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8. 여름 방학-10- >
"저기요?"
도훈이 부들부들대고 있는데 등지고 앉아있던 맞선남이 말을 걸어왔다.
"펜 다 쓰셨으면 적당히 돌려주시죠?"
도훈은 순간 김변이라는 놈의 관자놀이에 볼펜을 찍는 상상을 했다. 중간까지 박히고 나면, 프랑켄슈타인처럼 볼 만 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한 도훈이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거리자 불쾌해진 김변이 언성을 높였다.
"아니 지금 사람이 말을 하는데···."
"자요."
"···자요?"
김 변호사의 미간에 내 천(川)가 새겨졌다. 호텔 커피숍에 앉아 관광안내도를 보고 있는 꼬락서닐 봐선, 보나마나 시골에서 갓 상경한 뜨내기같았다.
‘나이도 어린 새끼가 싸가지 없긴. 하여간 이래서 촌것들하곤 상종을 말아야 한다니까? 호의를 보여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김 변호사는 평소에도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편이었다. 조폭들과 어울리고 나선 머리가 굵어졌는지, 안 그래도 시건방진 성격에 더욱 안하무인이 되었다. 특히 유흥주점에서 술김에 시비가 붙었을 때 아는 조폭들의 도움을 받은 이후부턴 세상 무서울 게 없
었다. 조폭들이 뒷배를 봐준다고 생각하자 고개가 뻣뻣해진 것이었다.
"아씨, 진짜 말 띠껍···."
"죄송해요, 경인씨. 오래 기다리셨죠?"
때마침 미션을 마친 민주가 화장실에 돌아왔다.
민주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던 김 변호사는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더니 억지 미소를 지으며 도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어이,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하라구."
그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도훈은 쥐었던 주먹을 서서히 풀었다.
‘거기서 대사 한마디만 더 쳤으면 넌 이 자리에서 뒤졌어 새끼야.’
민주가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김 변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요? 혹시 저 없는 사이 무슨 일 있었어요?"
민주는 맞은편에 앉은 모자 쓴 사람이 도훈이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변장 아이템에 정체불명의 모자까지 쓴 터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별일 아니었어요."
두 사람이 다시 대화를 시작하자 도훈이 조용히 핸드폰을 들었다. 김변의 실체를 깨닫자 그를 민주 곁에서 잠시라도 함께두고 싶지 않았다.
-이도훈 : 사진 마음에 드네. 아직도 맞선 보고 있으면 적당히 핑계대로 집으로 들어가.
-강민주 : 앗, 주인님. 그래도 한 시간은 채워야 하지 않을까요?
-이도훈 : 어차피 외삼촌 체면은 세워줬으니 상관없잖아? 그리고 사진 보니까 벌써 축축하더만. 오늘 오피스텔 문 잠그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아갈 테니.
도훈의 약조를 받은 민주가 기쁨을 주체 못 하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연이은 문자질을 꾹 참고 있던 김변이 끝내 한마디를 건넸다.
"···재밌으신가 봐요?"
"네?"
"아뇨, 저랑 대화하는 것보다 그분하고 연락하는 거요."
그 순간, 민주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그러잖아도 마지못해 나온 자리. 시간만 죽이고 있었는데 마침 상대가 꼬투리를 잡힐 실수를 하고 말았다. 민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따졌다.
"무슨 말씀이 그래요?"
"···예?"
"아니, 제가 분명 중요한 연락이라고 했잖아요. 그게 그렇게 못마땅했나요? 초면치곤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아,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제 막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다 보니···."
"됐고요. 기분 나빠 더 같이 못 잊겠네요. 외삼촌한테는 잘 말해 줄테니 앞으로 다신 보지 말죠. 진짜 어이가 없어서."
민주가 성을 내며 일어서자 놀란 김변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민주씨. 제가 말 실수 했습니다. 제 뜻은 그게 아니고···."
"놔요, 이거! 지금 어딜 만지시는 거예요?"
민주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지자 놀란 김변이 움찔 손을 놓았다.
그녀의 외삼촌에게 듣기로 순하고 맹탕 같다 한데다, 실제 대화를 할 적에도 조곤조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성격이 유한 줄 알았는데, 한 번 빈정 상하고 나자 불같은 성격을 드러냈다.
물론 이는 예정에 없던 도훈과의 약속이 잡히면서, 민주가 무리하게 맞선을 쫑 내기 위해 오버하는 감도 없진 않았다.
민주가 지갑에서 만원 짜리를 꺼내더니 테이블에 탁 내렸다.
"찻값이에요. 먼저 계산하셨던데 제가 마신 건 제가 낼게요."
"아, 아니 민주씨 굳이 이럴 필요까진···."
"저 이제 김변호사님한테 신세 진 거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셨죠?"
민주는 그 말만 남기고는 쌩하고 돌아섰다.
뒤에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도훈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소리 죽여 웃었다.
‘끅끅끅, 쌤통이다, 병신 새끼. 민주를 호구로 봤다가 된통 당하는구나.’
[민주 양에게 저런 면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주인님한테 그렇게 순종적이던 분이 다른 남자에겐 가차 없군요.]
‘흐흐. 당연하지. 내가 오늘 밤 찾아간다는데 벌써부터 얼마나 흥분되겠어?’
만 원짜리 한잔과 홀로 테이블에 남겨진 김변은 한동안 눈만 껌뻑거렸다. 소개팅이나 맞선을 보며 이렇게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뭐, 뭐야? 그 양반 말이랑 완전히 다르잖아? 자기 조카가 어떤 성격인지 제대로 파악도 못 한 거야? 그래놓고 무슨 설계를 한다고···.’
김변이 따지듯 민주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어르신. 이게 대체 뭡니까?"
-응? 난데없이 무슨 소린가? 오늘이 맞선보는 날 아니었나?
"말씀하신 거랑 전혀 다르잖아요?"
-이보게 김변. 많이 흥분한 거 같은데 차근히 말해보게나. 무슨 사정인 줄은 나도 들어야 뭐라 말을 해줄 거 아닌가?
김변은 흥분한 나머지 등 뒤에서 통화를 듣고 있는 도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었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커피숍에 앉은 손님들이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쳐다볼 정도였다.
"···진짜 살다 살다 이런 대우는 처음입니다. 완전 개무시 당했다고요!"
-허어-. 우리 민주가 그런 애가 아닌데···. 자네가 혹시 무슨 실수 한 건 아니고?
"아니, 맞선보는 내내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상대한테 말도 한마디 못 합니까? 이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제가 무슨 꿔다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아마 사정이 있었지 않았을까?.
"사정요? ···가만? 혹시 조카분 어르신이 모르는 애인 있는 거 아닙니까?"
김변은 민주가 마지막에 짓던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애틋한 연인을 떠올릴 때나 보낼법한 미소였다.
-에잉, 그럴 리가? 내가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 엊그제도 전화해서 물었단 말이지. 사귀는 사람 절대 없다는데?
"솔직하게 말을 안 했을 수도 있죠. 아무리 외삼촌이라도 20대 아가씨 사생활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어르신. 저희 작전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듣고 있던 도훈이 귀를 쫑긋했다.
하지만 그러나 김변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자 뭐라고 하는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로시, 음향 증폭기.’
[넵. 준비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야겠어. 계속 옆에 있다간 괜히 의심받을 테니까.’
도훈은 김변이 앉은 의자 뒤에 음향 증폭 스피커를 붙이고는 화장실로 이동했다. 다행히 수신 거리가 아슬아슬 걸리며 두 사람의 통화내용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어쨌든 제가 조카분을 꼬셔야지 뭐라도 진행될 거 아닙니까? 임신이고 결혼이고요.
-그렇지? 그래서 맞선을 주선시켜준 거 아닌가?
-맞선은 이미 텄습니다. 그리고 제 의심대로 비밀 애인이 있다면 그 관계부터 끊어내는 게 우선입니다.
-비밀 애인이라니? 에이, 설마···.
-제 촉이 틀림없습니다. 분명 조카분께 말 안 한 남자가 있을 겁니다.
-그래. 정말로 있다고 치세. 허면 두 사람을 무슨 수로 끊어낸단 말인가? 아니, 그전에 그놈이 누군 줄 알고?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해볼 테니까요. 어르신은 민주양에게 연락 오면 제 얘기나 잘 전해주십시오. 짧게 만나서 무척 아쉬웠다고. 다음에 꼭 다시 보고 싶다고요.
-그렇게 함세.
-전 다른곳에 잠시 연락 좀 하겠습니다.
뚝-
"뭐야? 통화 끊었어?"
도훈이 아쉬워하는데 곧 김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이게 누구야? 우리 김경인 변호사 아닌가? 저번엔 덕 많이 봤네. 집행유예로 막아줘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하핫, 제 수완 잘 아시면서···. 아, 다름이 아니고요 형님. 아는 애들 중에 심부름센터 일하는 사람 있다고 하셨죠?
-있지. 왜? 혹시 이혼소송이라도 들어온 거야? 불륜 증거 잡아서 위자료 받아주게?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그래 뭐, 연락처 알려줄까?
-네. 번호 좀 불러 주십시오. 네, 네. 구구사사에 빵빵···칠빵 네, 네. 외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에이 뭘, 우리 사이에. 다음에 술 한잔 빨자고.
-넵!
몰래 도청하던 도훈도 연락처를 똑같이 암기했다.
‘이 새끼 보소? 지금 민주 뒤를 캐겠다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요? 근데 민주의 비밀 애인이라는 사람이 바로 주인님 아닙니까?]
‘응, 귀찮은 날파리 들러붙게 생겼네. 그 전에 싹을 잘라야 겠지?’
도훈은 당장 김변이란 놈을 반쯤 죽여놓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김변은 공범일 뿐 주범은 따로 있었다.
‘아니야. 기왕 하는 거 그 외삼촌이란 사람까지 함께 엮어내야겠어. 어차피 판을 설계한 건 그 노인네일 테니. 김변만 절단낸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
[그럼 심부름 센터는 어떡하시고요?]
도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누군 뭐 뒷배 없나?"
도훈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을 뒤졌다. 그러자 검은색 바탕에 금박이 씌워진 고급스러운 명함이 하나 보였다. 일전에 아이돌 미션을 진행할 때 우연한 계기로 친분을 쌓은 민수의 연락처였다.
"여보세요?"
-앗, 이 번호는···. 오랜만입니다, 이도훈씨. 잘 사셨죠?
"방학이라 열심히 쉬고 있죠."
-그랬군요. 큰 형님한테는 이미 얘기 다 끝냈습니다. 도훈씨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들어오셔도 됩니다. 자리는 저희가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고민 중입니다. 아, 그보다 뭐 좀 알아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네네, 말씀만 하세요.
"혹시 제가 흥신소 번호 알려드리면 어떤 놈들인지 찾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쪽은 다 끼리끼리 통하거든요. 번호가 어떻게 되는데요?
도훈이 번호를 전달하자 통화중이던 민수가 옆에 있던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번호 들었지? 어딘지 1분 안에 조사해봐. 늦으면 넌 뒤지는 거야.
-저, 형님. ···이거 저희 애들 가겐데요?
-뭐?
-공공칠빵 뒷번호요. 저희 관할에서 활동하는 애들이라고요.
-그래? 아, 도훈씨 죄송합니다. 혹시 저희 애들이 몰라보고 뭔가 실수를 했을까요? 번호를 확인해 보니 저희 쪽에서 관리하는 애들이라는데···.
‘어랍쇼? 그러니까 김변호사가 의뢰하려던 흥신소가, 조폭대장 민수가 관리하는 애들이라는 소리지?’
[네, 공교롭게 그렇게 된 것 같군요.]
‘그럼 나이쓰지.’
"아뇨, 실수 한 거 없습니다. 실수할 뻔 했지만요."
-···그렇군요. 저희 쪽에서 단단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혹시 그 흥신소 직원들한테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요? 당연한 말입니다. 아니, 아예 명령해도 됩니다. 어차피 저희 조직 밑에 있던 부하가 독립해서 나간 가게거든요. 제가 당장 말해놓겠습니다. 도훈 씨가 시키는 데로 따르라고요.
"아이고,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욘 없는데···."
-아닙니다. 그리고 언제 한 번 시간 한 번만 내시죠? 큰 형님이 무척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 도와주신 것도 있고, 방학 때 시간 내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넵. 제가 연락해서 도훈 씨한테 직접 전화 걸라고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민수와의 통화가 끝나고 잠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도훈이 목소리를 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행님! 민수 행님한테 얘기 들었슴돠 행님.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쇼 행님!
말하는 투가 전형적인 조폭 따까리 스타일이었다.
도훈은 어색함을 감추고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어 그래. 다름이 아니고···."
도훈은 김 변호사라는 사람이 연락하면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미리 말을 맞추었다. 도청기에 별다른 통화 소리가 안 들리는 것으로 보아 김 변호사는 아직 흥신소에 연락을 취하지 않는 듯했다.
내용을 전달한 도훈이 통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
김변은 그새 커피숍을 나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 김변이라는 놈한테는 미리 덫을 쳐놨고, 민주한테 가서 외삼촌이란 사람 연락처 좀 받아 내야겠군."
도훈이 차를 타고 민주의 오피스텔로 이동했다. 민주가 먼저 출발한 지 10분쯤 지나서였다. 도훈이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앗, 주인님. 지금 집으로 가는 중이에요. 거의 다 왔어요.
"어, 나도 좀 있으면 도착할 거야. 참, 너희 집 저번에 보니 욕조 있던 데 맞지?"
-네, 주인님.
"가서 따뜻한 물 좀 받아놔. 씻고 싶으니까."
-네. 입욕제도 넣어 놓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아···.
"니가 입욕제잖아."
-네? 그게 무슨··· 아, 아! 미, 민주 기뻐요!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민주가 촉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918. 여름 방학-1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