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검붉은 모략 (7/12)

6. 검붉은 모략

출생의 비밀?

진부한 레퍼토리죠.

아, 불륜도요.

불과 2년 전.

황제가 붕어하시는 자리에 미겔이 불려 간 것은 웃긴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난 건 더더욱 웃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색이 대추기경인 백부까지 자리했다. 뭐 하자는 건지. 꼴 보기 싫은 이들끼리 모여서 우스꽝스러운 희극이라도 찍자는 건가. 빈정거리려다가 말았다. 황제가 검버섯 핀 쪼글쪼글한 손을 휘장 밖으로 뻗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안젤리나… 오, 내 딸아.”

여든 살이 훌쩍 넘은 황제 알프레도가 백태 낀 눈을 홉떴다. 씻지 못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손으로 가까이 다가온 미겔의 눈두덩을 더듬었다. 노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고명딸이 그리워진 모양이었다.

“초원의 하늘처럼 새파란 눈. 나의 파랑새. 나의 보물.”

가식적으로 웃고 있던 미겔의 얼굴이 서서히 딱딱해졌다. 그는 아주 영민한 알파였다. 노망난 황제가 읊는 일련의 대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어미를 똑 닮았구나. 아름다워.”

“폐하.”

“검고 풍성한 곱슬머리는…….”

그때였다. 꺼지기 직전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숨이 넘어가는 황제가 마지막 손아귀 힘을 발휘했다. 그 악력에 미겔의 멱살이 휘장 안쪽으로 쑥 끌려갔다. 밀담은 퍽 짧았다. 몇 초나 되었을까. 느릿하게 휘장을 걷고 상체를 세운 미겔이 뒤돌아섰다.

“운명하셨습니다.”

짤막하게 황제의 부고를 알리자, 저러다 목이 부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모자를 쓴 백부 드레이크가 재빠르게 달려왔다. 새끼 사제들이 그 뒤에 우르르 붙었다. 성수를 뿌리고 종을 흔들어 대며 음울한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모여 있던 나머지 가신들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황태자, 아니, 이 순간부로 오르칸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된 에드먼드의 주변에 모여 무릎을 꿇었다.

“축하드리옵니다, 황제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황제 폐하. 속히 옥좌에 오르소서.”

미겔과 에드먼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서 그들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친근하게 표현하자면 삼촌과 조카 사이. 하하하, 미겔은 모두가 고개 숙여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소리 없이 웃었다. 역시 희극이 맞았다. 저 식은땀 뻘뻘 흘리는 얼굴 좀 보라지. 허연 분칠이 다 녹아서 우스꽝스럽잖아.

“미겔… 미겔 체이스필드!”

볼일은 끝났다. 미련 없이 떠나려는데, 새 황제 에드먼드가 떠나는 미겔을 급히 쫓아 나왔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잠시 시차를 두고 황제를 마주 본 미겔이 연극 조로 화답했다. 그런 그를 늙은 에드먼드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려 50년간 황태자 노릇을 한 구렁이다. 에드먼드는 알프레도의 일곱 남매 중 장남이었다. 과거 시제인 이유는 태자 위를 넘보든 또는 넘보지 않든, 다섯 형제를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죽인 숫자만 다섯이며, 그의 경계심에 비명횡사한 ‘퍼스’들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무엇을 말이더냐.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지껄이는구나. 건방진 놈.”

속내를 들킨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한 에드먼드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칙서를 내리시지요.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라 하시면 기꺼이 서명하겠습니다.”

“…….”

현존하는 에드먼드의 유일한 혈육, 일곱째 안젤리나 공주.

선황제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총애했던 딸이자, 현재는 비셴 공국의 왕비였다. 종이 인형 신세로 전락한 타국의 그녀만이 큰 오라비의 검은 손을 피했다. 그러니 지금 에드먼드의 속이 뒤집힐 만했다. 무시하고 넘겼던 여동생이 이딴 거대한 위협을 남겼을 줄이야. 미겔, 콘라드 후작의 사생아로 유명한 미청년의 친모가 바로 안젤리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현 황위 계승 서열 2위였다.

불운하게도 에드먼드의 외아들이 지체아다. 이 점을 고려해 과장하자면 가히 차기 황제감이라 우겨 볼 만했다. 일찌감치 계산을 마친 에드먼드의 눈에 살기가 짙어졌다.

“폐하, 저는 정말로 황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

“예, 쥐 죽은 듯이 동북부에 처박혀 일개 수학자로 살다 죽겠습니다. 하오니 무시하십시오. 이전으로도, 앞으로도, 저는 모친 미상의 서자일 뿐이니까요.”

“흐음, 내 앞으로 지켜보겠다. 일단은 믿어 주지.”

“황공하옵니다.”

“곧 칙서를 내리겠다. 서명하도록 해. 허튼 소문이 돌았다간 재산을 몰수하고 삼대(三代)를 멸족하겠다는 조항도 추가할 것이야. 이의 없겠지?”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젠장, 혓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했나. 소름이 다 돋는군그래.”

미끈한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다는 표정을 지은 에드먼드가 망토 자락을 펄럭이고 돌아섰다. ‘늙은이가 죽기 전에 망령이 들어선… 제기랄!’ 불필요한 사실을 함구하지 못하고 서거한 선황을 모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겔은 그가 떠나고 한참 뒤에야 허리를 폈다. 조각 같은 낯이 싸늘하게 식었다.

피차 거짓말쟁이들의 밀고 당기기다.

에드먼드는 미겔을 살려 둘 생각이 추호도 없을 터였다. 기세등등한 후작을 염두에 두고 한발 물러섰을 뿐. 미겔 또한 마찬가지였다. 궁지에 몰려 얌전히 목을 내어 줄 리가 있나.

“염병은 부모가 떨어 놓고 뒤치다꺼리는 내 차지로군.”

선황의 유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짓씹듯 내뱉은 미겔은 황제의 처소를 벗어났다. 외침을 막기 위해 사방이 호수였다. 식인 악어를 키우는 검은 물을 가로질러 긴 다리가 놓였고 그 반대쪽 끝이 본궁이었다.

불이라도 난 것처럼 궁 전체가 휘황찬란하다.

황태자였던 에드먼드가 이렇게나 기고만장했다. 아버지의 수명이 경각에 달한 때에, 제 아들인 안젤로의 24세 탄생연을 거하게도 벌여 놨다. 누가 보아도 궁정 여론에 부딪혀 불리한 아들의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한 과시였다. 아니나 다를까, 발 빠르게 황제 서거 소식을 귀띔받은 몇몇 궁정인들이 안젤로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손바닥을 싹싹 비벼 대는 파리들에 둘러싸인 바보 천치는 속도 없이 허허, 웃고 있었다. 파리 대왕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때였다.

피할 겨를도 없이 미겔의 가슴팍에 찬 음료가 엎질러졌다.

“어머! 죄송합니다, 미겔 공. 결례를 저질렀군요. 너무 훤칠하셔서 기둥인 줄 알았지 뭐예요. 이리 오셔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이런, 차기 황태자를 정찰하느라 미처 앞을 살피지 못했다.

무슨 백작가라던가, 했던 집안의 영애였다. 고급 재질의 특수 초커를 한 오메가에게서 특유한 향이 풍겼다.

“어서요, 귀공.”

향락을 즐기고자 일부러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은, 발정기가 가까운 여인이 수줍어했다. 부러 샴페인을 엎질러 멈춰 세운 미겔의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단둘만의 장소에서의 정사를 에둘러 조르는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잘생긴 난봉꾼으로 유명한 미겔은 이상할 정도로 섹스에 관해서만큼은 무용담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한 차였다. 무엇을 그리 꽁꽁 숨기고 있는지 직접 알아보리라. 호기심이 동한 여인은 가임기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임신하면 금상첨화였다. 유력한 후작 위 후계자일뿐더러 손에 꼽는 우성 알파 아닌가. 그의 아이를 밸 수만 있다면야.

“아니오, 괜찮습니다, 레이디.”

“사양하지 마셔요.”

“사양할 수밖에 없음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주십시오. 기다리는 분이 계시기에. 지체하고 싶지 않군요. 괜찮으시다면 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나에게는 너 말고 섹스할 애인이 따로 있거든.

여인의 작은 머리통 속을 낱낱이 꿰뚫어 본 미겔이 제법 직설적으로 사양했다. 벌레를 떼어 내듯 그녀의 손을 떨치자, 창피를 당한 오메가는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주변의 키득거림이 들려오자 황급히 부채를 펼치고는 서둘러 떠나 버렸다.

축축해진 재킷을 재정돈한다는 핑계로 미겔 역시 댄스홀을 빠져나왔다. 덩달아 흥청망청 해이해진 경비대를 지나쳐 인적 드문 회랑의 구석을 향했다. 점점 발걸음이 빨라져 이내 달리는 폼이었다. 이국에서 들여온 거대한 야자수 뒤로 돌아간 그가 서둘러 무릎을 굽혔다. 심하게 구토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여자랑 닿은 거지, 이번엔.”

경비대와 어울리고 있던 휴고 퍼스가 뛰어가는 금발을 보고 뒤를 밟았다. 메스꺼워 위액까지 토한 형을 발견하고 소지하고 있던 가죽 물통을 던져 주었다.

“알 게 뭐야. 그런 역겨운 것들에겐 관심 없어.”

요령 좋게 물통을 받은 미겔이 서둘러 입 안을 헹구고 남은 물로 세수까지 했다. 찰나의 접촉으로 묻은 오메가 냄새를 떨치려고 애를 쓴다. 이래서 궁전이 질색이었다. 발정 난 연놈들.

명색이 나라의 지도부 계급이라는 알파 오메가들이 죄 오입질에만 열성이었다. 눈만 맞으면 자지와 보지를 내놓고 쏘삭거리느라 정신이 없는 것들. 사교의 장이랍시고 허구한 날 난교 파티를 벌이지를 않나.

연기자 뺨치게 사교술에 능한 미겔은 섹스의 체위에 통달했고, 여성과 남성의 성감대를 주제로 논설을 할 만큼 능통한 달변가였으나, 실상은 성행위 자체를 일절 혐오하는 남자였다. 섹스를 싫어하는 알파라니. 얼뜨기인 안젤로만큼이나 비웃음당할 신세였다. 하여 그는 겉으로 성교에 질려 버린 엽색가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어쩌다 여자 손이라도 스치면 그날 먹은 걸 전부 게워 내는 주제에 말이다.

“것들이라니. 말조심해.”

“하, 또 메리인지, 마리인지 하는 여자 얘기인가. 불구로 만들고 달아난 계집이 뭐 그리 좋다고 목을 매는지.”

“다음은 반드시 혀를 뽑아 버린다. 혓바닥 잘못 놀려서 벙어리 된 인명사전에 이름 올리고 싶으면 계속해 봐, 어디. 귓구멍 파고 똑똑히 새겨들어. 계집이 아니라, 내 짝이다. 내 오메가.”

“아, 그래, 그래. 너 고자 만든 여자. 어디서 뭐 하면서 살까 모르겠군. 발기해도 싸지를 못해서 귀두를 주먹으로 치는 병신이 여기 있는데.”

“…….”

“왜, 혀 안 뽑아?”

“그러는 넌. 고자 새끼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다고 지껄여.”

“누가 잘났댔나.”

이런저런 일이 겹쳐 무척 피곤하다. 회랑의 턱에 걸터앉은 미겔이 좁은 측면에 긴 다리를 뻗었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쫓겨난 너만 힘들었던 줄 아냐. 나도 개같이 굴렀어, 왜 이래?”

만 다섯이 되자마자 집 밖으로 걷어차인 휴고가 육체적으로 고생했다면, 장자랍시고 집에 붙어 있었던 미겔은 정신적으로 호되게 학대당했다. 방관자인 아버지에게서가 아니라, 백부 드레이크 체이스필드에게. 젠체하며 임종 기도문을 읊던 큰아버지를 떠올린 미겔이 이를 까드득 갈았다.

드레이크.

알파 귀족가에서 드물게 태어난 돌연변이 베타였다.

때문에 그는 동생 콘라드에게 밀려나 고향을 떠난 후 종교에 귀의했다. 악착같이 권력을 탐하여 오르칸 공의회 수장 자리에까지 오른 뒤에도 여전히 집안일에 사사건건 간섭했는데, 동생이 밖에서 낳아 온 아들들까지 우성 알파의 자질을 타고난 것을 격렬하게 질투했다.

“그 자식을 찢어발기기 전에는 두 발 뻗고 못 자지.”

뇌까리는 미겔의 목소리에 분노의 인이 박였다.

“하도 창녀의 자식이라고 구박하기에 진짜 그런 줄 알았잖아. 알아? 그 새끼가 하도 더럽다, 불결하다, 태생이 추하다고 해서 어느 날은 정말로 팔뚝을 벴지. 내 몸의 더러운 피를 전부 빼내겠다고. 뒤로 넘어가 기절해서 한 달은 누워 있었나.”

그러고 나서 학대가 좀 줄었나 하면 오히려 더 심해졌다. 휴고를 내쫓는 데는 성공했지만, 장자인 미겔은 어찌하지 못해 배알이 뒤틀렸던 드레이크는 그 뒤로 조카를 자해사(自害死)시키기로 작정한 듯 굴었다. 툭하면 어린 미겔을 헐벗겨 여신상 앞에 세워 두고 떼거리로 몰고 온 사제들로 둘러싸 귀 따갑게 고함지르며 돌을 던지게 했던 게 대표적 만행이었다.

“음행한 마녀의 씨앗… 타락한 괴물 새끼… 하루빨리 뒈져 신의 품으로 돌아가거라… 참 나. 밤새도록 소리를 질러 댔으니. 잊히지도 않아.”

미겔을 투과하여 그의 부모까지 욕보이는 비겁한 수법이었다. 이렇듯 베타로서 동생에게 밀려난 콤플렉스를 변태적으로 해소하는 자가 이 나라 종교를 쥐락펴락하는 수장인 것이다. 미겔이 회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오늘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지. 너와 나의 어머니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이미 이웃 나라에 시집간 공주와 3년 간격으로 그 짓을 해서 애를 두 번이나 배게 했다는 것 아닌가. 국경을 초월한 불륜이라. 대단들 하셨어. 공주는 몸만 풀고 나서 얼른 이웃 나라 남편에게 돌아가고, 아버지는 골칫덩어리 새끼들을 도맡아 방치했다는 눈물 나는 사랑 이야기다.

행여나 꼬리가 밟힐까 미겔과 휴고의 모친이 각각 다른 것처럼 행세하고, 안젤리나 공주의 명예에 흠집을 낼 수 없어서 형제의 순혈을 트집 잡는 백부의 학대를 수수방관한 아버지. 더불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을 나 몰라라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대단해. 미겔은 거듭 감탄했다. 아주 죽이 잘 맞는 한 쌍이로군. 역겨운 그들의 사랑에 속이 뒤틀리고 오심이 일었다.

“왜 말을 하다 마나.”

“잠깐만. 또 토할 거 같아서.”

우욱. 헛구역질한 미겔이 물통을 탈탈 털어 차게 적신 손수건으로 아예 얼굴 전체를 덮었다. 벽에 뒤통수를 댄 그가 손등 뼈가 도드라지도록 주먹 쥐었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지 않도록, 무언가 좋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정숙하고, 강단 있으며, 얻어맞는 퍼스를 가만 내버려 두지 못할 만큼 착한 오메가 소녀의 이야기 말이다. 미겔은 혼자서 한참 앞서 나간 멍청한 휴고가 그녀에게 청혼을 하려다가 대차게 차인 대목이 백미인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순수와 다정함이라는 환상 처방이 간절했다.

“속이 안 좋아. 진정되게 그 이야기 좀 해 봐, 휴고.”

“무슨.”

“메리 이야기.”

“동화 취급하는군.”

“그 정도면 페어리 테일이지. 어서, 평소엔 안 시켜도 잘만 떠들어 댔잖아.”

부추겨서 판을 깔아 주자, 뜸 들이던 휴고의 과묵한 입술이 열렸다.

“예뻤어.”

“콩깍지가 꼈겠지.”

“피부가 희었고.”

“가슴은 컸나?”

“제법. 허리는 제비 꼬리처럼 잘록했어. 힘주어 안으면 부러질 것 같았다.”

“몸매는 제법이었나 보군. 또?”

“신문을 즐겨 읽는 듯했어. 언제나 마지막 철자 하나까지 정확하게 발음했고.”

“좋아, 최소한의 교양은 갖추었다는 거네. 또?”

“내 입에 빵을 쑤셔 넣었지.”

“하!”

“얼음도 넣어 줬다.”

휴고의 목소리가 오래전의 자취를 더듬는 듯 한층 더 낮아졌다. 회랑의 반대쪽 벽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그의 입가에 아주 드문 웃음이 뱄다.

“그늘진 얼굴에 가끔 웃어 주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어.”

“시시한 대목이야. 넘어가. 키스는 어땠어.”

“키스? 열에 들떠서 엉망진창이었지. 난 좋았지만.”

“얼마나 오래?”

“30분은 족히.”

“오래도 했네. 그렇게 좋았나.”

“키스만으로도 죽을 정도로.”

“…….”

“여자 손가락만 스쳐도 토악질하는 네 녀석은 죽었다 깨도 모를 환희지.”

“…개자식. 우리 둘 중에 잘난 척하는 게 도대체 누구야. 헷갈리는데?”

“일평생 한 남자에게만 정절을 지키겠다는 신념이 굳건한 여자였다. 그녀의 남자가 될 수만 있다면 시궁창에서 뒹구는 나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 돼지 같은 공자가 밥그릇이라고 던져 주는 걸 엎드려 핥는데도 웃음이 나더군.”

“좋아, 배알 뒤틀리니까 그만 닥쳐. 고작 한 달 같이 지낸 여자에게 미쳐선…….”

“그럴 만한 여자였으니까.”

“닥치라고! 거짓말이로군.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허황해. 그런 여자가 세상에 어딨어? 넌 더위 먹어서 꿈을 꾼 거야, 분명.”

“그녀는 실존해.”

그럼 왜 못 찾는가.

손수건을 걷어치운 미겔이 동복동생을 향해 눈을 흘겼다. 자신과 똑같은 휴고의 청안이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3년 터울의 형제를 보고 ‘콘라드 후작은 푸른 눈동자의 여인이 취향인 듯하다’ 속닥거렸다. 하지만 진실은 그 이상이었다.

‘너희는 어머니가 같다. 죽고 싶지 않다면 이 이야기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라.’

아버지는 딱 한 번 어머니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내용을 미루어 볼 때 불륜이었겠거니 짐작은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황제의 고명딸이었을 줄이야.

미친 자들.

미겔은 거듭 실소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기에?

경멸한다. 동시에 미칠 듯이 궁금했다.

“메리를 찾고 싶나, 휴고?”

나도 갖고 싶다.

미겔의 속이 음험하게 들끓었다. 저처럼 부모의 업에 짓눌려 살아온 동생마저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라. 질투로 내장이 뒤틀렸다. 전혀 공평하지 않았다. 왜 저 녀석만? 좆같이 살아온 건 나도 똑같은데?

“…무슨 꿍꿍이야.”

“대답해, 돌아간다면 다시 그녀와 짝을 맺을 건가? 같은 헤어짐과 고통을 반복한다 해도?”

이들 형제가 재회한 것은 어느 난교 파티에서였다.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던 휴고가 에드먼드 황태자의 호위 기사가 되어 나타났다. 논문으로 학계를 뒤엎고 학자 데뷔를 하자마자 사관학교를 때려치운 미겔이 궁정에서 한창 방탕하게 놀아날 때였다. 허우대 멀쩡한 겉가죽과 달리 문드러진 속내를, 그들은 서로 알아보았다.

알파 오메가의 발정을 촉진하는 불쾌한 향이 진동하는 공간에서 오직 형제만이 멀쩡했다. 구태여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혈연의 유대감을 실감한 그들은 테라스로 자리로 옮겨 맞담배를 태웠다. 형제 학살자인 에드먼드 3세가 멀쩡한 황손을 얻고자 아무 오메가에게나 닥치는 대로 성기를 쑤시는 것을 관람하면서 킬킬거렸다.

‘쉰 넘은 노령에 애쓰시는군. 저런다고 무정자증이 치료되나.’

그렇게 서로 담뱃불을 태워 주면서 지나간 과거사를 떠들어 댔다.

부모에 대한 혐오가 종래엔 여성 혐오증으로 변질되어, 미겔은 좀처럼 이성을 상대로 발기하지 못하는 성 장애를 갖고 있었다. 베타에 비해 성욕이 몇 배나 강한 알파다. 제때 좆물을 비우지를 못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여 여러 번 섹스를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구토하며 실패만 했다.

“이 나이까지 동정인 알파는 나밖에 없을걸. 천연기념물이라니까.”

휴고는 실패담을 털어놓으며 자조하는 미겔을 쳐다보았다. 담뱃재를 턴 그가 한참 만에 운을 뗐다. 겁먹어 달아난 짝, 메리의 이야기였다.

“당연하지.”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메리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는 휴고가 인상을 썼다.

“좆이 썩어 문드러진대도 상관없어. 절대로 그녀를 포기하지 않아.”

“…독한 새끼.”

예상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복도 턱에서 뛰어내린 미겔도 마음을 확고히 정했다.

“그렇다면 너희 운명의 사이에 나도 끼워 줘.”

“하, 무슨 개소리를.”

“2년 안에 그녀를 찾게 해 줄 테니까.”

“뭐?”

“선택해. 평생 몽정만 하면서 살다가 뒈질 건지, 그토록 원하는 메리를 나와 함께 공유할 건지. 아. 보너스도 붙여 주지. 난 너를 대공으로 만들 계획이야. 그러면 메리는 향후 대공 부인이자 동시에 후작 부인이 되겠군.”

“미친놈, 헛소리가 도를 지나치는데. 뭐 잘못 먹었나?”

“식중독에 걸려도 팽팽 돌아갈 내 머리를 믿어 보는 게 어때. 한 가지 더 알려 줄까? 전자를 선택한다면 넌 아주 일찍 뒈질 예정이야.”

휴고가 주먹을 쥐는 것이 보였다. 헛소리를 그치지 않는 미겔에게 한 방 먹여 기절시킨 후, 그를 의사에게 데려갈 심산이었다. 어디서 파티용 환각 성분이 든 쿠키라도 집어 먹고 실성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방금 황제의 처소에 다녀오는 길이지. 마침내 황제께서 서거하셨다. 이제 에드먼드가 새로운 황제야.”

미겔은 자신을 패대기치기 위해 다가오는 동생을 향해 냉소했다.

“놀라긴 일러. 황제께서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에 우리 모친의 정체를 밝히셨거든. 현 비셴의 왕비이자 전 안젤리나 공주. 바로 그녀가 아버지의 불륜 상대였더군.”

“……!”

그야 깜짝 놀랐을 거다. 예상치 못한 미겔의 폭로에 휴고는 회랑의 그늘을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시종일관하던 무표정에도 금이 갔다.

“계산을 해 봐. 에드먼드는 안젤로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 직계 형제들과 그 자손들을 모조리 쓸어버렸잖아. 이 상황에서 너와 내가 새로 계승권을 얻게 된 거다. 내가 2위, 네가 3위.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거지.”

“…….”

“가만히 있다간 필패한다. 그렇다고 선공격을 하는 것도 무모하지. 남은 건 받아치기뿐. 우리는 철저히 준비해서 황제가 칼을 뽑았을 때 카운터를 먹여야 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래… 메리 또한 우리 계획의 일부가 될 거고.”

“뜬구름 그만 닥치고 전부 털어놓지 못해? 대체 무슨 꿍꿍이냐, 미겔 체이스필드!”

“이런, 간단한 이야기에 뭘 그리 성을 내나.”

“미겔!”

“선택해, 친애하는 동생. 셋이서 사이좋게 지내는 해피 엔딩. 메리의 치맛단 구경도 못 하고 요절하는 베드 엔딩. 답은 간단하잖아?”

“간단? 궤변 집어치워! 우리 사이에 왜 너를 끼워야 하냔 말이다.”

사납게 다가온 휴고가 기어이 미겔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기세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멀리서 실려 오는 파티의 음률 사이로 형제의 씨근덕거림이 불협화음처럼 깔렸다. 미겔은 휴고에게 잡힌 채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에 자존심도, 긍지도, 뭣도 없는 민얼굴이 드러났다. 지독한 고독에 말라비틀어진 표정이었다.

“그야 내가 외로우니까.”

나도 갖고 싶다고, 그 사랑.

“네가 가능하다면, 나에게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쯤은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불쌍한 나에게도 그 애정을 좀 나눠 줘, 휴고.”

수도 없이 메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나 보지도 못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라면 나도 가능할 것 같아.”

사랑하는 게. 섹스하는 게. 알파와 오메가끼리만 가능하다는 지고의 향락을 나누면서 행복해지는 게.

그 순간 참다못한 휴고의 주먹이 미겔의 안면을 강타했다.

곧바로 암전이었다. 밤의 기사는 기절한 형을 복도에 내버려 두고 떠났고, 정확히 일주일 뒤에 마지못해 그를 다시 찾았다.

“선택했나?”

‘다시 찾아올 줄 알았지.’ 방만하게 다리를 꼬고 서재에 늘어져 있던 미겔이 씩 웃었다. 오른쪽 광대에 피멍이 채 가시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식.”

미겔의 추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둘이 언성을 높였던 파티 다음 날 에드먼드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새로운 황제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안젤로의 황태자 책봉을 강행했다. 오른팔처럼 곁에 두고 총애하던 휴고를 향한 눈빛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 의심과 불신의 꼬리가 어디서든 달라붙었다.

콘라드의 둘째 사생아. 한때는 콘라드 후작을 놀려 먹을 장난감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의 핏줄이라는 것만으로도 눈엣가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 자식도 누이의 배에서 난 자식 아닌가. 타당한 의혹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날 터였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 형제의 발밑은 당장이라도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무엇보다, 미겔의 황폐한 표정이 갈퀴처럼 마음에 걸렸다. 무저갱을 표류하는 눈동자. 메리를 만나기 전 휴고 자신의 얼굴이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젠장할, 이걸 깨트려 버릴 수도 없고.

모두가 외면하기 급급했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메리다.

미겔의 이 꼴을 본다면 분명 이 녀석에게도 그 다정함을 할애해 줄 것이다.

“빌어먹을!”

“저런, ‘빌어먹을’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는데.”

“그럼 하나 만들어. ‘약속을 어기면 편히 못 뒤진다.’”

빠드득, 이를 간 휴고가 무언가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 낸 부드러운 물건은 낡은 리본이었다. 메리의 머리에 달려 있던 머리끈이었다. 동생이 애지중지하던 물건으로 그들 협약의 증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향이…….”

머리끈에서 나는 시트러스 향이 상큼했다. 폐 깊숙이 머리끈에 밴 페로몬 향을 맡은 미겔이 감탄했다.

“역겹지 않은 오메가 향은 처음인걸.”

“닥쳐.”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건, 내게도 함께 짝이 될 기회가 남았다는 거겠지.”

잔뜩 구겨진 휴고의 얼굴이 볼만했다. 둘의 짝짓기가 불완전해서 다행이라고 지껄였다간, 이번엔 반대쪽 광대를 얻어터지고 기절할 각이었다. 여기서 또 정신을 잃고 시간을 낭비해서야 되겠나. 미겔은 그쯤 하고 리본을 갈무리하여 일어섰다.

“안심해, 나는 이인자야. 똑같이 일 순위로 삼아 달라고 생떼 부리진 않으마.”

휴고를 지나쳐 서재를 나선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따라와. 아버지께 가 봐야겠어.”

***

“비셴의 왕이 오늘내일한다더군요. 비역질에 빠져 온갖 성병에 걸려서 골골거린다죠.”

다수의 동성 애인과 놀아나는 그와 왕비 안젤리나 사이에 공식적인 후계는 없었다.

이래 봬도 변경의 후예다. 미겔은 첩자를 통해 한발 빠르게 접한 이웃 나라의 소식으로 말문을 뗐다. 콘라드 체이스필드는 찾아온 형제를 일견하고는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다. 습관이 된 무관심이었다.

“무슨 일이냐, 둘이 어울리는 건 또 처음 보는군.”

“실은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좋은 소식?”

“예, 황제께서 제게 내리신 특명이자 유언이죠.”

“뭐…….”

그 순간, 선황의 장례식 때문에 궁전 객실에 머무르고 있던 아비의 손에서 종잇장이 구겨졌다. 미겔은 당황한 그의 앞에 앉았다. 뒷짐 진 기사 휴고는 형제의 곁에 섰다.

안젤리나의 아이들.

태생이 너무나 고귀하여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던 형제. 때문에 부러 외면하였다. 그것이 유일한 살길이었으므로.

그중 장자인 미겔이 공주를 닮은 눈매를 곱게 휘어 웃었다.

“아버지, 다 까발려진 마당에 한번 솔직해져 볼까요.”

“원망의 저주라도 쏟아 내려고?”

“하하하, 그러면 아주 유익하고 재밌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한참 부족할 겁니다.”

“하면.”

“경제적으로 대화해 보죠. 단순하신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자신들을 비호했던 아버지.

그 또한 에드먼드의 심상치 않은 행보를 눈치챘을 것이다.

“제게 작위를 물려주시고, 휴고 이 녀석에게는 그럴싸한 직책이라도 하나 맡겨서 동북에 숨겨 두실 예정이시겠죠. 아무리 에드먼드라도 섣불리 변경에까지 쳐들어오지 못하리라 계산하시지 않았습니까.”

“…….”

“황태자 자리를 50년이나 지켰던 자의 무자비함과 철저함을 만만하게 보시는군요. 아십니까? 요새 황제께서 백부 드레이크 추기경을 총애하시어 하루에도 두세 번씩 접견하신다는데요.”

“이야기는 들었다.”

“참 닮은 족속 아닌가요. 그 둘이 합작하여 저희를 공격하지 않으리라, 정말로 낙관하시는 겁니까?”

“본론을 꺼내라, 미겔. 서론이 길어서 지루하다.”

열등감과 권력욕으로 점철된 맏형 드레이크까지 거론되자 콘라드의 피곤이 배가 되었다. 미간을 주무른 그가 신문을 탁자에 내던졌다. 형제를 노려본다.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마침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미겔의 목소리가 보다 은밀해졌다.

“비셴의 왕이 좀 일찍 죽으면 어떨까 합니다.”

“암살이라도 하자고?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나.”

“비셴의 왕비, 안젤리나 님도 사망하셨으면 좋겠고.”

“…….”

“아버지께서도 좀 죽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음, 지금 당장 말고 2년 뒤쯤 어떠십니까. 그동안 여자를 갈아 치우면서 연막을 피워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버지 대신 방패로 세울 여인과 성혼해 주셔야겠습니다.”

“하.”

“때가 되면 계절 축하든 뭐든 핑계를 대서 지역 내 모든 미혼 오메가를 모아 주시길. 찾고 싶은 여인이 있어서요.”

이렇게까지 샅샅이 뒤져도 꼬리를 밟을 수 없다면 스스로 저희를 찾아오게 만들면 그만 아니던가. 메리는 휴고처럼 부작용을 앓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평민은 함부로 이사하지 못하니 동북부를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짝짓기를 하다 만 오메가. 결혼에 실패했을 가능성에 승부를 걸어 보기로 했다.

“그녀와 결혼하고 나보고는 죽어 달라?”

“예. 줄초상이 되지 않도록 시기를 잘 조율해 보죠.”

뻔뻔하게 부모의 죽음을 요구한 패륜아 미겔이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협상에 실패해 본 적 없는 계략가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끼익. 의자 등받이가 낮은 신음을 질렀다.

푸른 눈의 청년이 무릎 사이에 깍지를 꼈다. 의미심장하게 미소한다. 그를 마주한 콘라드의 심장이 어떠한 예감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프레도 선황께서 숨을 거두기 직전, 안젤리나 공주의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

“축하드립니다. 두 분 모두 자유의 몸이 되셨군요. 죽음을 위장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사망신고까지 완료한 후 먼 곳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은퇴한 이들의 로망 아니던가요.”

“정말이냐. 그게… 알프레도 님의 유언이었던가.”

“예.”

확답을 들은 콘라드는 잠시 침묵했다. 곧, 그의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딸을 이제는 콘라드에게 보내 다오.’

선황, 알프레도는 과거 한 쌍의 제비처럼 정다웠던 연인을 찢어 놓았다.

금지옥엽 아꼈던 외동딸을 콘라드에게서 떼어 내어 병목 지역 국가 비셴에 강제로 시집보낸 것이다. 결혼 동맹으로 군사 접경 지역의 지배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치 전략에 희생당한 안젤리나는 꽃 같은 생기를 잃고 스러져 갔다.

동성애자인 비셴의 왕은 매일 밤 창기를 불러 비역질하며 침대 앞에 그녀를 세워 놓고 조롱했다. 그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여 안젤리나는 눈물 젖은 편지로 연이어 모국에 호소했으나, 선황은 그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

이혼 요청을 묵살했고, 친정으로 돌아오겠다는 요청 또한 거절했다. 국가의 안녕 앞에서 공주의 행복은 짓밟혀야 마땅한 사소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죽기 직전에야 그녀를 콘라드에게 돌려주겠노라 마음을 돌린 것이다. 참회와 변덕 그 어느 사이에 걸친 심경 변화였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싶은 욕심이 났거나.

“그럼 죽어 주시겠습니까, 아버지.”

안젤리나의 숱 많은 검은 머리칼을 물려받은 휴고가 나직하게 되물어 왔다. 그런 아들의 종용에 콘라드는 환희하였다.

***

“…마치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군요.”

올가의 뺨에 가느다랗게 흐르는 핏방울을 주시하던 미겔의 입꼬리가 깊게 팼다. 긴장된 분위기를 더욱 조이는 미소였다.

아아.

마침내 그녀를 찾았다.

아니, 그녀가 자신들에게 찾아왔음이다.

달콤한 향.

미겔은 숨죽여 올가의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난 2년간 허름한 리본으로 자위하며 중독된 냄새. 심장이 거세게 맥동했다. 현명함과 오기, 그리고 겁먹은 연약함이 뒤엉킨 얼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랑의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날 듯이 기뻐 구름을 밟는 기분이었다.

“휴고, 근처에 있는 거 안다. 낯가림 집어치우고 나와 봐.”

그는 아가리를 쩍 벌린 짐승이 되었다.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분이야. 인사드려야지.”

네 메리가 찾아왔어.

또 다른 짐승을 불러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안젤리나 공주가 유언장을 송고한, 화창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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