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는 유음 황녀가 무엇을 했는지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 꿈이라고는 해도 이 꿈은 몹시 체계적이어서, 저는 유음 황녀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음 황녀가 냉궁에 갔을 때에는 제가 유음 황녀의 몸에 들어오기 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제 방에 갔는지 선황의 명으로 봉해져 있는 금줄을 뜯을 생각을 감히 어떻게 한 것인지, 그런 것들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유음 황녀가 당시 냉궁에 있었던 정황만 알 뿐입니다.
유음 황녀는 다소 격정적인 기질을 지니신 황녀마마로, 올해 열두 살입니다. 그분은 아마 저를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선황의 성지에 의해 봉해진 방에 들어갈 생각을 했겠지요. 어쩌면 자신이 냉궁에 유폐된 것도 제 탓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냉궁에 유폐된 날, 그날은 저의 기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기일은 황궁이 가장 조용한 날이라고 합니다. 황상께옵서 제 원혼을 달래기 위해 침전에서 두문불출하시는 날이거든요. 그런 날 유음 황녀는 훈육 상궁들에게 공부를 하지 않겠다며 패악을 부리고는 목욕물을 빨리 가져오라 명했습니다.
하필 그날 유음 황녀의 궁, 희원궁으로 가는 길목이 막히면서 궁녀들이 황상의 침전인 진선전의 옆길을 통해 목욕물을 날라야 했었던 것이 유음 황녀의 불행이었습니다.
황녀가 하도 사납게 얼러 겁을 먹은 궁녀들이 한껏 걸음을 재촉하다 결국 사고가 나 한 명의 궁녀가 목욕물이 든 독을 떨어뜨려 깨뜨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황상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황녀는 편전으로 불려 갔고 그곳에서 그녀는 냉궁으로 유폐되었습니다.
이때 듣기로는 유음 황녀가 황상께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만 소문이라 확실치는 않습니다. 단지 그녀가 매우 난폭한 성정의 사람인 건 맞는 듯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채찍질을 했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참 잔혹합니다.
어쨌든, 유음 황녀는 냉궁에 간 당일, 늦은 오후까지는 대청마루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저와 달리 죄인의 신분이라고는 해도 황녀였기 때문에 시녀들이 가서 식사 시중을 들었는데 대청에서 식사를 했고 잠도 그곳에서 자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했습니다.
가을이라 날이 좋으니 밖에서 자 보고 싶다면서요. 궁인들은 초 하나 없는 냉궁이 무서워서 그나마 달빛이라도 환하게 드는 대청에서 잠을 자려고 한 게 아닐까 하고 말들을 했다 합니다.
그런 그녀가 왜 다음 날 아침, 저의 금침에서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마도 그 격렬한 성격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저를 모욕하고자 제 방에 들어온 게 아닐는지…. 어쨌거나 황녀는 제 방에 들어왔습니다. 금줄을 뜯어 바닥에 내던지고서요.
그리고 왜 제 이부자리에서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음 날 그녀는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황후마마는 기절하셨고 사람들은 또다시 저의 탓을 했습니다. 제가 한이 맺혀 황상의 적녀를 구천으로 데려갔다고요. 그리고 다음 날 황녀의 장례가 시작되었습니다.
***
냉궁에 들어온 첫날,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대청마루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앉은 곳이 먼지로 가득하다는 걸 깨닫고 속곳을 빨아 일단 닦기 시작했습니다. 난생처음 해 보는 허드렛일은 힘든 대신 상쾌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헉헉대며 멈췄지만 그래도 결국 끝까지 대청마루를 닦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쓸 방을 정해야 했는데 저는 상궁이 쓰던 방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서쪽 방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치우면서 살아야 할 곳이니까 너무 크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았고 달빛이 잘 드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게는 초라는 사치품이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속곳을 빨아 널고서 잠을 청하는 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끝까지 아무것도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꿈속인 듯 실감이 나지 않았던 탓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난 것에 대한 허탈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피로한 하루였습니다. 오전에 황상의 성지를 받아 폐서인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인생이 바뀐다는 건 참 힘들고 지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잠들기 전, 저의 마지막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
숨이 막혔던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떠올렸습니다. 냉궁에 유폐된 여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다는 소문을. 아아, 나도 그렇게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몸에서 힘을 빼야 하는데, 어차피 저항은 소용없으리라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황상의 밀명을 받은 누군가의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항 자체가 불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살고 싶어서 버둥거렸어요. 언제나 우아하고 냉정하게 살라고 교육받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저는 필사적이었습니다.
제 목을 쥔 손을 할퀴려고 애를 썼어요. 발로 상대를 차 버리려고 했습니다. 여자답지 못하다는 건, 태자비답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죽임을 당하더라도 차분하고 고상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요.
살고 싶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하루라도 더.
무언가를 뿌리쳤습니다. 힘껏 패대기쳤어요. 그와 동시에 막혔던 숨통이 열리고 숨이 해일처럼 몰려왔습니다. 히이이익. 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벌떡 일어났어요. 갑자기 삼켜진 숨에 목이 아팠어요. 물기가 하나도 없이 메마른 목에 갑작스럽게 물이 닿은 것처럼요.
하아, 하아, 하아. 제 숨소리가 귀를 어지럽혔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지? 가위에 눌린 건가? 차를 마시려고 찻주전자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 세상이 무척 밝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꽃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도요.
옥으로 된 관 안, 꽃 위에 앉아 저는 찻주전자를 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이 마르다는 사실도 잊은 채 옆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제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시립해 있던 궁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꺄아아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비명에 놀라 저도 같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어요. 아마 제가 평생 소리를 지르거나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소리를 질렀을 겁니다.
그제야 상황이 조금 더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단 위에 있었어요. 제단 위 관 안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 밑에서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습니다. 모두 소복을 입고 있어 그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황후, 수많은 후궁…. 소복에도 각각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 있어 저는 그 표식으로 빠르게 그들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 중 누구도 제 눈에 익은 사람이 없었어요. 모르는 사람뿐이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유음아!”
황후마마로 추정되는 분이 저를 그렇게 불렀을 때야 저는 뭔가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저를 ‘유음’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유음? 왜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 거죠, 저 처음 보는 황후마마께오선?
그때 누군가가 저를 휙 들어 올렸습니다. 너무나 가볍게 들어 올려서 저는 제가 솜으로 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유음아.”
익숙한 목소리였어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올리자 나의 지아비, 이연 태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분은 선남으로 이름이 높으셨던 미장부신데 얼굴 반쪽을 가리고 계셨거든요.
가까이서 보니 그 가면 안쪽이 조금 들여다보였는데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어요. 이 존귀한 얼굴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죠?
“너는.”
그분이 뭐라고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문득 그분이 황상이라는 걸 깨닫고 더 놀랐어요. 태자 전하가 즉위를 하셨다고요? 남쪽에 계실 그분이 벌써 황도에 돌아오셔서 즉위를 하시다니,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흘렀다고요?
다시 보니 그분의 반쪽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습니다. 그분의 반쪽 얼굴은 더욱 수려해지셨고 위엄에 찼고 연륜이 느껴지네요. …도대체, 지금이 언제인 거죠? 왜 저는 지금 일어난 거죠? 왜 이분은 저를 유음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너…?”
그분이 저를 의아히 부르시는 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렸어요. 왜 이런 얼굴이 되셨죠? 그 아름다운 얼굴에 이런 흉한 짓을 누가 감히 했단 말입니까. 손을 뻗으려던 찰나 멈칫했습니다. 그분께 뻗어지는 손이 너무 작았어요. 고사리 같은 손은 어린아이의 것이었습니다. 그건 제 손이 아니었어요.
제가 눈을 크게 떴을 때 그분이 저를 바닥으로 팽개치셨습니다. 저는 바닥에 떨어졌고 크게 부딪쳤어요. 아. 머리 어딘가가 부딪쳐서 손으로 감싸며 그분을 올려다보았을 때였습니다.
그분은 많이 놀란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무표정한 얼굴인 척하셨지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저는 그 얼굴이 많이 놀라고 당황한 것이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러시는 걸까. 무엇 때문에 놀라신 걸까. 제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조상의 은덕을 입은 줄 알아라.”
그분은 서릿발 같은 한마디를 내뱉고는 등을 돌리셨습니다. 서둘러 나가시는 모습이 마치 도망치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왠지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거든요. 감기는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유음아!”
아까 저를 불렀던 목소리, 그러니까 황후마마의 목소리가 들렸고 저는 그대로 잠에 빠졌습니다. 잠에 빠지기 직전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저를 끌어안고 다급히 흔드는 게 느껴졌어요.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
그리고 눈을 떴습니다.
아침 햇살 속에서 얼마나 당혹스럽고 어이가 없던지요. 저는 무슨 꿈을 이토록 무엄하고 허황되게 꾼 것일까요.
냉궁에서 보내는 첫 아침, 저는 식은 보리죽을 앞에 둔 채 ‘유음’이라는 사람에 대해 한참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누구였을까…. 오전 내내 생각한 끝에 저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 이름은 황후마마의, 그러니까 꿈속의 황후마마가 아니라 제 시어머니셨던 황후마마께서 처음 태중에서 잃으신 황녀 아기씨의 이름입니다. 본디 남자아이로 태어나면 이연, 여자아이로 태어나면 유음이라 이름 붙이려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 이름입니다.
잊고 있었는데… 왜 꿈속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까요. 왜 저는 그 이름의 어린 황녀가 되어 갑자기 관 안에서 깨어난 것이었을까요. 왜 그분은 얼굴 반쪽이 상했을까요. 저는 이 꿈의 무엇에 가장 놀라고 가장 속상한 것일까요….
냉궁에 들어오면 속세와 떨어져 죽은 듯이 살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종일 마음이 언짢고 거친 말을 타는 듯 내내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그저 꿈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되뇌어 보았지만 마음의 불편함은 가실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사실 태자 전하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분은 저에게 정녕 잘해 주셨는데 왜 저는 이런 꿈을 꿔서 그분을 모욕할까요. 차라리 황상의 꿈을 꾸었다면 저의 원망이 꿈으로 화했다고 이해나 할 텐데 왜 태자 전하께서 그런 욕을 보시는 꿈을 꿨는지 알 수 없음이라 저 자신이 매우 저열한 인간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돕고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어요. 저의 본곁은, 특히 친정 아비는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태자비로 올리고 그것을 빌미 삼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셨어요.
그럼에도 태자 전하는 무척 단단하게 저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물론 태자 전하께옵서는 저를 보호하기에 앞서 그분 자신을 보호하신 것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에게 입찬소리 한 번 안 하신 좋은 분이셨습니다. 늘 괜찮을 거라고 절 위로만 해 주신 분이세요.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일이 떠오릅니다. 아비가 저를 빌미 삼아 뇌물을 받았던 일, 관직을 팔았던 일, 어미가 저의 이름으로 동생을 시집보내려고 했던 일, 그 일이 결국 거짓이라는 게 들통나 온 세상에 추문으로 알려질 뻔한 일, 기혼녀인 언니가 정인이 있는 멀쩡한 사내를 탐하여 그의 정인을 살해하려고 했던 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저는 한결같은 보호를 받았습니다. 폐서인이 되었을 때 억울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일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더 이르게 저는 폐서인이 되었어야 했어요. 그걸 태자 전하는 막아 주고 계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 악행들도 일이 채 일어나기 전에 마무리 지어 주셨어요. 뇌물은 돌려주고, 관직은 약속되기 전에 수습되었으며, 동생이 시집가는 일은 태자 전하의 비호 아래 양가 모두 만족스럽게 진행되었고, 언니의 문제는… 언니는 태자 전하께 엄청난 질책을 받았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는 사내와 그의 정인에게 성대한 결혼식을 하사해 주셨어요. 전하의 이름으로요. 언니가 절대 그 부부에게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저 꿈에서 가장 놀라고 속상한 건 스스로의 저열함입니다.
저는 그분이 저를 끝까지 구해 주지 않으셔서 원망하나 봐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런 꿈을 꿀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저를 세심하게 돌봐 주셨는데 정작 저는 그분을 원망하나 봅니다. 그분이 가엾고 저 자신이 너무나 미운 그런 하루가 지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또 이 꿈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