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20)

“무슨 말?”

“…너 사는 거 볼 때마다 답답해서 가끔 쥐어박고 싶다고.”

녀석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럼 그냥 쥐어박지.”

그랬다면 아마 찐도진이 조금 더 인간 시늉이라도 내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 말을 들은 녀석이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엄마가 너 째려보기만 해도 내 등짝부터 갈기는데 쥐어박으면 집에서 내쫓겼을걸.”

“허허.”

아줌마가 모성애가 좀 강하다.

아마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온 찐도진이 그렇게 안타깝고, 불쌍했던 거겠지.

그러니까 비싼 서울 월세방까지 턱 내어준 걸 테고.

“심할 땐 너한테 엄마 뺏긴 기분까지 들었다니까.”

…확실히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네.

아무리 의젓해도 그때의 신유정도 고작 열일곱에서 열아홉.

한창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해야 하는 때에 웬 놈이 나타나선 그 관심의 절반을 뚝 떼갔으니.

“아무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잠시 삼천포로 빠졌던 이야기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난 분명 그 얘기를 세 명한테만 했는데, 그 새끼가 알고 있더라.”

“김정훈?”

“어. 그년들 중 누가 말한 건지, 아니면 훔쳐 들은 건지….”

“그러면 그 얘기를 듣고 김정훈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거네?”

“그…,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닫고 있는 걸 보면 얼추 이야기는 다 들은 듯하다.

“그럼 처음에 나한테 미안해해야 하는 거냐고 물은 건 뭐야.”

“그게….”

제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눈살을 찌푸리는 신유정.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내가 지금 너한테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미안하거든?”

“…전혀 안 그래 보이는걸?”

그런 표정으로 미안해하고 있는 거라면, 그것도 재능의 영역에 속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은…, 그냥 억지로 참는 거고. 솔직한 심정으론 미안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겠다고.”

뭐야, 뭔데.

왜 그런 걸로 하고 대충 넘어가자고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데.

“근데 솔직히 한편으론 좀 억울하잖아.”

“뭐가.”

“웬 미친 새끼가 갑자기 남의 말 엿듣고 제멋대로 날뛴 건데, 내가 왜 이렇게 미안해해야 하나 싶고…, 미안한 마음에 네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겠고.”

잔뜩 일그린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드리는 녀석.

“그냥…, 그냥 가슴이 존나 답답해. 뭘 어떻게 해야 나아질지 모르겠어서 더.”

결국 요약하면 지금 나한테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고, 이걸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 몰라서 답답해 미치겠다, 이거네.

“그러니까 네가 말 좀 해줘 봐.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처음에는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를 하나 했는데, 전말을 알고 나니 막 던진 말이 아니란 건 알겠다.

결국 자기 처분을 내게 맡기고 싶다는 건데…

과연 그 수위가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졌다.

“내가 결정하면 따를 거야? 뭐든지?”

각오를 묻자, 녀석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시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너니까. 나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누군가의 말에 따라야만 한다면… 그건 너밖에 없지 않을까.”

호오.

나름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더.

“지금부터 영영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하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의 눈동자가 거센 풍랑을 마주한 듯 크게 울렁인다.

동시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신유정.

서늘한 가을 바람이 얼굴을 가볍게 쓸고 지나간 뒤.

마침내 녀석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게 진짜 그거라면…. 같은 집에 같은 학교니까 아예 안 보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최대한…!”

그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힘겹게 말을 내뱉어가는 신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니, 내가 진짜로 사라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예시만 든 건데 울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굉장히 당황스럽다.

그런데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본인도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는지 황급히 티셔츠 목을 늘려 얼굴을 슥 닦아내더니,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발악하듯 소리쳤다.

“최대한 꺼져줄게! 됐냐!”

곧장 떠나려는 듯, 몸을 들썩이기에 황급히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야, 진정해. 내가 지금 너한테 꺼지라고 한 거 아니잖아.”

“아….”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이 이제는 터지기 일보직전 상태까지 왔다.

흥분한 나머지 자기가 앞서 나갔다는 걸 인지한 모양.

아, 힘들다.

웃음 참는 게.

“씨발, 씨발….”

심지어 귀가 밝아서 그런지, 얼굴을 푹 숙이고 욕하는 소리가 다 들려서 더 힘들다.

“아무튼, 방금 전 질문은 네 각오를 알아보려고 한 말이었고.”

솔직히 말해서 녀석에게 내가 죄를 물어도 되는지가 의문이다.

사실 내가 이 몸뚱어리에 들어온 뒤로 녀석은 나한테 도움만 줬으니까.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녀석은 나에게 죄책감을 안고 있다는 것.

이 죄책감이라는 게 참 그렇다.

상대방은 괜찮다고 해도, 본인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계속 응어리져 남아 있거든.

그러니 별수 있나.

뭐라도 시켜서 그 죄에 합당한 벌이구나, 생각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사실 가장 시키고 싶은 게 있기는 한데….

“너도 억울한 건 인정. 그런데 가장 억울한 건 나잖아. 맞지?”

“…그걸 아니까 너한테 결정을 맡긴 거잖아.”

아직도 살짝 삐졌는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신유정.

“그래서 내가 좀 생각을 해봤거든? 내가 무려 3년을 그놈한테 괴롭힘을 당했잖아.”

“…근데.”

“그러니까 속죄라고 생각하고 3년 정도 내 노예로 사는 건….”

넌지시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흉흉한 시선이 얼굴 전체에 꽂힌다.

어우, 이건 안 되겠다.

“안 된다고 나도 생각했어, 음.”

“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

장난 아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차선책을 쓰는 수밖에.

“그럼 내 소원이나 들어줘.”

“…소원?”

“어, 소원.”

“뭔데.”

“당장 들어달라는 건 아니고, 정확히는 소원권을 달라는 거지.”

녀석에게 시켜보고 싶은 일들이 잔뜩 있다.

세상 야릇한 코스프레도 시켜보고 싶고, 거친 게 매력이지만 하루쯤은 나긋한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는 등.

말하자면 녀석의 죄책감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싶단 얘기다.

이게 꼭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닌 게 나는 행복해서 좋고, 신유정은 죄책감 덜어내서 좋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책 아니냐고.

“소원 하나?”

녀석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에이, 너무 양심없다. 설마 3년의 괴롭힘이 소원권 한 장으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럼 뭐, 몇 개를 원하는 건데.”

마음 같아선 한 달에 한 개씩 서른여섯 개 정도를 챙기고 싶은데.

인심 좀 썼다.

“열두 개.”

“…그렇게나 많이?”

“한 달에 한 개씩 해서 서른여섯 개 하려다가 줄인 건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아직 싫다고는 안 했거든.”

“그럼 콜?”

잠시 고심하던 녀석이 이내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콜.”

뭔가 계책이라도 떠올랐나 본데.

“좋아, 그럼 계약 성립.”

나도 자신 있다.

소원 열두 개를 다 쓰기 전에 신유정을 완벽하게 굴복시킬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서서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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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신유정, 임나은, 손서연에 나까지.

우리 네 사람은 교내 한적한 카페에 모여 앉았다.

“바, 반갑습니다, 만나서.”

“…….”

아, 넷이 아니라 4+1 명이지 참.

원래의 목적은 넷이 모여서 남은 팀원 한 명을 누구로 채울까 고민하기 위해서였는데.

“여러분의 티, 팀원 후보…, 엘레나 미, 미하일로바 도브레바…입니다.”

세 사람 몰래 엘레나를 이곳으로 불러두었다.

이유?

그야 당연히…, 그녀를 모두에게 소개하고, 적절하게 어필해서 팀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나저나 이 여자는 왜 이렇게 긴장을 했대.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여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엘레나,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편하게 해요, 편하게.”

그러자 그녀가 말하길.

“으…, 예상 밖의 상황입니다. 도진 킴, 순진하게 생겨서 더 순진했습니다. 설마 내 전단지 나눠주는 행위에 걸릴 줄이야….”

“……?”

갑자기 순진했다는 건 뭐고, 전단지 나눠주는 행위는 또 뭐야.

일단 어투나 억양을 봐선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전단지 나눠주는 행위…, 밖에서 이 가게로 오세요, 하고 돈 받고 전단지를 뿌리는 사람들.

아, 설마.

“전단지 나눠주는 행위가 혹시…, 호객행위를 말하는 건…?”

“맞습니다, 그거. 호객…? 호갱? 행위. 도진, 거기에 걸렸습니다.”

“…….”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겠다.

그러니까 지금…, 팀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찔러 보다가 우연히 나를 만났고, 못 먹는 감 찔러 보기나 하자는 식으로 나한테 자기 어필…, 그러니까 호객행위를 했는데 순진하게 내가 걸렸다는 거네.

“하지만, 몰랐습니다. 순진, 도진하길래 팀원들도 전부 도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아니 도진은 내 이름이고요.”

“누가 모릅니까? 오늘따라 이상합니다, 도진. 착하고 순진하던 때로 Coming Back, 합니다.”

“…….”

말을 말자, 말을.

나는 고개를 돌려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같이 의심과 곤란함으로 인해 찌푸려진 얼굴들.

왜 걱정하는지 알겠다.

눈앞의 셋은 나와는 달리 쉽게 넘기지 못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구만.

“야, 김도진.”

눈을 마주친 신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세웠다.

“너 지금 뭐 하냐?”

“…잠깐의 대화?”

“그게 아니라, 이 여자… 후우, 엘레나를 왜 불렀냐고 묻는 거잖아, 이 자식아.”

그럼 정확하게 물어봤어야지.

“엘레나가 자기소개하는 거 못 들었어? 팀원 후보라고. 말 그대로 면접 보려고 불렀지.”

내 마음대로 팀원을 채웠다간 아무래도 크게 시달릴 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 천사 나은이를 제외한 두 사람의 성격이 적당히 지랄 맞아야지.

한쪽은 손 대면 바로 터질 것만 같은 활화산에 다른 한쪽은 가까이 가면 선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을 것처럼 무뚝뚝하고 쌀쌀하니, 원.

“아하, 그러셔? 그럼 난 반대.”

아유, 저거 완전히 배배 꼬여서는.

“유정아.”

“왜!”

“네 기분이 별로라고 해도, 사람을 면전에 두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조목조목 따져서 묻자, 삐진 표정에 초조함이 서린다.

김정훈 사건 이후로 애가 조금 달라졌다.

평소에는 똑같은데, 지금처럼 어린애 타이르듯이 조목조목 말하면 금세 꼬리를 내리더라.

아무래도 죄책감 같은 게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

“아니…, 나만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닌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왜기는, 자식아.

“너만 지금 나서고 있잖아.”

원래 먼저 나서면 먼저 맞게 되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쟤는 참 손해 보기 좋은 성격이야.

양옆을 힐끔 쳐다보더니 뚱한 표정으로 입을 걸어 잠그는 신유정.

저거 은근히 잘 삐진단 말이야.

“유정아.”

“…또 뭐.”

“내가 설마 아무런 생각 없이 엘레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

입술을 우물쭈물 하더니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응, 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걱정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자존심 상하는 모양.

“나도 나름대로 고심해서 엘레나 부른 거니까, 일단 얘기부터 좀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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