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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76화 (1,343/2,000)

1359. 여대 잠입-59-

도훈이 희주의 집에서 나선 건 저녁 9시가 넘어서였다.

"신중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 그리고 혹시 내 도움이 필요 하거든 언제든 연락 주고. 매니저 미팅 갈 때 내가 같이 따라가 줄 수도 있으니까."

"정말요?"

"당연하지. 우리 희주 유명해지기 전에 매니저 자리라도 꿰차려면 말이야."

"히힛, 오빠랑 같이 가면 남자친구랑 같이왔다고 싫어하는거 아니에요?"

"뭣하면 사촌 오빠라고 구라치든가."

"후훗, 글쎄요. 그건 봐서? 암튼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 오빠한테 너무 시달려서 다리가 후들거리네요. 죄송하지만 문 앞까지만 배웅할게요."

"까분다. 잘 자라."

"넹!"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습니다. 의무 방어 3연전을 성공적으로 치르셨군요.]

'휴~, 하루가 엄청 길었다. 집에 가면 바로 뻗을 듯.'

[오늘은 수련 쉬시는 건가요?]

'의무 방어전 덕에 내공은 상당히 쌓은 것 같은데···. 음,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해 봐야겠다.'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말한 것처럼 곧바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러다 새벽 2시쯤 잠을 깼는데, 애매하게 잠이 들어서인지 좀처럼 다시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잠을 자려고 할수록 오히려 정신이 더욱 말똥말똥해지는 기분이었다.

'피로도 적당히 풀린 것 같은데 간만에 수련이나 시작해볼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일 수업도 가셔야 하는데.]

'어차피 가상현실에서 수련해도 현실 시간으론 고작 몇 분일 거 아니야?'

도훈의 가상현실 수련장에서 시간은 현실의 1/100로 흐른다.

즉, 가상현실에서 100시간을 있어도 현실에서는 고작 1시간 남짓 흐른다는 소리. 물론 정신적으로 피로해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끝나고 휴식을 취해도 6시간 이상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긴 그렇네요. 간만에 땀 좀 흘리시겠군요.]

도훈은 주택 2층의 체력단련실로 올라가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었다. 잠시 후 익숙한 어지러움과 함께 천상 크래프트의 공간이 나타났다.

흰색의 무한한 공간.

상상하는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는 곳이다.

"평소 연습하시던 수련장 형태로 준비할까요?"

어느새 조그만 요정으로 변신한 로시가 도훈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물었다. 도훈과 마찬가지로 천상 크래프트의 마스터 권한을 보유한 로시는, 가상의 공간에서 현신이 가능했다. 처음엔 인간형으로 변했지만, 도훈이 수련에 집중 못 하고 자꾸 덮치려(?) 드는 바람에 언제부턴가 조그만 요정 형상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주인님의 수련에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요정은 신체 사이즈가 인간형의 1/10 크기로 줄어든 형태였는데, 특이한 것은 잠자리처럼 반투명한 두 쌍의 날개가 등에 달려 흡사 피터팬에 나오는 팅커벨을 연상케 한다는 점이었다.

"아니야. 간만에 왔으니 분위기 전환 좀 해볼까? 최근에 포인트도 쌓이지 않았어?"

"네. 제법 모으셨습니다만."

"저번에 얘기했던 시나리오 모드 가능할까?"

"시나리오 팩 말씀입니까?"

천상 크래프트의 시나리오 팩이란, 일종의 RPG 게임과 같은 형태로 누군가 제작한 모드를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본래 천상 크래프트는 마스터의 상상대로 모든 것을 창조해 낼수 있지만, 반대로 창조력 한계 역시 똑같이 적용받기 때문에 혼자서만 수행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의 상상력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한들,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에 일정한 패턴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자칫 수련에 있어 흥미를 잃을수도 있기 때문.

또 천상크래프트의 기본 모드에서는 꾸밀 수 있는 배경이나 캐릭터의 숫자 역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싼 비용을 들여 업그레이드를 진행하지 않는 한 일대 다의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있었다.

한편 시나리오 팩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배경과 다수의 대적자 출현이 가능했다. 물론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 하기때문에 자유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은 단점이었다.

"응. 맨날 뻔한 1 vs 1만 수련 하는 것 같아서. 새로운 모드에 도전해 보려고."

"혹시 어떤 내용으로 준비할까요?"

"음, 조만간 박회장의 금고를 털어야 하니, 보물을 터는 내용의 시나리오가 적합할 것 같은데···."

"잠시만요. 마켓에 올라온 시나리오 중에서 비슷한 내용이 있는지 검색해 보겠습니다."

천상 크래프트의 시나리오는 사용자들이 직접 커스터마이 징하여 판매하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몇몇 플레이어들은 수련은 뒷전이고, 오로지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매력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포인트 벌이를 하기도 했다.

해당 분야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면, 실존하는 어떤 게임보다 현실감 넘치는 게임을 만들 수도 있었다. 로시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만들어낸 여러 시나리오를 필터에 맞게 검색하던 중 몇 가지를 추천했다.

"플레이 가능한 시나리오 중에 딱히 보물을 터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나마 비슷한 시나리오 중 [도둑들]이란 시리즈물이 있긴 합니다만."

"도둑들? 그게 딱인 것 같은데?"

"문제는 멀티 플레이 전용 시나리오입니다. 현재 주인님의 기본 모드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허참, 뭔 놈의 제약이 이렇게 많아? 멀티 플레이 옵션은 얼만데?"

"가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천상 크래프트 멀티 옵션은 랭커 이상의 플레이어에게만 해금되거든요."

"아!"

천상 크래프트에선 플레이어의 등급은 곧 레벨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수에게까지 허용된 것과 고수나 랭커에게 열리는 옵션이 각기 달랐다.

"젠장, 랭커까지면 당분간 꿈도 못 꾸겠네. 뭔 프로그램이 이렇게 복잡한 거람."

"음, 아시다시피 천상 크래프트는 전 우주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허용된 일종의 가상 수련장입니다. 멀티 모드를 하게 되면 다른 플레이어와 접촉이 가능해지므로 타 플레이어와 교신이 가능한 레벨인 랭커에게만 열리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참나. 더러워서 빨리 레벨업을 하든가 해야지."

"음, 도둑들 말고 다른 개인용 시나리오가 있긴 합니다."

"뭔데?"

"무협 세계관 배경으로 무공 비급을 훔치는 내용입니다.

금고를 터는 것까진 아니지만, 뭐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요?"

시나리오 팩의 설명을 들은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을 것 같은데? 여자 고수들 나오면 이기고 세리머니 가능?"

"세리머니라뇨?"

"이겼으면 한 번 눌러주는 게 국룰 아니냐? 난 절대 고자 주인공이 아니니까. 무협지 주인공 새끼들 맨날 미녀에 둘러싸여도 한번 싸지도 못하는 것 보면 열불 터지겠더만."

"주, 주인님!"

"농담이야, 농담. 내가 설마 수련하러까지 와서 그 생각만 하겠어?"

"주인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분 같은데요?"

팅커벨로 변한 로시가 삐친 척 팔짱을 끼며 두 볼을 부풀렸다. 조그만 요정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에 도훈이 로시의 부푼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풉-. 갑자기 웬 귀척인데?"

"귀, 귀척이라뇨?"

볼을 찔린 로시가 황급히 날개를 펼치더니 도훈의 머리 위를 빠르게 돌았다. 도훈은 필시 로시가 민망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보면 쟤는 인공지능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방금 무슨 생각 하셨어요?"

"왜? 내 머릿속 생각을 전부 너랑 공유할 필요는 없지 않아?"

"칫."

"인간처럼 삐친 척 하지 말라고. 아동성애는 내 취향 아니니까."

"아동이 아니라 요정이라구욧!"

"암튼, 지금은 너무 작아. 내 좆보다 작을 듯."

"아, 아니 주인님···."

"좆만하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었네."

"더이상 주인님의 음담패설에 놀아나지 않겠습니다."

로시가 갑자기 딱딱하게 말투를 바꾸었다. 도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의외로 현신을 했을 때는 계집애처럼 예민하게 굴었기 때문에 도훈도 장난을 자제했다.

"알았어, 장난 안 칠게. 그 시나리오 이름이 뭔데? 가격은?"

"구음진경을 찾아서, 라는 제목이고 가격은 1만 포인트입니다."

"1만 포인트라고?"

"넵."

"아니 잠깐. 생각보다 너무 비싼데? 천상 크래프트 한 시간에 100포인트 아니었어?"

"맞습니다."

"근데 커스텀 시나리오 하나에 1만이라고?"

"대신 플레이 타임이 40시간 쯤 됩니다. 실제 연습 시간으로 치면 대충 두배 가량의 가격이랄까요? 하지만 기본 모드에서구현할 수 없는 다양한 자연 배경이나 각종 건축물, 그리고 레벨에 맞도록 설정된 다수의 적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무턱대고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와···. 그래도 1만이면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

도훈은 현재 수련을 위해 포인트를 버는 중이었다. 운 좋게 습득한 칠성권의 숙련도를 올려 현실에서의 생존력을 올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차후 PK단과 맞닥뜨렸을 때 허무하게 당할 순 없으니까.

처음엔 현실이 아닌 가상의 훈련이 얼마나 도움이 되나 싶었지만, 최근 가상 공간에서 하던 동작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더 수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100시간 혼자서 수련을 하느냐, 40시간을 시나리오 모드로 수련을 하느냐의 차이구나···. 씁, 만든 새끼가 최소 6, 000포인트는 날로 먹는 건가.'

[꼭 그렇진 않습니다. 발생하는 매출은 천상 스토어에 30%의 플랫폼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거든요.]

'30프로라고? 와, 니들 진짜 나쁜놈들이구나?'

[네?]

'Don't be evil 이라고 지껄여 놓고 갑자기 수수료 장사하는 어떤 기업이랑 똑같은 짓이잖아.'

[그 기업이 과연 어딜 롤 모델로 했을 것 같습니까?]

'헐!'

[아무튼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근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더 싼 시나리오는 없고?'

[플레이타임이 일정 정도 보장되기 때문에 자유 수련비의 두 배가량이 평균 시세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평균가에서 그리 비싼 편도 아니고요.]

'음, 그래도 어떻게 모은 일만 포인튼데···'

[포인트야 또 모으면 되죠. 주인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잖습니까?]

도훈은 고민하다 결국 시나리오 모드 구매를 결정했다.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이란 명언을 되새긴 것이다.

'그래, 하자. 고민할 시간이 아깝다.'

[넵. 그러면 '구음진경을 찾아서.' 커스텀 시나리오 모드를 적용 시키겠습니다. 시나리오 생성 중 약간의 어지러움이 동반될 수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자, 잠깐만. 근데 무공이름이 구음진경인데?'

[네? 왜 그러시죠?]

'어디서 분명 들어 본 것같··· 으, 으아아아아!'

도훈은 순식간에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바람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무공을 익힌 이후 이 정도로 균형을 잃은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마치 독한 술을 진탕 먹고 취한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돌면서 위아래가 뒤집히기를 여러 차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대나무가 울창한 숲 한 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으, 으으, 뭐야 이건."

[시나리오 모드가 생성되었습니다. 동기화율 100%.]

요정으로 변신해있던 로시는 어느새 반지 형태로 모습을 바꿔 도훈의 왼손 약지에 착용되어 있었다. 도훈이 땅을 짚고 일어나는데 오른손에 들고 있는 묵빛의 검신이 눈에 들어왔다.

"오잉? 이 칼은 또 언제 생긴 거야?"

[시나리오 주인공의 이름은 백현. 나이는 29의 검사입니다.]

'거, 검사라고? 설마 변호사, 판사 할 때의 검사는 아닐 거고.'

[당연하죠. 진짜로 검객입니다.]

'난 살면서 한 번도 칼을 다뤄본 적이 없는데?'

도훈은 난처함을 표했다.

검집도 없는 묵빛의 검은 한눈에 봐도 명검처럼 으스스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더욱이 검의 색깔마저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훈은 이것이 무척 귀한 아이템임을 직감했다.

의복 또한 무협소설 주인공처럼 바뀌어 있는데, 전반적으로 검은색의 닌자복처럼 몸에 딱 붙는 의상에 머리는 뒤로 묶은 장발이었다.

자신의 차림새를 확인한 도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 시나리오 모드에선 이렇게 외형도 바뀌는 거였어?'

[디폴트 값은 개발자가 의도한 형태입니다. 나중에 다른 의복을 구하게 되면 복장 변경도 가능합니다. 성별의 경우엔 본래의 성별을 무조건 따라가고요. 단, 체형과 얼굴은 주인님의 생전 모습 그대로일 겁니다.]

'그렇구나.'

[상태창을 한번 외쳐 보십시오.]

'오잉? 스킬도 쓸 수 있어?'

[시나리오 모드에서는 개발자가 원하는 스킬을 개방할 수 있거든요.]

"상태창."

상태창을 열자 도훈의 눈 앞으로 사각의 홀로그램이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그곳에 도훈이 평소에 보는 성 관련 상태창과 다른 형태로 스펙이 나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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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백현

나이 : 29

내공 : 150/200

스킬 : 현실의 모든 스킬을 검술의 형태로 변형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목표 : 당신은 정파 소속 무림맹의 후지기수 중 하나입니다. 마교의 잔당이 훔쳐간 『구음진경』을 빼앗아 오는 것이 목표입니다. 주어진 플레이타임을 넘어서는 경우 게임은 자동으로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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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처음 보는 모양인데? 이런 상태창도 가능한 거구나."

[개발자의 커스터 마이징 버전이니까요. 그래도 비교적 간소한 편입니다.]

'근데 이거 눈앞에 계속 떠다니는데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다시 '상태창'을 외치시면 사라집니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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