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ravity (6)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신경정신과에서 돌아와 별로 한 것도 없이 멍하니 앉아있었을 뿐인데 이미 카페 밖은 어둡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카페에 돌아와서도 의사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정말 내 머릿속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심각한 상태인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형부. 피곤해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Bar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내게, 처제가 다가와 물었다.
하지만 이 말은 내가 처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제.....그 곳에서 처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를 보는 처제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별 일없어. 오늘 우리 카페 빨리 닫고 들어가자. 언니는 학교에서 행사 있어서 좀 늦는다고 연락 왔어.”
그러자 처제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조금 망설이듯 쭈뼛거리고 있었다.
“형부. 그럼 나 오늘 미나 집에서 자면 안돼요?”
“그럴래?”
처제의 물음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생각지 않았던 내 반응이 의아했는지 처제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망설임 없이 처제에게 그러라고 한 것은, 처제가 집에서 아내와 마주치는 게 몹시 불편해 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서둘러 카페를 정리하고, 처제와 미나를 떠나보냈다.
처제가 미나 집에서 잔다는 걸 언니에겐 내가 말할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내가 이렇게 카페를 빨리 닫고, 처제와 미나를 서둘러 보낸 것은, 계획에 없던 급하게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둘러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어....그래...김,.,김 사장님]
장 실장이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내 전화에 긴장을 했는지 목소리가 유난히 어색하게 들렸다.
[네. 장 실장님. 다름이 아니라..... 오늘 좀 봤으면 합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래요? 언제요?]
[시간되면 지금 봤으면 합니다만.....제가 장 실장님 계시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아....그럽시다.....내가 문자로 주소 보내 줄 테니까 이쪽으로 와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던 멘트가 멈췄다.
장 실장이 알려준 주소에 도착하니 대로변에 어느 아담한 주점 앞이었다.
좁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자 까맣게 코팅된 유리 자동문이 열렸다.
입구의 소박한 모습과는 달리 지하로 내려가자, 주점 내부는 신경을 많이 쓴 듯 고급스런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흰 셔츠를 입은, 앳돼 보이는 청년이 내게 고개속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몇 분이십니까? 예약 하셨습니까?”
“그게 아니고 약속 있어서 사람 만나러 왔는데...
장 실장님 왔어요?”
“네? 장 실장님요? 어....그게...누구지...
혹시 성함을 아고 계신가요?”
청년이 당황한 건지 머뭇거렸다.
“저기......혹시 장 형사님? 찾으시는 건가요?”
또각거리는 하이힐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홀에서 한 여자가 다가와 내게 되물었다.
“네....형사 하시던.......”
“혹시 김 치우씨?”
“맞습니다.”
“아.....빨리오셨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안내하는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반짝이는 은색 스키니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진한 화장을 했지만, 얼핏 보니 나이가 무척 어려 보였다.
장 실장이 미리 이 여자에게 연락을 해놨는지 룸에는 이미 술 세팅이 끝나 있었다.
“하아.....편히 앉으세요.”
룸에 들어와 멀뚱멀뚱 어색하게 서있는 내게 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는 분이시네요. 원래 장 형사님, 친한 분들 아니시면 여기에서 약속 안 잡으시는데......
많이 친하신가 봐요? 장 형사님하고?”
여자가 궁금한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조심스레 훑어보고 있었다.
여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말투나 행동이 무척 조심스럽고 예의 발랐다. 노출이 심한 홀복이 아닌 옷차림을 보니 룸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아가씨 같진 않았다.
“신 혜원 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여자가 내게 다가와 명함을 전해줬다. 명함에 적혀있는 대표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룸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미안해요....김 사장님.....내가 조금 늦었나?”
장 실장과 약속했던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초행길이라 좀 서둘렀더니 빨리 도착했어요.”
“그런가....하하하......혜원이도 같이 있었네?”
날카롭고, 다소 험상궂던 장 실장의 얼굴이 온화하게 변해갔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처음 보는 얼굴 표정이었다.
여자가 그런 장 실장과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몇 가지 안주가 룸에 들어오자 장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술을 따라줬다.
“으음.....김 사장님. 어제는 정말.....내가 실례했어요. 미안해요.....”
나도 그에게 잔을 채워주곤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최 약사님한테 대충 이야기를 들었어요.
나는 그런 사연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혹여나 나 때문에 마음 상했으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오늘 장 실장을 만나자고한 본론을 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작은 룸 공간이 내겐 너무 편안하게 느껴졌다.
장 실장과 나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한동안 술을 계속 마셨다.
신경정신과 의사가 당분간 절대 술은 마시지 말라고 했던 당부는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어져갔다.
순간...순간...
아내의 뺨을 천천히 쓸어 올리던 박 선생의 그 혀와 그리고 박 선생의 떨리는 손길에 아내의 몸이 어지러이 요동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내 감정이 아무렇지 않은 듯,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참....사람 사는 거....쉽지 않죠? 내 인생도 그렇고.......그때는 참 미칠 듯 힘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술 마시면서 문득 생각해보면.....그땐 왜 그랬을까....후회도 되고....하하하.....”
항상 그랬듯, 약기운이 떨어질 때면 다시 머리가 아파야 되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독한 술이 한잔씩 들어갈 때 마다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어둠이 깔린 밤, 따스한 달빛을 품은 고요한 바다처럼 그렇게 마음이 평온했다.
“장 실장님. 그 날 이야기 좀 마저 해줘요.”
“네?”
술을 마시려 잔을 들고 있던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날. 우리 처제...황 경태 차 타고 학교에서 나가서 어떻게 된 건지.....”
장 실장이 들고 있던 샷 잔을 마시지도 않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흐음.....그 날 그 차를 따라 갔어요. 한 30분 따라갔나? 도착한 곳이 도심에서 좀 떨어진 곳이던데.
한 건물로 둘이 들어가더라고요. 여자 분은 상당히 경계하는 분위기였고, 황 경태는 여자분 재촉하면서 건물로 데리고 들어가고.... 무슨...업소...같더라고요.”
“업소요? 무슨.....”
“그게....간판도 없고, 이제 막 오픈 준비하는 건지, 건물 입구가 좀 어수선 하더라고요.
침대, 사무 집기 같은 게 계속 도착해서 건물로 들어가고.....
한 1시간 정도 차에게 기다려도 안 나오길래. 근처 부동산 가서 물어보니까, 얼마 전에 계약하고 입주 시작했는데, 부동산 사람들도 뭘 하는 곳인지 잘 모르더군요.
그래서 계속 기다렸는데.
여자 분이 그 건물에 들어 간지 한 2시간 정도 만에 나왔어요. 황 경태 그 사람하고 같이....그런데 둘이 분위기가.....좀.....”
“네? 분위기요?”
장 실장이 말을 흐렸다.
내 시선을 피했다. 그의 표정에 당황함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그 분위기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차가 다시 여자분 태웠던 대학 그 건물에 도착하고, 여자 분은 내렸어요.
여자 분은 차 에서 내리자마자 건물로 바로 들어가고, 황 경태는 밖에서 담배 다 피고, 차에 올라타 좀 전에 여자 분하고 갔던 건물로 다시 갔어요.”
그의 말이 끝나자 룸이 고요해졌다.
3주전 강변의 그 카페에서 황 경태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를 데리고 나왔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아내의 그 사진이 박 선생에게 전해졌다.
아내 그리고 처제와 저녁 약속을 한 어제.....
황 경태가 처제의 대학에 찾아 갔다.
그리고 저녁을 예약해둔 그 레스토랑에 내가 도착했을 때,
아내가 처제의 뺨을 매섭게 내리쳤다.....
“장 실장님”
“네?”
“계속 좀....해주세요. 황 경태가....만나는 사람 모조리 확인하고 알려주세요.
그리고 처제나.....와이프가......”
갑자기 목이 메었다.
“그래요.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었어요. 그런 일 있으면 바로 김 사장님한테 알려드리겠습니다.”
별 말을 주고받지 않고 조용히 그와 술을 마셨다.
독한 위스키가 어느새 거의 비어져있었다.
“저기.....장 형사님. 서장님 오셔서 찾으시는데요.....”
조금 전 명함을 건 내 줬던 신 혜원이 급하게 룸에 들어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장님이? 갑자기?
저기 김 사장님. 예전에 모시던 선배 오신 거 같은데. 내가 인사만 금방하고 올게요.”
“네 그러세요. 괜찮습니다. 저는.”
장 실장이 룸에서 빠져 나가자 잠시 허전했지만, 이내 다시 홀로 있는 이 공간의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아이스 바스켓에 들어 있던 맥주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곤 테이블 위 하얀 냅킨위에 다소곳이 엎어져 있던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맥주병을 들고 잔에 따르려는 순간, 맥주잔이 아래 중간 즈음까지 길게 금이 가있는 게 보였다.
[지난번처럼 기억이 나지 않거나 하는 경우도 있나요?]
잡자기 신경정신과 의사의 목소리가 룸에 올렸다.
오늘 새벽.
아내의 차 데시보드 서랍에 들어 있던 금이 간 스마트폰을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냈다.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트레이를 열어보니 작은 마이크로SD 카드가 꽂혀 있었다.
아내의 그 스마트폰에 들어 있던 동영상 하나를 마이크로SD 카드로 복사하던 새벽녘의 그 순간이 완전히 떠올랐다.
스마트폰 화면에,
아내와 박 선생의 동영상과 뒤섞여 있는 다른 확장자 파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룸에는 어디인지 모를 다른 룸에서 울리는 여자의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