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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3화 (113/2,000)

< 115. 즐거운 사라-20- >

***

묵주반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은성은, 해당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늘 품에 반지를 지니고 다녔다. 그렇게 반지 속에는 그녀의 일생이 담기게 되었다.

도훈은 한 편의 일대기를 감상한 기분이었다.

그의 두 번째 스킬, 싸이코메트리는 사물의 기억을 들춘다.

오랫동안 정 들인 물건일수록 그 사념 또한 강해지는데, 이처럼 대를 이어온 반지의 경우 한 사람의 희노애락을 모두 엿볼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영상에 어지러움을 느낀 도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앞선 두 번보다 훨씬 방대한 정보에 순간적으로 강력한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으읏!"

고뇌하는 로뎅의 조각처럼, 이마를 감싸 쥔 도훈의 모습에 은성이 놀라 물었다.

"어머! 괜찮으세요?"

"가, 갑자기 편두통이···."

"아···. 어째요."

은성은 고통스러워하는 도훈의 모습에 자신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유난히 동정심이 많은 편이었다.

"안 되겠어요. 어서 약을···."

"아니에요."

도훈이 일어서려는 은성의 손목을 붙들었다.

"예?"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가끔 이러다 괜찮아져요."

"그래도···."

"봐요. 괜찮아 보이죠?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도훈의 안색은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은성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아직까지 도훈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것을 깨닫고, 민망함에 천천히 손목을 뺐다. 그녀의 몸을 이렇게까지 함부로 터치한 사람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이,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급똥으로 화장실에 뛰어들어갈 때부터 어딘가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급똥이라니···.

그래서 오빠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페이스에 휘말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어딘가 몸이 불편한 걸까?’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건장하기 짝이 없다. 키만 컸지 빼빼 마른 오빠에 비하면, 도훈의 몸은 운동선수처럼 단단했다. 문득 그의 몸을 감상하던 은성은, 타이트한 셔츠 아래 굴곡진 가슴근육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내,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본래 남자다운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것이 상처 많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강한 남성에게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남자다운 사내도 그녀의 배경을 알고 나선 금세 꼬리를 내렸다.

재벌가의 손녀딸.

그것은 강력한 굴레이자 풀리 않는 족쇄 같았다.

누군가는 복에 겨운 소릴 한다고 했지만, 소박한 성품을 지닌 그녀에게 어마어마한 집안 배경이 전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깜찍한 외모와 자상한 성격에 끌린 남자들도, 삼현그룹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비슷한 수준의 남자들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남성상은 땀에 찌든 작업복에 담배를 꼬나문 마초 같은 스타일이지만, 돈 많은 집 자식들은 하나같이 샌님이었다.

예의 바르고, 점잖으며, 사려 깊은. 그러나 머릿속으론 언제나 주판을 굴리며 손해 보길 싫어하는 이기적인 남자들. 자신이 당장 물에 빠져도 119에 전화부터 돌릴 것 같은.

그런 남자들은 정말이지 최악이다.

어쩌면 그녀의 비정상적 남성 취향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할아버지의 중매를 거부하고, 잘나가던 여배우와 결혼을 감행한 아버지.

아버지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사랑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데로 선택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결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렇게 살고 싶었다.

사랑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데로.

"가끔 편두통이 있어요.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네."

"아마도 제가 너무 열정적이기 때문이겠죠?"

"···예?"

모 광고를 패러디한 도훈이 씩 웃었다. 한참 뒤에야 농담임을 깨달은 은성은, 속으로 뜨악하는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아재 같아. 완전.’

그녀가 지켜본 도훈은 도저히 자신의 오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오빠의 결벽에 가까운 깔끔함은, 이런 거친 남자와 완전한 상극이다.

평소의 오빠라면 그를 보고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버러지 같은 천민 새끼. 눈코입 똑같이 달렸다고, 같은 사람인 줄 알지?

오빠의 말투가 생각난 은성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 아재 개그 좋아하시네?"

***

"어? 아재 개그 좋아하시네?"

통한다.

분명 통하는 느낌이다.

고급스런 취향이 아닐까 내심 걱정했는데 은근 서민적인 코드를 가지고 있다. 이런 개그에도 방긋 웃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봤지? 쟤 웃는 거?’

[저로선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군요. 그런 삼류 개그 어디에 웃음 포인트가 있다는 건지···.]

‘쯧쯧. 인간도 아닌 네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냐?’

[사람의 정신도 결국은 뉴런 간 전기신호 자극일 따름입니다. 웃음을 유발하는 기제 역시 논리적으로 입증 가능하구요.]

‘그렇게 허구한 날 논리만 찾으니 이공계 애들이 감성이 부족한 거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의 연금술은 문과에서 태어난다고.’

[그렇다고 딱히 주인님이 문과 취향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뭔데?’

[지금으로선 예체능계에 가까운 게 아닐지.]

‘뭐 인마? 이게 아주 나를 졸로 보네 이제? 내가 소싯적에 전국에서 놀던 수재란 건 까먹었어?’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이큐 세자릿수도 안되는 빠가일 뿐이죠. 앗, 죄송합니다.]

‘언제는 머리 쓰는 건 아이큐랑은 무관하다며?’

[물론 그렇습니다. 아이큐로 측정되는 지능이 인간의 지적활동 모두를 대변할 순 없으니까요. 실제로 노벨 상을 수상한 과학자들도 아이큐가 대단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죠.]

‘거봐.’

[그래도 평균치를 상회 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됐다. 말을 말자. 어쨌든 오늘은 적당히 호감도 올리는 선에서 그쳐야겠어. 정보창이 없으니 공략이 쉽지가 않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보더라도 하룻밤에 자빠뜨릴 수 있을 만큼 헤픈 여성 같진 않습니다.]

‘근데 진짜로 이상하단 말이지. 어쩜 저렇게 오빠랑 180도 다를 수 있을까?’

[글쎄요. 겪은 경험이 같다고 모두 똑같은 길을 가진 않으니까요.]

로시의 말을 듣자, 불현듯 두 남매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엄마의 치마폭 뒤로 숨어버린 은성과, 주먹을 말아쥐며 결기를 드러낸 성민. 두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 애초부터 달랐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부모님의 죽음이란 극단적인 사건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나뉘었다.

할아버지를 증오했지만, 할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으로 변해버린 성민. 내면에 아픔을 간직한 체 재벌가의 딸답지 않게 소박한 품성을 갖추게 된 은성.

두 사람의 극단적인 대비는,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완벽한 증거처럼 보였다. 물론 그로 인해 두 남매 모두 ‘있는 집 자식’의 보편적인 성격과 그 궤를 달리하게 돼버렸지만.

뭐, 나에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은성이 오빠와 비슷한 성격이었다면 이런 대화는커녕 입구에서 문전 박대를 당했을 테다.

나는 내일의 계획을 차분히 설명한 뒤 은성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런, 시간이 너무 늦었네. 나 때문에 피곤하겠다."

"아니에요. 어차피 전 비행기에서 푹 자고 온 걸요. 오히려 오빠가 더 피곤하시겠어요."

어쩜 저렇게 말도 예쁘게 할까?

일어서는 나를 배웅하며 그녀가 불쑥 물었다.

"저기 그런데···."

"응?

"저··· 하나도 안 불편하신 거죠?"

"엥? 내가 왜 널 불편해?"

"아, 아니에요. 그냥 말이 헛나왔어요. 그럼 들어가 주무세요."

"그래. 잘자."

은성과 얘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까먹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차! 사라랑 혜은이!"

***

‘진짜 날 밤이라도 샐 작정인가?’

혜은은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사라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라가 잠들면 오빠가 있는 방으로 몰래 가려고 했는데, 도무지 잠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물론 그것은 사라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혜은이가 의외로 밤잠이 없는 편이구나. 어쩌지, 도훈씨 기다리다 잠들어 버릴 텐데···.’

몇 시간 전 도훈과 격렬한 정사를 벌였던 사라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몸이 달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 혜은은 끊임없이 뒤척이면서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 살짝 일어나 볼까?’

사라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언니? 이 시간에 어딜가?"

아니나 다를까, 혜은이 득달같이 물었다.

당황한 사라는 자기도 모르게 둘러댔다.

"아, 아니 화장실."

"응."

‘칫. 무슨 경비견도 아니고···.’

결국 사라는 화장실에 들어가 도훈에게 문자를 남겼다.

사라 : 도훈씨 오늘 밤은 안 될 거 같아요. 미안해요.

방안에 남겨진 혜은 역시 동시에 문자를 남기고 있었다.

혜은 : 오빠, 오늘은 그냥 자야겠어. 내일은 꼭 같이 자.

두 사람은 그렇게 결국 서로를 견제하다 늦은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에 눈을 비비고 잠을 깼다.

처음 보는 벽지.

낯선 가구들.

"아! 호텔에서 잤지?"

결국, 어젯밤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방으로 온다던 사라와 여동생은 새벽녘에 문자 하나만 달랑 남기고 끝이었다. 이럴거면 왜 말을 꺼낸건지, 참.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어, 몇 시지 지금?’

[오전 10시입니다.]

‘스킬 쿨은?’

[정보창 스킬은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만, 새벽에 쓴 싸이코메트리 스킬이 아직 2시간 34분 남아있습니다.]

나는 아침부터 스킬을 확인했다. 쿨 타임이란 제한 조건으로, 필요한 순간 늘 곤경에 처한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스킬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꼴랑 200포인트로?’

[각각의 스킬을 1레벨씩 올릴 순 있겠네요.]

로시의 설명에 따르면 1레벨의 스킬을 올리는 데는 100포인트가 필요하다.

‘근데 그래 봐야 10% 쿨감이라며?’

[10%라지만 쿨타임 10시간인 정보창 스킬은 1시간, 그리고 8시간인 싸이코메트리는 48분 씩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라고? 게다가 다음 레벨 올릴 땐 두 배씩 든다며? 기하급수로 불어나는 포인트를 어떻게 감당해?’

[음, 아니시면 플레이어 레벨을 올리는 편이 현재로썬 가장 효과적입니다. 하수2레벨에 도달하시면 모든 스킬에 10%의 점감 효과가 붙게 될 겁니다.]

이것 역시 들은 기억이 있다.

플레이어 레벨을 올렸을 때의 세 가지 장점.

랜덤스킬 박스와 스킬 쿨타임 감소 마지막으로 마켓 할인 쿠폰과 할부 결제 시스템.

‘지금 달성한 위업이 모두 5개지? 진행 중인 위업이라도 빨리 클리어 해야 하나?’

눈치 빠른 로시가 디스플레이어 진행 중인 위업을 띄웠다.

[진행 중인 위업목록]

*밀당의 달인(1/2)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1/2)

*같이 할래?(3/10)

*SM마스터 (S도달도 : 54%, M도달도 : 45%)

*저기요, 지스팟 좀 켜주세요. (최고 기록 : 366ml)

*백마 타고 흑마 타고(1/2, 백마달성)

유심히 살펴봤지만, 당장 도달 가능한 것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하수2레벨까지 필요한 위업은 모두 7개. 위에 있는 위업을 모두 클리어하고, 이번에 재벌집 막내손녀까지 공략해야 겨우 오를 수 있는 경지다.

‘와, 이래선 답도 없겠는데? 언제 저걸 다 클리어 한담?’

[후후. 랭커의 길이 쉬운 줄 아셨습니까, 그럼? 물론 주인님의 업적 달성은 결코 느린 편은 아닙니다만···.]

‘젠장. 플레이어 레벨 올리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리고, 포인트를 모으기도 빡세고. 스킬을 줬으면 써먹게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욕망을 주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흠···. 조금만 더 나가면 오랜만에 신성모독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음음. 취, 취소야.’

[물론 쿨 타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이 전혀 없지만은 않습니다.]

‘어?’

로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은 한가지 아이템에 관한 내용이었다.

[쿨감 반지라는 게 있습니다.]

‘쿨감 반지?’

[정식 명칭은 아니고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떠도는 전설적인 아이템에 관한 이야깁니다.]

‘떠돌다니? 플레이어는 사후공개가 원칙이라며? 서로 정체를 숨겨야 한다면서?’

[물론 그렇지만 그건 고수 이하급에 해당하는 내용이지요. 랭커에 진입하시면 마켓창 외에도 또 다른 게시판이 확장됩니다. 그 채널을 통해 플레이어끼리 의견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걸 왜 지금에서 말하는 건데?’

[그거야 랭커에 오르는 플레이어가 극히 저조하기 때문이지요. 랭커에 올랐다는 의미는, 플레이어 시스템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증표가 되니까요. 즉 레벨 자체가 보증인 셈입니다.]

‘참나. 원, 저 랩은 서러워서 살겠나.’

[아무튼, 쿨감 반지의 정식 명칭은 ‘요르단의 반지’라고 부릅니다. 모든 스킬의 쿨 타임을 절반으로 떨어뜨리는 전설급 아이템이죠.]

‘저, 절반씩이나? 모든 스킬을?’

[네. 반지를 착용하는 순간 그 즉시 모든 스킬에 적용됩니다.]

‘그 아이템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데?’

[바로 마지막 위업을 달성하시는 거죠.]

‘마지막이라면···.’

[네. 108번째 위업입니다.]

108개의 위업 중 마지막 108번째.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저런 엄청난 아이템을 보상으로 준다는 말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플레이어가 정한 목적에 따라 위업은 제각기 다릅니다. 하지만 ‘요르단의 반지’를 획득하는 위업의 순번은 모두 108번으로 동일했습니다. 그것은 랭커 게시판에서도 수차례 확인된 사항입니다.]

‘왜 순번이 모두 마지막이지?’

[그것은 해당 위업이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위업의 순서와 난이도가 무관하다고 알려져있지만, 개발자들은 마지막이란 상징성 때문에 108번에 해당 아이템 위업을 배치했습니다. 주인님의 108번 위업도 분명 살인적인 난이도를 제시할 것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디스플레이를 확인해 보십시오.]

< 115. 즐거운 사라-20-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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