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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소리 사냥 (8/12)

7. 오소리 사냥

그 윤기 나는 털을 더는 못 참겠더군요.

굴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아예 굴을 무너뜨렸죠. 뻘에서 그 짓 하는 것도 나쁘지 않덥니다.

숨이 가빴다.

저도 모르게 가슴 끄트머리를 쥐어짜며 허리를 비틀었다. 올가의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신음이 가늘게 터져 나왔다. 허벅지가 벌어지고 얇은 손이 그 사이로 들어갔다. 뜨겁고 움찔거렸다.

“아, 하아.”

현재 그녀는 혼몽하여 외설적인 꿈을 꾸는 중이었다.

다리가 닫히지 않을 정도로 몸이 두꺼운 남자의 아래 깔렸다. 그의 헉헉거림이 듣기 좋았다. 이 사내가 더 정신을 못 차리고 자신을 원했으면 좋겠다. 하여 그가 닥쳐들고 있는 아래를 더욱 조였다. 올가는 음란한 기습에 허릿짓을 이어 가지 못하고 무너진 단단한 어깨를 휘감았다.

좀 더 들어와요.

난 받아들일 수 있어.

강하게 짓찧어 봐요. 뿌리까지 넣어 봐. 응?

깊이 연결되어서 당신의 음모에 할퀴어지고 싶어요.

빨갛게 쓸리고 부어올라서, 걸을 때마다 아래가 따끔따끔하겠지.

온종일 당신만 생각하게 될 거야.

아…….

미겔.

“……!”

마침내 얼굴이 보였다.

치받는 성감에 어쩔 줄 모르고 신음하는 남자는 미겔이었다. 여인보다 섬세하고 유려한 이목구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가 맑은 선홍색 입술로 입 맞추기 위해 다가오던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허억, 헉……!”

무서운 꿈이었다. 정수리에서부터 식은땀이 솟아서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도대체 왜…….”

휴고도 아니고 미겔이 꿈에.

아니야, 의미를 두지 말자. 한낱 꿈일 뿐이야. 억제제를 복용하면 이런 불결한 기분도 잦아들 거야. 올가는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깨물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초커가 제대로 달려 있었다. 안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이 따끔했다. 뭐지. 녹갈색 시선을 위로 하자, 베개 옆에 직각으로 꽂힌 식칼의 시퍼런 날이 보였다. 살짝 닿은 검지가 베여 몽글몽글하게 피가 비쳤다. 일순 온몸이 경직되었다.

…똑똑.

“기상하셨습니까.”

그때였다. 후작 부인의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실비아가 찾아왔다.

올가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침대 아래로 밀어 넣어 숨겼다. 진작 숨겨 놓았던 포크와 맞부딪혔는지 금속성 소음이 났다. 쿵, 쿵. 맥박이 가파르게 소리를 질러 댔다.

“네, 들어와도 좋습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려는 몸을 의식적으로 강제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자 달칵, 문이 열리고 실비아 브렛이 세숫물 담긴 대야를 가지고 들어왔다. 2차 충격이 뒤늦게 올가를 휩쓸었다.

기억이 났다.

문을 확실히 잠그고 누웠었는데…….

“기상이 자꾸 늦어지시는군요, 부인. 벌써 두 번이나 허탕 치고 세 번째 깨우러 온 거랍니다. 이러시면 안 되어요. 아랫사람이 흉봅니다. 본보기가 되어 주셔야죠.”

“…사람들이 저를, 싫어한단 말인가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어머.”

올가의 목소리가 뜻밖에 날카로웠던 모양이다. 장미수에 적신 수건을 침상에 올려 둔 실비아가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모르고 있었냐는 눈치였다.

“왜 저를 그렇게 보시는지 모르겠군요, 부인.”

“하신 말씀에 뼈가 있어서 그렇지요.”

“충언이 불쾌하셨을까요. 저는 그저 조금이나마 부인의 평판을 회복하고자.”

“평판? 누가 누구에게.”

손등이 하얗게 질리도록 수건을 움켜쥐자, 압력이 가해진 검지의 상처로부터 피가 약간 번졌다.

올가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결혼하고, 부인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한데 어째서 이다지도 숨이 막히는 걸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뒤로 밀려나고 있다. 절벽의 돌 부스러기가 느껴지고, 바람만 불어도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근면 성실함이 욕먹을 이유가 될까요, 실비아.”

“어디에 계시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부인. 진흙 발로 발버둥 치면 연못이 더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못의 주민들이 싫어할 만도 하겠지요. 아무튼. 자, 신발 신으세요. 의복을 정제하시고 오전 일과를…….”

끝까지 비아냥을 그치지 않는 시녀가 침상 밑에 슬리퍼를 가지런히 두었다. 시키는 대로, 올가는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신에 발을 밀어 넣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실비아의 재촉에 응하기는커녕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차남은 어디에 있나요.”

“휴고 경이요? 순찰 업무 때문에 나가 보신 거로 압니다. 아침 일찍 전서구가 도착해서…….”

“장남은?”

“미겔 공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아침도 거르셨어요. 처리하셔야 할 설계 업무가 밀리셨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상중이라 겨를이 없으셨을 테니까요.”

휴고가 자리를 비웠다.

개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올가는 가느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세요, 실비아.”

“예?”

“미겔이 서재에 있다는 건 오늘 찾아올 객이 없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저도 저 알아서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부인. 오늘은 회계 장부 교육을 받으셔야.”

“회계라. 두 자릿수 계산을 틀리시는 분께 배우고 싶지는 않네요. 가계 장부는 주판과 함께 두고 나가세요. 마무리하고 직접 책임자께 전달하도록 할 테니까요.”

“……!”

말문이 막힌 실비아의 얼굴이 못내 붉어졌다. 잘난 척 부인을 가르치려다가 단순한 계산을 틀렸던 적이야 있었지만, 그 실수를 단적으로 꼬집어 창피를 줄 줄은 몰랐다.

“그럼 혼자서 잘해 보시지요, 부인.”

입술을 씰룩인 그녀가 매몰차게 뒤돌아 또각또각 걸어 나갔다.

머릿속으로는 저 건방진 후작 부인의 뺨을 열두 대는 더 후려치고도 남았다. 내가 누구의 오른팔인 줄 알고, 감히… 감히! 입술을 짓씹다가 차갑게 웃기도 했다.

귀공들이 어머니, 어머니, 하며 잘해 주는 걸 곧이곧대로 믿는가 보군.

역시 이 물에 어울리지 않는 천한 계집이었다. 수준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지 않나.

귀족이란 무릇 진짜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 법. 여러 개의 가면을 갈아 끼우며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상대방을 떠보는 것이다. 그 재미를 모르고 고급 장막을 들출 방법도 모르는 년. 두고 보라지. 스타킹 하나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쫓겨날 일이 머잖았다.

“하아.”

쾅. 실비아가 까칠하게 문을 닫고 나가자, 올가는 그제야 원 없이 비틀거렸다. 침대 머리 기둥을 가까스로 붙잡고 슬리퍼에서 발을 빼냈다.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 얇은 피부가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신발에 면도칼을 거꾸로 박아 넣은 것이다.

도대체 누가.

침상에 칼을 박은 악인과 동일 인물인가.

그렇다면 왜.

그 순간. 휴고와의 입맞춤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쩍였다.

올가는 들릴 듯 말 듯 신음하며 침대 옆면에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끔찍한 죄악과 의미심장한 악의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고 울어 봤자, 주변에는 꼴좋다고 손뼉 칠 이들뿐이라는 사실이 헛구역질 나도록 몸서리쳐졌다.

벗어나고 싶어.

이렇게 숨이 막혀 살 수는 없어……!

오직 단 한 가지, 맹렬한 자유의 욕구가 올가를 다시 일으켜 세웠음이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한때 죽음조차 불사하려던 자신 아니던가. 막상 타인의 살해 위협이 닥치자 이제는 그로부터 달아나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니 발목에 바위를 달아 바다에 뛰어들었다 한들 편히 죽지는 못했을 테다. 어떻게든 다시 빠져나오려고 추하게 허우적댔겠지.

“…구질구질하네.”

사는 게.

올가는 고요하게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고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테이블 다리를 붙잡고 절뚝거리면서 일어섰다. 실비아가 놓고 간 장부 표지를 짚자, 실금처럼 붉은 얼룩이 묻었다.

마침 좋은 건수였다. 장부를 빌미로 미겔과 대화의 물꼬를 틀어 보자.

자리에 앉은 그녀는 잉크에 적신 깃펜으로 하나씩 숫자를 기록해 나갔다.

혼란한 마음이 자못 가라앉고 숨소리가 잔잔해졌다.

“언제쯤 찾아오려나.”

그런 그녀의 아래에서 미겔이 혼잣말했다.

말 그대로, 후작 부인의 침실 바로 아래층이 서재였다. 비딱하게 턱을 괴고 책상에 다리를 꼰 남자가 낮게 허밍했다. 손가락을 튕겨 진자 운동 장식품을 건드리자,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를 내며 쇠구슬이 움직인다. 올가의 심장 소리가 연상되었다.

“내려오세요, 어머니.”

차라리 아주 미쳐 버리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자유롭게 해 드릴 테니.”

최저에서 한번 박살 나고 나면 오히려 홀가분해질 겁니다.

“함께 진창에서 굴러 봅시다.”

온순한 미끼가 되어 주십시오, 부디.

푸른색 날염한 머리끈을 코끝에 갖다 대고 숨을 들이켠 미겔이 킬킬댔다.

***

“꺄악……!”

회계 정리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어느덧 오후의 색이 바뀌고 있었다.

언제 휴고가 돌아올지 몰라 초조해졌다. 올가는 서둘러 장부를 한 아름 껴안고 계단을 내려왔다. 늘어선 창가에 그녀의 머리 색과 비슷한 노을이 짓쳐 복도 전체가 노르스름했다. 서재를 찾는 일은 아주 쉬웠다. 옻칠한 양각 문 때문이 아니라, 독보적으로 훤칠한 미겔이 복도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지.”

식기를 나르다가 자빠질 뻔한 하급 하녀를 부축한 그가 나긋하게 꾸중했다. 그의 품에서 황급히 떨어진 어린 소녀가 왜 저렇게 홍당무가 되었는지, 올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스물여덟의 젊은 후계자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동작 하나, 하나가 명인의 붓질처럼 선명하고 화려한 이 아닌가.

“…미겔.”

“아, 어머니.”

뒤돌아선 남자가 화사하게 웃는다.

“전해 드릴 것도 있어서요. 드릴 말씀이 있고…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는지.”

“그럼요, 얼마든지요. 긴밀한 내용 같으니 이리 들어오셔서 이야기하시죠.”

흔쾌히 서재 문을 연 미겔이 올가를 인도했다.

쌉쌀한 원목과 종이 향이 가득한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책투성이였다. 끼익…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올가는 가까운 곳에 장부를 내려놓고 근처의 화병에서 꽃을 한 송이 뽑았다.

“자, 맡으세요.”

“…무슨?”

“향에… 민감하시지 않나요. 이 꽃의 이파리는 구역질이나 오심을 가라앉히는 약초입니다. 진정 효과가 뛰어나니 금방 속이 편해지실 거예요.”

“…….”

“저희 집 주변에 많이 나던 꽃이라 눈에 익어서요. 자주 꺾어다가 장날에 내다 팔았죠.”

꽃목을 꺾은 울금초의 푸른 대를 미겔에게 건넸다. 아침의 낯 뜨거운 꿈이 생각나 차마 그의 얼굴을 당장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올가는 무의식적으로 초커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낮은 목소리에 장난기가 싹 빠졌다.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미겔이 입술을 열었다.

“제가 여자를 싫어한다는 걸요.”

그렇게까지 확신하진 않았다.

다만, 의외로 여성의 향을 꺼리는구나 짐작했을 뿐. 멋대로 남의 약점이라면 약점을 들춘 죄가 있어 올가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에는 환기에 유독 신경을 쓰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좀 더 지켜보니, 창문을 여실 때는 꼭 여성이 함께한 자리더군요. 그 뒤로 살펴보다 알게 되었습니다. 맨손으로 여성의 손을 잡지 않으시고, 언제나 일정 간격을 두고 담화를 나누신다는 걸요.”

결정적인 장면은 그의 토악질이었다. 언젠가 조문을 온 귀부인이 분첩을 두고 갔을 때였다. 방석 밑에 깔린 화장품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겔이 화장품을 엎질렀는데, 그는 피어오른 분가루 냄새를 맡자마자 뛰쳐나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왔다. 당시 올가는 희미하게 들렸던 구역질 소리를 모른 척했었다.

“죄송했어요.”

뒤로 물러나 미겔에게서 거리를 둔 올가가 아주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제게만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죠. 배려해 주신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네?”

“정말로 어머니… 올가, 당신만큼은 괜찮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멀어지려는 그녀의 손을, 아들이 꽉 잡아당겼다.

“손이 얼음장 같군요. 어째서 그렇게 긴장하셨습니까. 제가 이런 별난 혐오증을 앓는 게 당신 탓도 아닌데요.”

‘이리 와 앉으세요.’ 미겔은 등받이가 없는 셰이즈 롱 소파에 머뭇거리는 올가를 이끌어 앉혔다.

“저를 만나러 오실 구실을 찾으셨군요. 굳이 그럴 필요 없으셨는데.”

“…어차피 제가 했어야 할 일이니까요.”

“그래서 재정에 난 구멍이라도 찾으셨습니까?”

“몇 군데는요.”

“하하, 귀족의 돈이라면 눈먼 돈으로 아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죠. 해서,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집안 어른으로서 위엄을 보여 주셨는지.”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어 쫓아냈다면 더더욱 원한을 샀을 텐데.

올가의 손을 여전히 움켜쥔 채로 같은 소파에 앉은 미겔이 그녀를 탐색했다.

또다. 저, 시험하는 시선. 올가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요, 시종장을 불러 조용히 해결했습니다. 아무래도 큰일이 있은 직후니까요. 괜히 뒤숭숭하여 관리가 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요. 다행히 몇몇 철없는 하인들이 푼돈을 빼돌렸을 뿐입니다. 원금을 세 배로 갚고, 이에 대해서 함구하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시킨 후 오늘 낮에 전원 해고하였습니다.”

“아하.”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일 처리였다. 군부대의 상벌과는 다르다. 가택의 대소사에는 그에 걸맞은 적정한 수준의 징계가 필요했다. 지나치게 잔혹하거나 유하면 오히려 사용인들의 신뢰를 잃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올가의 처분은 완벽했다. 아마 그녀를 은연중에 깔보던 시종장도 이 균형 감각에 매우 놀랐을 게 틀림없었다.

“첫눈에 반하게 하신 거로 모자라, 또다시 반하게 만드는군요.”

“…예?”

“장부 얘기는 때려치우죠. 올가,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예.”

“편히 말씀하세요.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제 약점을 걸고넘어지셔도 괜찮습니다.”

“설마요!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절대로요.”

“값비싼 거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해도?”

“황제의 관보다 비싼 약점이래도 팔지 않겠습니다, 미겔. 당신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요. 가진 것은 없지만 혓바닥 하나만큼은 무겁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아.”

시종 눈길을 피하던 올가가 마침내 미겔을 직시했다. 하나 그 이유마저도 자기 자신을 대변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겔의 불안을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정직과 연민으로 빛나는 선한 눈동자.

미겔은 고요하게 전율했다.

이 순간, 그는 기어이 모든 불신을 떨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 여자야. 그의 알파로서의 본능이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네가 포기했던 낭만과 순애, 정절과 현명함을 모두 갖춘 동화 속 여인.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헐거웠던 이성의 끈이 뚝 끊겼다. 아랫배가 끓어오르고 머리꼭지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알파의 발정. 러트였다.

바야흐로 짝짓기할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고귀하신 여인, 그렇다면 이 미천한 자식이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어서 말해요.

모든 미운 자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신원 불명의 침입자에게서 보호해 달라고.

휴고 자식이 무섭다고 해 봐요.

그러면 제가 당신을 꽉 안아 드리겠습니다.

“올가.”

새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미겔의 음성이 몹시 들떴다. 그의 무릎이 올가의 무릎에 닿을락 말락 했다.

“…미겔.”

“예.”

“저를 떠나게 해 주세요.”

“…….”

그러나 그토록 찬란한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산산이 조각난 염원과 함께 미겔의 푸른 눈이 서서히 식어 갔다. 그러나 올가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훈훈한 분위기에 휩쓸려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콘라드 후작의 장례는 전부 끝났습니다. 명부 작성하셨던 조문객도 거의 다녀갔지 않나요. 조문이 마무리되면 황제께서도 더는 동북부를 비워 두진 못하신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곧, 별 탈 없이 작위를 승계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절 떠나게 해 주세요.”

“올가.”

“부귀영화 같은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네,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족해요. 옆 마을 망나니에게 팔려 가지 않은 게 어딘가요. 그저 말 한 필과 약간의 여비만 챙겨 주시면 됩니다. 조용히 사라질게요. 절대로 집안에 폐 끼칠 일 없이.”

“잠깐만요, 올가.”

그런 그녀를, 마른세수한 미겔이 멈춰 세웠다.

“그러니까. 이혼을 원하시는 겁니까.”

“가능할까요?”

“…족보에 적힌 귀족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는 황제의 명이 필요하죠. 간곡히 청원서를 올린다면야, 뭐. 결혼 사흘 만에 남편을 잃고 독수공방하는 어머니의 처지가 애처로워 눈 뜨고 볼 수 없다 하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충분할 것 같군요.”

“그렇다면.”

“물론 절대로 청원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께서 애처로이 독수공방할 일도 없으실 테고.”

“…예?”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부탁이로군요. 저는 정말로,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올가. 마음이 찢어질 지경이네요.”

이번에는 올가의 희망이 박살 날 차례였다.

떠난다라.

하하. 누구 마음대로?

도와 달라, 지켜 달라, 무릎에 매달리기를 바랐다. 하여 야금야금 그녀 주위를 포위해 좁혔던 것이다. 이 품에 뛰어들기를 바랐지, 자신의 어깨 너머로 뛰어올라 달아나기를 바란 게 결코 아니었다.

벌떡 일어선 미겔은 서재 문 밖에 붉은 표지를 걸었다. 막중한 업무를 보는 중이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 표식이었다.

“어째서 떠나시려는 겁니까. 제가 무엇을 그리 서운하게 해 드렸나요.”

“미겔, 아니에요, 그런 게!”

“하면 무엇이 그리 두려우신 건가요. 근친간?”

“……!”

떠보는 질문에 올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찰칵. 문을 잠근 알파가 돌아서 기대어 섰다. 고개를 까닥이고 화사하게 웃는 것이다.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요.”

“미, 미겔.”

“그래요, 당신의 단점을 굳이 꼽으라면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겠네요. 아, 또.”

“어떻게…….”

“너무 순진한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빨래방 하녀였던 메리.”

“……!”

덜컹!

전신에 소름이 내달려 소파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올가는 어쩔 줄 모르고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이상했다.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자꾸만 손바닥이 미끄러져 무게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상했다.

갑자기 열대우림으로 장소를 이동한 것처럼 숨쉬기가 텁텁해졌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연기가 꽉 찬 것처럼 공기 밀도가 삽시에 상승했다.

아.

세상에, 이건.

“제 페로몬 향은 어떻습니까, 올가.”

“미겔……!”

“느껴지시나요. 제가 발정한 냄새입니다.”

“이럴 리가, 하아, 하아… 여자를 꺼리신다고 하지, 아… 허억.”

“괜찮습니다, 당신만은 예외라고 했잖아요.”

“말도 안 돼…….”

어째서 미겔마저 나를.

어떻게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거지.

설마.

이 모든 게, 형제의.

“…그럴 리가……!”

굳기 일보 직전의 지능이 마지막으로 작동하여 올가를 몸서리치게 했다.

콘라드 후작의 죽음. 새어머니. 황제. 방패. 작위 승계. 일련의 모든 것이 아주 잘 짜인 극본이었다. 진실과 진실을 엮어 가장 음험하고 추악한 목표를 밑바닥에 깔아 둔 것이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되감기하였다가 풀어 헤친 올가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짚은 손이 푹 빠지는 듯했다. 어느새 밀폐된 서재는 하나의 거대한 늪지대로 변하였다. 구석구석까지 꽉 찬 알파의 페로몬 향은 늪에 서식하는 생물이 뿜는 독과 같았다.

그녀는 벼락처럼 깨달았다.

이들이 정말로 원하는 건.

“나, 나였어.”

석녀를 원한다 하였음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들은 올가 자신도 몰랐던 그녀의 정체를 미리 알고 모른 척 그녀를 꼬드겼다. 결혼 서약으로 단단히 묶어, 별 볼 일 없던 날개 한 쌍을 아예 뜯어 버렸다. 다시는 날아가지 못하도록.

“네.”

숨을 몰아쉬는 올가를 칭찬하듯, 포식자가 느긋하게 다가와 자세를 낮추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운명의 여자도 기꺼이 공유하노라고요. 네, 우리 형제의 그녀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저 역시 당신을 짝사랑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모르던 때부터. 나 홀로.”

커다란 손이 바닥에서 헤엄치는 올가의 턱을 움켜쥐었다.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자위하며 익숙해졌던 푸른 리본의 향이 그녀에게서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홀로 그녀의 페로몬에 중독된 지 오래인 미겔은 이지가 흩어진 녹갈색 눈동자를 응시하고는 만족하여 웃었다. ‘제게 반응하여 당신의 히트도 시작되었군요.’

“기뻐하시길. 곧 가장 뛰어난, 두 명의 알파를 거느리는 여인이 되실 겁니다.”

올가를 바로 눕혔다.

헐떡이는 그녀의 위에 다리를 벌려 엎드린 미겔이 거칠게 목덜미의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그와 동시에 올가의 이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두 살 차이의 모친과 아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뜨겁게 입 맞추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의 혀를 먼저 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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