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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74화 (1,341/2,000)

1357. 여대 잠입-57-

갑자기 고백이란 말이 도훈이 긴장했다.

혹시나 사귀자고 할까 문득 걱정이 들었던 것. 하지만 생각해보니 희주는 이미 정신 조작이 걸려있어 섹파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관계였다.

'대체 무슨 고백일까?'

도훈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1학기 때 저희 집에 부른 것 기억나요?"

"나를?"

도훈은 너무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었나?"

"아씨, 여기다 주소 직접 써가지고 집 주소 알려줬었잖아요!"

희주가 갑자기 양반다리를 풀더니 왼 다리를 무릎 세워 앉았다. 순간 앞치마가 흘러내리며 아슬아슬 위치까지 허벅지 안쪽이 노출되었다. 도훈이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아, 맞네. 이사했었어?"

"뭐야? 설마 그걸 방금 아셨다는 거예요?"

[주, 주인님.]

'아씨, 내가 후배들 집에 워낙에 들락거려서 어디가 어딘줄 알게 뭐람? 간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고···. 근데 여긴 분명 처음오는데?'

"와, 오빠 진짜 몇 명을 만나고 다닌 거예요? 저희 집에 온 것도 기억 못 하시고. 저 남자 집으로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 그게 아니라 그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

"당연하죠. 집세 내기 어려워서 더 싼 곳으로 옮겼으니까요."

희주의 설명은 이랬다.

1학기 때까지 살던 원룸은 학교랑 가깝긴 했지만, 한 달월세가 말도 안 되게 비쌌다고 한다. 그래서 방학쯤 저렴한 곳으로 이사를 한것이라고. 짐이 밖으로 흘러넘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땐 붙박이장도 있었거든요. 신축건물이라 빌트인이 다 되있더라고요. 근데 여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급하게 행거 사서 정리한다고 했는데, 정리 한다고 해도 맨날 저 모양이에요. 신발장도 따로 없어서 현관도 늘 어지럽고요."

도훈은 그제야 희주의 집이 엉망으로 보이는 이유를 이해 했다. 집이 좁으면 아무리 정리를 해도 나아질 수 없었다.

'그랬었구나.'

[아니 어떻게 자취방 갔던 일도 기억 못 하십니까?]

'내가 떡을 친 게 어디 한 두번이냐. 1학기 때부터 지금까지 장소 바꿔서 떡친 것만 천 번도 넘었겠다. 그걸 여자마다 어떻게 다 기억하냐?'

[천 번은 살짝 오버고 오백번은 넘었겠네요.]

'그거나그거나.'

"근데 고백한다는 말이 뭐야?"

"음···. 실은 아까 다 말했어요."

"뭐?"

"저희 부모님 시골서 농사짓는다고."

"응?"

"그때는 오빠한테 우리 가족 서울에 사는 것처럼 뻥 쳤거든요."

"아···."

희주가 민망한지 소주를 한 잔 꺾었다.

"그냥 처음엔 부끄러웠거든요. 친구들한테 꿀리기 싫고, 우리 집 가난한 거 굳이 알리기도 싫고. 그래서 무리해서 신축 원룸도 얻고, 가족은 서울 아파트에 따로 사는 것처럼 말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오빠한테도 그렇게 말한 거고요."

"음···."

[결국 희주 양이 거짓말을 한 셈이군요.]

'저 정도는 애교로 봐야지. 스무 살이면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긴데? 친구들 앞에서 가난한 티 내기 싫었겠지. 난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봐.'

"근데 보증금을 많이 못 내서 월세를 높게 잡았더니 한 달에 나가는 집세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쪽팔린 건 잠깐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수준에 맞춰 이사했어요. 오늘 오빠한테 그거 말하려고 부른 건데···."

"그랬구나. 난 뭐 네가 어디 살고, 부모님이 무슨 일 하시는 건 딱히 신경 안 쓰는데."

"제가 신경을 썼다고요! 오빠한테 안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서."

"으음. 아니야 희주야.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네?"

"네가 예쁘건 못 생기건, 혹은 가난하거나 부자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런 건 그냥 날 때부터 부모님이 물려주신 거니까."

"······."

"물론 어린 마음에 괜히 부모님한테 심술부리거나 화가 날 수도 있어. 남들은 다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사 입고, 근사한 집에 사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하냐면서. 근데 내가 살아보니까 가난은 한순간이야. 결국 자기가 노력한 만큼 나중엔 다 잘 살기 마련이거든."

"헐, 오빠 무슨 40대 아재 같은 말을···. 오빠랑 나랑 몇 살차이 난다고?"

[주인님. 정말 아재 같은 말투였습니다.]

'아차, 내가 너무 심취했구나. 순간 이정우 빙의한 줄.'

"아, 아니 이건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들려주신 얘기야."

"그렇구나. 훌륭한 아버님이시네요."

"아버지가 또 이런 말도 했어. 어려서 가난은 자기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까지 가난한 것은 자기 탓이라고."

"그건 무슨 말이에요?"

"사람은 성인이 되면 스스로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야. 집안을 일으키고 가정을 꾸리는 건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라는 거지. 어린 시절 핑계대지 말고."

"와, 오빠 멋지다! 방금 엄청 철 들어 보였어요. 오빠는 오빠구나."

"뭐래? 3살 차이면, 내가 너보다 밥을 먹어도 천 끼는 더 먹었고, 똥을 싸고 그만큼은 더 쌌겠다야."

"근데 오빠 집은 부자잖아요."

"아니야."

"아니에요? 아버님도 유명한 작가분이고, 가족 다 미국에 살고···. 당장 사는 집도 엄청 으리으리하던데요? 오빠가 부자가 아니면 누가 부자겠어요. 괜히 겸손한 척 마세요."

"말했었잖아. 지금 사는 집은 집주인 사정 때문에 운 좋게 들어간 거라고. 그리고 우리 집도 어렸을 땐 되게 가난했거든."

"정말요? 전혀 안 그렇게 보였는데요?"

"원래 작가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직업이라고들 하잖아. 우리 아버지도 베스트 셀러 내기 전까진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이웃집에 쌀도 꾸고 반찬도 얻어오고 그랬어."

"와···, 진짜요?"

"아마 내가 중학교 갈 때까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을 거야.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지면서 살림을 좀 편거지. 뭐 지금도 부자라고 하기엔 뭣하고."

[주인님, 과장이 심한데요? 원주인이 부친이신 이찬명 작가는 데뷔 때부터 유명세를 떨치던 유명작가였는데요···. 도훈군도 살면서 한 번도 가난해 본 적이 없고요.]

'어차피 희주는 모르잖아.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그럴듯한 스토리지.'

"···오빠도 그랬었구나."

희주가 공감대를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희주 네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아니, 나라도 네 상황이면 분명 그랬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히히. 오빠한테는 그냥 다 솔직해지고 싶었어요. 숨기는 것 없이."

"응. 잘했어."

희주는 감동 받는 눈빛이었다. 이제껏 도훈을 단순히 남자로서 좋아하고, 성적인 매력에 빠져 있었다면 지금은 그를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하는 느낌이었다.

"맞다. 하나 더 있어요. 고백할 거."

"뭔데? 설마 임신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도훈이 심각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농을 던졌다.

"뭐래요. 나 알아서 피임 잘하거든요?"

당연히 도훈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씨 없는 수박으로 만든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얼마 전 홍대 앞을 지나가는데 누가 명함을 주더라고요."

"명함이라니?"

"오빠 혹시 JJP 엔터라고 들어 보셨어요?"

"JJP면 장종필? 그 가수가 세운 곳 말이지?"

"아시는구나."

"알다마다. 10년 전 엄청 유명한 댄스 가수였잖아. 아이돌시조새라고 불리던."

"근데 그땐 오빠도 초등학생 때 아니었어요?"

"···그, 그치. 그때는 음악 듣는 거 좋아했서."

"암튼, 거기 매니저라는데 저보고 명함을 주면서 그러더라고요. 혹시 연예인 해보고 싶은 생각 없냐면서."

[오잉? 희주 양이 길거리 캐스팅을 받았다는 겁니까?]

'쓰읍.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데···. 하긴 지금 희주와꾸에 저 몸매면 연예계 매니저들도 눈독을 들일 만 하지.'

"연예인이라고? 뭐 아이돌이나 그런 거 말이야?"

"음, 아이돌은 아니라고 했어요. 어차피 저도 춤이나 노래는 별로 자신도 없고. 일단 모델이나 배우 쪽으로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던데···."

"아···."

"제가 실은 혼혈이잖아요. 그래서 이국적인 느낌이 많이 난다면서."

"그랬어? 그래서 뭐랬어?"

"그냥 그땐 명함만 받고 왔어요. 한 번 시간 내서 미팅 잡자던데 어떻게 할지 고민이에요."

도훈은 일단 사기를 의심했다.

"그 명함 건넨 사람이 JJP 소속 매니저인 건 맞고? 요새 순진한 학생들 등쳐먹는 사람들 있다잖아. 연예인 데뷔시켜 준다고 꼬셔놓고 막···."

"에이, 제가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인터넷으로 번호 알아내서 회사에 전화 걸어 봤죠. 명함을 받았는데 확인하고 싶다고요. 저한테 명함 준 사람이 회사 번호로 돌려 받더라고요. 진짜는 맞아요."

[와, 대박인데요? 희주양이 연예계 데뷔 제의라니.]

'못 할 것도 없지. 저번에 그 누구지? 군대 간다는 애 사촌동생인가랑 엮어서 아이돌 지망생 만나봤잖아. 걔들이랑 희주랑 뭐 얼마 차이 난다고?'

[아닌데요? 그때 주인님은 역시 아이돌이라면서, 학교 여자 후배들하곤 급이 다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에이, 평균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정음이나, 또 누구냐 아영이 정도면 비빌 수준은 되지. 희주도 이제 그 급은 되고.

'[하긴···. 게다가 희주 양은 미인이기도 하지만 개성있게 생겼으니까요. 백인 혼혈 때문에 확실히 독특한 느낌을 풍기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진짜로 그 모델인가 배운가 해보려고?"

"아직은 결정 못 했어요."

"음, 어려운 문제긴 하네. 남은 학업도 걸리고."

"그쵸?"

"근데 잘 되면 교사랑 비교도 안 되게 돈은 잘 벌텐데."

"그것도 생각은 해 봤어요. 근데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도훈이 알기론 희주는 의외로 공부를 잘했다.

마냥 남자나 만나고 노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머리가 좋은 편인지 놀 것 다 놀면서도 알뜰하게 학점을 챙기는 편이었다.

'아마 희주라면 생각없이 보여도 이미 임용까지 플랜을 다 짜놨을 거야. 게다가 집 형편도 그러니까 엄청 독하게 공부할 거고.'

[연예인 데뷔를 하게 되면 교사의 길을 포기하는 셈이군요.]

'그렇지. 희주가 오히려 잘사는 집 애였으면 이런 고민도안했을 걸. 그냥 하고 싶으면 공부 잠깐 멈추고 하면 되니까.

실패해도 다시 공부해서 교사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희주양에겐 양자택일 밖에는 선택권이 없군요.]

'불확실한 미래를 걸고 연예인 데뷔를 하느냐, 아니면 지금처럼 꾸준히 학점관리 하면서 교사 임용시험을 치르냐의 문제지. 고민이 많이 될 만해.'

"음···. 근데 네 생각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정말로 하고 싶긴 한거야?"

"뭘요?"

"연예인. 배우라던가 모델. TV에 나오는 거."

"그냥···. 한 번씩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저는 남들이 저를 봐줄 때 제일 기쁘고 뿌듯하거든요. 아시잖아요, 저 관종인거."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과 여자 후배들 중에서 누군가 연예계 데뷔를 한다면 희주가 가장 어울리긴 하지. 남들 앞에 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시선을 즐기는 편이니까. 은근히 끼도 많은 것 같고.'

[근데 연기력이라던가 이런 건 타고나는 거 아닙니까? 희주양에게 그런 재능이 있을까요?]

'에이, 다 배우는 거지. 날 때부터 연기자가 얼마나 있겠어? 다들 깨지고 구르면서 커나가는 거야. 연습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있고, 안되는 게 있는데 오히려 타고난 외모를 바꾸는 게 더 힘들거든.'

[오호.]

'생각해봐. 왜 배우들이나 연기자들은 죄다 예쁘고 잘생겼을 것 같아?'

[그야 연예인이니까···.]

'그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만 뽑아서 트레이닝 시킨 거란 말이지. 선후관계가 그런 거라고.'

[아하.]

'아마 그 매니저라는 사람도 희주에게서 그걸 본 걸 거야.

원석 같은 느낌.'

[주인님 덕분이군요. 외모를 일취월장 업그레이드 시켜주셨잖습니까?]

'내가 최고의 성형외과의가 된 느낌이야.'

"그럼 미팅 정도는 괜찮지 않아?"

"근데 좀 걸리는 게 있어요."

"뭐?"

"저 학창시절에 조금 놀았거든요. 학폭 징계를 받거나 한건 아닌데, 솔직히 나중에 유명해지면 분명 그걸로 공격하는 애들 나올까봐서요."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지. 업보라고 생각하고 사과해야지. 설마 애들 돈 뺏고 막 때린 건 아니지?"

"그 정도 양아치는 아니었어요."

"그럼 뭐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근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어요."

"뭔데?"

"저 정말 데뷔하게 되면 오빠랑 자주 만날 수 없을까봐서요."

"뭐?"

"아무래도 스케줄 따라 움직여야 하니까. 다른 대학생 연예인들 보면 학교도 띄엄띄엄 나오고 맨날 결석한다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 기회인데."

"오빠한테는 제가 가끔 만나는 파트너 중 하나일지 몰라도, 저한테는 오빠가 전부니까요."

"···아, 아니 희주야."

"그래서 고민했어요. 괜히 이거 한다고 해서 오빠랑 멀어 질까 봐요. 그런 거라면 안 하려고요."

[아니 이건···.]

'희주가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게 문제네. 근데 섹파로 세뇌가 되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감정이 커질 수 있지?'

[관계에 대한 한계선이 그어진 거지 호감도나 애정까진 막을 수 없으니까요.]

'허참,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결국 나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거네?"

"그래서 오빠랑 직접 얘기하고 싶었어요. 근데 요새 자꾸 바쁘시다고 못 만나니까."

"으음···. 그럼 실험해보자."

"뭘요?"

"네가 정말 나 없이도 살 수 있는지."

도훈이 먹던 밥상을 밀쳤다.

마음 같아서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살림살이가 부족한 희주에게 민폐일 것 같아 적당히 옆으로 치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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