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전야 (6/12)

5. 전야

모든 축제의 꽃은

전날 밤의 흥분 아닙니까.

그 저택에서의 ‘퍼스’가 이 후작가의 ‘퍼스’라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놀라울뿐더러 간담이 서늘했다. 한순간, 비에 젖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망령된 자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뜨거운 손. 상반되어 서느렇던 입술. 입천장을 거칠게 쏘삭거리던 두꺼운 혀.

정원에서의 입맞춤이 머릿속에 눌어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며칠 내내 이런 상태였다. 잠을 자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섰다. 피곤 때문에 입 안이 죄 뒤집혀서 수프를 한 모금 삼키기도 힘들었다.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조금 체했나 봅니다. 소화가 잘 안 되어서요.”

설마 그때 짝이 되었던 거라니.

그렇기에 열성 오메가 취급을 당한 거라고.

‘그 밖에도 무수한 부작용을 겪고 있으실 겁니다.’

정체를 밝힌 기사는 입맞춤 도중 듬성듬성 속삭였다.

‘저 역시 당신에게 얽매였기에 불안정했습니다.’

흉흉한 성기를 감추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사정하지 못한 불구였습니다. 여자인 당신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 산지옥의 고통을.’

가능한 일이던가?

입맞춤의 감촉과 함께 떠나지 않던 질문이었다. 올가는 정서가 불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각자 간격을 두고 앉은 휴일의 점심 자리였다. 그녀는 미겔에게 고개를 고정하고 인형처럼 웃었다.

“흠, 코르셋이 너무 조이는 거 아닌가요. 이봐.”

“예.”

“다음부터는 편한 복장을 준비해 드려라. 불편한 장치는 전부 제외해. 불편함까지 감수하면서 몸매를 가꿔야 할 필요가 있나. 이미 충분하신데.”

올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겔은 다른 사용인들과 멀리 시립하고 있던 실비아를 불러 딱딱한 상아 코르셋의 제거를 주문했다. 귀족의 복장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촌스러움을 꼬집는 것만 같다. 하나 먼저 변명한 바가 있기에 올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쓰게 웃었다.

“……!”

그런데 이 명령은 예상치 못한 부가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부인?”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식사를 마치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까칠한 실비아의 도움을 받아 코르셋을 벗고 얇은 비단 슈미즈 한 겹만 남겼다. 한결 숨쉬기가 편했다. 더불어 벗기거나 희롱하기도 쉬워졌다.

“부인? 어디 계신가요? 잠깐 사이에 도대체 어디로 가셨담.”

방을 나서자마자 바로 옆 기둥 뒤로 끌려갔다.

보기 드문 평상복 차림의 기사가 재빨리 올가를 납치했다. 그림자 속에서 동그랗게 홉뜬 눈두덩을 핥은 남자가, 한 손에 남김없이 들어오는 작은 턱을 붙잡아 입술을 뭉개듯 키스하기 시작했다.

“응……!”

넓은 혀가 목젖에까지 침범했다가 물러나면서 점막에 고인 침을 모조리 빨아 갔다. 열렬하게 빠는 소리에 이어 올가의 신음이 뒤늦게 터졌다. 높게 들린 뒤꿈치가 바들바들 경련했다. 반대쪽 복도 방향으로 멀어진 실비아가 이 기습 밀회의 소음을 듣지 못해 다행이었다.

“휴고, 제발. 안… 흣.”

거부하는 손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이상한 표현이었지만 머릿속이 달아서 몽롱해졌다. 뇌를 꺼내어 꿀타래에 담갔나 싶을 정도였다. 이처럼 올가는 비강을 거쳐 제대로 뇌 중추에 직격한 휴고의 페로몬에 맥을 못 추었다.

면역이 없는 그녀를 무도하게 휘두르는 알파의 페로몬에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정말로. 여기에서 생각이 끊겼다. 그녀의 목에 감긴 초커를 갉작거리던 휴고가 단숨에 어깨 소매를 잡아 내렸기 때문이다.

“아, 아!”

슈미즈까지 한꺼번에 벗겨져 한쪽 맨살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뽀얀 젖 중심의 유륜은 정말로 연한 꽃잎 색이었다. 휴고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오목하게 숨은 젖꼭지를 힘주어 빨았다.

예민한 꼭지 주변에 밀집한 감각 세포들이 일시에 비늘처럼 일어섰다. 올가의 신음도 단박에 새되어졌다. 그녀는 가슴을 빠는 머리통을 움켜쥐고 입을 막았다. 질끈 감은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언제쯤 침실로 초대해 주실 겁니까.”

미겔 이 자식은 정말로 올가의 가슴을 보았던 건가.

흡착해 빨아 낸 젖꼭지가 정말로 큼직했던 것이다. 꿈에 그리던 여인의 살갗에 드디어 접촉했다는 감격이 질투로 희석되었다. 휴고의 청안에 불똥이 튀었다. 빠드득, 이를 간 그가 좀 더 구석으로 올가를 밀어붙였다. 도드라진 젖 알갱이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비비며 직설적으로 교접을 요구했다.

“이제 곧 제 러트 주기가 돌아옵니다. 억제제는 복용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못 마쳤던 그때의 짝짓기를 매듭지을 겁니다. 반드시.”

그 포학한 생식기를 올가의 밑에 밀어 넣겠고 말겠다는 선포였다. 짝짓기란 단순한 정사와 전연 달랐다. 다시 말해, 개처럼 노팅(knotting)하여 멍울져 부풀어 오른 성기 뿌리로 질구를 틀어막고 정액을 쏟아붓겠다는 선고이자 선서였다.

감히 아들이, 어미에게.

가슴 끄트머리 애무에 신음하던 올가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철썩!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휴고의 뺨을 거세게 때린 건 반사적이었다.

“단단히 미쳤군요. 그러다 지옥에 떨어져요, 휴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패륜을 입에 담으십니까. 맙소사……!”

말끝이 단호하지 못하고 떨렸다. 이미 그들은 지옥에 한 발을 걸친 것과 진배없었다.

“온전한 제 탓처럼 들리는군요.”

“그럼.”

“왜 신문을 보고 연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신문? 엉뚱한 추궁에 당황한 올가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쳤다.

‘이 집 못된 자식한테 복수하면 꼭 신문 투고란에 작게 실어 줘.’

잊고 있었던 약속이 떠오른 것이다. 돌아갔던 고개를 바로 한 남자가 그녀의 흔들리는 얼굴을 보고 조금 웃었다.

“근방 지역 신문이란 신문은 전부 수소문해서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광고를 실었습니다. 스완에서의 복수 완료. 연락 바람. 당신의 퍼스가. 메리에게.”

그러나 새파란 눈동자는 전혀 웃음기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연락해 주셨더라면 이렇게 재회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저는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부고란에서 이름을 발견할까 봐 무서웠기에 신문은 멀리했고요. 휴고, 네, 당신이 잘못했지 않나요. 미로 정원에서 만났을 때 저를 알아보신 거잖아요. 아닌가요?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랬더라면 절대로 당신 형제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의 무엇을 믿고 그리할 수 있었을까요.”

“뭐라고요.”

“당신은 오메가인 정체를 숨겼고, 알려 준 이름조차 거짓이었으며, 사는 곳도 불명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게서 도망쳐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지 않습니까.”

올가의 허리를 당겨 안은 악력이 거세어졌다. 젖꼭지를 비트는 힘도 강해졌다. 그에 찔린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올가의 위로 휴고의 페로몬이 짙어졌다.

“장담합니다. 제가 정체를 밝혔더라면 당신은 그길로 또다시 도망갔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고요. 겁 많은 여자니까.”

“……!”

정곡이었다.

“가족으로 묶인다면 적어도 놓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새어머니의 자리에 추대했음이다.

올가는 휴고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의적인 전말에 경악했다. 미쳤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혼잣말을 들은 상대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정신으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최소한의 도덕마저 무자비하게 짓밟은 기사의 진면목이 추악했다. 올가는 곱아드는 혀로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본능이 비웃고 있었다. 성벽을 치는 달걀처럼 무의미한 시도가 될 거라며.

“그, 근친간은 역모에 준하는 대역죄예요.”

“압니다.”

근친간 금기의 역설이다. 금지되었다 함은 그만큼 횡행했다는 의미였다.

2촌 근친까지 밥 먹듯이 하면서 혈통을 존속하던 황가가 몇 세대 전에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 뒤 유전병을 밝혀낸 황제가 국법을 뜯어고쳤다. 그로써 법전의 첫 페이지에 근친간하는 자는 남녀를 모두 척장분지형(剔臟分肢刑)에 처한다는 조항이 새롭게 새겨졌다.

“교수형을 당한 뒤 내장이 갈려 토막이 날 거라고요……! 만약, 만약에라도.”

휴고에게 목덜미를 내어 주고 턱을 젖힌 올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생전에 이런 걱정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만약에…….”

“아이가 생긴다면 유복자로 키우면 될 일입니다.”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도 않았다. 휴고가 그녀의 두려움을 서슴없이 낚아챘다. “초커를 하고 있다고 해서 남편과 밤을 보낸 적이 없겠습니까.” 새어머니와 성교하여 낳은 자식을 죽은 부친 아래 입적하겠다는 몰도덕한 발언이 끔찍했다.

“빨리 갖는 게 좋겠습니다. 둘러댈 수 있는 시기를 놓치기 전에.”

줄줄이 태어날 아이들까지 유복자로 속일 수는 없을 테지마는.

물론 첫째 또한 남의 아들로 속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당장의 불안감만 해소하면 그만이었다. 이미 이 여자는 늪에 빠진 작은 새였다. 뻘 아래에서 발목을 틀어쥔 각기 다른 두 손을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늦었다.

“오늘 밤이라도.”

당장이라도 맥박 치는 이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다.

휴고는 흡혈하는 괴물과 다름없는 거센 충동에 치받혔다. 올가의 초커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납 열쇠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알파의 러트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으나 그 정확한 시작점은 알파 본인의 감정 상태에 따라 세세하게 좌우되었다. 이에 따라 휴고는 직감했다. 올가의 치마를 걷자마자 반드시 러트가 시작되리라는 걸. 적절한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을 겨를 따윈 없었다.

“문을 열어 주신다면.”

정중한 혀와 달리 기사의 송곳니가 번뜩였다. 군침이 돌아 견딜 수 없었다.

한 시간만. 딱 한 시간이면 된다. 진작 발기한 상태였다. 속옷을 끄르고 삽입만 하면 그만이었다. 가녀린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노팅할 시간만 주어진다면야. 이 초라하고 먼지 매캐한 복도 구석에서도 역사는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사무쳤던 지난날의 매듭을 짓는 거다.

기대에 복받쳐 나직하게 신음한 그가 올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약간 집어넣었다. 치아 안쪽을 애무하다가 굳은 혀끝을 만났다. 이내 휴고의 혀가 뱀처럼 올가의 혀를 휘감았다. 어서 구애를 허락해 달라, 마음을 담아 그녀의 혀를 당겼다.

“다, 당신은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읏, 미겔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자신의 동생과 잠깐 이용하고 말 여자의 과거사에 대해서.

휴고의 페로몬에 저항하려는 이성의 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단내에 취한다. 뒷걸음쳐 창틀 턱을 잡고 기대선 그녀는, 나머지 젖가슴까지 헐벗겨져 빨리는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이지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물어야만 했다. 당신의 형은, 미겔은 이 배덕의 전모를 알고 있는가.

그사이, 휴고는 올가의 젖꽃판에 선명한 잇자국을 남겼다. 뒤이어 뻗은 콧대로 가슴 밑을 들추었다. 그렇게 살이 접친 부위의 땀을 핥으려던 순간이었다.

…탕!

불시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졌다. 등 뒤의 창밖으로 우거진 나무가 몸을 떨고 새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탕! 탕!

무엇을 맞히고자 하는지 살벌한 총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 울리는 경종이었다. 아버지의 가죽 혁대 휘두르는 파공음 또한 순간적으로 연상되었다. ‘정절을!’ 침 튀기는 고함과 살가죽이 찢어지는 쓰라림까지 되살아났다. 소스라쳐 정신을 차린 올가는 온 힘을 다해 휴고의 발등을 뒷굽으로 찍었다. 가까스로 그를 떨쳐 냈다.

“올가!”

부르는 외침을 무시하고 내달렸다. 빈 회랑을 달리면서 누가 볼세라 황급히 옷소매를 끌어 올린 참이었다. 꺾인 복도를 끼고 돌아가다가 하마터면 반대쪽에서 나타난 사람과 거하게 부딪힐 뻔했다.

“어머, 부인.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땀을 흘리시나요?”

실비아였다. 윗사람을 고까워하는 시녀가 당황하여 숨을 몰아쉬는 올가를 미심쩍은 눈길로 흘겨보았다.

***

“방해꾼 자식!”

기어이 올가를 놓친 휴고가 창문을 험하게 열어젖혔다.

“방해라니. 실수하기 전에 막아 준 거지.”

창문 아래 공터에는 아니나 다를까 미겔 체이스필드가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에 그의 머리칼이 금싸라기처럼 눈부셨다.

“그 자리에서 저지를 뻔했잖아. 계약 위반 아닌가.”

탕! 이제 겨우 개발 단계에 착수했을 뿐이다. 후작가의 미정 후계자가 국내에 몇 자루 없는 장총의 노리쇠를 철컥, 당겼다. 곧장 새로운 탄피가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상 참작해 주지. 필요 불가결한 과정에서 일어난 실책이었다고 쳐.”

‘의지박약한 새끼.’ 미겔이 무섭게 노려보는 동생에게 핀잔을 던지고 총신을 내렸다. 땅에 총구를 꽂아 세우고 지팡이 삼아 비딱하게 섰다.

“어때? 따로 밀회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잖아. 진척이 좀 있었나.”

“…그녀가 내 냄새를 인지하기 시작했어.”

“아하, 내 가설이 맞았군. 둘이 가까워지면 중단되었던 짝짓기 과정이 재개될 것 같았거든. 멈췄던 태엽이 다시 돌아가는 거지. 난 그 가운데 절묘하게 끼어들면 되는 거고.”

“그녀의 향이 느껴지나?”

“금목서 향? 그럼. 이렇게나 생생하고 진한걸. 숨만 들이켜도 심장이 두근두근하지 않나. 본능적으로 확신할 수 있어. 올가는 오메가로서 개화하고 있다. 곧 히트가 찾아오겠군.”

“네 러트는.”

“억제제 복용만 때려치우면 당장이라도 노팅 가능하지. 너처럼.”

어깨를 으쓱인 미겔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또 더러운 계략이라도 짜고 있는 거겠지. 창틀에서 몸을 떼어 낸 휴고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적거리긴 싫은데.”

“묘수라도 있나?”

“뭐, 오소리 사냥이라면 내 특기지.”

현신한 천사처럼 아름다운 사내가 킬킬거렸다.

지나다니는 동선에 굴을 파 놓고 깊숙이 덫을 치는 게 정석 아니던가. 그러고 나서 긴박하게 몰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명석한 여자.

그러나 아둔할 정도로 순진한 여자.

올가. 그녀를 갖게 된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힐까.

짝이 된 알파 오메가에 대하여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일체의 논문이나 문학 잡류를 믿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냉소적인 미겔이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 또한 확실했다. 사랑 놀음에 정신이 나간 일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증오하는 이들을 선망하여 그들의 사랑을 좇다니. 모순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만큼, 심신이 고되고 지쳤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사람을 혐오하여 그들을 가지고 놀기에만 혈안이었던 미겔이었으나, 이제는 그토록 비웃던 사랑이 당겼고 사무쳤다. 마지못해 인정해야 했다. 그 자신은 밑 빠진 애정 결핍의 결정체였다.

사랑할 여자. 사랑해 줄 여자.

태어난 순간부터 욕망, 가식, 음모 속에서 나뒹굴던 그가 찾을 수 없는 환상이었다.

그렇게 충족될 수 없는 갈구에 하루하루 비틀어져 죽어 갈 즈음이었다. 뜻밖에 어릴 적 헤어졌던 형제를 찾았고, 녀석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미겔은 낡은 머리끈을 신성한 보물처럼 보듬던 친동생을 목격한 순간의 감정을 똑똑히 기억했다.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강렬한 질투에 사로잡혔더란다. 하여, 그토록 숭배하는 그녀를 자신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 마음먹자마자 작당을 제안했다.

그것은 비단 한 여자뿐 아니라 그들 형제의 삶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모의였다. 이처럼 인의(人義)를 벗어난 계략의 동기는 싱거울 정도로 너무나 단순했다.

그저, 사랑이 고파서.

“그럼 이제 카드 게임이라도 해서 순번을 정해야 하나.”

숭배받는 여인, 올가의 마음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이라도 기꺼이 도맡을 미겔이 목을 울려 웃었다.

오소리를 길들이는 법은 오소리를 사냥하는 법과 비슷했다. 덫까지 몰아붙여 다정하게 팔 벌리면 된다. 그러면 사냥꾼을 구해 주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 품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올가의 허리를 껴안을 작정이었다.

결국, 먼저 섹스를 조르는 자는 그녀가 될 테다.

자신하는 미겔의 미소가 고혹적으로 변했다.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싶어졌다. 그녀가 오메가이고, 자신이 알파라는 행운에 대하여.

***

빈속에 억제제를 과다 복용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경련하는 위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그런데도 쿵쾅거리는 심장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숨을 참고 있어도 뇌리에 박힌 휴고의 단내가 났다. 자석처럼 강한 인력을 가진 향. 자신을 오매불망 그리워하였노라는 남자의 품에 달려가 안기고픈 충동을 부추겼다.

“안 돼… 윽!”

그날부로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방에 틀어박힌 올가는, 서둘러 침대 베개 밑에 숨겨 두었던 포크를 꺼내 들었다. 삼지창처럼 끝을 세우고 치마를 걷어 올린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 일순 동공이 좁아질 정도로 아팠다.

허드슨은 올가의 발정기를 극도로 꺼렸다. 여자의 욕망은 죄다. 누누이 강조했고, 스완에서의 정조 위기를 겪은 이후로는 싸구려 억제제를 빼먹지 않고 복용시켰다.

주변에 그녀를 자극할 만한 알파가 없는 것도 일조했지마는, 이러한 아버지의 히스테리 덕분에 올가는 한 번도 발정기를 겪지 않았다. 더불어 꼭 오메가가 아니라도, 남자가 아니어도, 여자의 성욕 또한 정당한 욕구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값비싼 장난감을 보면 훔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일평생 억누르고 다스려야 할 속된 본성으로 여겼다.

“으윽!”

가끔 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깨어날 때가 있었다. 아래를 만져 보면 어김없이 속옷이 축축했고 가랑이가 욱신욱신했다. 그럴 때면 부도덕한 자신에게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하여 스스로 벌하듯 허벅지를 꼬집기 시작했고, 바느질하던 바늘로 찌르다가, 여기까지 이르렀다. 올가의 흐벅진 허벅다리 안쪽에는 늘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래, 잘 알고 있다.

키스를 바라면 안 된다.

가슴을 움켜쥐고 세게 물어 당겨 주기를 바라면 안 된다.

다리 사이를, 치고 들어오기를 바라면 안 된다.

하물며 아들에게!

“아무리 당신이라도… 아, 휴고.”

나란히 도시 성벽에 목이 매달리는 끔찍한 광경이 감은 눈꺼풀 안쪽에 그려졌다. 그런데도 몸은 계속해서 뜨거워졌다. 억제제가 도통 듣지를 않았다. 마치 자신의 알파를 이제는 돌려 달라 아우성치듯이.

침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올가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졌다. 그녀는 뜨겁게 달군 돌 위의 뱀처럼 뒤척거리며 양손으로 다리 사이를 꽉 움켜쥐었다. 흥건한 물기가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너무나 거세져서 사위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첫사랑이었던 남자. 첫사랑이었노라 고백해 준 남자.

모두가 선망하는 우성 알파. 정중하나 동시에 야만적인 기질을 가진 사내.

젖은 고목처럼 어두운 피부색. 새까만 흑발이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휴고 퍼스 체이스필드. 믿을 수 없게도 아직 여자를 모르는 이였다. 자신만을 바라고 미쳐 살았다는 그의 성기에서는 엷은 핏빛이 섞인 정액이 흘렀지 않나. 회상하자마자 짜릿하여 발가락이 벌어졌다.

비명을 지르는 이성과 정반대로, 난생처음 욕정의 대상이 된 기분을 만끽하여 환호하는 자신이 있었다.

거짓말쟁이. 누가 누구를 매도하는 거야.

본능이 소리 질렀다.

뜨겁게 안기고 싶어. 그 단단한 몸에 짓눌려서 배 속이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찔리고 싶어. 그의 새끼를 배고 싶어. 난 오메가야! 알파의 씨를 원해. 난 그의 그릇, 검집, 우러를 여왕이 될 거야. 내 향기에 취한 알파를 발끝으로 복종시킬 거야. 내 음부에 코를 박고 밤새도록 봉사하게 할 거라고!

“시끄러워!”

올가는 커다란 베개로 양 귀를 막고 받아쳤다.

이 거대한 저택을 벗어나야 해.

그녀는 거듭 결심했다. 그것만이 죄를 범하지 않을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벗어나기란 역부족이었다. 휴고 퍼스는 변경백 대리였다. 동북부 전체에 눈이 달린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날 도와줄 수 있지.

“…미겔.”

휴고 퍼스에 대항하여 그녀에게 조력할 수 있는 유일한 자. 미겔 체이스필드. 한 줄기 희망이 비쳤다. 아주 가느다란 빛이었다. 그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므로, 올가를 놓아주는 대신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할 게 분명했다. 그가 작위를 받을 때까지 어머니의 자리에서 버티겠다는 선계약 또한 남았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견디어야 했다.

생각 타래가 무한으로 뻗어 나가다 어느 순간 정지했다.

약 기운이 돌고 무섭게 잠이 오기 시작했다. 올가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태아처럼 웅크려 잠에 빠졌다. 잠자리를 봐주는 사용인들이나 실비아마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문을 철저히 잠근 후였다. 금속 경첩을 단 두꺼운 흑단 문이니 제아무리 덩치 큰 기사라도 무작정 침입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에, 방심했다.

끼익.

올가가 잠든 침대 맞은편의 커다란 액자가 비뚤어졌다.

뒤이어 감쪽같았던 벽면의 이음새가 벌어졌다. 비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선 남자가 가구 위에서 타오르고 있던 초를 훅, 불어 껐다. 순식간에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

“…….”

후작 부인의 방에 은밀하게 들어선 자는 미겔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독보적인 금발이 반짝였다. 발소리 죽여 침대에 다가온 그가 가만히 숨을 삼켰다. 정숙한 여인의 흐트러진 몸가짐이 몹시 자극적이었던 까닭이다.

반투명한 슈미즈 자락이 배꼽까지 올라가 달빛처럼 흰 엉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두 손으로 움켜쥐어도 모자랄 둔부의 골짜기에는 속옷이 돌돌 말려서 끼었다. 그 아래 엇갈린 허벅지의 멍 자국 또한 또렷했다. 위로는 어떠한가. 가슴 끈을 풀어 헤친 덕에 부드럽게 흐른 젖무덤이 훤히 보였다. 넓고 도톰한 젖꽃판 한가운데 오뚝하게 불거진 젖꼭지를 보라. 휴고의 잇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겔은 곤히 잠든 올가를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식칼이 번뜩였다. 곧장 섬뜩한 날이 반원을 그리며 올가의 위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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