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20)

신유정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듣는다고. 들을 테니까, 그 말투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냐?”

“말투가 왜?”

“어린애 다루듯이 하는 말투 하지 말라고!”

“그랬구나~ 우리 유정이가 이런 말투를 싫어하는구나….”

“아오, 진짜!”

여기서 더 놀렸다간 뻥 하고 터질 것 같아 잠시 피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커피부터 시킵시다. 다들 아메리카노?”

“응, 난 따뜻한 거.”

“나도….”

“난 지금 뜨거운 거 마시면 속 타 뒤져버릴 것 같으니까, 차가운 걸로.”

나긋하게 말하는 임나은, 손서연과 달리 씩씩거리며 대답하는 신유정.

그래, 너는 차가운 게 맞겠다.

그거라도 마셔야 속이 안 터지지.

나는 여전히 살짝 얼어 있는 엘레나를 향해 물었다.

“엘레나는 뭐 마실래요?”

“저는….”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속사포로 말을 내뱉는다.

“아이스 화이트 초콜릿 모카 프라푸치노 부탁합니다. 아, 초콜릿 모카 소스는 반만 넣어주고, 설탕 대신 Zero Sugar Vanilla로 바꿔주십시오. 고맙습니다.”

“……”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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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커피를 주문해온 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면접이라고 표현하기는 했다만, 사실상 면접이 아니라 설득의 시간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엘레나와 내가 한 팀이 되어 나머지 세 사람을 납득시켜야만 하니까.

“자, 일단 이 태블릿을 좀 봅시다.”

테이블 위에 태블릿을 올려두었다.

화면에 띄워둔 것은 현재 기준으로 남아 있는 탱커들의 목록.

성적 상위권의 탱커는 이미 싹쓸이됐고, 중하위권 중에서 나름 가성비 쏠쏠한 이들도 이미 매물이 다 털린 상황.

솔직한 말로 여기에 남은 탱커들은 하나 같이 단점이 명확한 이들이라고 봐야 한다.

“엘레나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해. 여기 남은 사람 중에서 엘레나가 제일 최선이기 때문이야.”

신유정의 안색이 살짝 흐릿해졌다.

“벌써 이렇게나 줄었다고…? 더럽게 빠르네, 진짜.”

남아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핀 신유정이 투덜거린다.

나나, 나은이나, 서연이나.

이번 학기에 입학한 특례 입학생이라 잘 모르지만, 얘는 안다.

지금 남은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우연히 엘레나가 운동하는 모습을 봤는데, 능력치가 상당하더라고. 체력, 근력은 물론이고 타워 실드를 사용하면서도 발까지 느리지 않아.”

“흥…!”

옆에서 듣고 있던 엘레나가 콧바람을 강하게 내뿜는다.

그러다 살짝 눈이 마주쳤는데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좋습니다, 도진. 더 강하게 나를 어필하십시오!’라고.

아니, 이게 왜 읽히는 거야?

“하지만…, 엘레나한테도 단점이 있잖아.”

옆에 있던 서연이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놀랍게도 저게 우리가 모여 있는 동안 처음 꺼낸 말이다.

널 어쩌면 좋니, 진짜….

신유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파고들었다.

“그래, 맞아. 그 특성. 그건 어떻게 할 건데?”

서연이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기다렸던 그 질문이 드디어 나왔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모두 공평하게 발목을 붙잡는 그녀의 광역 CC 특성에 대한 말이.

“그 특성 말인데…, 내가 한 번 경험을 해봤거든?”

“그런데?”

그녀를 중심으로 퍼지는 감속 지대.

이를 경험한 모두가 말한다.

효과는 좋은데, 피아 구분이 안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특성이라고.

그런데 그거, 틀렸다.

“엘레나의 특성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작동되고 있어.”

신유정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전부 느리게 만드는 게 잘 작동되고 있는 거라고?”

“어, 잘 작동되고 있어.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특성이 생겨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엘레나의 특성은 잘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피아 구분까지 아주 확실하게 하는 상태로 말이지.

옆에서 화이트 초콜릿… 뭐시깽이를 신나게 빨아 마시고 있던 엘레나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게…, 정말입니까? 엘레나의 특성, 이게 정상이란 말입니까?”

“응.”

단호한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든다.

“맙소사, 망했습니다…. 이게 정상이라면, 고칠 희망도 없다는 것. 그러면 엘레나는, 엘레나는…!”

그녀의 얼굴이 단숨에 울상으로 바뀌었다.

이대로 최하위 성적으로 졸업한 뒤,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고 쓸쓸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라도 한 모양.

나는 축 처진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모두에게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엘레나의 특성은 아주 잘 작동하고 있어.”

손가락을 빙빙 돌려 엘레나를 제외한 우리 모두를 가리킨 뒤,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 전부를 적으로 인식한 상태로 말이야.”

세상에 나쁜 특성은 없다.

주인에게 문제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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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장에 확신을 가지는 근거는 하나다.

이러한 특성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있다는 것.

예전에 아주 재미있는 아이가 길드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막무가내로 길드 건물로 찾아와선 뭐라더라.

자기를 이 누추한 길드의 길드원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겠다던가.

나이는 열다섯을 훌쩍 넘겼는데 중2병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근데 그것과는 별개로 특성은 아주 희귀한 걸 가지고 있더라.

특성 이름이 ‘폭군의 시선’이었던가.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강한 위압감을 심어주어 행동을 제약하는 특성이었다.

이 아이가 엘레나와 같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적들의 행동에 제약을 가해 상대가 한층 쉬워질 거란 예상과 달리,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제약을 가해버리더란 말이지.

간부들은 저래서야 도저히 써먹을 수 없다고 내보내자고 말할 때, 나는 달리 생각했다.

특성이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 진화할 수 있는 초능력.

그렇다면 훈련을 통해 피아 식별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그 아이와 함께 6개월을 훈련했는데…, 안 되더라.

나와의 개인 훈련을 통해 기본기나 기초 능력치가 몰라보게 뛰어나졌고, 상승한 능력치를 토대로 특성도 더욱 강해졌는데, 여전히 피아 구분은 불가능했다.

뭐가 문제일까 한참 고민했는데, 걔가 먼저 그만하겠다고 하더라.

여기까지 했으면 가망이 없는 거라고.

중2병이 심하게 걸려서 자기 전생을 폭군이라 믿으며 사는 녀석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니 차마 포기하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년, 2년이 걸리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그때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로 오직 나만이 녀석의 시선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더란 말씀.

감이 딱 오더라.

아, 이거는 특성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고.

“그러니까 네 말은…, 엘레나가 우리 모두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그러는 거다?”

“맞아.”

돈을 벌기 위해 건너온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그녀는 너무나도 많은 시련을 겪었다.

언어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외모에 혹해 달려드는 추잡한 놈들에 그녀를 속이려는 사기꾼들까지.

지금이야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지만, 옛날에는 그것조차 불가능했을 테니 혼자라는 느낌을 버리지 못했을 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켰고, 타인에 대한 불신이 깊숙이 박혔겠지.

그것이 자연스럽게 특성에 반영되어 모두를 적이라고 인식한 걸 테고 말이다.

“사실 그녀의 탓이라기보단…, 그녀를 이용하려는 추악한 놈들 때문이라고 봐야지.”

테이블 분위기가 단숨에 숙연해졌다.

타향살이에 고통받는 엘레나에 대한 동정이 그들의 마음을 여리게 만들었다.

엘레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진의 말, 맞습니다…. 나 사람, 무섭습니다.”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 집, 가족 많습니다. 동생 다섯, 부모님 총 일곱 명입니다.”

엘레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맺혔다.

“우리 가족, 언제나 배고픕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공부도 하고, 돈도 벌기 위해서.”

군대의 성향이 짙은 유럽의 아카데미는 개인 활동의 제약이 심하다.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돈을 번다는 건 어불성설.

뛰어난 헌터가 되고 싶음과 동시에 당장 돈을 벌고 싶었던 엘레나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내 예상과 달랐습니다. 아니, 내가 너무 바보였습니다.”

엘레나가 자기 자신을 바보라고 말한 까닭은 뒤늦게 깨달은 거겠지.

자기가 꿈에만 부풀어 있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언어, 생활 방식 등 달라도 너무 다른 곳에서 홀로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거다.

“나, 나쁜 사람 많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람 믿기 힘듭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엘레나의 표정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도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문제, 고쳐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상태론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많은 상처를 품에 안은 그녀가 사람을 믿기 위해선 재활의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둘러싸여 그들과 신뢰와 유대를 쌓을 시간 말이다.

“엘레나의 말이 맞아. 지금과 같은 상태론 쉽지 않겠지.”

“그럼 어떡해…?”

임나은이 걱정스러운 투로 묻는다.

나머지 두 사람의 표정도 비슷했다.

말은 따로 안 하지만,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두기가 찜찜해진 모양.

여기까지만 오면 이미 내 목적은 9할 정도 달성한 거나 다름없다.

어쨌든 그녀를 받아들이게끔 만들었으니 말이다.

“인간 불신에 시달리는 엘레나의 인식을 단기간에 바꾸기는 어려워. 하지만, 편법을 이용하면 그중 일부인 우리의 인식 정도는 바꿔볼 수 있지.”

“어떻게?”

엘레나를 비롯한 네 여인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된다.

그녀의 인식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또 쉬운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범위만큼, 또 어떤 식으로 변화를 꾀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휙휙 달라진다는 뜻.

아주 오래 가기 위해선 시간을 들여서라도 터를 아주 단단하게 잡는 게 좋다.

여기서 말하는 터라는 건, 우리 사이에 아주 짙은 신뢰와 유대를 쌓는 것을 말한다.

근데 신뢰와 유대라는 게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자! 한다고 쌓이겠나.

그건 함께한 시간에 따라 깊어지는 거니까 당장은 힘들고.

“엘레나에게 우리라는 존재가 가지는 인식을 바꾸는 거야.”

다행히 엘레나에겐 파고들 만한 여지가 딱 한 군데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억지로 적응하며 살게 된 원인.

“엘레나에게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존재.”

이게 당장 현실적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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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에 나올 대답은 수도 없이 많다.

근데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바로 나에게 득을 주는가, 실을 주는가로 판가름하는 방법이 아닐까.

나한테 이득을 가져다주면 일단 아군이고, 손해를 떠안기면 적인 거지.

문제가 있다면 오직 손익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그 관계가 매우 얄팍할 수 있다는 점인데.

그거야 차차 다른 것들로 두께를 더해가면 되는 거고.

엘레나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도 이러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돈.

그렇다면 우리가 금전적으로 이득을 주는 대상이 된다면 어떨까.

“그게 우리가 이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 이유다, 이 말씀.”

팀원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펼치는 곳은 다름 아닌 동대문구에 있는 한 던전이다.

C급 난이도의 던전이다.

던전의 이름은 ‘개미굴’.

이름만 들어도 알다시피 작고 소중한 개미가 나온다.

C급 던전 중에선 벌이가 상당한 곳이다.

여기 나오는 개미들의 갑각이 제법 단단해서 간단한 작업을 거치면 쓸 만한 방어구 재료가 되기 때문.

다루기도 쉬워서 초보 대장장이들이 애용하는 소재라 수요도 많고, 돈벌이로 아주 제격이다.

엘레나도 넉넉히 벌게 해주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모두 잘 벌자는 의미에서 고른 건데.

“다들 표정이 왜 그래?”

탈의실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나온 팀원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토요일인데 쉬지도 못하고 나와서 기분이 별로인 건가.

“도, 도진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던 임나은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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