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꿈을 꾸게 된 건 제가 이곳에 온 첫날부터였습니다.
***
제가 있는 곳은 냉궁이라 불립니다. 매우 오래전 어느 황제께서 이 궁을 총애하는 귀비에게 하사하셨다고 합니다. 산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궁에 사는 귀비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었지만 자유만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귀비는 이 궁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받지 못하였고 결국 시름시름 앓다 죽었습니다. 공문서에 기재된 내용은 아니지만 알음알음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귀비는 본디 정인이 있는 몸이었는데 황제의 눈에 띄어 귀비로 책봉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인을 잊지 못하여 결국 갇혀진 채로 살다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귀비가 죽자 황제께서는 이 궁의 문을 잠그셨습니다. 그렇게 궁은 백 년이 넘게 버려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냉궁이라고 불리며 후궁들의 유폐 장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온 지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이러저러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폐서인 된 죄인의 신세일 뿐입니다. 냉궁의 한쪽에 격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제게 희망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리죽 한 그릇과 찻주전자 하나가 주어집니다. 저에게 이것을 건네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문이 조금 열리고 문틈 사이로 스르륵 들어올 뿐입니다. 이 큰 궁에서 저는 혼자입니다.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저는 홀로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많이 두려웠습니다. 여기 들어올 때 제 손에 쥔 것이라고는 갈아입을 무명옷 한 벌과 요와 이불, 베개가 전부였습니다. 저는 자신이 귀하게 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냉궁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컸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잘 견디는 중입니다. 입이 짧은 편이기도 하고 본디 식탐은 있는 편이지만 참는 데 익숙하여 먹는 것이 부실한 데에는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다행히 깨끗한 냇물이 흐르고 있어 씻는 데에도 불편함이 없습니다.
말을 걸 상대가 없다는 건 외롭지만 평생 타인의 눈을 신경 썼는지라 후련함도 있습니다. 홀로 평상에 드러누워 바람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위안이 됩니다.
냉궁에서는 겨울을 나기 어렵다고 합니다. 북쪽에 있어 본디 궁이 춥기도 하거니와 장작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도 겨울을 나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만 그래도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많아진 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때때로 그런 생각도 듭니다. 냉궁에 온 지금만큼 제가 저 자신에게 몰두한 적이 있을까요? 언제나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야 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돌보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매일 생각하는 삶을 삽니다. 그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꿈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이 궁에 들어온 뒤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꿈은 기묘하고 현실감이 넘치며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저는 제 지아비의 ‘아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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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지아비에 대해 이야기를 잠깐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분은 이 나라의 태자로 동궁의 주인이십니다. 존귀한 자리에 오르신 지는 오래되셨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황상의 유일한 적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고귀한 혈통을 제외하고라도 그분은 우아한 법도를 지니고 있으며 훤칠한 미장부이시고 문무 양쪽에 능하십니다.
유명한 서예가이면서 알려진 지장이기도 한 그분의 정궁으로 제가 지목된 것은 오로지 전설 속의 이야기 때문인데,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제 지아비는 모두가 말하는 완벽한 태자십니다. 제게도 몹시 다정다감하시어 작은 꽃을 주신다든가 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냉궁에 올 당시에 그분은 출정 중이셨는데 동궁에서는 그분이 계셨다면 제가 냉궁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들을 했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가타부타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구해 주려 하셨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저를 구하실 수 있으셨을지 저는 좀 부정적입니다.
저는 역적의 딸입니다. 제 아비는 불충하게도 황상의 이름으로 뇌물을 받아 사리사욕을 채웠다고 합니다. 물론 탐관오리는 많습니다. 그러나 감히 황상의 이름을 빌렸다는 건 목숨이 사라져도 싼 대역죄입니다. 아비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기에 저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아비는 제가 태자비에 책봉된 뒤, 제 이름으로도 여러 번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불거지지 않은 것은 제 지아비, 이연 태자가 철저하게 아비의 문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출정에 나간 이상 아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태자 전하께서는 출정하시기 전 아비를 부르셔서 단단히 일러두신 것 같긴 했지만 탐욕은 그 어떤 말로도 누를 수 없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역적의 딸을 태자비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는 폐서인이 되어 냉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황태자비에서 폐한다는 성지를 받들 때 황상께옵서는 친히 아비의 수급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법대로 ‘황상의 은혜에 감사 드린다’고는 했지만 지금도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황상을 원망하라는 의미는 아닐 텐데요. 얌전히 폐서인이 되라는 경고의 의미인지, 아비의 죽음을 보고 더욱 상처 입으라는 뜻인지.
저는 눈을 부릅뜬 아비의 수급을 보며 굳이 눈을 감겨 드리진 않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아비와 잘 맞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저는 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그리 말할 수는 없었지만요. 저는 탐욕을 부리다 죽은 아비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의 탐욕 때문에 저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폐서인이 된 저도 저이지만 제 어머니는, 언니는, 동생들은, 가솔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차라리 죽은 사람은 편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안식을 찾을 수는 없겠지요. 죄인은 사지가 동서남북 다른 곳에 버려져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만드니까요. 그건 아비에게 꽤 잘 어울리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태자 전하께서 부재중이었던 사이에 제가 몰락한 것도 좋은 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제게 정말 잘해 주셨고 저는 그분이 저를 위해 노력하시는 것도 저를 외면하시는 것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분이 안 계실 때 이렇게 끝나는 게 가장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그러니 나름대로 모든 일은 제게 자비롭게 행해진 것 같습니다.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면 가장 자비로운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
또 꿈이군요.
이 꿈은 늘 제게 곤란합니다.
***
“유음아!”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이 여성은 제 꿈속의 황후마마입니다.
눈 옆의 애교점이 귀엽고,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들어 있는 어여쁜 여인입니다. 제 꿈에 의하면, 그녀는 저의 지아비 이연 태자의 두 번째 정궁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냉궁에 들어온 다음에 정궁이 된 분이죠. 태자비로 책봉된 뒤 황후까지 오르신 분으로 성격은… 저랑은 조금 다르시지만 자신의 딸을 무척 사랑하시는 어머니임에는 분명합니다.
“정신이 드느냐? 몸은 어떠하느냐, 응?”
아아, 이런.
제 꿈속의 저는 일관되게도 제가 현실에서 일어나면 쓰러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꿈속의 아이가 일어날 때쯤에 잠자리에 드는데 어제는 새가 엄청 지저귀는 바람에 놀라서 일어나고 말았어요. 황후마마와 다과를 함께하던 중이었으니 아마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태의!”
내 괜찮다는 말은 밀어 둔 채 황후마마는 태의부터 찾으셨습니다. 날카롭게 외치시자 태의가 옆에서 서둘러 다가왔는데 안색이 무척 초췌하여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황후마마께 어지간히 시달렸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유음이가 잘못된다면 너를 기필코 내가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데다 실제로 행할 수도 있으신 분이라는 점이 태의를 많이 곤란하게 했겠죠. 저는 난처한 얼굴로 태의를 바라보았습니다.
태의는 하루 사이 홀쭉해진 뺨을 하고서 제 맥을 짚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곤경에 처한 사람의 눈으로 저와 황후마마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맥을 한 번 더 짚고, 또 한 번 짚고. 저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기에 입을 열었습니다.
“나가 보세요, 우 태의. 수고했어요.”
“유음아!”
“어머니, 저는 무척 건강하고 우 태의도 그걸 압니다. 제가 쓰러지는 건 단순히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여요.”
황후마마의 눈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 일. 그녀는 그 일만 생각하면 심장이 멎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녀는 딸을 사랑하는 좋은 어머니입니다.
“유음이가 잘못되면 네놈의 구족을 멸할 것이니 명심, 또 명심하도록!”
…좋은 황후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황후마마는 이를 갈면서 태의를 협박하고는 손짓으로 그를 내보냈습니다. 태의는 구족을 멸할 것이라는 협박보다 이 자리를 떠나게 된 게 더 위안이 되는지 조금 환해진 안색으로 다급히 인사를 올리고는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다소 허둥지둥하는 듯한 뒷모습을 보며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어제 갑작스럽게 깨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런 곤욕은 겪고 싶지 않아요.
“유음아.”
황후마마께옵서 제 손을 잡으십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죄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그녀는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신데, 사실 그 딸의 몸속에 어여삐 여기시는 딸의 혼이 아니라 무척 싫어하실 폐비가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노여울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분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꿈에서라고는 하나, 현실이 아니라고는 하나 이분은 제가 가꾸고 있던 모든 것을 차지한 분. 저의 지아비, 저의 궁, 저의 사람들. 모든 것이 이제 이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이분을 미안함이나 죄책감만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이분의 딸, 그러니까 유음 황녀의 몸에 제가 들어오게 된 것도 저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열두 살 어린 황녀마마의 치기 어린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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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음 황녀는 황후마마의 유일한 소생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적자를 생산하시지 못한 황후마마께옵서는 난처한 지경에 빠지셨을 법하지만 제 꿈속의 황궁 사정은 조금 달랐습니다.
황상, 그러니까 현재의 태자 전하시자 한때 저의 지아비셨던 분께서는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계셨고 많은 여인에게서 자손을 보셨으나 그중 단 한 명도 사내아이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스물이 넘는데 사내아이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변고가 분명하다는 소문이 스산하고도 은밀하게 황궁의 그림자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무척 억울하게도 그 변고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주목된 사람은 저였습니다. 꿈에서 듣기에 저는 꽤 오래전에 죽었는데 궁인들은 제가 한이 맺혀 제 지아비께 저주를 내렸다고 수군거렸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저는 그분께 원망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저를 구할 수 없었어요. 당시 그분은 황제가 아니라 태자셨습니다. 그것도 황상의 견제를 받는 태자셨죠. 그분은 젊고 아름다우며 강한 태자셨습니다.
행동거지는 우아하고 사리 분별은 정확하셨죠. 일에서는 공명정대하고 아랫사람에겐 어질고 윗사람에겐 극진했습니다. 모두가 그분을 찬양했어요. …그것이 황상께옵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종종 다른 친왕들을 더 가까이하시며 태자 전하를 노골적으로 멀리하셨으니까요.
태자 전하께옵서는 가끔 속이 상하시면 술을 한두 잔 기울이시기도 하셨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그분의 곁에 앉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그분을 원망하고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인들의 입은 새털처럼 가벼운 것. 그들은 제가 저주를 내렸다고 믿었습니다. 하여, 냉궁에서 제가 쓰던 방을 금줄로 봉하고 부적을 덕지덕지 붙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밤, 유음 황녀는 그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