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7. 여름 방학-9- >
‘내 말 맞잖아? 나이도 어린 새끼가 어디서 돈 자랑을.’
[변호사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가 무슨 킴앤장급이라도 돼? 일개 변호사 따위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왠지 주인님 질투하시는 거 같은데요?]
‘아니거든? 야, 내가 막말로 잘나갈 때 연봉이 얼마였는 줄 알아?’
[지금은 평범한 대학생이시잖습니까?]
‘아니, 그건···.’
"아, 제가 말 실수 했나요? 제 말은 진정한 남자친구라면 소중한 여자친구를 위해 그 정도는 지원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돈 잘 버시나 봐요?"
"많이 잘 벌진 못하지만 외벌이로 먹여 살릴 만큼은 돼죠. 하하. 비싼 거 좀 못 먹고, 비싼 옷 좀 못 입는다고 그거 별로 큰일 아니거든요."
"오늘 입고 오신 옷은 무척 비싸 보이는데요?"
‘옳지 잘한다.’
[민주 양이 띠꺼워하는 말툰데요?]
‘그러게 민주 앞에서 어디서 이빨을 털어?’
"아, 이거요? 처음 사법시험 합격하고 큰 맘 먹고 하나 질렀습니다. 제가 실은 엄청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고생이요?"
"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1.5평짜리 고시원에서 지냈습니다. 냉 난방도 안 되고, 옆 방 팬 굴러가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열악한 환경이었죠."
"저런···."
"그래서 나중에 합격하고 나니까 연수원에 입고 갈 복장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고민 끝에 샀습니다. 이게 제가 가진 제일 좋은 옷이거든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얼래? 이 개자식이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주인님. 너무 과민하신 것 같은데···.]
‘딱 보면 모르겠어? 가난한 고학생 출신 변호사가 빵빵한 민주 집안 보고 꼬시려는 거라고. 도저히 못 봐주겠어.’
[네? 설마 진짜 난장이라도 피우시게요?]
‘그럴 필요 뭐 있어? 민주한테 문자한통 보내면 끝인데.’
나는 곧바로 폰을 꺼내 민주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이도훈 : 맞선 잘 보고 있어?
부르르-.
"아, 죄송해요. 갑자기 문자가 와서."
"괜찮습니다. 편하게 보세요."
잠시 후 민주에게서 답장이 왔다.
-강민주 : 네. 주인님 말씀대로 얼굴만 비췄어요. 주선해 주신 집안 어른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문자를 확인하는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얼굴만 비춰? 하하호호 웃고 떠들 땐 언제고.’
-이도훈 : 상대는 어때? 괜찮은 거 같아?
-강민주 : 별 생각없어요. 어차피 차만 마시고 헤어질 거라서요.
"평소에도 바쁘신가 봐요."
"···예, 뭐. 중요한 연락이라."
반대편에 앉아있던 나는 민주의 말을 듣고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럴 줄 알았어. 민주에겐 내 연락이 가장 중요하지.’
[어휴, 주인님도 참. 의심할 사람을 의심하셔야지.]
"민주 씨는 근데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이상형이요?"
"네. 궁금해서요."
이번엔 나 역시 귀를 쫑긋 세웠다. 민주가 과연 무엇을 말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잘 통하는 사람이 좋아요."
"어떤 부분이요? 대화 같은 거요?"
"뭐··· 여러 가지로요."
‘속궁합이지, 병신아.’
[주인님. 지금 너무 찌질하신 것 같은데요···.]
‘뭐?’
[맞선 보고 오라며 쿨하게 보낼 땐 언제고 뒤에서 흉보는 모습이 보기 안타깝습니다. 뭘 그렇게 질투하십니까?]
‘아니 저 새끼가 역겹게 굴잖아? 언제 봤다고 이상형을 물어?’
[맞선 보는 자리니 당연히 물어볼 수도 있죠.]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주인님. 어차피 주인님이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민주양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렇게 역정만 내시면 어떻게 좋은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로시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살짝 흥분한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을지 알았는데, 막상 민주가 외간 남자와 앉아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마치 내 것을 빼앗기는 기분이랄까?
‘네 말이맞다. 이 새끼가 어떤 새낀 줄부터 파악해야지.’
나는 민주가 함께 있으면 곤란할 것 같아 그녀에게 지령을 날렸다.
-이도훈 : 야, 강민주.
-강민주 : 네, 주인님. 말씀하세요.
-이도훈 : 나 갑자기 가슴 보고 싶네.
"또 연락 왔나요?"
"···아, 네. 잠시만요. 중요한 문자라서."
"흠, 알겠습니다."
-강민주 : 지금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나서···.
-이도훈 : 뭐? 내가 당장 보고 싶다는데 맞선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강민주 : 아니에요. 저는 주인님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 바로 화장실 가서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이도훈 : 가슴 골짜기 패이게 모아서 사진 찍어 보내.
-강민주 : 네, 주인님.
민주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죄송한데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네 그러세요."
민주가 총총걸음으로 화장실로 걸어갔다.
핸드폰을 덮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변호사 옆에 섰다.
"저, 죄송한데 혹시 볼 팬 같은 거 있으면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뭐 좀 체크 할 게 있어서."
변호사는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데 말을 거느냐는 띠꺼운 표정이었다. 저 씹새끼 확 그냥 눈알에 먹물을 쏙 뽑아 버릴라.
"볼 팬이요?"
"네."
내가 브로슈어를 들고 흔들었다.
그것은 서울시 관광지가 표시된 관광지도였다.
남자가 귀찮다는 듯 슈트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건넸다.
"이거 쓰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만년필을 받은 나는 다시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적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정적 내가 한 것은 싸이코메트리라는 스킬이었다.
‘로시, 만년필에 담긴 기억 개방해. 저놈의 실체가 어떤지 알아야겠으니까.’
[네, 주인님]
스킬을 발휘하자 머릿속으로 영상이 흘러들어왔다.
***
음침해 보이는 매장 안.
진열장 안에는 각종 전자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거 녹음 잘 되는 거 맞죠?
-네, 위에 버튼만 누르시면 개미 소리 하나까지 생생하게 녹음됩니다. 안에 Micro usb 들어있으니까 나중에 용량 다 차면 컴퓨터로 뽑아내시면 되고요.
첫 번째 영상은 그렇게 끝이었다.
‘녹음기? 이게 녹음기였어?’
[영상 보니 그런 것 같은데요? 근데 정말 감쪽같군요. 은근히 지구의 기술력도 쓸만하군요.]
‘근데 변호사가 왜 녹음기를 사?’
[진술 녹취를 위해서가 아닐까요?]
‘아니. 그럼 그냥 정식 녹음기를 샀겠지. 이건 도청장치나 마찬가지잖아.’
[그게 문제가 되나요?]
‘상대 동의를 구하지 않는 불법적 녹취는 법정에서 증거효력이 없단 말이야.’
[아, 그렇군요.]
‘변호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뻔히 알면서 몰래 녹음기를 구매한다고? 뭔가 구린 냄새가 나지 않아?’
[저도 조금 이상하군요]
‘일단 다음 영상 넘어가 봐.’
[넵.]
이어 또 다른 영상이 재생되었다.
변호사는 험상궂어 보이는 사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부분 머리를 바짝 깎거나 대머리였는데, 반 팔 밖으로 문신이 큼지막하게 드러나 있어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놈들이 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어이, 김변. 우리 형님 진짜 빼낼 수 있는 거지?"
"똑바로 해. 그러라고 우리가 고용한 거잖아."
"맡겨만 주십시오. 이건 절대 실형 안 나옵니다. 제 말대로 증거 싹 다 인멸하고 증인만 출석 못 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오이오이, 믿고 있다었고!"
"이 새끼는 잘나가다 왜 갑자기 쪽바리 말투야? 그것도 이 시국에?"
"마, 그건 내가 소싯적에 야쿠자에서 활동을···."
덩치들은 갑자기 시비가 붙더니 서로 으르렁거렸다. 그때 김변이라 불리는 사람이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 여기 싸인 한 번만···."
"뭔데?"
"그, 새롭게 변경되는 부분에 대해서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뭔지 몰라도 해주지. 근데 팬 같은 거 없는데."
"아, 여기 있습니다."
김변이 안주머니에서 볼 팬을 꺼내 건넸다.
녹음 기능이 있다는 바로 그 팬이었다.
그 장면에서 두 번째 영상이 정지되었다.
도훈의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
‘가만. 이 새끼 지금 건달이랑 어울리는 거 맞지?’
[네. 아무리 봐도 조폭 같은데요?]
‘조폭들이 사주하는 변호사라고? 증거인멸? 증인 출석을 막아? 이거 완전 쓰레기 새낀데? 돈만 주면 범죄자건 뭐건 다 변호해 준다는 거잖아?’
[이러면 고학생이었다는 과거도 살짝 의심스러워지는데요?]
‘당연히 개소리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완전 개막장인데?’
그때 도훈의 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자 화장실에 간 민주가 상의를 탈의하고 양 가슴을 끌어모아 찍은 사진이었다.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는 민주의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이도훈 : 보기 좋네.
-강민주 : 주인님 마음에 든다니 민주 기뻐요.
-이도훈 : 립스틱 가진 거 있지?
-강민주 : 네. 가방에 들어 있어요.
-이도훈 : 빤스 내리고 허벅지 안쪽에다가 ‘이도훈 전용’이라고 써서 보내.
-강민주 : 잠시만요.
[주인님 영상이 하나 더 남아 있는데요?]
‘그래. 틀어봐.’
마지막 영상이 재생되었다.
응접실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 한 명과 김변이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조카분이 외동딸이란 말씀이죠?"
"그렇다니까. 결국, 매형 재산이 싹 다 민주에게로 상속된다는 말이지."
"호오. 건물 시세는 얼마나 되죠?"
"모르긴 몰라도 100억은 넘을걸. 부동산만 따져도."
"근데 그 정도 자산을 가진 분이 저같이 평범한 변호사에게 따님을 넘겨 줄까요? 아무리 봐도 무리해 보이는데."
"이 사람아, 내가 있잖나. 내가 어떻게든 중간에서 다리를 놔 봄세. 매형이 조카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모르지? 마흔 넘어서 겨우 얻은 딸이라고 어려서부터 얼마나 극진히 아끼던지···. 아무튼, 매형이 나이도 있고 해서 죽기 전에 손주 한 번 안아보는 게
소원이란 말일세."
"손주라···."
"자네는 직업도 그럴싸하고 그만하면 얼굴도 준수한 편 아닌가? 일단 어떻게든 꼬셔서 일단 임신부터 시켜버리란 말이지. 그러면 매형도 별수 있겠는가? 혼수로 손주를 장만해 가는 사위를 내쫓기야 하겠냐는 말일세."
김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어 보이네요."
"그리고서 상속세를 핑계 대면서 슬쩍 손주에게 증여를 유도해보란 말이지. 그 많은 재산 어차피 안고 갈 수도 없을 테니 솔깃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네한테 주는 것도 아니고 손주한테 증여하는 것이니."
"하지만 어쨌든 제 자식이죠."
"바로 그거지. 어떻게든 물려받기만 하면 그 뒤로는 자네 마음대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이네."
"그 대가로 제가 어르신에게 받은 돈의 절반을 때 드리는 조건이죠? 알겠습니다. 다 좋은데···."
"좋은데?"
"그 조카분이란 사람이 저희가 하는 짓을 과연 보고만 있을까요?"
"민주 고것이? 에헤이, 민주는 돈 같은 덴 일절 관심도 없다네. 공부는 썩 잘하는 편인데 매형하고 달리 돈에 별로 욕심이 없더라고. 그리고 천성이 착해서 남편이 하는 일 가지고 딴지 걸고 그럴 애가 아니야."
"하긴 그건 제가 컨트롤 하면 되겠네요. 한데, 이렇게 어려운 방법을 쓰는 것보다 매형이란 분에게 말씀드려서 유산을 한 몫 챙겨달라고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쯧쯧. 말도 말게. 다른 건 몰라도 매형이 돈 문제에 대해선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일세. 내가 젊었을 때 돈 빌려서 크게 한 번 말아먹고 난 뒤론, 돈 문제에 대해선 일절 말도 안 꺼내지 못하게 하네. 매형도 노욕이 과하시지, 그 많은 돈 친척들에게 좀 나눠주면
얼마나 좋아?"
"원래 재산 분쟁으로 소송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게 친척 간이거든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어르신이 적극적으로 밀어만 주신다면 충분히 해볼 만 하겠네요."
"우리 한 번 잘해보세나."
노인이 나가고 김변은 주머니에 담아둔 볼 팬을 꺼내더니 뚜껑을 눌러 녹취를 완료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중요한 사항은 늘 녹음을 떠 놔야지 안심이 된단 말이야."
영상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머릿속에서 영상을 돌려본 도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개새끼가 진짜!’
[주, 주인님.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봐! 내가 말했지? 뭔가 찝찝하다고? 외삼촌이라는 사람이랑 김 변호사 저 새끼랑 설계한 거잖아. 민주 아빠 재산을 홀랑 벗겨 먹으려고!’
[저도 놀랬습니다. 어떻게 외삼촌이 되서 조카가 상속받을 재산을 탐낼 수 있는지···. 저 김변이라는 사람이야 원래 인성이 쓰레기라도 쳐도, 어려서부터 딸처럼 아꼈다는 외삼촌의 변절은 정말 충격적이군요.]
‘원래 사람이 돈에 눈이 멀면 더한 쓰레기 짓도 서슴지 않는 법이야. 아무튼 이 개같은 새끼들을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네.’
도훈이 팬을 부러뜨릴 것처럼 씩씩거리고 있는데, 또 다시 민주에게서 답신이 날아왔다.
-강민주 : (사진)
핸드폰에 떠오른 것은 도훈이 요구한 그대로였다. 하의를 벗고 다리를 활짝 벌려 립스틱으로 글자를 새긴 포즈.
허벅지에 쓰느라 삐뚤빼뚤한 글씨가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이도훈 전용
도훈은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내 전용 여자를 설계하려고 해? 너희 두 새끼는 살아 있다는 게 후회스럽게 만들어 주마.’
도훈이 이를 빠득 갈았다.
간만에 살기가 느껴졌다.
< 917. 여름 방학-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