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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477화 (450/2,000)

< 459. 교생 실습-3- >

"하, 할 말이요? 그, 그러니까···."

도훈은 속으로 씩 웃었다.

태영의 머릿속 생각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떡하지? 아무래도 내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난 분명히 대물 배트맨이 도훈이 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목소리만 비슷한 사람이었나 본데? 아아, 형이 정말 배트맨이면 무릎을 꿇어서라도 섹스킬을 전수 받으려고 했건만, 형이 배트맨이 아니니 나도 로빈은 못 되겠구나.}

"응. 너가 학교에선 말 못 할 중요한 얘기 때문에 불렀다면서?"

도훈의 계속되는 압박에 태영은 일단 눈 앞의 파르페를 원샷으로 들이켰다. 음료를 마셔도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젠장! 아무리 봐도 저 사진들은 명백한 증거잖아. 이건 혼자 착각해서 병신 짓 한 거라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태영은 한숨 돌리면서 시간을 벌려고 했으나 도무지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후후. 주인님의 판단대로 사진 편집기 어플이 주효했군요.]

‘그러게. 정말 감쪽같네. 누가 봐도 현장에서 찍을 줄 알겠어.’

[설사 포토샵 전문가라도 눈치 못 챌 겁니다. 천상계의 기술력은 10만분의 1나노 단위까지 정교히 편집해 내니까요.]

‘그나저나 태영이 저 자식 때문에 내 피 같은 1000포인트를 날렸잖아? 근데 뭐? 로빈? 정말 나한테 여자 후리는 기술이라도 배우려고 한 건가? 불쌍한데 한 번 거둬 줘 볼까?’

[아니 될 말씀입니다. 주인님이 대물 남인 걸 들켰다간 대학 생활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약점을 공유하는 건 현명한 판단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야. 오죽하면 저러겠나 싶어서. 옛날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과거의 주인님보다야 낫죠. 태영 군이 실속 없긴 하지만 풀 발기 5cm는 넘을 것 아닙니까?]

‘어쭈, 너 말 다 했냐?’

"혀, 형. 저 좀 도와주세요."

"뭘?"

"제가 실은···. 이거 어디 가서 절대 얘기 하심 안 돼요."

"나 원래 남 얘기 잘 안 하잖아. 뭘 도와달라는 건데?"

"제가 2학년에 좋아하는 선배가 생겼거든요."

"진짜?"

"네. 근데 친해질 방법이 없어 가지고 염치없게 형이 다리 좀 놔줬으면 해서···."

태영이 끝내 떠올린 것은 연애 상담이었다.

그편이 가장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정말? 2학년 중에?"

"네."

"2학년에 여자애라곤 둘밖에 없잖아? 그중 자영이는 남자친구 있을 거고, 혹시 너 설마···."

태영도 아무렇게나 지어낸 핑곗거리가 아차 싶었는지 이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제 와 발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그대로 밀어붙였다.

"마, 맞아요. ···현미 누나예요."

태영이 똥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현미? 진짜로 우현미?"

"네."

도훈은 속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었다.

‘푸핫. 애 지금 뭐래냐? 세상에 메갈 우현미를 짝사랑한다고 지껄이는 건가?’

[주인님도 일전에 관계하지 않으셨던가요?]

‘그건 빽보 위업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 뒤론 인연의 붉은 실 가위로 바로 잘라 버렸잖아. 우리과에 하고 많은 예쁜 여자애들 놔두고 빽보 우현미라니···. 태영이가 제 욕심에 자충수에 걸렸군.’

"음, 근데 난 현미랑 별로 안 친한데?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부탁을?"

도훈이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자 태영이 움찔 놀라며 허둥지둥 핑계를 댔다.

"어··· 실은 제가 우연히 학과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까 형이랑 현미 누나랑 같은 실습 학교더라고요. 다음 주부터 실습 맞죠?"

앗,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성수가 분명 다음달이라고 한 것 같은데···.

[시험 기간이 4월 말이었으니 5월이면 틀린 말은 아닌데요?]

‘그렇네. 어린이날이랑 겹쳐 연휴가 끼는 바람에 시간이 훅 가버렸구나. 3학년 끝나고 2학년 차례니까 대충 맞겠다.’

"응. 근데 나 말고도 다 부설로 가지 않아?"

도훈의 물음에 태영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반문했다.

"형, 부설 아니던데요?"

"뭔 소리야? 다른 학교는 신청도 안 했구만?"

교생 실습은 따로 별개의 학교를 신청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부설 고등학교로 배정된다. 그러나 태영은 도훈의 상식을 뒤집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게 저도 선배들한테 우연히 들었는데, 인근 중학교에서 올해 부설 대용 신청을 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학과마다 교생을 두 명씩 보내기로 했는데 저희 과는 아무도 신청을 안 해서···."

"안 해서?"

"그래서 교수님이 그냥 2학년 가운데 두사람을 임의로 배정했데요. 그게 현미 누나랑 형이에요. 아, 모르셨구나. 일본에 계셔서 연락이 안 닿았을 테니···. 형 일본 떠난 다음 날 게시판에 공고 떴잖아요."

난데없는 소식에 도훈은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부설 고등학교는 대학교에 바로 붙어 있어 거리상 가깝기도 하고, 난생 처음인 교생 실습을 동기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부담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거기다 자신으 편의를 봐줄 송지희도 있고.

그런데 타학교 배정이라니!

그것도 인연의 붉은 실로 관계를 끊어 낼 만큼 매력이라곤 거기 매끈한 거 말고 전혀 없는 우현미와 단 둘이!

도훈은 억하심정에 태영에게 따지고 들었다.

"왜? 왜 하필 난데?"

"저, 저야 모르죠. 조교 샘이 한명씩 일일이 물어봤는데 다들 싫다고 해서··· 연락이 안 닿은 도훈이 형이 당첨된 것 같기도···."

"하-! 그럼 조교 샘이 나를 골랐다는 소리야?"

"아뇨. 뽑기는 교수님이 뽑았죠. 조교샘은 시키는 데로 연락만 돌렸고."

‘으으! 이 강민주 천하에 융통성 없는 년. 연락이 안 되도 됐다고 뻥 치면 될 것을···.’

도훈은 애먼 민주를 원망했다.

"근데 새 학교라서 인기가 없는 건가? 왜 사람들이 거길 지원 안 했는데?"

"아, 대광중학교요?"

"학교 이름이 대광중이야?"

"거기 남중 이거든요."

***

두둥-!

청천벽력이 이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

남중이라고? 부설고처럼 공학도 아니고, 산삼보다 좋은 고삼이 즐비한 여고도 아니고.

남중? 나아아암 중?

"나, 남중?"

"네. 저희과 2학년들은 유난히 남자가 많잖아요. 그래서 남중 가는 걸 다 꺼린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선배들 말 들어 보니 고등학교가 훨씬 가르치기 편하데요. 중이병 단체로 걸린 남중은 정말···."

태영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냥 치를 떨었다.

하지만 정말로 울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다.

"태영아 잠깐만 나 민주, 아, 아니 민주 샘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

"조교샘요?"

"어. 잠깐 있어 봐 담배 좀 피우고 올 테니까."

나는 까페 흡연실로 이동해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이라도 실습학교를 바꾸지 않으면, 나의 첫 교생 실습이 중이병 녀석들의 사타구니에서 퍼지는 밤꽃 냄새에 질색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인님! 얼마나 연락을 기다렸다구요! 일본에서 오시자마자 저한테 전화하신 거예요? 지금 나갈 채비 할까요?

민주는 답답한 내 속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나를 반겼다.

"야. 강민주."

-네?

"내가 왜 남중으로 배정받았지? 교생실습."

-아, 그게···. 교수님이 멋대로 선발해 가지고···.

"솔직히 말 안 해? 너가 중간에 통빡 굴린 거 아냐?"

-제가 뭘요?

"부설에 송지희 있잖아. 걔 의식해서 나 다른데로 떨어뜨리는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예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

민주가 발뺌했지만, 나의 직감은 민주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미필적 고의가 작용한 의도적인 실수가 분명하다.

"됐고. 지금이라도 바꿀 방법 없어?"

-그게···. 연휴 전에 교육청에 명단 제출했는데, 이미 학교로 공문이 나갔을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변경을 해보겠는데, 교육청까지 관련된 일이라 절차가···.

"아오! 너 진짜!"

-주인님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민주는 절대란 단어에 힘을 빡 주며 부인했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욱 의심스러웠다.

‘두고 보자. 내가 나중에 마음의 소리 들어서 진심을 알아내고 만다.’

-그리고 주인님. 저도 교생 실습 많이 다녀봤지만, 의외로 남중도 좋아요. 특히 체육 수업은 운동만 같이 시켜주면 되니까 애들도 엄청 말도 잘 듣고요.

씨뎅, 그게 말이냐 막걸리야?

머리 빡빡 깎은 중학생 남자 새끼들 보는 게 뭐가 좋겠어?

달리기할 때 출렁이는 여고생 슴부먼트를 구경하는 게 나의 로망이었는데···. 아아! 나의 첫 교생 실습이···.

"어으. 너 나중에 보자."

-예? 오늘은 안되고요?

"나 귀국한 지 한 시간밖에 됐다. 오늘 엄청 피곤해."

-히잉···. 주인님만 오매불망 기다렸···

뚝-

나는 홧김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흡연실에서 나오니 태영이 물었다.

"조교 샘이 뭐래요? 바꿀 수 있데요?"

"아니. 이미 공문 나가서 철회 불가래. 나참···."

"형, 너무 안 좋게만 생각 마세요. 인생사 새옹지마라잖아요. 좋은 일인 것 같았는데 나쁠 수도 있고, 반대로 나쁜 일인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론 좋을 수도 있죠."

음? 모처럼 태영이 맞는 말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역시 나의 로빈인 건가?

[주인님. 제자로 받아 줄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제자까진 아니고···. 생각해보니 나는 여자들 실컷 따먹고 다녔는데 태영이도 하나 쯤 새끼 쳐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기도.’

[우현미 양 말입니까?]

‘그렇지 뭐. 내가 먹다 버린애긴 한데, 어쨌든 인연을 잘라냈으니 줘도 아깝진 않을 것 같고···.’

아마 태영이 찍은 여자가 나연이나 연두, 혹은 정음이라면 택도 없는 일이다. 아니 희주도 주기 아깝다.

하지만 메갈 우현미라면 딱히 기분 나쁠 건 없었다.

"그래 뭐, 기왕 하는 교생인데 어딜 가든 뭔 상관이겠어. 그냥 중딩들하고 재밌게 뽈이나 차고 놀지 뭐."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 편하죠."

"참, 그리고 현미도 같은 학교니까 일단 내가 어떻게든 다리 놔줘 볼게."

"아, 아 굳이 무리 안하셔도 되요. 현미 누나랑 별로 안 친하시다면서요."

"아니야. 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어. 현미도 나름 괜찮잖아?"

메갈이란 걸 빼면.

"아···. 네, 뭐 예. 해주시면 저야··· 감사죠."

"다음에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아볼게. 기왕이면 술 자리로."

"수, 술자리까지···. 어쨌든 감사해요."

"근데 태영이 네가 현미한테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다. 오늘 말 잘했어."

"고, 고마워요 형."

전혀 고맙지 않은 표정으로 태영이 말했다.

어쨌든 태영의 의심도 풀었으니 나로선 오늘은 만남이 손해는 아닌 셈이다.

태영과 헤어진 뒤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긴 연휴도 끝나자마자 다음 주 부턴 교생 실습이다.

근데 내가 누굴 가르칠 실력은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닥치면 하겠지.

***

다음날.

오전 수업을 마친 도훈은 실습학교를 사전 방문했다.

자신이 배치받을 학반을 정하고 실습 담당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 첫 대면이었다.

도훈이 배속된 학년은 2학년. 그야말로 중이병의 끝을 달리는 2학년이라는 데서 도훈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씨발. 오기도 싫은 남중에 하필 또 2학년이라니. 근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늦지?’

도훈은 2학년 교사 휴게실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할 일이 없어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를 맞이한 2학년 학년 부장은 업무가 바쁜지 도훈을 앉혀놓고 계속 컴퓨터만 두들기고 있었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며 새로운 인물을 등장했다.

늘씬한 몸매에 유독 알이 큰 안경을 쓴 젊은 여성이었다.

"부장샘, 오늘 실습생 온다면서요?"

"현아샘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교사가 체통을 지켜야지."

부장이 언짢은 듯 혀를 끌끌 찼지만, 현아라 불리는 여자는 부장을 무시하고 신병을 맞이한 고참처럼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 벌써 와 있었네? 무슨과?"

"체육과입니다."

"아항, 어쩐지 몸이 좋다했지. 잘 부탁해요. 난 2학년 3반 담임인 정현아. 과목은 음악이고."

현아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만큼 화통한 성격으로 보였다. 이지적인 외모에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몸사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좀 날티나는데?’

[교사한테 날티가 뭡니까?]

‘왜? 여교사는 거기 금테라도 둘렀다던? 벗겨놓음 다 똑같지.’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만 할까요. 해외까지 진출하신 분인데.]

‘비꼬지 마라.’

"근데 학생은 기본이 됐구나?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서 기다릴 줄도 알고."

"아, 제가 수업이 좀 일찍 끝나가지고···."

"어머, 겸손하기까지."

현아가 계속 도훈에게 추근덕거리자 공문을 처리하고 있던 부장이 끝내 한 소리 했다.

"현아 샘. 교육청에 보고 하기로 한 기안 올렸어? 오늘 오후까지 잖아."

"아 그거, 이제부터 하려고요."

"교감 선생님이 임박해 올리지 말고 미리미리 좀 하라잖아. 결제 하는 데 읽어볼 시간도 안주냐면서."

"치-."

현아는 부장의 핀잔에 대놓고 삐진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남 잘되는 꼴을 못 봐요."

"뭐라고?"

"아니에요. 그럼 교무실 가서 공문처리 하고 올게요. 있다 봐, 잘생긴 교생?"

폭풍처럼 등장했다 퇴장하는 현아를 보고 부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도훈이라고 했지? 내가 대신 사과함세. 시집 못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요샌 젊은 남자만 보면 저렇게 추태를 부리더란 말이지. 평소엔 참 괜찮은 사람인데 말이야."

"아니요 뭐."

"참된 교사란 말이야, 실습에서부터 딱 티가 나는 법이야. 무쪼록 첫 실습이니 만큼 다른데 한눈 팔지 말고 학생들에게만 최선을 다해주게."

"넵."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근데 이 좋은 냄새는 뭐지? 아, 방금 정현아 몸에서 나던 냄새구나. 상당히 매혹적인데?’

[방금 조언을 듣고도 그러십니까?]

‘생각해 보니 여자가 꼭 학생들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 459. 교생 실습-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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