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무림치매대응반 61
* * *
“지존을 뵙습니다….”
흑백마노가 어제의 갈자윤처럼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나 니네 천마 아니라니까 그러네.
“지존 아니니까 일어나십시요. 신녀. 신녀도 참람한 심정은 알겠지만 그만하세요.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하오나 지존….”
마교를 우호 세력으로 쓴다는 계획은 어차피 물건너 간거고. 지나간 과거의 일로 질질 짜고 있는 꼴이 영 짜증나서 못 봐주겠다. 어차피 내가 니네 지존 아니라고 해도 들어먹지도 않을 사람들이니까 깔끔하게 정리나 해 줘야지.
“자윤.”
“예, 지존.”
“나가서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보고 오게.”
“...예?”
“네가 정신을 놓고 있던 동안에 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보고 오라는 이야기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뭔 소린지 못 알아 듣는 것 같았지만 일단 내가 명령조로 시키니까 두 번의 반문은 없이 접객당을 뛰쳐나갔다. 다음은 부복하고 있는 흑백마노.
“흑백마노. 내각주라 하였나? 이름은 무엇인가?”
“혁중모라 합니다. 편하게 부르시옵소서.”
“좋네. 대전이 있나?”
“천마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앞장서라.”
흑백마노 혁중모가 조용히 일어나 접객당 밖으로 시립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애들을 데리고 접객당을 나서서 대전으로 걸어갔다.
[어쩌게 오라버니? 정말 천마가 될 생각이야?]
[천마같은 소리한다. 다 미련이고 아집이야. 여기 좀 봐라. 이게 무슨 마교냐?]
[그건 그렇네….]
[옛날에 안 이랬던건 맞냐?]
[모르겠어, 전대 천마가 죽고나서는 국지적인 충돌만 조금 있었고 그 뒤로는 세가 확 줄어들어서 외당에서도 거의 신경 안썼거든.]
[하여튼, 나는 천마의 이름을 빌려서 확실하게 정리나 해 주련다. 불쌍해서 눈 뜨고 봐 줄수가 없네.]
전생의 무협지에서도 마교 하면 항상 악랄하고, 당당하고, 강력하고 어쨌든 무림을 이루는 한 축으로서 악이든 위악이든 간에 위압감 넘치는 거대조직이었다. 연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천마가 살아 있을때는 이 지경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봐서는 얘들 뭐 나쁜짓을 하려고 해도 나쁜짓 할 기력도 없는 애들이다.
“대전으로 드시지요!”
“고맙네.”
혁중모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가구 종류는 전반적으로 낡아 빠졌으나 어쨌든 청결은 유지하고 있었다. 척 봐도 제일 높은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 앉았다. 뭔가 의자에 사람을 밀어내는 기운이 있는 것 같았으나 이것도 뭐 보안장치겠지 두르고 있는 극천마기로 내리눌렀더니 피식 하고 꺼지는 느낌이 나서 수월하게 눌러 앉았다.
“오오오…. 천마좌(???)가 채워진 것이 얼마만의…. 지존…. 어허허허헝….”
아, 여자 즙도 짜증나는데 다 늙은 할아버지 즙이라니.
“교내에 남아 있는 이가 있으면 소집하라!”
“천마령(???)을 받드옵니다!”
아니 무슨 천마 월드인가 모든것의 접두사로 천마를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K머시기도 아니고. 어쨌거나 사람을 모으러 혁중모가 대전을 나가고 나자 극천마기를 흩어버렸다. 이거 켜고 있으면 정신이 사나워서.
“니들도 거기 어정쩡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이렇게 둘씩 어 그렇지.”
“왜?”
“그래야 좀 있어 보이잖아.”
어? 명색이 천마인데. 끝내주는 미녀…는 면사로 얼굴을 가렸으니까 불가능하고. 입고 있는 경장들이 하나같이 몸매가 확 드러나는 옷이니까 내 좌우에 둘씩 딱 서 있으면 위세가 살것 같지 않냐. 어차피 무림은 허세가 반이다. 몇십년간 공석이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마가 권위를 가지려면 이런거라도 있어야지.
“위압감을 줄 수 있게 기운도 쫙 끌어올려서 알지?”
“에휴. 알았어 오라버니.”
“왠지 재미있어 보여요 삼랑.”
린이와 서령이는 군소리 없이 따르는데 연이와 화란이는 나한테 쉴새없이 구시렁거린다. 빨리 빨리 정리하고 가자. 무영신투 불러 놓은것도 얼마 안남았는데. 누가 들어와도 딱 위압감을 줄 수 있도록 자세를 잡고 기다리는데, 아까 둘러보고 오라고 보냈던 갈자윤이 대전으로 들어와 내 앞에 납작 엎어졌다.
“지존….”
“그래, 보고 오니 어떠하더냐?”
“죽여주시옵소서…. 그저, 교를 지키지 못한 죄인은 죽음을 청하옵니다….”
또 운다. 허 참. 울지말라고 지랄이라도 해야하나 하는 상황에 혁중모가 사람들을 끌고 대전으로 들어섰다. 어우야 생긴게 과연 마두들이라 할 만하네. 울던애개 울음을 그치는게 아니라 트라우마가 생길만 한 외모들이다. 다 떠나고 진짜 골수들만 남았나보구나.
“지존. 저 또한 죄를 청하옵니다….”
혁중모도 갈자윤이 엎어져서 죄를청하며 우는꼴을 보자 그 옆에 같이 엎어졌다. 일단 방금 들어오신 분들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서 극천마기를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상당히 낡은 대전이 우르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떨리며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진다.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다행히 전대 천마의 극천마기를 봤던 사라들인지, 아니면 그냥 분위기에 휘말린건지 혁중모를 뒤따라 들어온 노친네들도 하나같이 대가리를 박고 엎어졌다.
“보아라. 천마신교의 역사가 깊다 한들 이제 남은것은 텅 빈 전각과 무너진 담벼락 밖에 없다!”
“…죄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천마신교의 역사를 닫을 마지막 천마로서 명한다.”
말은 거창한것 치고 진짜 모양 안 난다. 천마 수호대라도 있었으면 좀 모양새가 나았을까. 어쨌거나, 지금 이걸 다시 부흥시키고 한다는건 답 안나오는 짓이다. 내가 너무 섣불리 긴 역사를 없애버리는가 싶긴 해서 잠깐 고민을 해 봤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다. 무림의 구성 자체가 다 무너져 가고 있는데, 어디에서 뭘 하며 돈을 벌고 딸린 식구들을 먹여 살릴 것인가?
“지조오온!”
“참람한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못할 짓이긴 하다. 수십년을 기다리던 천마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황급히 달려들어와 극천마기를 보고 막 뽕에 차 오르는데 어차피 우리 답 안나오니까 문 닫자고 하는거니까. 그래서 애초에 안 보여주고 그냥 갈자윤이 회복된것을 축하하며 마교의 끝을 안타까워 해주기만 하면 되는거였는데 갈자윤에게 선택권을 줬더니 이렇게 되었다.
물론, 책임 질 자신은 있었으니까 그냥 내버려뒀지. 그때까지는 내가 이걸 살릴지 말지 확실한 결정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남아 있는 인원들 모아오라 그래서 확인을 해 보니까 글렀다. 마교는 무슨. 동네 조기축구회도 이거보다는 사람이 많을거다. 가지고 있는 경지도 하나같이 탈마 근처에도 못 갔다.
“천년 마교의 역사는 오늘로 끝을 낸다!”
“지존….”
“지조오오온!”
어이쿠 그놈의 지존은. 솔직히 그냥 쌩까고 지나갈 수도 있는 문제긴 한데. 다 늙어서 늘그막에 희망도 없는 일에 저러고 있으면 안타까우니까. 오지랖일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정도 오지랖은 부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뭐, 내가 그냥 등떠밀어 주는거지 혁중모도 이미 정리하고 있었고
“지존…. 지엄한 명을 받들겠으나, 단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말해봐라.”
“신녀만큼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오로지 지존만을 기다리며 수십년동안 교를 지켜왔사옵니다!”
“그것은 내가 신녀와 이야기 할 내용이다.”
제가 당사자랑 잘 이야기 해서 해결하겠습니다.
“신녀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래도 두해 넘게 치매 투병을 한 것 치고는 인망을 많이 잃지 않았나 보다. 다들 문 닫는건 알겠으니까 신녀는 좀 데리고 가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반로환동하고 노망을 회복한 것은 혁중모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그렇지. 얘들은 아직 모르겠구나.
“자윤. 이 앞에서 답해 보라. 나를 따라 가겠느냐?”
“지존…. 저는 오로지 지존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자 입니다. 물어보심이 가당치 않사옵니다.”
“내 친히 네 몸속에 있는 천마의 금제를 해제하였느니라. 미색이 출중하고 젊어지기 까지 하였으니 마교를 벗어나 자유로운 일생을 보내려 한다면 능히 가능할텐데, 그래도 본좌를 따르겠느냐?”
크…. 갈자윤에게는 일생일대의 결심이 걸린 중요한 문제겠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본좌라고 칭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조금 죄책감이 생긴다.
“일생토록 지존의 발 아래에 있겠나이다.”
[오라버니 미쳤어?]
[삼랑, 혹시 마기가 머리 끝까지….]
[주인님, 마기는 위험한 힘이에요.]
나는 면사 아래에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애들한테 고개를 살짝 저어 주었다. 마기라니! 내가 요딴 어두침침한 기운에 당할리가. 물론 켜 놓으면 조금 하이한 기분이 되는걸 봐서 확실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운에 노출 된 것 만으로도 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들이 걱정하니까 꺼야겠다.
“좋다. 너희들이 그렇게 간청을 하니 신녀만큼은 천년 마교의 증거로 내가 거두도록 하겠다.”
“죄인들의 청을 들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너희는 죄인이 아니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흠. 문을 닫을때는 닫더라도 뽕차는 한 마디 정도는 해 줘야 나중에 저승갈때 추억거리라도 있으시겠지.
“마지막 명을 들어라! 너희는 최후이며 최강의 천마를 눈앞에서 본 천년마교의 증인이다!”
“지조온!”
“지존!”
지존좀 고만 불러라. 느그 지존 닳아 빠지겠다.
“탈마의 기치(??)를 영원토록 가슴에 새기고 후대에 전하라! 천마는 영원할 것이다!”
“천마영원!”
순진한 영감님들 선동하는것 같아서 좀 그렇기는 한데. 화란이가 그랬고, 린이가 그랬듯이 이렇게 끊어내주지 않으면 갈자윤은 오히려 살아갈 원동력을 잃어버릴거다. 다른 애들은 스스로를 끊어냈지만, 갈자윤의 상태를 보면 이 사람은 때려죽여도 그게 안되는 스타일이다.
그 끝에 뭐가 있냐면, 결국 수명이 다해서 먼저 죽어버릴 동년배의 노인들과, 변해버린 무림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할 마교. 종래에는 살아남은 스스로를 끝없이 저주할 갈자윤이다. 여기 이 척박한 변방에 내가 갈자윤을 두고 가 버리면 확정적으로 일어날 문제다. 손을 안 댔으면 모를까 물에서 건졌으면 보따리까지 챙겨줘야지. 연이에게도 그랬고, 화란이에게도 그랬고, 린이에게도 그랬다. 서령이는…. 뭐 앞으로 물에 빠질일이 있으면 그렇게 해주지 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천마영원을 외치는 영감님들을 두고 조용히 대전을 빠져나왔다. 알아서들 해산하겠지. 문앞에 기다리고 있으면서 한 명씩 포옹하고 악수해줄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마의는 언제 오는거지?
“신녀.”
“예 지존.”
“아까 그러고 나와서 다시 들어가기가 뭐한데, 가서 마의좀 빨리 찾아와라.”
“존명.”
내 여자들을 데리고 대전을 빠져나오는데 갈자윤도 눈치빠르게 따라나왔다. 혁중모한테 물어보는게 제일 빠르겠지만 마을 위치는 갈자윤도 알고 있을것 같아서 갈자윤을 내려보냈다. 대전의 뒷길로 나와서 며칠전에 왔었던, 갈자윤이 격리되어 있던 전각으로 들어갔다.
“푸하하하하!”
“왜?”
“본좌래! 본좌!”
연이는 전각 안으로 들어와 기막이 둘러쳐지자 마자 문자그대로 포복절도를 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야 그래도 그분들한테는 마지막으로 남을 천마의 기억인데 본좌 정도는 해 줘야 하는거 아니냐?”
“누가 뭐래? 잘했어. 잘했구말…흐읍…큭….”
내가 민망해 하자 웃음을 참으려고는 하는데…. 웃어라 웃어. 나는 적당히 외투를 벗어서 탁자위에 던져놓고 의자에 앉았다.
“아니에요. 잘 하셨어요 삼랑.”
“네. 주인님. 저도 중간까지는 의아했지만, 주인님의 생각을 알고서는 눈물이 날뻔 했어요.”
“그래, 내가 니들덕에 웃고 산다.”
“아하아…. 뭐야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왜, 뭐 찔려?”
“나도 그렇게 생각 한다니까? 진짜야. 근데 오라버니가 ‘본좌’라고 할 때 그 의기양양한 표정이 진짜…. 하아. 후우. 하아. 후우.”
연이는 하다하다 심호흡까지 한다. 엄…. 생각해보니 좀 쪽팔리긴 한다.
“아냐, 삼아 멋있었어. 진짜 천마가 다시 왔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거야.”
서령이도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한 마디 하는데, 몸 까지 베베 꼬는걸 보면 얘 또 하고 싶은가보다. 이틀밖에 안 됐는데. 얌전하던 애가 남자맛을 보더니…. 여기서 해 버려도 상관 없을것 같긴한데. 일단 마의가 오면 마의랑 약액 만드는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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