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0. 교생 실습-4- >
잠시 후 2학년으로 배속된 타과 학생들이 하나둘 교사 휴게실로 모여들었다. 모두 열 한 명이었는데 그중엔 같은 체육과인 우현미도 있었다.
현미를 제외한 여자는 모두 일곱.
도훈은 자신을 포함 4:8이라는 이상적인 남녀 성비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범대 특성상 우리 과를 제외하면 대부분 여초겠구나.’
[남자 하나에 여자가 두 명인 꼴이군요.]
‘무슨 소리야?’
[아뇨, 성비가요.]
‘남자 하나에 여자가 여덟이라고 해야지. 흐흐.’
[이런 욕심쟁이!]
도훈은 남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여자들을 우선해 살폈다.
‘쟤는 너무 뚱뚱하고. 쟤는 너무 못생겼고···. 뭐야? 저 여잔 장수생인가? 왜 저렇게 늙었어?’
입맛대로 여자들을 쳐내다 보니 제법 봐줄만 한 외모의 여성은 3명 정도.
‘크크. 체육과 밖에도 괜찮은 애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처음보는 얼굴이라 더 신선한 것 같기도 하고.’
도훈은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부장이 말했다.
"이런, 사람이 열명 넘게 모여있으니 휴게실이 비좁구만. 옆에 미술실로 잠시 자리를 옮기지."
"네."
교생 실습생 12명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부장이 대표 격으로 교단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비교사 여러분. 저는 대광중학교 2학년 부장 나종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부장은 실습생들의 긴장된 면면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2학년이면 다들 첫 실습이죠?"
"네."
"듣기론 이번 실습은 참관 위주로 한다던데 맞나요?"
"네, 근데 한 번씩은 수업을 해야 한다고···."
"아아, 네 그렇죠. 저희 학교도 올해 처음 실습생을 받는 거라 가지고···. 일단 2주간 함께할 학반 선생님들 소개해 드릴게요."
부장이 말을 마치자 그 뒤에 도열하고 있던 교사들이 하나씩 나서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2학년 2반 담임인 이채경이에요. 과목은 도덕입니다."
도훈은 1반부터 6반까지의 교사 소개를 들으며 면면을 확인했다. 역시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먼젓번 휴게실에서 만났던 정현아였다.
"와! 요새 대학생들은 다들 잘생기고 예쁘네요. 우리 땐 임용에만 찌들어 가지고···."
"정현아 선생. 소개만 하세요."
"오랜만에 후배들 보니까 신기해서요. 반가워요. 저도 국성대 나왔어요. 다들 제 후배 맞죠?"
"쫌, 현아 샘!"
"쳇."
현아가 까불거릴 때마다 부장이 제지했다.
‘왠지 저 둘은 앙숙인 것 같은데?’
[근데 정현아라는 분은 확실히 튀는 성격이긴 하네요. 다른 분들은 다들 점잖아 보이는데.]
‘그래? 난 오히려 활기차서 좋은데? 교사라고 너무 고리타분하면 재미 없단 말이지.’
교사 소개까지 끝나자 부장이 다시 가운데 서서 교통정리를 했다.
"자, 오늘은 첫 날이니까 참관 학반만 배정하고 마치도록 하죠. 오전에는 학급 경영, 오후에는 전공과목 수업 참관 방식인 거 알죠?"
"혹시 체육과가 누구지?"
얼굴이 시꺼먼 남자 선생의 질문에 도훈과 현미가 손을 들었다.
"오후 수업은 주로 운동장에서 있으니까 내일 썬크림 듬뿍 바르고 와. 안 그럼 나처럼 얼굴 타."
"김 선생님. 교생선생님들에겐 되도록 존댓말로."
"아, 네, 네. 제가 교생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부장이 다시 주의를 주었다.
"다들 주의하세요. 학생들 앞에서 후배라고 편하게 반말하면 학생들도 교생선생님들께 존경심을 갖기 어려워요. 사적인 자리에서야 형,동생 할 수 있지만 언제나 학생 앞에선 같은 선생님으로 대우해 주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음, 부장 선생은 진짜 꼰대 같은 성격이구만.’
[하지만 무릇 선생이라면 저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장 반에 걸리면 엄청 피곤할 것 같은데···.’
"학반은 가나다순으로 배정했습니다. 기운찬 선생님이랑 김영미 선생님이 1반···."
이름순으로 끊다 보니 도훈은 4반에 배속을 받았다. 3반인 정현아는 도훈이 바로 앞에서 끊기자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이런 건 상의 좀 하고 결정하셔야죠, 부장님."
"뭐가?"
"칫."
"그리고 이도훈 선생님은 우현미 선생님이랑 같이 4반이에요."
‘억, 빌어먹을! 왜 교생까지 와서 현미랑!’
도훈 역시 낭패감에 젖어 있는데 아까 그 체육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부장 선생님. 근데 저 둘 다 체육과라지 않았나요?"
"응?"
"같은 전공자들을 한 반에 넣으면 나중에 수업이 겹칠 텐데요?"
"아, 그렇네. 이름순으로 그냥 끊다 보니···. 가만있자···."
부장은 명단을 훑더니 그 자리에서 반을 조절했다.
"3반의 도종우 선생님이랑 이도훈 선생님이 반을 바꾸면 되겠군."
"아싸!"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정현아를 향해 부장은 또다시 쯧쯧 혀를 찼다. 그렇게 모두 반 배정이 끝났다.
"일단 내일은 각 담임 반에 가서 아침 활동 참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장은 당연히 준수해야 하는 거 알죠? 나이가 아직 어리니 중학생 애들이 형 누나 보듯 할 수 있어요.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선생은 선생다워야죠. 조금 덥더라도 다들 정장을 갖춰 입도록 하세요."
"네."
"그럼 내일 전교 조회 때 인사할 대표 교생분 뽑고 오늘은 해산하겠습니다. 그리고 2학년 선생님들은 잠시 휴게실 모여서 실습 계획 좀 정리하죠."
부장을 따라 2학년 선생들이 모두 나가자, 그제야 긴장했던 교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아직 학생들도 못 봤는데 분위기 장난 아니네."
"확실히 실습 나오니까 너무 낯설다."
"반가워요. 서로 잘 모르는데 우리끼리 소개라도 할까요?"
사람이 열둘이나 되는 데다 전공도 제각각이라 어색하기는 교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도훈이 잠자코 눈치를 살피는 사이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남자 하나가 분위기를 주도했다.
"사회과 임달영입니다. 다들 바쁠 테니 대표 교생만 얼른 뽑고 집에 갈까요?"
"달영이 형이 해요. 형이 젤 연장자잖아요."
"에이, 나이순으로 하는 게 어딨냐? 참, 대표 교생은 실습점수 추가로 받는 건 다들 알고 있죠? 이것도 나름 학점에 들어가니까 기왕이면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걸로 해요."
점수에 들어간다고 하니 사범대생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비록 1학점짜리 실습 과목이긴 하지만, 유난히 학점에 목을 매는 내신 쟁이들이라 그런지 다들 욕심을 내는 모양새였다.
‘음. 학점 잘 받으려면 도전해야 하나?’
[괜히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감투를 그냥 씌워주진 않을 텐데요. 근데 참관 실습에도 점수가 있나요?]
‘그렇지. 어쨌든 담임 교사가 평가하니까. 아, 맞다. 내 담임이 그 정현아라는 그 여자였지?’
도훈은 자신에게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현아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번 실습은 날로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흐. 어차피 참관인데다 담임 평가면 엿장수 맘대로라는 소리잖아? 차라리 그 여자를 구워삶는 쪽이 빠르겠는데?’
그때 머뭇거리던 실습생 중 한 여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제가 해볼게요."
당찬 태도만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수학과 16학번 오진아에요."
도훈이 빠르게 진아의 몸매를 훑었다.
‘오, 가슴 큰데? 설마 뽕은 아니겠지?’
[확인해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 쓰리사이즈 스카우터가 있었지?’
도훈은 주머니를 뒤져 평범한 뿔테 안경을 꺼냈다.
그리고는 안경을 착용하며 진아의 몸매를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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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뽕은 아니네. 수학과에도 저런 인재가···.’
그때 옆 자리에 있던 현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훈 오빠, 원래 안경 쓰셨어요?"
"어?"
생각해 보니 체육과 전공 수업을 들을 때 안경 쓴 모습을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도훈이 황급히 대답했다.
"원래 책 볼 때 쓰긴 하는데 갑자기 눈이 침침해서."
"아···. 잘 몰랐어요."
"그나저나 아깐 정신없어서 인사도 못 했네."
"네."
인연의 붉은 실 가위로 관계가 초기화되었기 때문인지 현미는 도훈을 보고도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진아 뒤로 두 명의 학생들이 더 손을 들었으나, 퍼스트 팽귄의 용기 때문인지 대부분 그녀가 교생 대표를 하는 데 동의했다.
교생 대표로 뽑힌 진아가 말했다.
"종이에 학과랑 이름 전화번호 좀 적어 주고 가세요. 제가 친추해서 단톡방 초대할게요. 혹시 전달 사항 있으면 앞으론 그걸로 대신해요."
진아는 모임 대표가 익숙한지 신속히 일 처리를 했다. 정리가 모두 끝나고 해산하려는데 갑자기 한 여자가 도훈을 향해 물었다.
"저기, 3반 배정받은 선생님 맞으시죠?"
"네."
"아, 저도 같은 3반인데···."
긴 머리를 뒤로 묶은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아, 반가워요. 체육과 이도훈입니다. 나이는 23이고요."
"아, 오빠시구나."
"그쪽은···."
"전 교육학과 박혜진이라고 해요. 스물 하나구요."
"그냥 교육학과요?"
"···네."
혜진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교육학과는 별도의 전공 없이 "교육학" 자체를 다루는 사범대 학과로, 나중에 임용을 위해선 타과 전공을 복수로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통상 "그냥 교육학과".
살짝 비하가 담긴 표현이라는 걸 깨달은 도훈이 쑥스러워하는 혜진의 반응에 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저도 교육학 좋아해요. 교육학 개론 되게 재밌게 듣고 있어서."
"그러세요? 혹시 어떤 교수님이세요?"
"성함이 정영철 교수님이던가?"
"네네! 저도 그 수업 들어요."
"그랬어요?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학생이 워낙 많으니까요. 저희 근데 담임 선생님한테 간다고 인사는 드리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도훈은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혜진의 몸매가 고스란히 렌즈에 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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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얘는 귀염상이긴 한데 너무 절벽이군.’
[왜요? 얼굴은 예쁘장한데요. 몸매로 사람 평가하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내가 원래 등반을 좋아해서 말이지. 저기 오르다간 추락사 할걸?’
[근데 주인님은 너무 잿밥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설마 학교에서 일을 벌이시려는 건 아니죠?]
‘흠, 아직까진 뭐 탐색전이지. 장소가 바뀌었으니 미션이 등장할 때도 됐고 말이야.’
[역시 철두철미하신 분!]
‘그리고 생각해 보니 어차피 여고를 가던 공학으로 배정받았던 학생들은 그림의 떡일 거 아니야?’
[그렇죠. 신께선 현행법을 준수하시니까요. 아청법에 저촉되는 행동은 자칫 신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은 어차피 의미 없어. 오히려 학교 선생이나 다른 과 교생을 노리는 편이 낫지.’
도훈은 어제 태영이 까페에서 해준 말이 떠올랐다.
-형, 인생사 새옹지마라잖아요.
‘크크. 오랜만에 맞는 말 했구나, 태영아.’
***
"현아샘. 교생들 앞에서 주의 좀 하세요."
휴게실에는 대광중학교의 2학년 교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부장은 여러 선생들 앞에서 대놓고 야지를 줬다.
"제가 뭘요?"
"아니, 아무리 후배들이라도 그렇지, 막 그렇게 편하고 말하고 그럼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교사는 정선된 언어를 써야죠."
"뉘에뉘에."
"허 참! 또 그런다."
현아는 공개적으로 꾸중을 듣게 되자 입이 삐죽 나왔다.
‘쳇. 맨날 나만 가지고 뭐라 그래. 자기도 말만 번드르르 하지 별로 깨끗한 사람도 아니면서.’
현아는 동 학년 회식이 끝나고 남자들끼리 몰래 노래방에 가는 것을 보았다. 입간판에 <베트남 도우미 항시 대기>라고 적힌 퇴폐 영업소였다.
우연히 그 장면을 놓고 온 현아는 그 뒤부터 동 학년 남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다.
‘앞에선 맨날 도덕군자인냥 떠들더니만, 기껏 한다는 짓이 노래방 도우미 끼고 노는 주제에. 흥이다, 흥.’
현아는 그 뒤 같은 교직에 있는 남자 선생들에게 흥미가 뚝 떨어졌다. 부부 교사가 꿈이었던 그녀가 지금껏 결혼할 남자를 찾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워서 잡아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현아는 실습생으로 온 도훈을 떠올렸다.
호리호리한 몸매. 훤칠한 외모. 서글서글한 인상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비록 모든 교생들이 다 임용에 합격하는 건 아니겠지만, 도훈 정도라면 합격할 때까지 뒷바라지 해 줄 자신도 있었다.
‘그래. 기왕이면 아직 때묻지 않은 대학생 쪽이 낫지. 초반에 꽉 잡아버리면 다른 데 한 눈도 못 팔거 아니야?’
현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부장이 한 번 더 당부했다.
"아, 그리고 저번에 옆 학교 소식 들었죠? 여자 교생이랑 유부남이랑 바람나서 학교 뒤집어 진 거. 여기에 설마 그럴 사람은 없겠지만, 괜히 뒷말 안 나오게 단도리 잘하세요. 부설 대용 신청도 겨우 되서 교장선생님이 엄청 예민합니다."
"네."
그러나 현아는 부장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뭐래? 난 결혼한 사람도 아닌데. 성인끼리 만날 수도 있는 거지.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야?’
그녀는 어떻게 하면 도훈을 꼬실 수 있을지 궁리했다.
***
"아직 회의 안 끝나셨나봐요. 계속 기다려야겠죠?"
"그럼 학교 구경 좀 해볼까요? 건물 위치도 익힐 겸."
기다림이 무료해진 나는 혜진과 함께 학교 탐방을 해보기로 했다. 학생들은 이미 하교를 했는지 텅 빈 교실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요 그럼."
"체육관으로 한 번 가볼까요? 저는 거기서 주로 수업을 해야 해서···."
"네."
안내도를 따라 체육관에 들어서자 텅 빈 코트가 덩그러니 있었다. 나는 다소곳이 서있는 혜진에게 물었다.
"기구 실을 한 번 보고 싶은데···."
"네. 가봐요. 그럼."
혜진은 말하는 데로 내 뒤를 졸졸 따랐다.
무척이나 소극적인 성격인 건지 자기 주장이 없이 시키는 데로 했다.
‘흠, 말 잘 듣는 타입이구나.’
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메트와 평균대 뜀틀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주인님, 미션 발동입니다!]
< 460. 교생 실습-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