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 빌드 업-46-
"아무래도 배당률 높은 게임이 유리하죠. 룰렛이나, 바카라같은?"
"텍사스 홀덤은요?"
"홀덤도 연승만 계속할 수 있으면 최고죠. 하지만 혼자선 못해요. 인원이 채워져야 할 수 있거든요. 칩도 최소 30개 이상 필요하고요. 칩은 지금 들고 있는게 전부예요?"
도훈은 성희와 다이스 게임을 하며 얻은 13개의 칩이 있었다. 마지막에 딴 5개의 칩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원래 18개를 가지고 있어야 맞았다.
"네."
"흠, 너무 적은데···. 안 되겠다. 아까 저한테 주신 거 칵테일 값은 제하고 다시 돌려드릴게요."
성희가 칩 3개를 도훈에게 내밀었다.
도훈은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요. 준 걸 왜 도로 줘요?"
"내기는 내기니까요. 받으세요. 칵테일 값만 뺐어요."
도훈은 거절했다가 성희를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칩을 거두었다. 이 직업에 자부심을 가진 그녀를 딜러로서 존중키로 한 것이다. 어설픈 동정은 모욕으로 느낄수도 있었다.
그렇게 모두 16개의 칩이 확보되었다.
"알았어요. 내기는 내기니까."
"참고로 홀덤은 테이블에서 진행해요."
성희가 바가 아닌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가 블랙잭이나 텍사스 홀덤 같은 카드 게임을 주로 하는 곳이에요."
"딜러는 누가 봐요?"
"인원이 채워지면 바텐더 중 한 명이 딜러로 배정될 거예요."
"성희씨도 가능해요?"
"아뇨. 전 아직 실력이 모자라서 블랙잭이나 홀덤은 무리예요."
"그럼 추천해주실 딜러 분이라도?"
"추천이라뇨?"
"기왕이면 카드를 잘 다루는 분이면 좋겠어요. 어설픈 사람이 딜러 보다가 중간에 말 나오면 피곤하니까요. 특히 셔플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면."
성희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누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주아가 딱이네!"
"주아?"
"네. 저희 가게 유일한 전공자거든요. 카지노딜러 학과라고 아세요? 그곳 출신이라."
"오. 진짜로 딜러네요?"
"물론 아직 학생이라 라이선스를 딴 건 아니고요, 카드는 정말 잘 다뤄요. 프로처럼."
"누군데요? 그 주아라는 분이."
"잠시만요. 막 출근했을 시간인데."
성희가 바텐더들을 쭉 살피다가 반대편에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죠? 되게 어려 보이는 바텐더. 쟤가 주아예요."
"아하."
도훈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한테 그럼 텍사스 홀덤 게임 신청한다고 하면 돼요?"
"네. 4명만 모이면 바로 시작할 거예요."
"오케이. 고마워요."
"히히. 돈 많이 따고 오세요. 그리고 혹시나 칩 다 잃으면 저한테 와요. 술은 공짜로 드릴테니."
"그럼 오늘 중으로 공짜 술은 먹을 일 없겠네."
"왜요?"
"성희씨 퇴근할 때까지 돈 잃을 일 없을테니까."
"풉-. 하여간 자신감 하나는 최고네요."
"그럴만 하지 않겠어요?"
도훈이 공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더니 바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누가봐도 수상한 동작이었지만, 성희는 그를 마술사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게 뭐예요?"
"제 트레이드 마크요."
"응?"
"궁금하면 뒤집어 봐요."
성희가 흥미로운 눈길로 카드를 뒤집었다.
"이건 K 카드 잖아요?"
"그게 뭐의 약자죠?"
"···킹?"
도훈이 싱긋 웃으면서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흔들어 보였다.
"맞아요. 제가 바로 킹이거든요. 도박왕, 킹 조지라고."
"푸하하하!"
웃음기 많은 성희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카드를 들고 진지하게 말하는 폼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만약 못 생기고 볼품없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대사를 쳤으면 시트콤이지만, 잘생긴 도훈이 뻔뻔한 태도로 지껄이자 의외로 그럴듯 해 보인다는 게 반전이었다.
"왜 그렇게 크게 웃어요?"
"하하, 마술사 맞네요. 방금 무슨 연극 보는 줄?"
"마술사 아니고, 도박왕이라니까."
"근데 왜 하필 조지에요?"
"네?"
"킹 조지라면서요."
"굳이 말하면, 다른 것도 킹이라?"
"뭐라고요? 푸하하. 진짜 겁나 웃겨."
성희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이게 그렇게 웃기냐?'
[그럴리가요. 주인님에게 호감이 있으니 무작정 좋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
[제 생각엔 유머코드가 정상처럼은 안 보입니다.]
'뭐 의도치 않게 취향은 저격한 것 같네.'
[근데 별명 붙일 거라면 원아이드 잭 같은 게 훨씬 있어보이지 않나요? 아니면 선수를 의미하는 스페이드 에이스라든가. 주인님은 지금 호빠 선수니까요.]
'킹 조지가 뭐 어때서? 도박왕에 딱 걸맞는 이름이구먼.'
[이제는 도박왕까지 겸하시려고요?]
'아니야. 주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면 돼.'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요. 혹시나 업장에서 쫓겨나면 낭패니까요.]
'그럴리가 있나? 절대 안 걸릴 사기를 칠 건데.'
"그럼, 나중에 봐요."
"넹!"
도훈은 자연스럽게 성희를 떠나 반대편에 있는 주아에게로 넘어갔다. 다른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주아가 도훈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 소리쳤다.
"어? 어? 그쪽은!"
"안녕."
"진짜 왔네요? 맞죠? 점심 때 같이 담배 피웠던."
"맞아. 언제는 놀러 오라면서?"
"오늘 바로 오실 줄은 몰랐죠! 반가워요. 술 한잔 드릴까요?"
"아니. 술 마시러 온 건 아니고, 게임 신청 하러 왔어."
"게임? 무슨 게임?"
"텍사스 홀덤 하고 싶으면 너한테 직접 말하라던데?"
"누가요?"
"저 쪽에 있는 바텐 아가씨가."
도훈이 성희를 가리키자, 그의 손짓을 알아본 성희가 멀리서 두 사람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헐, 성희 언니랑 구면이었어요?"
"아니. 방금 만났는데?"
"엄청 친해 보이는데?"
"글쎄? 암튼 홀덤은 어떻게 신청 하면 돼?"
"신청자가 아직 부족해요. 4명부터 시작할 수 있거든요. 최소 참가비도 필요하고."
"칩 30개?"
"네. 잘 아시네요."
"그럼 나 참가할테니까 인원 다 채워지면 불러줘."
"어디가게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지. 매칭 금방 될 거예요."
"그게 아니고, 쩐이 부족해서 충전 좀 하고 오려고."
"네, 그럼 좀 이따 봐요."
도훈은 간단히 용건만 마치고 주아를 다시 떠났다.
[벌써 가십니까?]
'왜? 용건 다 말했는데.'
[그게 아니라 주아양이 오늘 헌팅 대상아닙니까?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서 꼬셔야죠. 헌팅하곤 별 상관도 없는 성희양과는 몇십 분을 노닥거리더니, 막상 타깃인 주아양에겐 별 관심을 안 보이시는 군요]
'아, 그거?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라고요?]
'주아는 오늘 당장 공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중에 호빠 테이블에 앉히는 게 목표잖아. 즉 평소 하던 것처럼 따먹을 작정으로 들이대선 안 된단 말이지. 나랑 자고 나면 호빠를 찾아갈 이유가 사라지니까.'
[듣고보니 일리가 있군요. 그럼 부족한 칩을 충전하시게요?]
'충전을 왜 해? 따면 그만인데.' 도훈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업소 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룰렛을 보았다.
'저거 한 번 해볼까?'
[할 줄은 아십니까?]
'복잡한 규칙은 잘 몰라도 색깔이나 홀짝만 맞춰도 2배로 따는 건 알고 있지.'
룰렛은 사발 형태의 회전기구에 쇠구슬을 떨어뜨려, 구슬이 멈춘 숫자에 따라 승패와 배당이 결정되는 게임이었다. 금속의 볼이 룰렛 위에서 돌아가는 또르르하는 소리가 시각적·청각적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카지노하면 대표적으로 연상되는 게임이기도 했다.
[근데 저건 주인님이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게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운으로 맞추는 게임일텐데요?]
'맞아. 운빨 좆망 게임의 대표적인 게임이지. 심리전도 필요없고, 추가베팅도 없으며, 무지성 찍기에 가까우니까.'
[그런 걸 굳이 도전해 보시겠다고요?]
'뭐 어때? 운에 한 번 기대 보는 거지. 딱 한 번만 따면 되잖아.'
도훈은 평소에도 강운을 타고났다.
어지간한 운 빨 게임에선 거의 진적이 없었다.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룰렛 게임을 구경 하던 도훈이 옆 사람에게 슬쩍 물었다.
"여긴 최대 베팅이 얼마예요?"
"최대요? 최대가 빨간 칩 세 개까지던가?"
"빨간 칩이요?"
"흰색 칩 다섯개가 빨간 칩 한 개랑 같아요. 빨간 칩 두개는 검은 칩 한개랑 같고."
"아."
도훈은 손에 잔뜩 쥐고 있는 자신의 흰색 칩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쓸데 없이 동전만 많이 들고 있는 셈이구나.'
설명에 따르면 흰색 칩은 100원, 빨간 칩은 500원, 검은 칩은 천원짜리란 비유였다. 흰색 칩이 추가 구매할 시 만원에 3개라는 걸 볼때, 검은 칩의 실제 값어치는 3만원이 훌쩍 넘는다는 뜻이었다.
'하긴, 판이 커지면 나중엔 수십만원이 오갈텐데, 3만원짜리 칩도 크다곤 할 수 없겠네.'
[그럼 텍사스 홀덤은 최소 참가비는 10만원 가량이란 뜻이었군요.]
'4명이 모두 올인할 경우 최대 30만원까지 딸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도훈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는 와중에도 룰렛은 계속 쳇바퀴 돌듯 돌았다.
"노 모어 베트."
딜러의 해당 선언이 끝나면 더 이상 베팅을 할 수 없었다.
거의 1분에 한 번씩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었고, 칩을 베팅한 구경꾼들과, 끼어들 기회만 노리는 또 다른 구경꾼들이 또르르 굴러가는 쇠구슬에 눈을 떼지 못하고 몰려 들었다. 확실히 사람을 끌어모으는 게임이었다.
도훈 역시 한동안 게임을 계속 지켜보았지만, 아쉽게도 쇠구슬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이건 진짜로 운빨이구나. 주사위 게임처럼."
[그냥 다른 게임을 알아 보시렵니까?]
'아니. 어차피 승률은 반반이야. 승부 한 번 걸어보자.'
도훈이 보유하고 있던 16개의 칩중 15개를 빨간색 칸에 베팅했다. 위로 쌓아올린 칩의 높이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도훈을 쳐다보았다. 물론 칩 중에서도 가장 금액이 작은 흰색 칩이었기 때문에 카지노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남들이 지폐를 걸 동안 동전만 잔뜩 내놓은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도훈 이후로도 다른 사람들의 베팅이 이어졌다. 도훈과 반대로 검은 색에 건 사람, 혹은 짝수나 홀수에 건 사람. 아니면 고배율을 노리고 숫자 하나에만 몰빵한 사람들까지.
어느정도 참가자가 정해지자 딜러가 룰렛을 돌리면서 베팅 종료를 선언했다.
"노 모어 베트,"
촤르르르-.
원판 위에서 쇠구슬 돌아가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도박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호시탐탐 끼어들 기회를 노리는 다른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칩의 대부분을 베팅한 도훈은 처음으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봐야 5만원도 안되는 돈인데 이게 뭐라고 떨린담.'
실제 도훈의 현찰 동원력이면 오늘밤 가게를 통째로 사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당장 수중에 칩이 몇개 없으니 마치 전재산이라도 건 것처럼 긴장되었다.
룰렛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면서, 도훈의 입술도 바싹 말랐다.
'제발, 빨간 거, 빨간 거.'
룰렛의 절반 가까이가 빨간 색이다. 물론 딜러의 몫인 녹색칸이 두 개 존재해서 참가자 전부 패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거의 희박한 확률이기 때문에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빨간 거, 빨간 거!'
무한히 돌것 같던 구슬이 마침내 멈췄다.
하지만 도훈의 기대와 달리 검은색 칸이었다. 좌우에 빨간색이었는데, 하필 그 사이에 걸린 것이다.
"으아!"
도훈이 좌절감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의 강운이 꺾인 것이다. 딜러가 승부에서 진 칩을 무표정하게 거두는 모습을 보며, 도훈이 자신의 판단을 곱씹었다.
'왜지? 내가 왜 진 거지?'
[왜라뇨? 승률이 반반이니 당연히 질수도 이길수도 있죠.]
'그게 아니라 나는 강운을 가진 사나이잖아. 그래서 주사위 게임에서도 3연승을 했었고.'
[엄밀히 말하면 3번째 게임은 아이템을 이용한 사기였죠. 그리고 주인님의 운빨대폭발 패시브는 섹스 직후에만 활성화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지막 관계 이후 시간이 다소 흘렀으니, 패시브 효과도 당연히 사라졌고요. 즉, 주인님의 현재 운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뜻입니다.]
'아···. 그럼 앞에 연승했던 건?'
[당연하지만 우연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우연히 진 것이고요.]
도훈이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코인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베팅 칩을 15개로 딱 맞추는 바람에, 운좋게 살아남은 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