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4. 처녀 보살-16- >
도훈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상황이 난처하게 됐군요. 겨우 벌어 놓은 점수가 대폭 깎인 것 같습니다만.]
‘갑자기 뒤를 돌아볼 줄 내가 알았냐?’
[그러게 왜 냄새를 맡기를 맡으십니까? 좋은 냄새도 아닌걸요.]
‘몰라서 물어?’
[네?]
‘남자가 자기 불알 냄새 확인하는 습성은 일종의 본능이라고. 냄새를 확인함으로써 성기의 이상징후와 정자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이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냄새를 맡는 거고.’
[이유야 어찌 됐건 여자가 볼 땐 당연히 오해할만한 행동이죠. 둘밖에 없는 한적한 등산로에서, 뒤따르던 남자가 갑자기 바지에 손을 넣어 고추를 만지는 행동을 하면 당연히 무섭지 않겠습니까?]
‘내가 무슨 성폭행범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지금?’
도훈이 격하게 흥분했다.
난봉꾼인 그에게도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임자 있는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물론 이 원칙은 애자매의 어머니를 공략하고서부터 흔들리긴 했다. 현재는 "그러나 오는 여자는 굳이 막지 않는다."의 단서조항이 추가되었다. 어쨌든 적극적으로 남의 여자를 뺏으려는 행동은 최대한 삼가는 편이었다.
둘째 성추행이나 성폭행처럼 상대의 의지에 반하는 강압적인 행위는 하지 않는다. 이는 신의 대리자라는 플레이어의 절대 원칙에도 위배 될 뿐 아니라 도훈 스스로가 무척이나 혐오하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이도훈이 가진 외모와 능력, 스킬을 이용하면 굳이 강제로 여자를 범할 필요가 없었다.
셋째 책임질 말과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사귐빙자 간음이라던가, 관계를 단정 짓는 말에는 늘 신중을 기하는 도훈이었다. 이는 카사노바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으니까.
이처럼 나름의 원칙을 준수하며 여자를 공략해 왔던 도훈이었기에, 장군의 과한 반응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도훈이 당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자지 가려워서 긁었다, 왜!"
"뭐, 뭐라고?"
"못 들었어? 불알에 땀이 차서 거기가 근질거려 미치겠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그게 무슨···."
장군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자지’니 ‘불알’이니 하는 저질스러운 용어를 필터링 없이 그대로 내뱉을 줄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그런 단어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입으로 발음한 적이 없을 정도로 순진했다.
‘사, 상스러워. 자··· 어찌 그것을.’
장군이 노한 얼굴로 맞받았다.
"내 앞에서 더러운 말 쓰지 마!"
"뭐?"
"그런 상스러운 말 사용하지 말라고!"
"자지를 자지라고 부르고, 불알을 불알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이거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말이야!"
국어사전까지 들먹이자 장군도 주춤했다. 가방끈이 짧은 그녀로서는 무려(?) 대학생인 도훈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장군이 밀리는 기세를 보이자 도훈이 한술 더 떴다.
"그럼 소인이 음경에 발진이 발생하여 잠시 조치하였습니다, 라고 할까? 무슨 선비도 아니고."
"너, 너 지금 나 비꼬는 거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그녀가 씹선비임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반박을 못 하자 도리어 도훈이 그녀를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너도 가슴 크니까 알 거 아니야. 접힌 부분에 땀이 얼마나 자주 차는지. 그래서 브라 안 하고 있는 거 아냐?"
"그, 그 말이 갑자기 왜 나와?"
"나도 똑같다고. 나도 커. 커서 자꾸 쓸려. 그래서 간지러워서 긁었어. 그게 그렇게 잘못된 행동이야?"
도훈은 필요 이상으로 솔직했다.
약간의 고의성도 엿보였는데, 자신의 물건이 대물임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넌 가슴이 크지만, 난 잦이가 크다는.
"그, 그러면 몰래 하면 되지 왜 보란 듯이···."
"네가 날 돌아본 거지. 내가 너 보라고 앞질러 갔냐? 그러게 왜 앞만 보고 가고 있다가 갑자기 뒤를 보는데?"
그때 장군이 뭔가가 떠오른 듯 화제를 바꿨다.
"아, 맞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었는데."
"뭔데?"
도훈은 장군이 불리해지니 화제전환을 꾀한다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더 싸워봐야 관계개선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명분은 챙겼다.
"귀신이 신호를 보냈어."
"신호라니?"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기서 멈추라는 느낌이었어. 그거 말하려고 돌아본 거야."
"잠깐. 멈추라고 했다고?"
도훈이 뭔가를 눈치챈 듯 핸드폰을 꺼냈다.
수신감도가 약하긴 했지만, 네비게이션이 실행되며 등산 전 표시 해 둔 사체의 매장지를 가리켰다.
"아닌데. 아직 한참 남았는데?"
[추락한 위치가 낭떠러지라고 했지 않았나요?]
‘어. 그랬지.’
[어쩌면 등산로에서 한참 벗어난 곳일지도 모릅니다. 귀신이 자신의 유해를 감지하고 사인을 보낸 것일 수도 있고요.]
‘아, 그런가?’
도훈이 뭔가 생각난 듯 지도를 입체로 전환했다.
평면인 지도가 입체로 바뀌자 등고선이 표시되었다. 지도를 확대해 유심히 살펴보니 등고선이 촘촘히 좁아지는 공간에서 현 위치가 굉장히 가까웠다.
‘빙고. 맞았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위치가 이 근처인가 보다. 잘했어, 로시.’
[약간은 애완견처럼 부른 느낌인데, 기분탓이겠죠?]
"맞는 것 같아."
"뭐가 맞아?"
"여기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더 빠르다고. 어차피 유해가 있는 곳은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야. 결국엔 비탈길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쯤에서 꺾으라는 신호인 것 같아."
"아!"
도훈의 말귀를 알아챈 장군이 등산로 옆을 쳐다보았다.
우거진 숲과 급격한 경사로가 잘 닦인 등산로보다 몇배는 험준해 보였다.
"여, 여길 들어가야 한다고?"
"힘들 것 같으면 나 혼자 갈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도훈은 장군이 머뭇거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산로를 이탈했다. 혼자 남겨진 장군이 두려움에 가득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 누가 안 가겠데? 가, 같이가!"
***
드래곤볼 레이더를 든 손오공이 생각났다.
핸드폰에 표시한 위치를 향해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매는 심정이 딱 그것 같았다.
‘젠장, 길이 안 닦인 수준이 아니라 아예 만들고 가야할 판이네.’
"조심해. 여긴 가시가 많아."
"으, 응."
나와 장군은 벌써 30분째 산비탈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경사도 경사지만, 중간중간 나무뿌리가 지뢰처럼 박혀있고 날카로운 바위와 가시덤불이 장애물처럼 성가시게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가뜩이나 체력도 후달리는 장군은 하필 발목까지 접질리는 바람에 배는 힘들어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나 역시 그녀가 했던 발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만 되는 것 같아, 나는
‘진짜로 짐덩이 맞네. 이래선 찾기도 전에 해가 떨어질 텐데.’
슬슬 걱정이 들긴 했지만, 딱히 무서운 건 아니었다. 설사 귀신이 눈앞에 나타나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다만, 원래 목표했던 산장에서의 하룻밤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허억, 허억. 더럽게 힘드네. 정글도 라도 하나 챙겨올 걸 그랬어."
"정글도라니?"
"길이 아니다 보니 잔가지가 많아서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
나는 앞에서 길을 막는 나무줄기를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길이 없는 산길을 이미 등산을 넘어 오지 탐험이라는 말이 적절할 정도. 가뜩이나 힘든데 짐덩이까지 챙겨 가려니 점점 힘이 빠졌다.
"자, 잠깐 쉬었다 갈까?"
"그러자."
중간에 걸터 앉을 만한 커다란 바위가 나왔다. 나와 장군은 손수건으로 얼굴과 목에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했다.
"우리 옳게 가는 거 맞지?"
"틀림없어. 네비가 가리키는 위치로 직진 돌파하는 중이야. 최단거리로."
"휴-. 미안. 네가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같아서."
"됐어. 네 부탁으로 온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사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까 화를 냈던 것이 되려 미안해졌다. 사실상 방구 뀐 놈이 성내는 격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깐 미안.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까? 아···. 아니야. 나도 잘 몰라서 오해했어. 네가 등 뒤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줄 알았어."
"이상한 짓이라니?"
장군이 민망해하며 답했다.
"왜···. 언제 기사에서 봤거든. 남자들이 막 여자들 훔쳐보면서. 자위 같은 거···."
"억!"
"그, 그러니까. 네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만 괜히 오해했어. 난 여자니까 거기 땀 차는 건 잘 몰랐으니까."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
"아니. 그랬으면 처음부터 안 따라 왔겠지. 더구나 이젠 진짜 등산로도 아니잖아. 우리가 여기 단둘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를 거야."
장군은 스스로 말을 하고 아차 싶었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장군 말대로 여기선 무슨 일을 당해도 구조하러 올 사람조차 없다.
그 모습을 보자 불쑥 장난기가 치밀었다.
"하긴, 뭔 일 벌어져도 아무도 못 올 곳이긴 하네."
"무, 무섭게 갑자기 그런 말을 왜하는 거야."
"너 사람 운명 본다고 했지."
"으, 응."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데, 혹시 네 운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있어?"
목소리를 깔면서 질문을 던지자 장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녀는 앉아있던 바위에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도, 도훈아. 진정해."
"왜? 난 아주 침착한 상태라고."
"무섭단 말이야!"
"풉-. 장난도 못 치겠네. 쫄지 마. 날 진짜 뭘로 보는 거야?"
"우이씨, 이게 진짜!"
긴장이 풀린 장군이 화가 난 나머지 내 팔을 세게 때렸다.
짝!
"무슨 그런 장난을 치고 그래? 진짜 무서웠단 말이야, 방금은."
"와, 귀신이랑 대화도 하는 사람이 별걸 다 무서워하네. 난 무당은 겁도 없는 줄 알았어."
"당연히 무섭지.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 나는."
"왜?"
"사건 사고 기사만 봐도 그렇잖아. 세상에 끔찍한 일이 얼마나 흔히 벌어지는 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참, 근데 진짜 네 운명은 못 보는 거야? 거울 보면 관상같은 건 보이잖아."
"잘 안 맞아."
"안 맞아?"
"왜, 옛날에 우리 세계에서 되게 용하다는 점쟁이가 하나 있었거든. 유력 정치인들도 대선 결과를 물어볼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어."
"정말?"
"응. 매스컴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으니까. 이쪽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이랄까?"
"갑자기 그 사람 얘기는 왜?"
"그 사람 아들이 교통사고로 어이없이 죽었거든. 고속도로 위에서 차가 고장 나서 갓길에 세워놓고 밖으로 나왔는데 하필 지나가던 트럭이 모르고 쳐버린 거야."
"아이고 저런."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들었어. 근데 그 용하다는 점쟁이가 그날 뭐 하고 있던 줄 알아?"
"뭐?"
"이름을 지어주고 있었다는 거야. 자기 하나뿐인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는 날에, 세상 태평하게 남의 짓 손주에게 작명을 지어주고 있더라는 거지."
"아···."
"네 말이 맞아. 중이 제 머리 못 깎고 점쟁이는 자기 운명에 대해선 알지 못해. 아니 안 보인다고 해야겠지. 가족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그렇구나. 아무튼 대답해 줘서 고마워. 너 오늘 중 방금 가장 말 많이 한 거 알아?"
"내가?"
"응. 이제 좀 내가 편한가 보다. 처음엔 말도 못 놨는데."
"그건···."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움직이자고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은데 서두르지 않으면 산속에서 조난당할 지도 몰라."
조난이라는 말에 장군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시각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아무리 산속에서 해가 빨리 떨어진다고 해도 아직 4시도 안 됐는데?"
"응?"
듣고보니 이상했다.
여름에 오후 4시면 해가 쨍쨍 뜰 시간이다. 낮이 긴 여름엔 아무리 산속이라도 7시는 넘어야 해가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늘은 금방이라도 해가 떨어질 것처럼 몹시 어두웠다. 나무에 가려 구름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조도는 아니었다.
"잠깐. 설마 저거 먹구름인가?"
"뭐, 뭐라고?"
하늘을 유심히 살피자 근방에서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짙은 구름이 해를 가리면서 날씨를 흐릿하게 만든 것이었다.
‘설마 소나기?’
[한여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아차!
등산 중에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못 했을까? 게다가 먹구름이 유달리 진한 것으로 보아 뇌우를 동반한 국지성 호우 같았다.
"일기예보 확인해봐. 지금 위치로."
"어, 어!"
장군이 핸드폰으로 보더니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 강수확률 100프로."
"100프로라고?"
투둑-
그때였다.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진 건. 굵은 물방울이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이마 위로 한 방울 떨어지더니 잠시 후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퍼붓기 시작했다.
"혹시 우산 챙겼어?"
그녀의 커다란 배낭이 제 몫을 해주길 바랬지만, 장군은 절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젠장, 일단 비 피할 곳부터 찾아보자."
아무리 여름이라도 비를 쫄딱 맞았다간 위험할 수 있었다. 자칫 계곡물이 불었다간 수해를 당할 수도 있었고, 설사 그게 아니라도 물 폭탄 같은 소나기를 고스란히 맞았다간 자칫 저체온증이 올지도 몰랐다. 나는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는 장군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수풀을 헤치고 나갔다.
이 비는 호재일까, 악재일까?
< 874. 처녀 보살-1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