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즐거운 사라-21- >
***
"식사는 괜찮았지?"
"뭐, 그럭저럭."
성민, 은성 남매는 룸서비스로 아침을 해결한 뒤 티타임을 가졌다. 오랜만의 오누이와의 시간이 즐거웠는지, 성민의 입가에선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외국 갔더니 더 예뻐졌어.’
자기 동생이지만 참 예뻤다.
영화배우인 어머니를 쏙 빼닮은 은성은 타고난 자연미인.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두 볼은 소녀 같은 풋풋함을 풍기면서도, 특유의 짙은 쌍꺼풀에선 그윽한 여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어느새 어엿한 숙녀가 다 됐구나.’
봉긋 올라온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20대 초반 여성 특유의 늘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실부모한 뒤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왔던 동생이라 그런지, 성민은 훌쩍 커버린 은성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나 품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동생이 다른 남자를 사귄다면 진한 배신감이 들 것이다.
"덴마크는 지낼만해?"
"응. 거기선 그냥 평범한 유학생처럼 지내거든. 사람들 시선도 일일이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사람들은 유난히 재벌가에 관심이 많았다. 파파라치처럼 따라붙는 기자들을 자기 손으로 쫓아낸 적도 있었던 성민은, 동생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잘됐네. 넌 언제나 서민처럼 살고 싶어 했잖아."
"또 또 그런다. 서민처럼이 대체 무슨 소린데? 아직도 신분제 사회에 사는 줄 알아?"
"제도만 없을 뿐, 마땅히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지. 후기자본주의에선 결국 돈이 곧 권력이고 계급이야."
"그거야 오빠 혼자만의 생각이지."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성민이 물끄러미 창가 아래를 가리켰다. 화려한 야경이 걷힌 도심은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 아래를 봐. 휴일인데도 개미처럼 바둥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모습. 일요일 아침부터 우리 식사를 준비해온 쉐프나, 룸서비스로 가져온 호텔직원은 어떻고? 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결국 돈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돈을 가진 자들이 그런 사람을 노예로 다스리는 거고."
노예라니.
은성은 오빠의 과격한 표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신을 끔찍이 생각하는 마음은 항상 고마웠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편협하고 천박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미워하면서 닮아간다고 했던가.
본인은 인정 안 하겠지만, 지금의 성민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할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적당히 해. 오빠 독자들은 오빠 이런 사람인 줄 몰라? 기파랑의 정체를 알고 나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질걸?"
"기파랑···."
성민은 나직이 자신의 필명을 읊조렸다.
베일에 싸인 체 혜성처럼 등단한 괴물 신인.
일본에 하루키가 있다면, 우리에겐 기파랑이 있다. 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떠돌 정도로 유명해진 자신의 분신.
"엄밀히 말하면 기파랑은 내가 아니야."
"설마 대필이라는 소리야?"
"아니. 작가 기파랑과, 재벌 손자 고성민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가 직접 쓰고 있는데, 오빠가 아니라니?"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기파랑은 내 또 다른 자아야. 성격부터 취향, 사상조차 완전히 다른."
"오빠 무슨 해리성 인격장애야?"
사뭇 진지한 여동생의 표정에 성민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믿기 힘들 만큼 자연스러운 미소. 동생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날 선 칼날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무디고 둔한 순둥이로 변했다.
그에게 있어 여동생은 단순한 가족 이상의 존재. 이 세상에 그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때론 누나 같고 때론 엄마 같은 은성 앞에, 성민은 완전히 무장해제되기 일 수였다.
"뭐래, 얘가.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오빠 말이 그렇잖아. 또 다른 자아라니?"
"음, 알기 쉽게 비유를 해줄 게."
"해봐."
"뛰어난 영화배우는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면 영화를 찍는 동안 마치 그 사람처럼 행동한다지? 말투나 습관, 심지어 생각조차."
"메소드 연기 말하는 거야?"
"그렇지. 나에겐 기파랑이 그런 존재야.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껴. 그래서 기파랑은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기도 하지."
"당최 무슨 소린지···."
"여튼, 재미없는 얘긴 이쯤하고. 이제부턴 뭐 할 거야?"
은성은 살짝 머뭇거렸다. 새벽녘에 도훈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절대 우리 계획을 발설하면 안 돼. 성민을 깜짝 놀라게 주려면.
"음, 친구 만날거야."
"친구?"
"오랜만에 한국 왔으니, 고등학교 때 동창들이나 볼까 해서."
"집에는 바로 안 가고?"
"집에 들어가면 또 할아버지가 감시 붙일 거 아냐. 어디 가면 기사 데리고 가라고. 으~ 정말 싫어. 차에서 내릴 때마다 사람들 쳐다보는 거."
"잘 생각했어. 오빠가 놀아줘야 하는데··· 미안하다."
"친구랑 먼저 약속한 거라며. 연락도 없이 온 내 잘못이지."
"친구?"
"어제 차에서 통화한 사람, 친구 아니었어?"
성민은 그 순간 도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멱살을 잡아 올리던 우악스러운 손길까지도.
‘참으로 시건방진 놈이었지.’
"···맞아. 친구."
"암튼 재밌게 놀아. 가이드 잘 해주고."
"그래. 나중에 연락하자."
"응."
은성이 나가고 성민이 힐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전 10:30분.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
★달성 가능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5/108)
108. 주지육림을 펼쳐라! (기 공략에 성공한 여성 12명과 집단 난교 시 달성.)
-당신은 현대판 의자왕입니다.
-‘같이 할래?’위업이 자동 달성됩니다.
-업적 보상 : 아이템증정
「요르단의 반지」 - 착용하는 동안 가진 모든 스킬의 쿨타임 절반으로 감소.(이 효과는 다른 버프와 중첩됩니다.)
‘헐! 주지육림이라면?’
[맞습니다. 은나라 시절 주왕이 애첩 달기의 요청에 따라 ‘술로써 연못을 삼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만들고, 남녀로 하여금 벗고 그 사이에서 뛰놀게 하였다.’라는 「사기」 은본기에서 비롯된 고사입니다.]
‘미쳤네, 미쳤어. 뭐? 기 공략에 성공한 여성 열두명? 직업여성으로 한정해도 어렵겠다.’
[애초 직업여성이 위업에 등장할 일은 없습니다. 금전을 통한 거래나, 위력에 의한 강간 등은 공략으로 인정되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문란한 여성이라 한들 저런 난교에 동의해 줄까?’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난도가 매우 높은 업적이라고요. 다만 주인님께서 공략하신 여성 숫자가 어느덧 13명을 넘겼기에 알려드렸습니다.]
열세 명이라고?
벌써 그렇게나 됐나?
나는 천천히 이름을 나열해 보았다.
허영자, 전수연, 박하린, 나예림, 이수아, 강민주, 마유미, 육정음, 이효민, 양희주, 하서윤 그리고 어젯밤의 사라까지.
음, 진짜 13명이네. 많이도 먹었구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 중 난교파티에 참석할 만한 인물은 강민주 외엔 없어 보인다. 어쩜 서윤이도 방송 핑계를 대면 나오려나? 그래 봐야 둘.
‘살인적인 난이도가 맞구만. 이건 제정신 가진 애들이라면 절대 안 하려 들거야. 제안했다가 뺨이나 안 처맞음 다행이지.’
[당연히 전설급 아이템을 얻는 것이 쉬울 리 없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불가능하다고만 단정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공략한 여성 숫자가 몇배로 늘어난다면,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여성 숫자 역시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확보는 얼어 죽을. 아이템 얻기도 전에 복상사부터 할 견적인데.’
[주인님에게 복상사라면 호상(好喪)이 아닐지···.]
‘됐고. 어쨌든 저 위업은 보류야. 현재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스킬을 최대한 신중히 쓰는 게 최선이겠어.’
그때 전화가 울렸다.
혜은이가 깨서 연락했나 하고 봤더니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고성민?"
전화를 받자, 예의 놈의 건방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다. 오늘 일정으로 상의 좀 하게 잠시 올라와.
"알았어."
나는 후다닥 채비를 갖추고 룸을 나섰다. 나가면서 우연히 복도를 걸어오는 스테파니와 마주쳤다.
"일어나셨어요?"
스테파니가 영어로 인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어제 엄청 늦게 잤나 보더라고요. 깨어도 잘 못 일어나길래 저 혼자 조식 먹고 오는 길이에요."
"그렇구나. 우린 어차피 점심쯤에나 움직일 거니까 그때까지 천천히 준비하라고 전해줘."
"네. 근데 오빤 어디 가세요?"
"어제 말 한데로 성민이랑 같이 움직여 볼까 해. 지금 만나러 가는 길이야."
"정말요? 같이 가신데요?"
스테파니가 뛸 듯이 기뻐했다. 사심 가득한 눈빛이군. 요 주근깨 가득한 백마가 나한테 무관심한 게 천만다행이다. 백인 여성이라고 다 예쁜 건 아닌 것 같다.
"모르겠어. 일단 얘기 좀 들어보고."
"꼭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기왕이면 가는 사람이 많으면 좋으니까···."
"응, 알겠어."
스테파니는 신이 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성민이랑 같이 다닐 생각에 몹시 들뜬 표정이었다. 글쎄. 성민도 보는 눈이 있다면 널 그다지 반기진 않을 것 같다만. 자신이 장작이 아니라 불쏘시개라는 걸 알면 얼마나 슬플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펜트하우스에 오르자, 성민의 방에서 호텔 직원이 룸서비스 카트를 밀고 나왔다.
‘동생이랑 아침 식사한다더니 다 먹었나 보네. 혹시 은성이도 있으려나?’
기대감에 부풀어 들어갔지만, 방에는 성민뿐이었다. 그는 창문을 살짝 열어 둔 체 입가에 뭔가를 물고 있었다. 입에선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씨가? 취향 한 번 고급지네.’
두툼한 갈색 시가를 피우던 성민이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건방지긴.
"왔나?"
"그래."
차르륵-
갑작스러운 부싯돌 튕기는 소리에 그제야 성민이 몸을 돌렸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문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뭐, 뭐야? 너 담배 피우는 거야? 여기서?"
"어. 너도 피길래."
성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방에서···."
"어차피 연기 베이는 건 똑같잖아."
뻔뻔한 나의 태도에 성민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소파에 걸터앉으며 재떨이까지 내주었다.
"···그래. 어차피 나갈 호텔인데. 필려면 펴."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한동안 끽연을 만끽했다. 폐부를 찌르르 울리는 매캐한 담배 연기에 정신이 조금 몽롱해진다.
"어제 하려던 얘기는 뭐야? 새벽에."
"아, 그거?"
나는 스테파니에게 했던 얘기를 다시 재탕했다.
원래 가이드는 내가 맡기로 했지만, 약속이 중복 되었으니 그냥 같이 다니자고. 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어때?"
"···그럼 멤버가 모두 다섯인가?"
"그렇지. 사라랑 스테파니, 그리고 나랑 내 여동생."
"혜은이 말이로군."
"맞아."
"그리곤 다시 호텔로 복귀?"
"글쎄. 그건 아직 미정인데?"
"이런 건 어때?"
"뭐?"
놈이 역으로 제안해왔다.
"양평에 가면 내 별장이 하나 있어.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건데 자주는 이용 안 해도 관리인이 있어 나름 깔끔한 편이거든. 관광 마치고 거기서 하루 묶는 건?"
"양평에 별장?"
이건 분명 미끼다.
아마도 별장에서 혜은이에게 못된 수작을 부리려는 거겠지.
일단은 튕겨 본다.
"근데 사람이 다섯인데 별장에서 다 잘 수 있을까? 난 처음 보는 사람이랑 같이 잘 못 자는 편이라."
"하하. 별걸 다 걱정하는군. 혹시나 무슨 팬션 같은 건 줄 아나 본데, 별채만 따로 두 개나 존재하는 큰 별장이야. 다섯 명이 각각 자도 될 만큼 방도 넉넉하고."
오호라, 역시 재벌 손주라는 건가?
누군 집도 절도 없는마당에 벌써부터 별장이라니.
"또 관리인한테 미리 말하면 노천 온천도 즐길 수 있지."
"온천?"
"원래 수영장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일본식 노천 온천을 좋아하셔서 개조했다고 들었어. 물은 인접한 게르마늄 유황천을 끌어다 쓴다더군."
캬! 스케일 지리네.
온천까지 즐길 수 있는 별장이라니.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놈은 그것이 자신의 재력에 놀란다고 착각했겠지만, 나는 전혀 다른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일본 만화에서나 보던 노천 떡떡떡을 해볼 수도 있겠는데?’
놈은 모르지만, 이번 관광에는 여동생까지 합류하게 된다. 그렇다면 남자 둘, 여자 넷의 노천 주지육림 찌찌 파티를···.
"갑자기 왜 침을 흘리지?"
"아, 아냐. 내가 좀 구강구조가 특이해서 그래."
성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다시 물었다.
"아무튼 오늘 밤은 별장에서?"
"오케이 콜. 내가 밑에 가서 애들한테 말해 볼 테니 12시 쯤 보자고. 첫 번째 코스는 경복궁이야."
"그래."
"참, 우리가 차가 없어서 그런데 네 차 타고 이동해도 되겠어?"
"그렇게 해."
놈은 기사가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혜은이를 꼬시고 싶은가 본데, 절대 네 생각대로는 안 될 거다, 고성민.
나는 각오를 다지며 놈의 방에서 내려왔다.
< 116. 즐거운 사라-2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