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3)화 (3/100)

3.

“유음아! 정신이 드느냐?!”

저를 유음이라고 부르는 황후마마의 모습을 보며 저는 눈을 깜빡깜빡했습니다. 제가 눈을 떴다는 건 알겠지만 여기는 꿈속입니다. 제가 유음이라는 황녀 아기씨가 됐다는 건 꿈속이라는 이야기니까요.

아, 이 꿈은 싫습니다. 깨고 싶어요. 그러니까, 저는 말없이 계속 눈만 깜빡거렸습니다. 깨라. 어서 이 꿈에서 깨. 다정다감한 분을 모욕하지 말고 차라리 잠을 자지 마. 저는 계속 깨라, 깨라, 되뇌었지만 잠은 깰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 태의! 황녀가 이상하지 않느냐?! 네 구족을 멸하겠다!”

황후마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구족을 멸하겠다고?! 저는 그 엄청난 말에 놀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 태의로 보이는 태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건대 황후마마의 말씀은 농도, 과장도 아닙니다. 그분은 진짜로 저 태의의 구족을 멸할 생각인가 봅니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저는 일단 황후마마의 손을 콱 움켜쥐었습니다.

움켜쥐긴 했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태의에게 그러지 말라고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까요. 저 태의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는 그저 태의일 뿐입니다.

“유음아, 어미다. 어미를 알아보겠느냐?”

황후마마가 다급히 하문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잠시 망설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알아본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 됩니다. 이분은 자신의 딸을 걱정하시는 분이신데 제가 거기에 대고 거짓을 고해도 되는 걸까요. 제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황후마마가 부릅뜬 눈이 우 태의를 향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황후마마의 손을 세게 잡았습니다.

“어, 어마마마.”

이것이 제 사기 행각의 시작이었습니다….

사기는 나쁘다는 걸 압니다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멀쩡한 태의의 구족을 멸하게 할 수는 없지요. 저는 황궁의 사람으로 컸고 태자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저는 존귀한 분들의 진심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압니다. 황후마마는 진심이세요. 저분은 그저 화풀이로 태의의 구족을 멸할 셈입니다.

“소녀는.”

콜록하고 기침이 나왔습니다. 배가 아팠어요. 누군가에게 발길질을 당한 것처럼요. 왜 이렇게 아프지, 하는데 황후마마께서 제 뺨을 그녀의 보드라운 손으로 감싸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응? 그곳엔 왜 들어갔어?”

그곳?

“도대체 폐비가 죽은 데를 왜 들어가! 선황의 명으로 봉해져 있는 곳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을 터! 진짜, 진짜 네가 삭탈이라도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폐비?

“그년이 널 해치면 어쩌려고! 그년의 저주가 너한테까지, 너한테까지 미치면…!”

말을 하다 말고 으앙, 황후마마는 마치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황후라는 존귀한 자리에 계시는 분이 이렇게 우는 걸 처음 봐서 저는 얼어붙고 말았어요.

희로애락을 얼굴에 드러내지 말라는 요구를 평생 받아 왔습니다. 저는 태자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교육받았고, 그 자리는 미래의 황후가 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황후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아 왔었죠. 평생을요. 그런데 정작 황후에 오르신 이분이 이토록 어린애같이 우시다니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가만히 그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분이 고개를 홱 드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어미는 평생 폐비 년과 비교를 당하며 살아왔으나 그는 괜찮다. 그러나 그년에게 너를 잃는다면 어미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저승에 가서 그녀의 혼을 말살해 버릴 것이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분이 이토록 증오하는 ‘폐비’가 누군지를요.

그건 바로 저였습니다.

“폐비 심씨는….”

혹시나 해서 제 이름을 대 보았더니.

“개 같은 년! 어디 손댈 데가 없어 조막만 한 너에게 흉수를 뻗는단 말이냐!”

그분은 분통을 터뜨리셨습니다. 아, 역시 저군요. 저는 아무래도 이 유음 황녀 아기씨에게 흉수를 뻗은 몹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몹쓸 원혼이라고 해야겠네요. 죽었다는 것 보니까.

***

그래서 저는 유음 황녀가 된 김에 당금의 황궁 사정을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어차피 이리된 거, 제 마음대로 깰 수 있는 꿈도 아닌 것 같으니 사정을 알아야 할 것 같았어요.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린 궁녀와 놀고 싶다면서 어린 궁녀들을 소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궁녀들은 듣는 건 많고 입은 가볍습니다. 궁녀들은 처소를 같이 쓰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온갖 소문을 퍼 나르는데 그들의 수발을 드는 것이 저 어린 궁녀들입니다.

궁녀들은 어린 궁녀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지만 그 아이들은 생각보다 귀가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 소문을 수집할 때는 그 아이들을 먼저 잡아 오는 것이 요령 중 하나입니다. 이건 저만의 요령으로 저는 이 사실을 아무와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유음 황녀는 어렸기 때문에 궁녀들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이 더욱 쉬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린 궁녀들은 입이 무거웠습니다. 입단속이 너무나 잘되어 있는 것에 좀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단속이 잘된 게 아니라 유음 황녀를 무서워하는 듯했습니다.

분위기는 무겁고 아무리 놀자며 이런저런 장난감을 내밀고 단것들을 내주어도 궁녀 아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도리어 황녀가 어느 순간 갑자기 변덕을 부릴지 몰라 크게 두려워하기만 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어느 궁녀 아이가 참지 못하고 다과를 덥석 무는 게 보였습니다.

“난 너랑 놀래.”

그 아이 하나만 남겨 두고 모두를 내보낸 다음 한참 딴소리를 하며 놀았습니다. 아, 필요한 정보도 조금 얻었어요. 저는 빨래나 걸레질 같은 일에 대한 요령을 조금 얻었거든요.

꿈속의 요령이지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구석이 있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폐비 심씨, 즉 저에 대해 물었습니다.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라는 서두는 언제나 유용합니다. 모두의 귀를 바짝 열게 하죠.

“나는 냉궁에 들어갔을 때.”

궁녀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어요. 궁녀들은 상전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큽니다. 본인들의 거취 문제가 달려 있기도 하고 그 자체로도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되지요.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궁녀 언니들에게 하면 그날은 조금 관대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을 테고요.

“그… 폐비 심씨의 방에 들어갔는데에.”

“여, 역시 거기에 폐비의 원혼이 있었사옵니까?!”

원혼.

“뭐가 있긴 했는데.”

“아아, 역시! 그래서 거기를 봉하셨군요! 거기를 봉할 때 신궁의 궁주께서 직접 납시어 봉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원혼은 사라지지 않았나 보옵니다! 마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사옵니까!”

궁녀 아이가 제 손을 붙잡고 마마, 하고 울음을 터뜨리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눈치가 없어도 어지간히 없는 아이인 게 틀림없습니다.

신궁의 궁주가 납시어 봉하셨다고? 저는 신궁의 궁주가 누군지 압니다. 저의 둘째 고모세요.

저희 집안, 그러니까 심씨 집안은 약간 별난 구석이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여아를 팔아먹어 가문을 부지한다’는 악명이 높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만한 부분이 존재했어요.

심씨 가문의 가장 유명한 선조를 말씀드리자면 태초황후마마이실 겁니다. 대륙은 단 한 번, 상고 시대에 통일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통일하셨던 황제 폐하를 태초황제, 그분의 황후를 태초황후라고 부르는데 그 태초황후께서 저희의 선조가 되십니다.

그분은 다섯 꽃잎 모양의 점과 다섯 불꽃 모양의 점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나신 분으로 절세의 미색과 강한 인내심, 어진 성품에 높은 덕을 지니셨고 무엇보다 매우 강력한 예지력을 가지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분의 능력을 바탕으로 태초황제께서 대륙을 통일하셨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 이후로 심씨 가문은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가문끼리 뭉쳐 살았고, 가문의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든 심씨 가문에서 나오는 ‘꽃잎의 아이’ 즉, 꽃잎 모양의 점을 가진 여아는 그 나라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적은 꽃잎은 석장이오, 많은 꽃잎은 다섯 장인데 다섯 장 꽃잎의 아이는 현재까지 세 명입니다.

태초황후, 먼 과거에 음악과 의복을 세상에 전했다는 황후마마 그리고 저입니다. 참 놀랍게도 두 명은 역사에 길이 남는 황후가 되었고, 한 명은 폐서인이 된 역적의 딸로 남았습니다.

태초황후마마를 제외하면 심씨 가문에서 꽃잎과 불꽃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없었습니다. 꽃잎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미색이 뛰어나고 매우 훌륭한 태자를 생산했습니다. 불꽃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강한 신력을 지녔습니다.

그리하여 불꽃을 가진 아이는 신녀가 되었는데, 현재 신녀들의 주인, 즉 신궁의 궁주는 저의 둘째 고모님 되십니다. 그분이 멸문지화에서 제외되셨으리라는 건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속세를 떠난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분이 저를 봉인하러 오셨을 줄은 몰랐네요. 신궁의 궁주는 속세의 사람이 아닌지라 황상께옵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황명 아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특별한 데가 있는데 고모님이 오셔서 저를 원혼 취급하시며 봉하셨다니, 의외의 일입니다.

제가 정말 원혼이라도 된 것이었을까요?

그래서 지금 유음 황녀의 몸에 들어와 있는 걸까요?

아니, 이건 꿈이니까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요, 마마.”

궁녀 아이가 아주 작게 소곤거렸습니다.

“정녕 그곳에 황상께옵서 계셨사옵니까?”

뭐?!

내가 눈을 부릅뜨자 궁녀 아이는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묻다가 퍼뜩 놀라 몸을 움츠렸습니다. 마치 채찍질을 당한 것 같았어요. 아이는 정신이 든 것처럼 바닥에 엎드려 아, 아, 아, 하고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었습니다.

무슨 말이야, 이게?

황상께옵서 어찌하여 냉궁 같은 누추한 곳에 계신단 말인가. 간과할 수 없는 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어요. 아이는 끅끅거리며 울었습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 같았어요. 말실수를 한 아이들은 다루기가 쉽습니다. 저는 아이의 팔뚝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말했습니다.

“똑바로 말해라. 황상께옵서 어디에 계신다고?”

“아, 아니, 아니옵….”

“본 황녀를 기만하는 것이냐!”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채찍질을 하고 너뿐만 아니라 네 처소에 있는 언니들도 모두 관리 소홀로 불러오겠다며 협박하자 아이는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결국 아이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대충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궁인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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