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8. 제주도 푸른 밤-88-
* * *
호텔 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 위에 머그잔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염력 마술을 보는 것처럼 커피잔이 스스로 기울어지더니 안에 담긴 커피가 아슬아슬한 각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쏟아질 것 같던 커피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임시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미스터 엑스. 그 유령 놀이 좀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 밤에 보면 가끔 귀신 나오는 것처럼 섬뜩하단 말이에요.”
“시연씨. 미스터 엑스가 굳이 머그잔을 투명화시키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섭니다. 가끔 좁은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이랄까?”
대답은 미스터 엑스가 아니라,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던 김태홍이 대신했다. 그는 성녀의 예언을 따라 본부에서 파견된 특임대의 리더였다.
“흠, 그럼 그냥 평소처럼 코트라도 걸치고 계시던지요. 옷을 입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도 확인도 안 되니 원···.”
“······.”
임시연의 요청에 갑자기 텅 빈 것처럼 보였던 의자 위에 덩그러니 갈색의 레인 코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전히 안은 텅비어있었고, 빈 코트만 바람에 부푼 것처럼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라 음산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임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어휴, 투명 인간이란.”
그때 김태홍이 노트북 커버를 덮으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지난 며칠간 조사 끝에 낸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
“아무래도 내부에서 정보가 샌 모양입니다.”
특임대 리더 김태홍의 충격적인 발언에 다들 놀라서 되물었다.
“네?”
“···그게 정말인가?”
세 사람은 커다란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호텔 방안에 있기엔 무척이나 어색한 소품으로 보였다. 임시로 잡은 호텔방을 임의로 개조해 사무실처럼 꾸며놨기 때문이었다. 태홍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놈의 흔적이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잡으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도망친 것처럼.”
“이미 오래전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은요? 혹은 다른 지부에서 이미 헌팅을 시도했을 수도 있고요.”
“다른 지부도 모두 확인해봤지만, 딱히 보고된 바가 없었습니다. 아예 한국을 뜬 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단서가 남았을 텐데 이상할 만큼 깨끗합니다.”
“흐음···.”
“이번 파견 건은 본부에서도 극비로 진행한 게 아니었나요? 대체 누가 정보를 흘렸다는···. 설마?”
말을 하던 임시연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화배우 뺨치게 예쁜 그녀의 모습은 장면 하나하나가 스틸컷처럼 느껴졌다.
“그렇죠. 모두 아시다시피 본부의 고위직 말고 이번 파견 건에 대해 알고 있는 단원들이 있죠.”
“조대근 지부장이 데리고 있는 인원들이겠군.”
태홍은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대물 배트맨의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내부의 첩자가 미리 정보를 흘려 빼돌린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물론 현재까진 근거 없는 가정일뿐이지만, 미약한 가능성일지라도 일일이 확인해보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이곳 지부 인원이 모두 몇 명이랬지?”
텅 빈 레인코트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투명화 능력자 미스터 엑스의 음성이었다.
“모두 넷입니다. 지부장 조대근을 비롯해 정신 조작계 능력자인 이창범, 그리고 올여름부터 지부에 합류한 염동술사 김건. 마지막으로 정식 단원은 아니지만, 객원으로 활동 중인 미호가 있습니다.”
“미호? 아, 그 구미호? 지난번 회동 때 봤었지. 지부장 조대근과 오랜 인연이라지?”
“미호는 실질적으로 이곳 지부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깨비불을 다루는 마도사를 메인으로 다양한 전투 특기를 가지고 있죠. 참고로 그녀는 몸속에 9개의 영혼을 지닌 군령자입니다.”
“한낱 영물에 불과한 이가 군령자라니···. 참으로 독특한 케이 스군.”
임시연이 김태홍에게 물었다.
“그 4명 중에 누가 정보를 흘렸을까요? 특별히 의심되는 사람이 있나요?”
“누굴 확신한다기보다 제외할 사람은 있죠.”
“그게 누군데요?”
“김 건.”
“염동술사? 그는 저번 회동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PC방으로 위장한 지부를 지키느라 불참했죠. 하지만 그는 확실히 아닙니다. 해당 플레이어가 등장한 이후 합류한 인원이거든요. 게다가 올해 처음 지부 발령이 난 신규기도 하고요. 육성교에 계속 있었으니 접촉할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그럼 김 건을 배제한다면 남은 건 셋이군. 혹시 더 제외할 사람은?”
“조대근 지부장도 빼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왜?”
“조 지부장의 충성심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본부의 평가에 따르면, 지부장 정도로 그칠 인물이 아니라 어디 지방 지역장정도도 역임했어야 할 인재라더군요.”
김태홍의 발언에 제주지부 지역장 출신인 임시연이 눈썹을 꿈 틀했다. 태홍의 말은 자칫, 서울의 일개 지부장과 지방 지역장이동급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지방이라고 해서 지역장 자리가 그리 녹록지는 않을 텐데요?
지방 지역장이 무슨 고스톱 치고 딴 자리도 아니고.”
“아, 오해는 마시길. 지방 지역장의 역량이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조대근 플레이어가 그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근데 어째서 그 나이 먹도록 여태 지부장이지? 승진할 나이는 한참 지나지 않았던가?”
미스터 엑스의 말이었다.
대머리 덕분에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것도 있지만, 현재 40대 초반인 대근은 지부장급에서도 상당한 고령에 속했다.
회사로 비유하면 승진에 번번이 누락 된 만년 과장같은 이미지였다.
태홍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몇몇 사건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미호랑 관련된 것도 있었고···. 자세한 내막까진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힘들 것 같군요. 1급 기밀에 속하는 부분이라.”
태홍이 확실히 선을 그었다. 특임대 신분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권한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고 있었다.
태홍의 대답에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미스터 엑스가 입을 다물었고, 권력욕이 강한 임시연은 입술을 비틀며 반감을 드러냈다.
‘쳇. 꼴에 최연소 특임 조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건가? 나이도 어린 녀석이.’
태홍은 말투만 존댓말로 예의를 차릴 뿐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상하관계가 누구보다 확실한 인간이었다. 실제로 너무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성격 탓에 본부 내에서 젊은 꼰대라는 별명도 붙었다.
‘하긴. 전생자라는 소문도 있던데, 실제 나이를 알 게 뭐야? 속에 100살 먹은 능구렁이가 들어가 있을지.’
“아무튼, 내부 평가로 볼 때 조대근 지부장은 결코 조직을 배신할 성격은 못됩니다. 저희의 인사평가가 틀리지 않았다면요.”
“그렇다면 남은 이창범과 구미호만 조사해 보면 되겠군.”
“난 창범이란 놈 표정 영 마음에 안 들던데.”
“그 정신 조작능력자 말씀이시죠?”
“왜, 저번 회동 때 호텔 찾아왔을 때도 시종일관 아니꼬운 표정이었잖아. 싸가지도 없어 보이고. 조직에 반감이 매우 많아 보였어.”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예단할 순 없죠.”
“오히려 미호가 더 의심스럽지 않아요?”
“미호?”
“객원이라고 했잖아요. 말이 객원이지 이해관계로 묶인 용병이나 마찬가지잖죠. 정식 단원이 아니니만큼 조직에 대한 충성도도 별로 없을 테고···. 플레이어 놈들과 결탁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태홍이 이번에도 섣부른 추측을 자제했다.
“확실치 않은 만큼 둘 다 감시를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미스터엑스씨가···.”
“내가 창범이라는 녀석을 맡지. 정신조작 능력자는 상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거든.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읽을 수 없겠지.”
미스터 엑스가 말을 마친 뒤 갑자기 공중에 떠 있던 머그잔과 레인 코트가 스스륵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태홍이 임시연에게 말했다.
“그럼 미호는 임시연 씨가 감시하는 걸로 하죠.”
자연스럽게 임무가 나뉘었지만, 임시연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태홍에게 따졌다.
“그럼 조장님은요? 우린 밖으로 뺑뺑이 돌리고 호텔에서 자리나 지키시겠다?”
누가 봐도 명백한 도발.
임시연은 이번 특임 기수에서 가장 어린 태홍이 조장을 맡은 것을 무척이나 못 마땅해했다. 외국으로 파견 나간 나머지 두 명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제주지부 전 지역장인 자신의 커리어를 넘는 인원은 없었다. 지역장은 전국 모두 합쳐봐야 16명이 전부. 제주도가 비록 작은 지자체라곤 하지만, 광역시급에 준하는 단원수를 자랑했다.
경력으로 보나 연차로 보나 임시연은 당연히 자신이 이번 기수의 특임조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부에선 김태홍을 더 신뢰했다.
시연은 그게 불만이었다.
“임시연씨.”
“왜요?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시연은 기회다 싶었는지 곧바로 태홍에게 대들었다. 자신의 빠른 스피드라면 1초 만에 태홍을 때려눕힐 수도 있었다. 본부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기회였다.
“···적당히 하시죠.”
“크흠, 나는 그럼 먼저 출발하겠네. 두 사람 문제는 두 사람끼리 해결하라고.”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스르륵 방문이 열리고 잠시 후 다시 닫혔다. 미스터 엑스가 호텔 방을 먼저 나선 것이었다.
둘만 남게 되자 임시연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젠 하극상이라고 증언할 사람도 없었다.
“적당히? 웃기고 있네. 나이도 어린 새끼가 조장이라고 거들먹거리···. 컥!”
그때였다.
시연이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갑자기 폐 속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었다. 몸 속의 장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태홍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임시연씨. 예전부터 나한테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존댓말 따박따박 해주니까 아주 내가 우습지?”
“커, 커헉, 무, 무슨···.”
“아? 그거? 인간의 몸은 70%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리고 내 능력은 대부분은 주변의 수분을 끓이거나 얼리는 능력이고.
장기 내부를 돌고 있던 혈액 온도를 조금 떨어뜨렸어. 더 떨어지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지 않을까? 아, 그전에 폐 기능이 떨어져 호흡곤란이 먼저 올지도.”
“크헉···.”
주저앉아 있던 임시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호흡을 하려 해도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에선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사, 살려···.”
“어이, 임시연씨. 자기 지부 단원을 목숨도 제대로 못 챙긴 양반이 어디서 전직 지역장 타이틀 따위로 거들먹거려? 본부에서 징계를 내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제, 제발···.”
“경고로 끝나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선배 대접받고 싶으면 처신 똑바로 하라고. 알아 들어?”
시연은 대답도 할 수 없는지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낯빛은 창백하다 못해 동사한 시체처럼 보랏빛으로 변해있었다. 죽음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크허헉!”
임태홍이 도술을 풀자 시연이 각혈을 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호텔 바닥에 깔린 카페트에 혈흔이 묻자 임태홍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젠장. 괜히 클리닝 비용만 들게 생겼군.”
“허억, 허억, 허억···.”
도술이 풀리고도 임시연은 한동안 거친 숨을 내쉬었다.
‘괴, 괴물 같은 새끼···.’
한국 내 PK단원 중 최고로 빠르다는 광속의 스피드를 뽐낼 시간조차 없었다. 태홍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 자신의 장기를 망가뜨릴 수 있는 능력자였다. 잠깐 이지만 얼어붙엇던 폐기관 손상이 심상치 않았다.
“···뭐하십니까? 감시 안 가십니까?”
태홍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은 시연을 향해 말했다. 시연은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호텔 방을 빠져나가는 시연을 보며 태홍이 차갑게 입술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병신같은 게.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 가지고.”
그는 호텔 내선 전화기를 들고 카운터에 룸서비스를 요청했다.
“네 혹시 까펫에 뭘 좀 흘렸는데 클리닝이 가능할까 해서요. 바로 지금요.”
태홍은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방금 전 동료를 죽일 뻔한 일은, 그에겐 일어난 적도 없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완벽히 지워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