.’
기둥 형태가 아니라 파문 형태로 퍼져나가긴 했지만, 설마 문양 강화 평온의 파동이 타락까지 풀어줄 정도였다니.
왠지 간단한 길을 멀리 돌아온 느낌이지만, 간단히 왔다면 지금처럼 상쾌하고 개운함은 느끼지 못했을 테니 환인은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끄우우우워워워어어어어——
“…….”
패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울음소리에 그쪽을 돌아본 환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소독약을 먹은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며 하늘 기사들, 그리고 여자친구들을 공격하는 괴물의 모습.
하늘 기사들은 맹렬히 날아다니며 괴물의 살점을 베어내고 촉수 다리를 깎아내는 중이고 이실리테는 다중 검기 두 자루를 휘두르고 밟으며 촉수 다리를 썰고 있다.
안느도 쿠핀을 타고 기마전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중.
거기에 비하면 껍데기만 남은 듯한 괴물은 어기적, 허우적거리며 공격하는 건지 땅을 짚는 건지 모를 병신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다.
특수 공격도 하지 않는 모습에 환인은 도와주려던 마음을 접었다.
저런 하찮은 놈과 싸우면 지금 느끼고 있는 상쾌함이 더럽혀질 것 같아서였다.
때마침 바르둘의 시체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서 푸르게 빛나는 늑대인간의 영혼이 일어났다.
「…….」
“…….”
푸른 늑대인간 영혼의 모습에 환인의 손가락이 작게 움찔거렸다.
영혼 구슬로 만들까? 만들 수 있나? 바르둘도 일단은 루크랑 선조의 한 갈래니까 사람의 영혼으로 분류되니…… 강령해도 바르둘이 체화한 기술을 얻을 가능성은?
그러한 환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바르둘의 영혼은 우람한 팔뚝으로 팔짱을 끼더니 흥, 코웃음을 치곤 그대로 빛무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음.”
「아…….」
약간의 아쉬움에 짧은 침음을 흘렸을 때 동시에 작고 가녀린 목소리가 뒤에서 흘러나와 돌아본 환인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백려강을 볼 수 있었다.
「강대한 적에게서 승리를 쟁취하셨네요. 축하드려요, 환인 님.」
“고맙다.”
후, 작게 웃으며 대답한 환인은 바르둘이 승천한 자리에 남은 푸른 빛구슬 여덟 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빛구슬을 남겼으니 역시 사람의 영혼으로 분류되는 거였군. 그나저나 백려강보다 푸른빛이 더 짙었고 빛도 났던 거 같은데 그 차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던 환인은 푸른 빛구슬이 갑자기 가슴으로 쏜살같이 날아오는 미간을 좁혔다.
문양에 흡수된 건가 싶어 조끼와 셔츠 앞섬을 펼친 환인은 뜻밖의 사실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집어올렸다.
「어머. 이런 건 처음봐요…….」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이것을 보며 중얼거리는 백려강.
푸른 빛구슬을 흡수한 핏빛 목걸이가 적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기묘한 색으로 변해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