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니여친쩔더라-266화 (266/325)

〈 266화 〉 신이나 인간이나

* * *

올림푸스로 이동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냥 통로를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마계도 그렇고 올림푸스도 그렇고 생각보다 너무 별 탈 없이 들어갈 수 있어서 싱겁기까지 했다.

"문지기 같은 건 없어?"

"있는데 잠들어 있어요, 아직 그들까지 힘을 다 회복한 건 아니어서요."

인간도 오래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근육이 죽기 마련인데 신은 오죽할까.

힘이 그나마 괜찮았던 신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수면 상태라는 말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회복 해봤자 아레스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 정도...라는 말이니까 크게 나한테 위협이 되진 않겠네.'

아폴론 같은 경우는 뒤통수를 칠 가능성은 있다고 해도 당장 적대감을 드러내진 않을 테니 상대할 신이 생각보다 적었다.

처녀신인 헤스티아와 아르테미스는 날 건드리지도 못할 테니 무시해도 되고 그렇게 소거법으로 정리하자면 8명 정도.

하데스는 애초에 올림푸스도 아닌지라 애초에 고려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나마 강적이라고 생각될 만한 존재는 제우스와 포세이돈 정도.

솔직히 나머지는 다 그냥 그런 수준으로 보여서 크게 신경 쓰이지가 않았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올림푸스가 생각보다 전투원이 없구나.'

신의 힘이 빵빵했던 시절엔 몇 명의 전투원만으로 모든 걸 견딜 수 있었겠지만 이젠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술도 빚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사랑도 했다지만 이젠 다 의미 없었다.

"근데 그때랑은 다르게 왔네."

"아, 그땐 비상 탈출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아테나는 푸른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내 몸에 착 붙어서 말을 이었다.

성 노예는 물건처럼 쓰는 게 맞다면서 몸에 붙은 건데, 그 의도가 너무 빤히 보여서 오히려 웃길 정도였다.

춘향이가 순수한 광기로 야했다면 아테나는 정말 새하얀 19금이라고 해야 할까.

[나으리! 저도 순수 쪽에선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모르시겠나요!]

몰라.

춘향이의 헛소리를 일축한 뒤 난 궁금했던 걸 계속 물어 봤다.

"비상 탈출?"

"네. 혼자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위에서 지원해주는 형식이예요."

"지금은 그런 게 아니니까 몰래 들어올 수 있는 거고?"

"그쵸."

아테나는 내 옆에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줬다.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는데,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평소에 강한 모습만 가진 사람이 기댈 곳을 찾으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녀도 여태 지켜왔던 게 다 소용없음을 깨닫고 이제 전사가 아닌 암컷의 모습을 드러내는 거였다.

여태 전사로 살아온 세월만큼 반동으로 여자가 될 때의 변화 폭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막상 왔다고 해도 엄청 넓으니 숨어 있긴 좋겠네."

"네, 일단 저도 행방불명 상태로 처리 되어 있을 테니까 우선 은신처로 가는 게 좋겠어요."

"은신처? 그런 게 있어?"

"신들도 개인만의 공간이란 걸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거든요."

아테나는 그렇게 말하는 게 부끄러운지 볼을 긁적거리며 날 안내했다.

은신처라 그런지 확실히 이동도 순식간이었다.

누군가한테 걸릴 일도 없이 아테나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뜨면 끝.

짧은 시간 동안 주변 배경이 휙휙 바뀌니까 은근 어지러웠다.

영화로 치면 3분도 안 되는 사이에 화면 전환이 여섯 번 정도는 된 느낌이다.

"여기가 제 은신처예요."

"딱 봐도 그런 티가 나."

대리석을 기반으로 한 바닥에 깔끔하고 차가워 보이는 인테리어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테나 신전을 작게 축소해서 현대화 시킨 느낌의 방은 정말 아테나스럽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일단 주인님은 여기서 원하고자 하는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아테나는 은신처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탁자와 의자를 내 앞에 가져다 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확실히 전쟁의 신이자 승부욕이 강하다 보니 행동력이 엄청났다.

'이건 편하네.'

늘 혼자만 움직이다가 이렇게 협동으로 무슨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심리적으로 안정 됐다.

여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움직이기 일쑤였는데.

같이 설계한다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제우스 조지려고. 지금 올림푸스 신들을 이끄는 게 제우스잖아, 맞지?"

"네 맞아요. 근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아버님, 아니 제우스가 명목상 리더인 건 맞는데 이끈다기보단 의견을 결정하는 쪽이예요."

"그게 그거 아냐?"

"음... 묘하게 차이가 있는데 결정은 하지만 따르지 않는 신들도 많아요."

갈 곳을 정하고 거기로 모두를 이동시키는 게 아니라 정말 '여기로 갈 거야'라고 말만 하는 역할이라는 뜻이었다.

쉽게 말하면 리더가 아닌 그냥 단톡방에 공지사항을 복사­붙여넣기로 알려주는 반장 수준이었다.

"아폴론도 그럼 그런 경우야?"

"아폴론이요?"

"응."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난 아폴론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놈이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온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해치지 말아 달란 말을 꺼낸 것까지.

아테나는 그 모든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도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막 깨어나서 활동을 시작한 참이라... 성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짐작을 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여태 알아본 바로는 그 졸렬한 아폴론이 무조건적인 선의로 그런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무장한다는 정보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구요."

아테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도 뒤통수 맞을 염려를 하는 상태에서 남에게도 이런 말을 들으니 더더욱 아폴론이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무장한다는 정보가 대단한 게 아니라는 말.

이것도 아폴론이 말을 꺼냈을 때 어렴풋이 느꼈던 부분이었다.

'당연히 싸우려면 무장을 하겠지.'

얼음은 차갑다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온 거나 다름없는 아폴론의 정보.

그리고 졸렬하다는 기본적인 평가.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합해봤을 때 나오는 결과는 단 하나였다.

"내 뒤통수를 쳐서 제우스의 힘을 뺏으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내가 신들과 싸울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쏙 빼달란 이야기한 걸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게 아니고선 갑자기 이유 없는 선의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인간과 싸울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보다 더 그럴 듯했다.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점과 아테나가 행방불명이 됐을 때 나한테 찾아온 점 등등.

아테나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놈이 얼마나 수상한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뭐 애초에 순순히 믿을 생각도 없었지만 얘가 날 너무 호구로 봤다는 게 느껴지네.'

빈손으로 와서 거사를 치르기 전에 노크 몇 번 하고 몇 마디 씨불꺼리다가 적당히 맞아주고 올라간 아폴론.

놈에게 괘씸죄가 점점 추가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처음으로 잡아야 될 놈은 아폴론이겠네."

"그렇겠네요. 감히 주인님에게 해선 안 될 상상을 품게 한 벌을 달게 받게 해야죠."

결론은 냈으니 이제 행동하는 것만 남은 상태.

이제 가장 중요한 건 아폴론을 어디서 찾냐는 거였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모든 신들이 지원을 올 수 있으니 은밀하게 행동해야 하는바.

아테나는 그런 걸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결과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아테나의 승부욕이 아주 좋게 작용하고 있었다.

"일단 헤파이토스한테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거긴 왜?"

"저희도 충분한 준비해야 하니까요."

정말 오랜만에 맛 보는 파워업 이벤트라니.

'좋네.'

매우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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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백태양이 뭘 하고 있으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흔적이라도 남겨서 놈의 동태를 감시 했어야 하는 건데.

아폴론은 은신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여러 고민에 빠졌다.

'백태양이 과연 언제쯤 움직이려나.'

가장 이상적인 건 신들이 지상으로 내려갔을 때 백태양이 뒤늦게 대처하는 거였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올림푸스는 텅 비게 될 테고 그러면 옥좌는 자연스럽게 빈자리가 된다.

비어 있다고 힘을 얻는 건 아니었지만 그 형식을 갖추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이점이 있었다.

'일단 그래도 너무 무책임하게 당하면 안 되니까...'

아폴론은 정말 철저하게 자기 자신조차 속일 정도로 계획을 숨겼었다.

올림푸스에서 엄한 생각했다간 생각이 읽히게 되는 순간 바로 역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기에.

평화주의자인 척을 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백태양을 만난 것도 다 그런 계획의 일환이었다.

누굴 만나고 왔냐고 물어 봤을 때 당당하게 백태양을 만났다고 하면서 중립인 척, 인간을 위한 척을 할 수 있도록.

오히려 당당하게 나온다면 처벌을 받아도 약하게 받을게 분명하니, 아폴론이 나름 수를 쓴 거였다.

"아레스와 아테나를 이길 정도면 백태양은 충분히 제우스를 잡을 수 있다."

제우스를 잡게 되면 난 그 틈을 노려서 뒤를 치는 거지.

아폴론은 자기 계획이 너무나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무기를 받으러 가 볼까.'

은밀한 무장을 시작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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