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9. 제주도 푸른 밤-89-
* * *
보미가 목장 울타리를 넘으려고 하자 도훈이 갑자기 그녀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어엇, 왜, 왜?”
“안 떨어지게 내 목 꽉 잡아.”
보미를 안아 든 도훈이 지면을 박차고 도약하더니 그대로 공중으로 솟구쳤다.
“꺄아!”
착지까지 안전하게 마친 도훈은 보미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 주려 했다. 하지만 도훈의 품에 안긴 보미는 착지한 후에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버텼다.
“울타리 뛰어 넘었어. 이제 그만 내려도 돼.”
“조금만 있어 주면 안 돼?”
“응?”
“품에 안겨 있으니까 너무 좋아서. 이대로 행복사 할 것 같아.”
도훈은 단순히 섹스만 잘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방금 봤던 것처럼, 그는 정의감도 넘치고 자신과 비견될 정도로 강력했다. 살면서 한 번도 자기보다 강한 남자를 만난 적이 없던 보미에게 있어서 도훈은 꿈에 그리던 왕자님처럼 느껴졌다. 그런 왕자가 지금 자신을 공주처럼 안고 있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흐흐. 그럼 이대로 야외 플레이라도 한 번 갈까?”
도훈이 변태처럼 말하며 보미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도훈의 농담에 환상이 깨진 보미가 비명을 지르면서 도훈에게서 뛰어내렸다.
“꺄, 까악. 뭐야. 야외는 좀 부끄럽다고.”
“농담이야. 여기면 괜찮겠어?”
보미가 폐쇄된 목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거 목장이었던 이곳은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전해 듣기로는, 어떤 건설사가 콘도를 짓는다고 매입했다가 자금 부족으로 시공이 지연되면서 몇 년째 방치된 곳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지금은 누구도 찾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응. 사람도 없고 주변이 뻥 뚫려 있어서 스킬 보여주기엔 좋을 것 같아.”
“기대되는구먼.”
“음, 근데 표적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는데.”
“표적이라니?”
“저기 저 나무로 할까?”
보미가 30M 밖에 떨어진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공터에 덩그러니 자라난 나무가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높이가 2층건물에 이를 만큼 커다란 나무였다.
“저걸로 뭐 하려고?”
“나중에 보면 알아.”
“근데 어떤 스킬 보여줄 건데?”
“일단 내가 가진 스킬은 크게 7가지야. 그 밖에 아이템으로 사용가능한 자잘한 스킬까지 합하면 대충 10개?”
“그렇구나.”
도훈이 얼추 계산해보니 고수 3단계에 다다른 것 치곤 스킬이 많지는 않아 보였다. 중간중간 승급 보상으로 받는 스킬만 해도 5개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고수 3단계까지 올랐는데 스킬이 모두 10개밖에 안 돼? 지금 나도 그보단 많은 것 같은데?’
[플레이어의 클래스에 따라 부여되는 업적이 다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주인님이 얻은 스킬의 상당수는 업적 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보미 양은 업적을 해결하고 받은 스킬이 거의 없다는 뜻이죠.]
‘어째서 그렇게 되지?’
[플레이어마다 갖출 수 있는 아이템과 스킬의 가짓수는 상이합니다. 동일 레벨이라고 해도 성장 방식이나 클래스, 그리고 램덤으로 부여되는 미션과 업적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거든요. 보미양이 오히려 평균에 가까운 것이고, 주인님이 비정상적으로 스킬이 많은 이레귤러인 셈이죠.]
‘아하, 그런 거구나. 역시 히든 클래스라서 보상도 다른가?’
[히든은 아니고 희소는 맞습니다.]
“저번에 장작 자를 때 보여준 스킬은 패스하고, 윈드 커터부터 보여줄게.”
“윈드 커터?”
“음, 이런 거야 대충.”
보미가 손에 마나를 모으기 시작하자 그녀의 손이 푸른 빛에 휩싸인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손안에 푸른색 LED 전등을 쥔 것처럼 번쩍거리는 이펙트가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손 위로 푸른 원반이 만들어졌는데, 지름은 대략 30cm 정도로 시중에 파는 피자와 흡사한 크기였다.
“오, 이게 윈드 커터라는 거구나.”
“응. 이건 목표를 추적하는 마법이 걸려있어. 그래서 이렇게 날리면.”
보미가 손을 휘두르자 푸른 원반이 커브를 크게 그리며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잠시 후 나무 기둥을 통과한 원반이 다시 원을 그리며 부메랑처럼 보미의 손으로 회수되더니 사라졌다.
도훈은 이것이 일전에 사이코메트리 영상에서 보았던 엄청난 기술이란 걸 깨달았다.
‘이게 윈드 커터구나. 실제로 보니까 더 화려하네. 근데 사람 목은 쉽게 자르더니 나무는 못 자르는 건가? 하긴 두께가 있으니.’
“이게 끝이야?”
“어?”
“아니 방금 나무 기둥을 지나친 것 같은데 아무 변화가 없어서.
설마 흠집도 안 난 건가?”
“아, 잠시만 기다려봐.”
보미의 말대로 도훈이 잠시 뒷짐을 지고 나무를 관찰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무 중간이 스스륵 옆으로 밀려 나가더니 일순간 굉음을 내면서 반으로 잘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쿠구궁-!!
거대한 나무가 넘어간 충격으로 목초지에 흙먼지가 나부꼈다.
아름드리 나무가 수수깡처럼 단칼에 베어진 장면은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우, 우앗. 지금 나무를 반 가른 거지?”
“어. 수평으로 잘라서 한 번에 안 쓰러졌나 봐.”
보미가 담담하게 답했다. 도훈은 놀라서 쓰러진 나무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녀의 말대로 잘린 단면은 두부를 자른 것처럼 깔끔했다. 윈트 커터가 잠시 지나치기만 했는데도 둘레 지름이 50cm가 넘어가는 거목이 순식간에 토막 난 것이었다.
“세상에. 이거 뭐든 자를 수 있는 거야?”
도훈이 잘려나간 밑둥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보미가 설명을 이어갔다.
“뭐, 대충은? 마법적인 베리어라면 막을 순 있겠지만, 일반적인 방어구는 거의 자를 수 있을걸?”
“세상에. 이건 생각보다 너무 강한데?”
도훈은 보미가 보여준 마법의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이코메트리 영상에 사람 목을 치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윈드 커터의 절삭력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나무가 두부처럼 한방에 썰려 나간 것을 보면 강철도 너끈히 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 목이 한 방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혹시 더 있어? 다른 스킬?”
“음, 이번엔 바람 장막 보여줄까?”
“바람 장막이라고?”
“지금 나한테 아무거나 던져 볼래? 가령 돌덩이 같은 거.”
“진짜? 괜찮겠어?”
도훈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만약 진심으로 돌팔매질을 한다면 맞고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미는 별로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응. 최대한 강하게. 있는 힘껏 던져봐.”
“흐음. 괜히 후회할 짓 말고.”
“괜찮다니까. 저번에 한 번 설명했잖아. 달려오는 차도 막아낼 수 있다고.”
도훈이 미심쩍어하며 들판에서 돌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크기는 야구공보다 조금 작았지만, 무게가 제법 묵직해 정통으로 맞으면 꽤 위험해 보였다.
[설마 진심으로 던지실 건 아니죠?]
‘모르겠어. 방어력을 확인해 보려면 전력투구 하는 게 맞는데, 그러다 보미가 다치기라도 하면···.’ 고민하던 도훈이 보미에게 바람 장막의 범위를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범위야?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데?”
“보이게 해줄까?”
보미가 손짓하자 바람 장막의 외곽으로 푸른 빛이 돌면서 범위가 표시되었다. 대략 좌우로 3M 높이는 2M에 이르는 직사각형 형태였다. 전신을 가리고도 좌우로 여유가 남았다.
‘보미가 없는 구석으로 던지면 되겠다.’
도훈은 설사 장막이 파훼 되더라도 보미가 다치지 않을 만한 위치를 노렸다. 20M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와인드업 자세를 갖춘 도훈이 전력으로 돌멩이를 내던졌다.
“으차!”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지는 18.44미터를 조금 넘는 거리였지만, 도훈의 정확도는 특급 투수에 비견될 정도로 놀라웠다. 구석으로 날아간 돌멩이가 빠르게 바람의 장막으로 쇄도했다.
퍽-!
시속 180Km로 날아간 돌멩이가 장막에 적중하는 순간. 뭔가 막힌 것처럼 멈춰 서더니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던진 도훈도, 막아선 보미도 서로 놀랐다.
“어? 이게 막힌다고?”
“와! 방금 충격량 엄청났는데.”
“무슨 소리야? 충격량이라니?”
“바람 장막이 충격으로 살짝 흔들렸거든. 이 정도면 총알보다 더 관통력이 우수한 것 같은데?”
“설마 총알도 튕겨내는 거야?”
“응. 대물 저격총 아니면 흔들리지도 않을걸?”
“무슨 저격총이라고?”
“대물!”
도훈은 대물이라는 말에 자신을 지칭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다 군용 장비 중에 차량 장갑을 뚫는 저격총의 종류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보미를 얕잡아 봤나?’
[저 정도면 탱크 포탄에 직격 당해도 버틸 것 같은데요? 주인님 힘으로는 어림없을 것 같습니다.]
로시의 말에 도훈도 살짝 약이 올랐다.
‘장난해? 일부러 살살 던진 거라고 방금은.’
[그렇다고 보기엔 와인드업을 너무 크게 하신 것 아닙니까? 경기 등판한 선발 투수인 인 줄?]
‘이게 씨.’
도훈이 다시 주변의 돌멩이를 찾았다. 이번엔 투포환 공보다 큰 현무암이었는데, 한 손에 다 쥐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컸다. 심지어 가운데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손에 잡히는 그립감도 우수했다.
“한 번만 더 해봐도 돼?”
“응. 얼마든지.”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도훈은 어떻게 해서든 보미에게 무력시위를 하고 싶었다.
‘내공 풀파워로 간다.’
[네? 그건 너무 오버 아닙니까?]
사실 방금 전 돌멩이를 던질 때 도훈은 순수한 본인의 근력으로만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론 어림없다는 걸 깨닫고 진지하게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미가 해도 괜찮다잖아.’
[그러다 사고 납니다. 자중하시죠.]
‘테스트는 해봐야지. PK단에 나만큼 힘센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잖아. 그리고 걱정 마. 아까처럼 구석으로 던질 테니까.’
도훈이 내공을 끌어 올리자 그의 손에 강한 악력이 들어갔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잠고 있는 부분의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흐읍!’
심호흡을 크게 한 도훈이 발끝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아 전력투구했다. 대포알보다 빠른 속도였다.
부우웅-!
돌덩이가 지나가는 주변 수풀이 길을 내듯 좌우로 쓰러졌다. 시속 300Km를 훌쩍 넘는 순간 속도는 공기를 찢는 파공음마저 일으켰다.
돟누의 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보미가 바람의 장막에 마나를 한 번 더 주입했다. 심화 스킬인 2단 강화였다. 베리어를 한 겹 더 쳐서 방어력을 두 배로 끌어올리는 기술이었다.
콰과광!!!
돌덩이가 하나 부딪혔을 뿐인데 1차 장막이 박살나며 두 번째 장막에 이르렀다. 하지만 첫 번째 장막을 깨뜨리면서 충격을 못이긴 돌덩이가 결국 산산 조각났다.
파스스-.
주먹보다 큰 현무암이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보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마, 말도 안 돼. 대물저격총도 견디는 바람 장막을 굴러다니는 돌덩이만으로 1차 장벽을 뚫어내더니···. 만약 투포환 같은 쇳덩이였다면 정말로 깨졌을지도.’
하지만 도훈은 전력투구한 돌덩이가 가루가 되어 날아간 장면만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후-. 어림없구나. 내 힘으론.”
“아, 아니야. 방금은 두 겹으로 친 거야. 혹시나 싶어서. 그 중 하나는 뚫었어.”
“그래 봐야 전부 관통은 못 한 거잖아. 음, 성능하나는 확실하네.”
보미는 속으 도훈이 같은 편이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보미는 몇 가지 기술을 더 선보였다.
도훈과 처음 싸웠을 때 사용한 스카이 워커라는 기술은 그녀의 신체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체조선수처럼 공중으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밖에 여러 개의 궤적으로 나뉘어 목표물을 타격하는 뇌격탄 기술이라던가, 혹은 작은 토네이도를 일으켜 상태를 달려버리는 돌풍 등의 기술이었다.
“여기에 정보창 스킬까지 더하면 내가 쓰는 모든 스킬이야.”
“아하. 그렇게 7개.”
도훈은 여러 스킬 중에서도 특히 초반에 선보인 윈드 커터와 전면에 베리어를 치는 바람의 장막 기술이 기억에 남았다. 특히 윈드 커터 스킬이 자신에게 날아올 경우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스킬을 직접 보니까 정말 고수 등급은 엄청나구나.”
“무슨 소리야? 난 네가 나보다 훨씬 강한 것 같은데. 아직 중수인데 그런 능력이면 고수가 되었을 땐 나하곤 비교도 안 될걸?”
보미의 말은 과찬이 아닌 진심이었다. 도훈의 잠재력과 자질은 자신을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너한테 지켜달라고 해야 할지도.”
“서로가 서로 지켜주는 거지 뭐.”
스킬 시범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순찰차로 돌아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인근에 맛집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도훈이 보미에게 말했다.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갈테니. 같은 메뉴로 시켜줘.”
“응,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