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 질투는 나의것-4-
* * *
도훈과 영철이 간식을 사러 간 사이 정음과 아영은 스타디움안에서 자리를 찾았다.
"H열··· 23번부터니까. 아, 저기다."
"우아, 엄청 가깝네?"
예매를 담당한 아영이 비교적 빠르게 좌석을 찾았다. 홈팀응원석과 무척 가까운 곳이었다. 경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늘씬하게 빠진 치어리더들이 무대 위에서 몸을 풀고 있는 게 보였다. 응원단장은 경기 시작 전 응원 구호를 알려주기 위해 열심히 목청을 높였다.
야구에 대해 잘 모르는 정음을 위해 아영이 경기장 구조를 소개했다.
"오늘은 우리가 홈팀이라 1루 쪽이 응원석이야."
"그게 뭐야?"
"야구는 전국 단위로 1년 동안 리그전을 치르잖아. 그때 자기 경기장에서 기다리는 팀이 홈팀, 원정경기를 온 상대팀은 어웨이가 되는 거야. 오늘은 백산 경기니까 백산이 홈팀."
"아하."
"그리고 홈팀은 무조건 말 공격이고."
"그러니까 9회 말까지 경기를 한다는 거지?"
"꼭 그렇지 않아. 우리 팀이 지고 있을 경우에만."
"응?"
"아니, 이기고 있으면 9회 말 공격을 진행할 필요가 없잖아.
상대방이 9회 초까지 역전을 못 시키면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니까. 마무리가 되는 거지."
"아아, 그 소리구나. 이해했어."
아영은 야구에 대해선 척척 박사급이었기 때문에 야구 경기 장을 처음 구경 온 정음을 향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정음은 처음 와 본 야구장 모습이 신기한지 이것저것 물었다.
"저 언니들은 그럼 경기 끝날 때까지 계속 응원하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우리 편 공격일 땐 스피커 크게 틀어서 응원하고, 상대팀 공격 타임엔 쉬는 편이야. 상대방이 공격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근데··· 와, 되게 늘씬하다 저 언니들."
정음은 가까이서 마주한 치어리더들의 늘씬한 몸매에 약간 기가 죽었다. 길거리에서 보면 눈 돌아갈 것 같은 미모의 여성들이 긴 팔 긴 다리를 쭉쭉 뻗어가며 춤을 추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벌써 흥분한 남자 팬들은 치어리더의 이름을 연호하는 중이었다.
"백산 치어리더가 예쁘기로 유명한 편이야."
"으응. 그렇겠다."
아영은 정음이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항변했다.
"예약할 때 보니까 4자리 연속으로 붙어 있는 곳이 여기 밖에 안 남았더라고. 평소엔 늘 한 자리만 예약하는 편이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봐."
"아, 아냐. 스피커가 좀 크긴 하지만 난 좋아. 자리 마음에 들어. 근데···. 그럼 평소엔 맨날 혼자서 경기장에 왔던 거야?"
"응."
아영은 아무렇지 않는 다는 듯 대답했다.
"난 원래 영화도 혼자 보러 가. 밥도 혼자 잘 먹고."
"아영아, 다음엔 같이 갈사람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같이 가줄게."
아영은 정말 혼자가 편해 그런 것이었지만, 정음의 배려가 고마워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어."
"혼자도 좋지만, 뭐든 같이 하면 더 즐겁잖아."
"그래."
아영은 역시 정음이라고 생각했다.
늘 쾌활하고 구김 없는 아이였다. 특히 친한 사람 하나 없는 체육과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다.
‘친구···. 정말 좋은 친구긴 한데.’
하지만 아영은 오늘 정음을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부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예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도훈 오빠를 양보하긴 싫어.’
아영은 한 가지 의심을 품고 있었다.
도훈과 정음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난봉꾼인 도훈이 학과에서 가장 예쁘다는 정음을 그냥 놔뒀을 리도 만무하지만, 아영은 둘 사이의 관계가 보통 이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둘 사이가 정말로 깊은 관계라면 아영은 오늘이야 말로 확실하게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쨌든. 사랑과 우정은 양립할 수 없는 거니까.’
"어어, 응원석에서 엄청 가까운 자리네?"
양손 가득 음료를 든 도훈이 자리를 찾아오며 말했다. 그의 뒤에선 영철이 순살 치킨이 담긴 원통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야구엔 역시 치맥이지?"
"어라? 맥주도 사 오신 거예요?"
"응. 두 개는 맥주. 두 개는 음료수. 뭐 마실래?"
"오빠가 먼저 고르세요."
도훈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음료수를 골랐다.
"저도 그냥 음료수로 주세요."
아영도 따라 음료를 고르는 통에 남은 건 맥주뿐이었다. 정음은 상관없다는 듯 흔쾌히 맥주를 골랐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영철이 마지막 남은 맥주를 고르며 뜬금없는 소릴 했다.
"이러면 맥주커플대 음료커플로 나란히 앉으면 되겠다. 자리 바꿔 앉아요, 우리."
"···예?"
커플이라는 소리에 정음이 안색을 굳혔다.
"뭘, 굳이···."
좌석은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어 있었는데 먼저 들어온 여자들이 안쪽에 앉았고 도훈이 아영의 바로 옆, 영철은 혼자 바깥쪽 끝자리였다.
영철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3시간 옆 자리에 남자인 도훈이 붙어 있는 셈이었기 때문에 괜히 수작을 부려 자리 교체를 시도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정음이 단박에 거절함으로써 무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결국 뻘쭘하게 구석 자리에 앉게 된 영철이 생각했다.
‘어우씨, 내가 이런 찬밥 대접이라니.’
확실히 체육과 1학년 신입생들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여느 때 같으면 자신을 서로 옆자리에 앉히기 위해 난 투가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늘 그런 대접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 싼 다툼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정음과 아영은 서로 귀찮다는 식으로 자신을 응대했다. 뭐랄까, 셋이서 오긴 어색하니 깍두기로 남자 한명을 구색 맞춰 넣어준 느낌이랄까?
‘나도 많이 죽었구나. 군대 한 방에 훅 가버렸네.’
영철은 2년여의 군 생활 때문에 자신의 외모가 사그라졌다고 자책했다. 아무리 땡보로 군 생활 했다지만, 그 여파가 없다고 볼 순 없었다. 어쨌든 군대는 군대고, 감금에 가까운 의무복무는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아니지. 그래도 엊그제 간 클럽에서 당장 홈런치고 온 몸인데?’
머리도 전역을 앞두고 제법 기른 상태라 결코 군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클럽에서 처음 만난 여자들은 자신을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외모가 죽었다고 자책할 일이 아니었다.
‘가만, 설마···?’
영철은 아까부터 품고 있던 의혹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정음과 아영이 자신을 홀대하는 것은 자기가 못 나서가 아니라 어쩌면 다른 경쟁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는 거의 겪어 보지 못한 경우였지만, 일관된 무시와 홀대를 받다보니 그쪽으로 점점 생각이 기울었다.
‘뭐야? 진짜 정음이가 도훈 선배를 좋아하는 건가?’
그렇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둘 다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연인 관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방학 때 굳이 시간 내어 야구장에서 따로 만나는 사이라면 썸을 타는 단계일수도 있었다.
영철은 도훈에게 통닭을 챙겨주는 정음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자신에겐 결코 보인 적 없던 상냥한 미소는, 확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맞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여자를 많이 만난 바람둥이들은 몇 가지 반응만 봐도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단박에 간파한다. 영철이 볼 때 정음은 도훈을 좋아하는 게 확실했다.
‘캬. 그거였구나! 난 또 괜히 매력이 떨어진 줄 알고 걱정했네.’
경쟁상대가 도훈이라고 인정하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영철이었다. 그가 보아도 도훈은 흠잡을 데 없는 멋진 남자였다. 그리고 여자들 가운덴 자신처럼 미소년 타입보다 도훈 같은 근육남 취향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는 호불호의 문제기 때문에 자신이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잘생겼다고 해도, 세상 모든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해 줄 거라는 건 헛된 망상이다.
‘오케이, 이건 인정. 내가 처음부터 타깃 잘 못 잡았구나. 정음이 보고 혹해서 야구장 따라 온 거지만, 어쨌든 우리 과에 여자가 정음이만 있는 건 아니니까.’
영철은 쿨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도훈의 바로 옆에 앉은 아영의 외모도 전혀 꿀리지 않는데 영향을 미쳤다.
‘아영이도 엄청 예쁘니까.’
정음이 발랄하고 밝은 성격이라면, 이와 대조적으로 아영은 무뚝뚝하고 시크한 타입이었다. 그 때문에 좀 더 공략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원래 저렇게 차가워 보이는 애들이 침대에선 더 뜨겁거든.
흐흐.’
여자를 많이 만나 본 영철은 평소 쌀쌀맞아 보이는 여자일수록 막상 정이 들면 누구보다 깊게 정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처음에 진입장벽은 높아도 이후에는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것이다.
‘그렇게 애달프게 만들어 놓고 뻥 차버리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공략 대상을 수정한 영철은 이제 본격적으로 아영을 노리기 시작했다.
* * *
"백산은 오늘 경기가 분수령이에요. 이미 1승을 올렸으니, 남은 2연전모두 이기면 이번 시즌에 4강은 확정이라고 볼 수 있죠."
아영은 끊임없이 도훈에게 말을 걸며 야구 광팬임을 입증시켰다. 도훈은 아영의 설명을 듣는 척 하며 시선은 치어리더를 향해 있었다. 아영의 속셈이 무엇이건 간에 어쨌든 오늘의 공략 목표는 치어리더이기 때문이었다.
‘와, 다들 엄청 예쁘네. 이 정도면 누굴 골라도 만족이겠어.’
단상위에서 열띤 응원전을 펼치는 치어리더는 모두 다섯 명.
하나같이 늘씬한 미인들이었다. 옆에 아영과 정음도 미인이긴 하지만, 확실히 치어리더 쯤 되니 외모에서는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
응원단장이라 불리는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배애액 산! 배애액 산!"
그러자 이미 응원구호를 알고 있는 열성팬들이 떼 창을 하며 호응했다.
"자자, 일어서세요!"
응원단장의 기립 요청에 관중들이 하나 둘 일어서자 도훈도 따라 일어섰다.
"여기 황시엘 치어리더분에 맞춰서 동작을 배워보겠습니다."
응원단장의 소개에 센터에 있던 단발머리의 여성이 응원 봉을 들고 나왔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양 가르마로 빗어 넘긴 매력적인 치어리더였다. 가슴의 발육도 훌륭했고, 핫팬츠를 입어 드러난 각선미 또한 일품이었다.
‘오우, 지저스. 오늘은 너다.’
[공략 대상을 고르신 겁니까?]
‘어. 황시엘이라는 쟤 괜찮지 않아?’
[예쁘긴 하네요. 근데 치어리어를 무슨 수로 꼬시려고요?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 말 걸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도훈도 그 부분이 문제였다.
차라리 클럽이나 나이트라면 부킹을 핑계로 들이대보기라도 하겠지만, 공공연히 드러난 장소에서 말 한마디 걸기도 녹록치 않아 보였다.
‘응원이라는 게 하루 종일 하는 게 아니거든.’
[그럼요?]
‘우리 편 공격 타임일 때는 저렇게 앞으로 다 나와서 춤도 추고 응원가도 부르지만, 수비를 할 때는 한두 명씩 나오고 돌아가서면 쉬는 거 같더라고.’
[오호!]
‘마침 우리가 앉은 자리랑 멀지 않은 곳이잖아. 저 시엘이라는 치어리더가 쉬는 타임에 말을 걸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역시 집요하십니다. 근데 정음양과 아영양의 눈치는 안 보시고요?]
‘물론 대놓고 할 순 없지. 쟤들도 물 마시는데 화장실 한 번을 갈 거 아니야. 그때 뒤따라가는 수밖에.’
[파이팅입니다, 주인님.]
도훈이 공략 계획을 다듬는데, 옆에 앉은 영철이 자꾸 한자리 건너 아영에게 말을 걸었다.
"아영이라고 했지? 너 야구 되게 좋아하나 보다?"
"네?"
"아니, 엄청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군대 있을 때 일과 끝나면 백산 경기 중계로 많이 봤거든."
"근데요?"
"···어, 어?"
도훈과 정음에게는 야구 이야기를 쉬지 않고 떠들던 아영이었지만, 막상 영철이 끼어들자 무척이나 싫은 티를 내는 것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영철은 머쓱해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이, 이게 아닌데?’
정음의 경우는 도훈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십분 이해했지만, 아영에게마저 쿠사리를 먹고 나자 영철은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와, 근데 나도 나름 선밴데 저렇게 쌀쌀맞게 굴어도 되나?
체육과 군기가 뭐 이렇게 물렁해 빠졌담?’
학번으로 치면 3년 차이나는 선후배지간에 살짝 선을 넘는 무례한 태도로 여겨졌다. 특히 현역으로 군대에 있던 영철은 어느새 군대의 서열 문화에 찌들어 자기도 모르게 꼰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 예쁘다고 싸가지 없는 거봐. 너, 딱 찍혔어. 나중에 내 바짓가랑이 잡고 울고 불게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려라.’
영철은 오기가 생겨 기필코 아영을 공략하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경기 초반은 투수전으로 이어졌다.
양 팀의 에이스끼리 맞붙는 경기다 보니 쉽사리 점수가 나지 않은 채 3이닝이 삭제되었다. 점수가 나지 않자 정음은 따분해 했지만 아영은 누구보다 집중하며 경기를 관람했다.
"오늘 양 팀 투수 공 정말 좋네요."
"좋은 거야?"
"네. 공 끝이 살아 있잖아요. 특히 박계범 선수 슬라이더가··
·. 와, 잘하면 내년에 메이저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영은 무슨 야구 20년차 쯤 본 아재처럼 구질이 어떻고 볼끝이 어떻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진성 야구팬인 그녀로선 치고 박는 난타전보다 명품 투수전이 훨씬 흥미진진해 보이는 듯 했다.
도훈이 그런 아영을 보며 생각했다.
‘얘는 진짜, 야구 볼 때는 완전 다른 사람 같네. 얼마나 집중력이 좋은지 한 번 건드려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