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5. 처녀 보살-17- >
하늘이 뻥 뚫린 것처럼 빗방울이 쏟아졌다.
나뭇가지가 한 차례 완화 시켜주긴 했지만, 빗줄기가 거세지자 그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장군의 손을 붙잡고 미친 듯이 산속을 뛰어다녔다.
"허, 헉! 도훈아 좀만 천천히···."
장군은 유난히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리를 접질려 제대로 뛸 수가 없었던 것. 더구나 경사진 비탈길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자 진흙탕이 된 바닥이 유난히 미끈거리는 것도 문제였다.
"으앗!"
결국 땅으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린 장군이 크게 휘청였다. 넘어지려는 그녀를 겨우 붙잡았다.
"조심해. 바닥에서 눈 떼지 마."
"으, 응 고마워."
상황이 이쯤되자 아무리 나라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줄기차게 퍼붓는 비로 시야는 흐릿했고, 개척되지 않은 산속은 밀림처럼 우거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다시 등산로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고,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어디로 가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콰르르릉!
갑자기 천둥이 내리쳤다.
겁 많은 장군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울먹였다.
"도, 도훈아 우리 잘못되는 거 아니지?"
괜히 아까 조난 얘기를 꺼낸 탓에 장군은 잔뜩 쫄아 있었다. 귀신이랑 친구 먹는 주제에 천둥소리에 놀라는 모습이 살짝 귀엽기까지 했다.
"걱정마. 분명 어딘가 비 피할 곳이 있을 거야."
그저 안심시키려 내뱉은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뇌우로 멘탈이 흔들리긴 나 역시 마찬가지. 플레이어로 다시 태어나 지금처럼 무능력하게 느껴진 순간은 처음이었다. 잠깐 지나가는 비면 좋으련만,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는 더더욱 거세졌다. 지나가는 소나기라기보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전야제같았다.
‘로시, 뭐라도 방법을 알려줘. 이대로 비를 쫄딱 맞는 수밖에 없는 거야?’
[우산용도의 아이템이 있긴 합니다만···. 아깐 없다고 했다가 갑자기 생겨나면 장군 양이 주인님을 의심하지 않을까요? 만에 하나 주인님의 정체를 들켰다간 지금 비를 맞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요.]
‘젠장.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보는데 커다란 바위 사이로 사람 하나가 드나들 수 있는 틈이 보였다.
‘어라? 저게 뭐지?’
유심히 보지 않으면 바위와 바위 사이 단순한 균열처럼 생겼지만, 본능적으로 그곳이 어딘가로 통하는 입구임을 직감했다.
"장군, 저기 봐!"
"어, 어디?"
"앞에 바위틈 보이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저길 어떻게?"
장군이 내키지 않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꽈과광!
그때 또 다시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가까운지 소리가 원체 커 주변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계속 여기서 있다가 벼락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일단 들어나 가보자."
한 번 더 장군을 설득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장군도 하는 수 없다는 듯 나를 따라 동굴로 진입했다.
몸을 옆으로 돌려야 겨우 들어갈 비좁은 입구.
등에 멘 배낭을 손에 쥐고, 게걸음으로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좁은 입구를 지나가 내부의 빈 공간이 드러났다. 핸드폰 후레쉬로 조명을 비추자 인공적으로 조성된 토굴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장군이 놀라 물었다.
"여, 여긴 대체···."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이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갔다.
"빨치산들이 파놓은 동굴 아닐까?"
"빨치산?"
나는 간략하게 과거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리산에 숨어든 그들은 추적을 피하기위해 산 곳곳에 숨을 곳을 조성했다고 한다. 아마 그중 하나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리라.
"아···. 그, 그럼 이 동굴에 주인이 있다는 말이야?"
"걱정 마. 빨치산들은 예전에 다 소탕되었으니까. 오래전에 파놓은 굴이 수색 당시 발견되지 않고 묻힌 모양이야."
"근데 어떻게 안쪽에 굴이 있다는 걸 알았어?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장군이 놀랍다는 듯 물었다.
나역시 순전히 직감이었기 때문에 딱히 근거는 없었다.
"···운이 좋았나 봐."
[플레이어의 기민한 감각이 발동한 것 같군요. 위기 상황에서 펼쳐지는 직관력이요.]
‘나도 그거 같아. 솔직히 겉으로만 봐선 토굴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거든. 근데 직감적으로 그냥 안이 비어 있을 것 같더라고.’
"으으."
비를 쫄딱 맞은 장군이 갑자기 스스로 몸을 껴안더니 으슬으슬 떨기 시작했다. 소나기는 피했지만, 이미 젖어 버린 옷 때문에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추, 추워."
"잠시만. 불 지필 것이 있는지 찾아볼게."
핸드폰 플래시를 켠 채 이곳저곳 사방을 비췄다. 임시 대피용으로 만든 토굴이기 때문인지 내부는 텅 빈 동공이었다. 사람이 지나 든 흔적이라곤 드문드문 벽에 보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들고 온 가방에서 텐트용 랜턴을 꺼냈다. 미약한 핸드폰 불빛으로는 광량이 적어 전체를 비추기 힘들었다. 더구나 만약을 대비해 유일한 구조장비가 될지도 모를 핸드폰 배터리를 아껴야할 타이밍이었다.
‘혹시 몰라 등산용품점에서 사놓길 잘했네.’
텐트용 랜턴을 세워 토굴 중앙을 비추자 주변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전체적인 크기를 가늠한 동굴은 생각보다 내부가 넓었지만 천장이 낮은 편이라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 머리를 찧을 정도였다.
"혹시 배낭 안에 여벌로 옷 챙겨온 거 있어?"
장군이 오한이 도는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대답했다.
"이, 있을 거야. 안쪽에."
나는 흠뻑 젖어있는 그녀를 대신해 커다란 배낭을 뒤졌다. 안에는 그녀가 말한 제기 도구와 그릇에 담을 음식들, 그리고 청주가 들어있었다.
"술? 이게 왜 여기 들어 있어?"
"처, 천도제 지낼 때 올릴 술이 필요해, 했어."
"잘됐다. 이거라도 좀 마시고 있어. 몸을 따듯하게 데워 줄 거야."
"가, 갑자기 여기서 술을 마시라고?"
"너 러시아 애들이 왜 독한 보드카 마시는지 몰라? 겨울이 너무 추워서 얼어 죽지 않으려고 마시는 거잖아. 술을 마시고 나면 몸이 좀 뜨끈해질 거야."
"근데 나 진짜로 술 못 마시는데···."
"저체온증 오면 그게 더 위험해. 조금이라도 마셔 둬."
"아, 알았어."
마개를 딴 장군이 잠시 망설이더니 병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쯤 배낭 깊숙이 있던 장군의 옷을 찾아냈다. 겉에 걸쳐 입을 얇은 잠바였다.
"설마 이게 전부야?"
"으, 응. 밤에 추울 때 껴입으려고 챙겨왔어."
"급한 대로 이거라도 입어."
"넌? 넌 안 추워?"
"난 남자니까 괜찮아. 나도 술이라도 줘."
사실 나도 몸이 으슬으슬하긴 했다. 비로 인해 기온이 하강하고 몸이 젖은 탓도 있지만, 동굴 내부가 유난히 서늘했다.
그러나 나보다도 장군의 상태가 훨씬 심각해 보였기에 참는 것뿐이었다. 장군은 젖은 등산복 위로 잠바를 걸쳤지만, 여전히 이빨을 부딪칠 정도로 심하게 떨어댔다. 금방이라도 오한이 들것 같았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젖은 옷을 벗는 편이 좋겠어."
"버, 벗으라니?"
"그것 때문에 계속 몸이 떨리는 거잖아. 겉에 잠바를 껴 입어 봐야 뭐해. 안에 입은 옷이 다 젖었는데."
"아, 아니 그래도···."
장군은 옷을 벗으라는 소리에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저히 추위를 참을 수 없었는지 이내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뒤, 뒤돌아서 줘."
"알았어."
내가 벽을 향해 돌아서자 곧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조차 하지 않은 장군의 몸이 몹시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발생한 이번 사태를 어떻게 내 쪽으로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를 피한다고 동굴로 뛰어들어오긴 했는데, 어쩌면 여기가 산장보다 더 가능성 높은 거 아냐?’
[설마 이 와중에 공략에 들어가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이런 눅눅하고 지저분한 토굴에서요?]
‘장소가 중요하냐? 마음만 먹으면 눕는 곳이 곧 침실이지.’
[아니 그래도요.]
‘일단 저러다 감기라도 들면 큰일이니 몸에 열을 낼 수단부터 찾아야 해. 어디 모닥불이라도 피울 게 있으면 좋겠는데.’
[아이템이 있습니다.]
‘뭐? 모닥불 아이템이 있어?’
[외형만 모닥불일 뿐 사실 야외형 난방기구의 일종입니다. 장작처럼 생긴 나무토막에 불을 붙이면 내부에서 가스가 배출되면서 계속 타오르게 됩니다. 불에 타지 않는 신소재로 이루어져, 가스만 충전하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요.]
‘없는 게 없구만? 그런 걸 누가 쓴다고 만들었데?’
[과학이 발달한 천상계 거주민들도 가끔 전통적인 방식의 캠핑을 즐기거든요. 그 대용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놀랍다 정말. 근데 여기서 갑자기 장작을 꺼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머리를 쓰셔야죠. 장군은 정신이 없어서 이 동굴에 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에 숨었던 사람이 남겨놓은 거라고 둘러 대십시오.]
‘아, 그렇게하면 되겠다.’
그사이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장군이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다, 다 입었어."
"잠깐. 동굴 안쪽에 뭔가 있는데?"
"뭐, 뭐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어둠 속에서 뭔가를 들어 올렸다. 등 돌려 있는 사이 가방을 매개로 전송한 모닥불 아이템이었다.
"장작이야! 장작이 몇 개 쌓여있어!"
"자, 장작이라고? 진짜?"
"어. 일전에 숨어있던 사람이 추워서 불을 피웠었나 봐. 잘하면 불을 붙일 수 있겠는데?"
추위에 떨고 있던 장군은 장작이 왜 있는지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빨치산이 파놓은 게 맞다고 가정한다면, 이미 장작은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아이템으로 꺼내 장작을 가슴 한가득 잔뜩 집어와 동굴 가운데 쌓았다. 장작을 빙 둘러 세워, 모닥불 형태를 만들자 장군이 물었다.
"그, 근데 이거 어떻게 피워? 불이···."
"내가 흡연자라는 걸 잊었어?"
"아···. 맞다. 라이타가 있구나."
하지만 눈앞에서 불을 붙이는 건 불가능했다.
로시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토막의 질감을 보이는 이 신소재 아이템은 내부에서 미량의 가스가 세어 나와 자연스러운 불길을 연출한다고 한다. 만약 라이터 불을 붙인다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닥불이 타오를 거고, 아무리 정신이 없는 장군이라도 이것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 가방 안에 대학 노트가 들어있을 거야. 그걸 태우면 되겠다. 깜빡하고 넣어서 왔는데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어."
"그, 그거 중요한 거 아니야?"
대학 노트를 태운다는 말에 장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쿨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지금 그런게 중요하겠어?"
물론 가방 안에 대학 노트가 들어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 학교 다닐 때 메던 가방이긴 하지만, 등산용품을 넣느라고 다 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가방은 손만 집어넣으면 무엇이든 꺼내지는 도라에몽 가방이다.
‘로시, 아무거나 글씨 빼곡하게 적힌 노트 한 권만 아이템으로 구매해 전송해줘.’
[알겠습니다.]
로시가 전송한 아이템을 꺼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대학 노트였다. 나는 라이터를 꺼내 노트 종이를 찢어 불을 붙였다. 그리곤 모닥불 안으로 하나씩 밀어 넣었다. 장작 당 가스 배출량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은 천천히 붙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노트 한 권을 모조리 태웠을 때쯤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고, 이내 동굴 안은 더이상 텐트용 랜턴이 필요 없을 만큼 훤히 밝아졌다. 차갑게 식은 몸을 훈훈히 데우는 열기 또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도훈아, 대단해. 여기서 불을 피울 줄이야."
"운이 좋았지. 누군가 장작을 쌓아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장군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한껏 불을 쬐었다.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지 덜덜 떨던 오한증세도 사라졌고, 시퍼렇던 입술도 점차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보는 눈빛이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해낸 나에 대한 호감도가 많이 높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오히려 호재가 되었군.’
[근데 소나기가 맞긴 한 걸까요? 너무 오래 내리는 데요?]
‘몰라. 언젠간 비는 그치겠지. 우선 장군에게 점수를 땄다는 게 중요해.’
"옷도 좀 말려. 나중에 다시 입어야 하니까."
"으, 응."
장군이 배낭을 세워 그 위에 젖은 등산복을 넓게 펼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가 아무것도 입지 않는 맨살 위에 얇은 잠바하나만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저 후드 짚업의 지퍼만 내리면 그대로 속살이라는 소린데.’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비에 젖은 장군의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달라붙은 게 섹시하게 느껴졌다. 잠바를 입고도 묵직한 볼륨감을 드러낸 폭탄 같은 가슴은 말할 것도 없다. 뜨거운 열기에 기분이 이상해진 걸까? 몸에서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몸이 왜 이렇게 뜨겁지?’
[아차! 아까 술을 마셨지 않습니까?]
‘억! 맞다. 모닥불 때문에 피가 빨리 돌면서 술기운이 훅 퍼지는 구나. 가만, 나만 술을 마시진 않았는데?’
장군을 보자 그녀의 얼굴도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이 약하다고 했던 말이 정말인지, 아니면 나보다 훨씬 많은 양을 마셨는지 취기가 오른 장군이 모닥불 앞에서 몸을 살짝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장군이 살짝 늘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갑자기 잠이 너무 오는데."
< 875. 처녀 보살-1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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