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6. 여름 방학-8- >
***
도훈이 떠난 뒤 은주는 데스크 위에 제품 설계도를 다시 펼쳤다. 그러나 폭풍 같은 섹스의 후유증 때문인지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잠깐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그와 뒹굴었던 소파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했다.
"아이참,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은주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럴 땐 수다가 최고였다. 핸드폰을 잡은 은주가 절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미. 뭐해?"
영미는 그녀와 오랜 단짝이었다.
대인관계가 좁은 은주는 소수의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편이었는데, 영미는 그중에서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뭐하긴? 애 엄마가 애보지.
영미의 직업은 세무공무원. 하지만 1년 전 아기를 낳고 나서는 육아 휴직계를 내고 집에서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었다.
-근데 이 계집애, 요새 바쁘다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래?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는 사이니? 그냥 심심해서 걸었어."
-아닌데, 뭔가 있는데? 혹시 맞선 들어왔어? 이번엔 또 누군데?
"아니야 그런 거."
은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된 은주는 선 자리가 자주 들어오는 편이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주변의 인식과, 월등한 스펙 탓에 그녀의 지인들은 쉴 새 없이 다리를 놓아주었다.
-아님, 저번에 소개팅했던 그 의사 요새도 찝쩍거리니? 강남 성형외과 원장이라던.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 사람 연락 싹 차단했어. 전화도 깨톡도."
소개팅이건 맞선이건 은주를 만난 남자들은 100이면 100 모두 그녀에게 에프터를 걸었다. 앞선 성형외과 의사라는 사람은, 싫다는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음에도 2주간 스토커처럼 들러붙을 정도였다.
외국물을 먹은 전도 유망한 여교수.
이기적인 몸매와 상반되는 지적인 매력에 은주의 주가는 골드미스라는 말로 부족할 정도였다.
잠시 생각하던 영미가 난데없이 물었다.
-야, 너 또 설마 걔 만났어?
확실히 오랜 친구다 보니 눈치가 빨랐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단박에 친구의 고민거릴 눈치챘다.
"···응."
-에라이, 미친년아. 내가 너 진짜 그러다 큰일 난다고 했지?
영미는 본래부터 입이 걸걸했다. 특히 절친인 은주에겐 육두문자도 서슴지 않았다.
은주는 일전에 한 번 영미에게만 도훈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당시 23살이라는 도훈의 나이를 듣는 순간, 흥분한 영미가 노발대발 난리를 피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진짜, 이 계집애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너 이제 불장난 할 나이 아니라고 했지?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데?
친구를 아끼는 영미는 은주를 뜯어말렸다. 당시만 해도 도훈에 대한 마음이 갈수록 커진 은주가 도훈을 남자로서 진지하게 바라보던 시점이었다. 어린 남편을 들여 업어 키워볼까 한다는 은주의 고백에 영미는 당시 현실적인 충고를 날렸다.
-당장이야 죽고 못 할 수 있지. 누군 소싯적에 불타는 연애 안 해 본 줄 아니? 게다가 어리고 잘 생기겼다니 얼마나 좋아? 너, 근데 그게 몇 년이나 갈 것 같니? 계집애야 너도 내일 모래면 마흔이야. 여자 애 낳고 나면 팍 늙는 거 알지? 나중에 서른도 안 된 신랑
이 너 지겨워져서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있겠어?
애 엄마인 영미의 현실적인 조언에 은주도 점점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도훈이 좋은 사내이며 특히 속궁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는 건 알았지만, 끝내 그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은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영미에게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아닌 줄 알면서 왜 또 만난 건데? 넌 가만 보면 공부는 똑 부러지게 잘하면서 남자 문제는 유독 맥을 못 추더라?
"그냥, 갑자기 찾아왔어."
-걔가? 평소에 연락도 잘 안 한다며?
"응. 성적 확인하러 학교 들렀다가 내 생각나서 왔데."
-설마 또?
"어?"
-···했네 했어, 미친년. 아휴, 진짜 내가 못 살아. 떡정 들면 절대 못 끊는다고 했지? 불장난했다 치고 그냥 마음 접으라고. 지난 번에 내 말 듣겠다더니 왜 또 그러는데?
은주는 다다다 쏟아 붙이는 영미가 밉지는 않았다. 거친 말투긴 했지만, 그 속에서 친구의 앞길을 걱정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있었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축의금 두둑하게 찔러준다며 적금까지 붓고 있는 베프였다. 어릴때부터 예쁜데 공부까지 잘한다며 질투하는 친구들로부터 은근한 따를 당할 때도 끝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주었던 친구였다.
그런 영미의 잔소리였기 때문에 은주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아 주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
-어휴, 이미 떡정이 찐하게도 들었네. 이년아. 그거 병이야 병.
"무슨 병이야 그게?"
-누군 연애 안 해봤어? 막 손만 잡아도 벌렁벌렁하지? 맞지?
"야. 넌 애 엄마가 되 가지고··· 언어 순화 좀 해."
-내가 오죽하면 그러겠니? 지난번에 마음 접는다면서 다시 만나자마자 바로 무너지면 어떡해, 그러니까.
"난 먼저 연락도 안 했어. 굳이 찾지도 않았고. 자기가 먼저 찾아오는데 그것까지 어떻게 막아?"
-혹시 걔가 널 좋아하는 거 아냐?
"글쎄···."
-맞네. 솔직히 너 아직도 처녀 같잖아. 얼굴이야 원래 예뻤고, 가슴도 여전히 탱탱하고.
"야, 넌 무슨."
-오히려 걔가 너한테 푹 빠진 거 아닌가 모르겠다.
"절대로 아냐. 전에도 말했지만, 도훈이는 여자한테 휘둘리고 그럴 스타일 아냐."
-그래? 그럼 왜 찾아왔을까? 만나서 뭐라고 하던데?
"그냥···. 성적 잘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다고."
-너 걔한테 점수도 잘 줬니? 천하에 은주가? 어머어머 세상에···.
"잘 준건 맞는데, 사심 하나 없이 준 거야. 걔 공부도 잘해. 기말시험도 학부생 중에 유일하게 만점 받았어."
-캬, 무슨 말만 들으면 엄친아네 엄친아. 키도 크지, 얼굴도 잘생겼지, 공부도 잘하지···. 걔 좆도 크다며?
"아휴, 너는 진짜 무슨 말을 해도···."
-왜? 니입으로 한 말이잖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그렇게 실한 애는 처음 봤다며. 계집애 진짜 푹 빠져가지고···. 정신 차려, 이것다. 너 그거 맛들이면 절대 시집 못 가. 계속 생각나서 다른 놈들이 성에 차겠어?
"시집갈 생각 없어. 설사 내가 비혼으로 산다고 해도 걔랑은 상관없이 내 소신 때문이고."
-그럼 어쩌자는 건데?
"그냥. 쿨하게 마음 먹기로 했어."
-쿨하게?
"응. 오늘 헤어질 때 대놓고 말했어. 여자친구 사귀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귀도 된다고."
-헐. 진짜? 너 괜찮겠어?
"무슨 상관이야. 막말로 내 남자친구도 아닌데."
-그래놓고 또 만나면 막 하고?
"뭐, 내키면?"
-너 그거··· 막말로 섹스 파트너잖아. 미쳤네 미쳤어. 어린 애 맛 보더니 애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네.
"야. 안영미. 말 그렇게 하지마. 나 아직 시집도 안 갔고, 만나는 사람도 없거든? 양심에 거리낄 것 하나도 없어."
-미안. 그런 뜻은 아니었어. 네가 유학 다녀와서 그쪽으로 프리 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니? 걔 이제 스물셋이라면서? 그것도 네 제자고.
"제자는 무슨. 여기가 고등학교니? 스승 제자 사이 찾게? 걔도 성인이고 나도 성인이야. 그 정도 판단은 충분히 할 수 있어."
-너 그러다 걔가 맘 바뀌어서 너 협박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협박이라니?"
-그루밍성폭력이라고 들어봤지? 노처녀 교수가 어리고 순진한 남학생 꼬드겼다고 몰래 찌르기라도 하면?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은주는 영미의 날카로운 지적에 흠칫 놀랐지만, 곧바로 부인했다.
"도훈이는 그런 사람 아냐."
-네가 어떻게 알고?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아냐고.
"아무튼, 절대 그런 거 아냐. 그냥··· 내 느낌을 믿어. 그리고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럴 자신 있어."
-미쳤어, 진짜. 저 봐. 공부 잘해봐야 다 헛거라니까? 어린 나이에 유학까지 가서 교수 달아봐야 뭐하니? 어린 남자애한테 쩔쩔매는데. 으휴, 저 헛똑똑이.
은주는 그 뒤로 한참을 절친과 통화를 이어갔다.
그냥 사는 얘기.
육아 얘기, 남편 흉보기,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진행.
도훈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았지만, 통화가 끝난 후 은주는 도훈에 대한 감정이 확실하게 정리되는 걸 느꼈다. 단지 복잡한 마음을 친구에게 털어놓기만 했을 뿐인데도, 머릿속이 한결 심플해진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결론은 정해진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저 자신의 결심을 절친한 친구에게 털어놓고,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선언같은.
‘···그래. 도훈이랑은 그렇게 만나면 돼. 단지 그뿐이야. 내가 더 좋아하니까.’
***
은주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데 마음이 조금 허전했다.
‘흐음. 내가 너무 내 볼일만 보고 나왔나?’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아니, 생각해보니까 오랜만에 얼굴 봐놓고 실컷 따먹기만 했네. 물론 그러려고 간 건 사실이지만.’
[성욕만 채운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씀인가요?]
‘응. 대화도 더 나누고 그럴 걸 그랬어. 은주랑은 얘기도 잘 통하는 편인데.’
[실제 주인님과 동년배라서요?]
‘동년배까진 아니지.’
[어쨌든 나이 차가 제일 안 나는 분이지 않습니까? 편의점 주 허영자를 제외하면요.]
‘그렇긴 해. 근데 은주는 약간 누나 같달까? 뭔가 날 편하게 해주는 거 같아.’
[손 교수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긴 했죠. 허영자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영자랑은 느낌이 좀 달라. 영자는 사실 누나보다는 이모같은 느낌이었거든. 끝날 때마다 용돈도 쥐어주고. 아무래도 사장과 알바생이란 관계 때문인지 몰라도.’
[손 교수는요?]
‘말했듯이 큰 누나 같아. 늘 배려해주고, 아껴주고, 뭐든 퍼줄 것 같은.’
[호구라는 말씀 같은데요?]
‘그런가. 호구도 내가 이용해 먹어야 호구지. 난 은주한테 딱히 바라는 거 없어. 성적을 잘 봐달라고 청탁을 한 것도 아니고.’
[어쨌든 대학 생활 내내 든든한 우군이잖습니까?]
‘그렇지. 딱 그 정도지. 은주와의 관계는.’
[솔직히 헤어질 때 굉장히 쿨하더군요. 살짝 놀랬습니다.]
‘그러게.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 걸까? 지도 고민이 많겠지. 대학교수가 대학생과 몸을 섞다니. 막말로 남녀가 바뀌었으면 지탄을 받아도 할 말 없는 관계잖아.’
[은주양은 똑똑하니까 나름 잘 처신할 겁니다.]
‘그럴 거라고 봐.’
[이제 민주양의 맞선 자리에 가시나요?]
‘응. 동선 한 번 따봐야 겠다.’
나는 어장관리 어플을 통해 민주의 동선을 파악했다. 어플의 충돌방지 기능은, 일정 호감도 이상의 상대에 대한 위치 파악이 가능했다.
‘국제 호텔?’
[호, 호텔이요?]
‘뭘 놀래? 호텔 로비 커피숍인가 보지. 맞선은 보통 그런데 서 보거든.’
[아하. 어딘지는 아십니까?]
‘응.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야. 차로 15분 정도? 벌써 도착했나 본데?’
[그럼 서두르셔야겠군요.]
나는 차를 타고 민주의 맞선 장소인 호텔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정체를 감추기 위해 변장도구 세트와 정체불명의 모자로 위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변장이 끝난 후 룸미러를 통해 얼굴을 보는데, 내가 봐도 전혀 다른 사람이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이건 볼 때마다 놀랍군. 어쩜 이렇게 감쪽같지?’
[천상계의 제품이니까요. 근데 변장까지 하셔놓고 모자를 쓰실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못 알아챌 텐데요.]
‘혹시 모르잖아. 항상 만반의 대비를 해놓는 편이 좋으니까.’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대고 1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바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민주를 찾는 데 구석에서 한 남성과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저깄네.’
[다행히 뒷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최대한 가까이 앉아서 무슨 얘기 하는지 들어봐야 겠어.’
나는 호텔 입구에서 챙긴 브로슈어와 커피를 챙겨 민주의 소개팅남 맞은 테이블에 등을 지고 앉았다. 의자에 앉는 척 하며 변호사라는 놈의 면상을 확인했는데, 생각보다 말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특히 깔끔한 슈트가 무척 잘 어울렸다.
‘좆같이도 생겼네.’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 아닙니까?]
‘아닌데? 좆같거든?’
[설마 주인님 질투하시는 겁니까?]
‘내가? 저 새끼를? 대물 플레이어 이도훈이?’
[아니면 아닌거지 뭘 그렇게 흥분하십니까?]
‘흥. 좆같은 새끼.’
왠지 모르게 멀쩡한 인상을 보자 화가 치미는 느낌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민주가 웃고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참나. 차나 한 잔 마시고 오랬더니 수다를 떨고 있네.’
의자에 앉아 브로슈어를 읽는 척하며 슬쩍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임용을 쳐서 교사가 되는 것 보단 좀 더 깊이 있는 전공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요."
"그러시구나! 역시 꿈이 크시네요. 기왕이면 교수까지 도전해 보시는 것도 좋죠."
"쉬운 길은 아니에요. 그냥 일단 해보는 거죠."
"전 여자친구가 그런 도전을 한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도 있습니다. 돈은 제가 벌어도 충분하니까요."
‘개새끼가 어디서 돈 자랑이야? 씹새끼가 처 맞을라고.’
[주, 주인님.]
< 916. 여름 방학-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