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즐거운 사라-19- >
***
좋아. 일단 들어오는 데까진 성공했군.
난 커버도 올리지 않은 채 변기에 앉아있었다. 문밖에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은성이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
[급똥이라니···. 정말 개똥 같은 핑계로군요.]
‘왜? 생리현상만큼 자연스러운 게 어딨다고?’
[자연스럽다니요? 어색한 건 둘째치고 첫인상부터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이라면 백이면 백, 안 좋아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새벽에 숙소 들어와 자려는 사람 방을 무슨 수로 난입해? 일단은 아무 핑계라도 대는 수밖에.’
[···어쨌든 이제부터 어쩌실 생각입니까?]
‘정보창은 아까 성민이 놈에게 써버렸으니, 싸이코메트리로 승부해야지. 쿨 타임은 얼마나 남았어?’
[15분 남았습니다.]
‘좋아. 활성화되면 알려줘. 그전까지 어떻게든 버텨 볼 테니까.’
"흐으으응!"
나는 일부러 밖으로 들리게끔 신음 소릴 냈다.
소리가 새어 날 때마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칫멈칫 중단되었다.
"끄아아아아!"
변기에 걸터앉아 괴상한 소리를 나조차도 자괴감이 들 지경이다. 세상에 여자 한 번 꼬셔보겠다고 이런 쌩쑈를 벌어야 한다니···.
똑똑-
"저기, 괜찮으세요?"
심상치 않은 소리에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은성이 화장실 밖에서 물었다.
"속이 좀 안 좋아서요."
"많이 불편하시면 프런트 연락해서 상비약이라도 받아올까요?"
프런트라고? 아니 될 소릴!
쓸데없이 친절한 계집애로군.
"괘, 괜찮아요. 거의 다 끝났어요."
"그래요? 오빠한테 방금 연락했는데, 씻는 중인지 전활 안 받네요."
"저, 전화요?!"
"아니 친구분께서 속이 안 좋으신 거 같아 제 방으로 내려오라고 하려고요."
아, 안돼!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기껏 둘만의 자릴 만들었더니, 얘가 판을 깨뜨릴려고 하네?
나는 황급히 변기 물을 내리고 벌컥 문을 열었다. 핸드폰을 들고 서 있던 은성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 나오셨네요?"
"진짜 성민이한테 전화했어요?"
"네. 혹시 잠들까 봐서요. 운전하는데 약간 피곤해 보였거든요. 친구분 기다리신다고 말씀드리려고."
"하지 마요."
"네?"
"전화하지 말라고요."
"왜, 왜 그러세요?"
그래야 니 거기에 금테 둘렀는지 확인할 거 아니야!
···라고 말할 순 없으니, 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번 건 서프라이즈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서프라이즈라뇨?"
"동생분, 내일 일정이 어떻게 돼요?"
"제 일정요?"
"네."
"아침에 오빠랑 조식 먹구···. 음, 이후는 미정이에요. 원래 오빠랑 같이 놀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오빠가 외국인분들 가이드를 해 줘야 한다면서···."
역시.
아까의 전화 통화 반응을 보면, 성민도 동생의 귀국을 몰랐던 게 틀림없다. 그렇다는 건 녀석도 예상 못 한 변수란 말이지.
"동생분도 저희랑 함께 갈래요?"
"어딜요?"
"내일 관광요."
"제가요?"
"사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사라 자매와 여동생의 한국 방문에, 성민이 끼어든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그리고 나 역시 여동생이랑 같이 다니는 만큼, 성민도 여동생을 데리고 오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기왕이면 짝을 맞추자고.
"아, 그렇게 된 것이군요. 오빠가 자세하게 말을 안 해줘서."
"네. 근데 제 생각엔 이걸 서프라이즈로 하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오호."
"성민이 성격 알잖아요. 동생분 따라간다고 하면 극구 말릴리지 않겠어요?"
"아마도 그렇겠죠?"
"그러니까, 내일 같이 가는 거 비밀로 하다가 중간에 짠하고 나타나는 거죠. 설마 그 자리서 내쫓진 않을 테니까."
"아!"
양반은 못 되는지 곧바로 성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했었네? 샤워하느라고 못 받았어. 무슨 일인데?
"어, 별건 아니고···."
나는 은성 앞에서 두 손바닥을 합장해 한 뼘에 붙이며 자는 시늉을 했다.
"···낼 아침 몇 시에 먹는지 물어보려고."
-일어나는 데로 우리 방으로 와. VIP룸은 아무때나 주문해도 돼.
"알았어. 그럼 나 잘게."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성이 제스쳐를 알아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무슨. 나 피곤해. 내일 봐."
-그래.
전화를 마친 은성은 지금의 상황이 코믹했는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히히. 오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친데요?"
당연하지. 아직 성민에게 말도 안 꺼냈거든.
그나저나 은성이란 얘, 보면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재벌집 딸이라 도도하고 콧대 높은 아가씨를 연상했는데, 하는 행동을 보면 오히려 평범한 대학생에 가깝다. 특히 오빠를 속인다는 데서 장난기 가득, 웃음 짓는 모습이 어딘지 푼수 같은 면까지 엿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복수를 위한 공략이었지만, 점점 그녀에게 인간적인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근데 동생분은 성함이···."
"앗. 경황 중이라 제대로 소개도 못 했네요. 전 고은성이라고 해요. 친구분은요?"
"도훈. 이도훈입니다."
"근데 오빠 친구치곤 굉장히 어려 보이시네요?"
"네. 사실 성민이가 형이에요. 전 스물셋이거든요."
"어머? 진짜요? 저랑은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네요?"
"그래요? 성민이가 미국서 살다 와서 그런지 나이 차이에 대해 관대하더라고요. 어쩌다 보니 그냥 친구 먹기로 했어요."
"그렇구나···."
은성은 관대하다는 표현이 어색했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근데 성민이도 참 이상하네."
"네?"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 있으면서 이제껏 꼭꼭 숨겼었다니."
나는 마치 그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거짓말했다.
"자꾸 왜 그러세요, 민망하게. 근데 오빠가 제 얘기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덴마크? 뭐 그런 데서 미술 공부하신다고···."
"맞아요. 유학도 할 겸 잠시 나가 있어요."
"그나저나 우리 계속 서 있을 게 아니라 내일 일정에 대해 논의해 볼까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저기 앉으세요."
은성이 창가 쪽을 가리켰다.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북유럽풍의 오밀조밀한 티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다. 5성급 호텔룸 다운 구성이로군.
내가 의자에 앉자 은성이 물었다.
"도훈 오빠,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차요?"
"네. 늦었으니까 카페인 없는 걸루."
"그럼 음료수 아무거나 한 잔 주세요."
"네."
은성이 냉장고를 열어 안에 든 음료수와 자기가 마실 차를 꺼내왔다. 친절한 행동은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워 어떠한 가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에! 오빠하곤 완전 정반대의 성격이군요.]
‘그러게? 어떻게 남매가 저렇게도 다르지? 난 성민이 보고 재벌가 사람들은 다 재수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엉?’
[있는 집 자식일수록 교양있고, 품위 있는 행동을 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이 모난 구석이 없는 것처럼요.]
‘하긴 그러고 보면 성민이 특이한 성격 같기도.’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비행 오래 하셔서 피곤할 텐데···."
"아니에요. 비행기 내내 목베개하고 계속 잤어요. 그리고 오빠 친구신데 말 편히 하세요."
"그래도 초면이니까."
"그래요?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응?"
그녀는 말릴 새도 없이 갑자기 문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데 은성이 말했다.
"이렇게 하면 구면이죠? 이제 말 편히 하기에요?"
"그, 그래."
헐, 뭐지? 이 깜찍함은?
갑자기 은성이 더욱 귀엽게 느껴진다. 돈 많은 집 딸이라 건방질 거라 예단했던 나의 선입견이 부끄러울 정도다.
"오빤 근데 우리 오빠랑 어떻게 알았어요? 오빠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던데···."
그렇겠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성민이 놈의 인간성에 제대로 된 친구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은성에게 사실대로 밝힐 순 없었으므로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냥 뭐, 어쩌다 보니까."
"혹시 그 사교모임?"
"사교모임이라니?"
"왜 오빠가 가끔 참석하는 모임 있잖아요. 사회지도층 자제들끼리 모인다는···."
금시초문이다.
"음, 난 아닌데?"
"그래요? 오빤 그럼 뭐하시는 분인데요?"
"나? 대학생이지."
"아, 경영 수업받기 전에 학위부터 따는 건가요?"
"아냐. 난 사범대 다녀. 체육교육과."
"사, 사범대요? 그럼 선생님 하는 거?"
"응."
"그럼 나중에 재단이라도 물려받는···."
"아니야. 뭔가 오해하나 본데 난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야. 체육 교사하려고 사범대 다니고 있고."
"아···."
은성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긴 성민이 평소 어울리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사회지도층급 유력집안 자제들이었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내가 그와 친구라는 사실에-사실은 친구도 아니지만-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왜? 내가 너무 평범해서 이상해?"
"아, 아니에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괜찮아. 나도 무슨 말인 줄 아니까."
"혹시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기분이 왜 상해?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돈이 얼마나 많건, 집안이 얼마나 부자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람 만나면 사람만 봐야지."
"아···."
나의 대답에 은성이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어째 이걸로 점수 좀 딴 것 같은데?
‘로시, 싸이코메트리는?’
[준비 완료입니다.]
나는 그녀의 정보를 좀 더 캐기 위해 그녀가 착용한 액세서리들을 훑었다. 다이아 박힌 귀걸이와 여성스러운 손목시계. 딱히 추억이 깃들만한 물건은 없어 보인다.
탐색을 더 해봐야겠군.
"성민이랑은 자주 보는 편이야?"
"네?"
"아니. 외국에서 공부하면 얼굴 보기 힘들 거 같은데."
"네···."
은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전 도피 유학이나 마찬가지예요."
"도피 유학이라니?"
"부모님 돌아가신 뒤론 집에 기댈 사람이 오빠뿐이었는데, 후계자 수업받기 싫다고 오빠가 뛰쳐나가 버렸잖아요. 혼자 있으려니 너무 쓸쓸해서."
"음."
그런 사정이 있었군.
"그래서 그냥 평소 하고 싶은 그림공부나 실컷 하려고 떠났어요. 가까운데 가면 한국 오고 싶어질까 봐 최대한 먼 곳으로."
"아하, 그래서 덴마크?"
"네. 근데 뭐 한국에 아예 안 올 수도 없고··· 실은 일주일 뒤에 부모님 기일이거든요."
순간 은성은 왼손에 낀 반지를 자기도 모르게 만지작거렸다. 다른 장신구와 달리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묵주반지.
어쩌면 저것이 그녀의 비밀을 알려줄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에 손을 가져갔다.
"은성이, 천주교 신자였어?"
그녀는 내 손이 닿자 움찔 놀라며 손을 빼었다.
"아앗. 아니 그건 아니고···."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으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
"천한 것이 어디 주제도 모르고!"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역정을 내자, 아름다운 중년의 부인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치마폭 뒤로 꼬마 아이 둘이 두려운 표정으로 몸을 숨겼다.
"손주 새끼들까지 끼고 오면 내가 눈 하나 깜빡할 줄 알았어?"
"그게 아니고 이번에 그이가 파견된 곳이 뉴스에서 전쟁발발 위험이 크다고···."
"하! 니 까짓게 경영을 알아? 반반한 얼굴 가지고 어쭙잖은 광대 짓이나 하던 계집이 어디서 주제넘게 경영을 참견해, 참견하기를!"
"아, 아버님···."
노인의 불같은 성화에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반면 남자아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런 손주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노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삼현을 어떻게 일궜는지 알기나 해? 총알 빗발치던 베트남에서 목숨 걸어가며 군수품 나르던 사람이야 내가! 무릇 부하들에게 존경받고 싶거든, 윗사람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가뜩이나 능력 없는 낙하산이다 뭐다 뒷말 많은데 그런 데 가서 떡하니 성과 내주면 얼마나 보기 좋아? 성민 아범도 각오하고 간 것이니까 더 아무 말 말아! 안 사람이 바깥양반 내조는 못 해줄망정 허구한 날 치마폭에 끼고 돌려고 하니 어떻게 큰일을 하겠어? 하여간 배운게 없으니 머리에 똥만 차서는··· 보기 싫으니 썩 물
러가!"
"···죄송했습니다, 아버님."
영상은 흐릿해지더니 이번엔 장례식장으로 바뀌었다.
초등학생밖에 안 돼 보이는 소년은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소년은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면 어린 소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어머니가 뒤따라 자살했지만, 소녀는 여전히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올 것은 믿는 사람처럼 천진난만했다.
부모의 부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의 순진함에, 조문객들은 더더욱 서글퍼졌다. 소녀의 손엔 어머니가 남긴 묵주반지가 들려 있었다.
"오빠, 엄마 아빠 사진이 왜 저기 있어?"
소녀가 두 사람의 영정 사진을 보고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성민은 부르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은성아,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턴 우리 둘뿐이야."
"우리 둘?"
"그래. 우리 가족은 이 세상에 너랑 나밖에 없어."
"응, 알았어. 오빠 나랑 놀아줘. 나 심심해."
영상은 또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소녀가 든 묵주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훌쩍 자랐고, 어엿한 성인이 되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에는 화목한 가족이 그려져 있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고, 양옆에는 장성한 아들딸이 서 있었다.
완성된 그림 바라보던 은성이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그녀가 묵주반지를 만지며 속삭였다.
< 114. 즐거운 사라-1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